750화 지배당하지 않는다 (2)
그날, 황제는 병제를 바꾸는 일에는 응하지 않고 막북 방원 백리의 막북 병력을 이동시킨다는 성지를 내려 경성에 퍼트리도록 했다.
또 진옥과 이여벽의 파혼 성지도 바깥으로 전해지기 시작했다.
영친왕비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깜짝 놀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립니까? 설마 우리가 생각한 대로 태자와 방화를 혼인이라도 하게 만들려는 걸까요?”
영친왕이 말했다.
“진정하시오. 우상이 직접 궁에 들어가 폐하께 청한 것이라고 들었소.”
영친왕비는 진정은커녕 더 화를 냈다.
“제가 어찌 진정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때가 어느 땐데요? 태자가 조정에 없어 우상과 좌상이 진경을 도와 나라를 다스리고 있습니다. 게다가 북제마저 군사를 움직이려는 게 보이는데 어찌 이 시기에 사사로운 일로 폐하를 귀찮게 만들 수 있단 말입니까? 분명 뭔가 있으니 급히 황궁에 들어가 폐하를 어쩔 수 없게 만들어 허락을 받아낸 겁니다!”
“부인 말씀이 일리가 있구려. 항상 심사숙고해 폐하를 뵙던 우상이 굳이 어화원에서부터 심기가 좋지 않았던 폐하를 쉽게 찾아갈 리가 없소. 확실히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오.”
“분명 뭔가 있는 겁니다. 안 되겠어요. 제가 궁에 다녀오겠습니다.”
영친왕이 황급히 영친왕비의 손을 붙잡았다.
“부인, 걱정하지 않겠다고 하시고선 어찌 또 이러는 것이오?”
“이 상황에 제가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만일 태자가 정말 방화에게 장가를 들려한다면 우리 강이는 어떡해요!”
영친왕비는 마음이 조급해 견딜 수가 없었다.
“강이도 다 큰 성인이오. 어떻게 해야 할지 스스로 잘 알고 있을 것이오.”
“그래도 안 됩니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반드시 알아내야 해요.”
영친왕비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밖으로 향하려하자, 영친왕이 더욱 다급히 그녀의 손을 잡아당겼다.
“진정하시오. 아니면 이렇게 합시다. 아직 날이 저물기 전이니 우상을 우리 왕부로 들게 해 물어보면 어떻겠소?”
영친왕비는 말없이 영친왕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에 영친왕은 재차 그녀를 쳐다보며 확실하게 말했다.
“걱정 마시오. 제대로 물어보겠소.”
영친왕비도 평소 정말 급한 일이 아니고서야 황궁에 들기는 꺼려했기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부르세요. 정확한 연유가 있으면 곧바로 제게 알려주셔야 합니다.”
영친왕은 고개를 끄덕이곤 본원을 나와 희순에게 지금 우상에게 가서 차를 좀 마시고 싶다 청하라고 말했다. 우상도 이 소식을 전달받고, 단번에 영친왕이 자초지종을 물으려 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곧장 왕부로 들겠다고 전해드려라.”
희순은 다시 서둘러 영친왕부로 돌아갔다.
* * *
우상은 환복을 마친 후 우상부 다실로 향했다.
이윽고 우상부 다실, 영친왕은 우상과 마주앉아 거두절미하고 직설적으로 질문했고, 우상도 숨김없이 모든 것을 다 얘기해 주었다.
영친왕은 충격에 한참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도 진옥이 사방화와 혼인하려 황태자 자리까지 내려오겠단 말로 황제를 위협할 줄은 몰랐다. 황제가 어찌 이를 윤허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 나라에 황태자가 없다는 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영친왕을 더욱 충격에 빠트린 것은 진옥이 우상부에 보인 성의였다. 3대를 재상에 앉혀주겠다 약조까지 했다면……, 사방화도 이미 승낙한 것일까?
영친왕은 아무리 생각해도 사방화가 어째서 진옥과의 혼인을 승낙한 것인지, 남진 경맥을 갖고 황제를 위협해 휴서 성지까지 내리게 한 것인지, 그것도 만 천하에 알려 제 명성까지 깎아내리려 한 것인지 당최 알 길이 없었다.
우상은 영친왕의 놀란 모습에 묘한 위로를 받았다. 자신은 지난번 황궁에 고작 서신 2통을 전하러 갔다가 황제의 기에 짓눌려 등줄기에 얼마나 식은땀을 흘렸던가. 하지만 정작 황제의 형도 이렇게 당혹해하는 것을 보니 왠지 마음이 한결 나아지는 기분이었다.
또한 우상 역시 영친왕의 마음을 십분 이해했다. 사실 이 일로 제일 괴로워 할 곳은 우상부가 아닌 영친왕부였기 때문이었다.
이내 영친왕이 정신을 다잡고서 다시금 우상에게 확인하듯 물었다.
“이게 정말 사실이란 말이오?”
“이리 큰일로 어찌 왕야께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영친왕은 급히 우상과 인사한 뒤, 다실을 박차고 영친왕부로 돌아갔다.
* * *
영친왕비는 본원에서 초조히 기다리고 있다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떻답니까? 대체 무슨 일이래요?”
영친왕은 문을 닫고 길게 한숨을 내쉰 뒤, 근심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정말 부인 말씀대로 맞아떨어진 듯하오.”
영친왕비의 안색이 급변했다.
“뭐라고 하던가요?”
영친왕은 우상이 했던 말을 그대로 전했고, 영친왕비는 너무도 놀라 그 자리에 멍하게 굳어버렸다.
사실 영친왕비도 진옥이 사방화를 연모한다는 걸 잘 알았기에 일이 이렇게 흘러갈 것은 예상한 바였다. 다만 그녀는 사방화가 정말 진옥에게 승낙을 해 준 것일까, 그것이 가장 두려웠다.
사방화가 어찌 진옥과의 혼인을 승낙해줄 수 있단 말인가? 영친왕비도 지난 날 사랑을 해본 청춘이었다. 사방화는 누가 봐도 진강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오직 진강만의 정인이었다.
사방화는 고귀한 신분의 귀족 아가씨로서 명성과 체면이 다 훼손된 상황에서도 끝까지 진강의 손을 놓지 않았다. 이미 명예가 땅으로 저 끝까지 추락한 상태에서도 결코 진강과 혼인하겠다는 뜻을 꺾지 않았다.
늘 진강을 위해 옷을 짜주고, 음식을 해주고……. 진강을 향한 눈빛엔 언제나 애틋한 물결이 일렁였다. 세상에 그 어떤 사람이 사랑하지도 않는 상대에게 이 모든 것들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영친왕비는 사방화의 마음을 조금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을 단박에 내친다고? 그것도 모자라 그 사람의 사촌형제인 진옥에게 다시 시집을 가겠다고? 영친왕비는 도저히 지금의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덥석 영친왕의 팔을 붙잡고 물었다.
“이제 어떡하지요? 왕야, 이래도 절 임안성에 못 가게 막으실 겁니까? 방화를 만나서 대체 무슨 일인 건지 확인을 해야 합니다!”
영친왕은 이내 깊은 생각에 잠겼다.
“잠시 기다리시오.”
“여기서 대체 뭘 더 어찌 기다리라고요! 태자가 방화와 혼인을 하려 합니다. 이 시기에 우상부와 파혼을 하고 3대를 재상에 올려주겠다 약조까지 하며 폐하를 위협했어요! 그런데 더 못할 일이 뭐 있습니까? 안되겠어요, 지금 바로 임안성에 가야겠어요. 왕야께서도 더 이상 절 막으실 순 없을 겁니다.”
서둘러 떠날 채비를 하려는 영친왕비를 보고, 영친왕이 서둘러 그녀의 손을 잡았다.
“왕비! 황후도 황궁에 가만히 계시지 않소! 아이가 크면 자기주장도 생겨 어디로든 튀어나가는 게 정상이오. 부모로서 한 번은 관여할 수 있겠지만, 어찌 평생을 그럴 수 있겠소?
자천, 부디 내 말을 들어주시오. 태자가 정말 방화에게 장가를 들 생각이라면 그 또한 그대로 내버려 두시오. 우리 강이도 어련히 알아서 방법을 생각해내지 않겠소? 폐하께서도 어쩌지 못하시는 것을 우리라고 뭘 어쩔 수 있겠소? 어쨌거나 미래의 이 남진 강산은 저 아이들의 것이오.”
영친왕비는 천천히 자리에 앉으며 한참을 침묵한 끝에 입을 뗐다.
“그래요, 왕야 말씀이 맞습니다. 한 번은 그럴 수 있지만, 평생 관여할 수는 없겠지요. 그래, 장가든 시집이든 갈 테면 가라지요! 인연이면 떼어놓을 수 없을 것이고, 인연이 아니라면 어떻게 해도 소용없을 테니 말입니다.”
“그래, 바로 그 뜻이오.”
영친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영친왕비를 차분히 다독였다.
* * *
한편, 우상은 잠잠한 영친왕부의 반응에 다소 당황한 기색이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면 영친왕은 몰라도 영친왕비는 당장 황궁에 뛰어들 줄로만 알았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어떤 낌새는 있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지금 영친왕과 만난 지 반나절이 지나도 영친왕부는 아무 움직임도 없었다.
우상은 저녁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영친왕부마저도 이대로 관여하지 않겠다는 것인가?
그리고 한참 후, 우상은 비로소 뭔가를 깨달았다는 얼굴이 되었다. 그도 이제야 안 것이었다. 일이 이 지경까지 됐으니 이젠 누구도 관여할 수 없었다. 황제, 황후, 영친왕, 영친왕비, 아무리 대단한 사람들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진옥과 사방화가 혼인을 하든, 그보다 더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도 더 이상 누구도 그들을 통제할 수 없었다. 딱 한 사람, 진강을 제외하고는.
이 일에 관여할 수 있는 인물은 진옥과 어릴 적부터 다퉈온 오직 진강 한 사람뿐이었다. 그 외에 나머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건, 과연 진강이 나서서 이를 막을지, 이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일지나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이는 어디까지나 진강과 진옥 사이의 일이니 어쨌거나 오직 두 사람만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우상은 지난 반평생이 참 헛되이 느껴졌다.
그가 어렸을 시절엔 이러한 다툼이나 고민을 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고 모두 부모님과 매파의 뜻에 따라 혼인을 해야만 했다.
젊을 때의 우상은 사방화의 모친, 박릉 최씨 최옥완을 연모했었다. 이 순간 우상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자신도 부모와 윗세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직접 최옥완에게 청혼을 했더라면, 최옥완도 결국 사영과 혼인하지 않았을까……?
우상은 끝내 쓴웃음을 터뜨렸다. 벌써 죽은 지 몇 년이나 지난 사람을 이제와 놓지 못할 게 무엇이 있겠는가?
* * *
두 성지의 소식은 불과 보름 만에 임안성까지 전해졌다.
진옥은 성지에 극히 담담한 반응이었다. 아들인 그가 아버지의 성격을 모르겠는가? 예상대로 황제는 곧바로 병제를 바꾸지 않았고, 기껏해야 막북 방원 백리에 있는 막북 군사들을 배치하라는 성지를 내렸다.
하지만 경성에서 아무리 쾌마를 타고 간다고 해도 막북까지 최소 보름은 걸렸다. 북제에서 군사를 움직이고 있는 상황에 보름 뒤에 전해질 성지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막북 변경을 쳐부수는데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무엇보다 병제를 바꾸지 않으면, 막북 주변에선 더 이상 막북 군령은 들은 척도 하지 않을 것이다. 하늘은 높고, 황제는 멀다 여기는 그들을 성지 하나로 움직이게 만든다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이대로라면 막북 군영은 고립된 채로 북제의 군대와 맞서야 하는 상황이었다.
황제는 병이 드나, 노쇠해지나 어쩜 이렇게 고집을 꺾지 않으려는 것인지. 그는 사씨 권력에 숙이고 들어가 도움을 받기도 싫고, 북제에 의해 남진이 망하기도 바라지 않는, 그야말로 모순적인 바람만 쥐고 사는 제왕이었다.
이젠 결국 사묵함이 하루빨리 막북 군영에 도착해 설성으로 용병을 청하러 가기만을 기다려야 할 뿐이었다. 설성이라……. 진옥은 심하게 어두워진 안색으로 창가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태자전하! 연 군주님께서 깨어나셨습니다!”
“연이가 깨어났단 말이냐?”
“예, 그러합니다. 태자전하.”
“지금 바로 가보겠다.”
진옥은 방을 나와 진연의 숙소로 향했다.
<『경문풍월』 26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