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48화 (748/978)

748화 서산에 지는 해 

황제는 다시 전 내를 이리저리 맴돌다 입을 열었다.

“우상의 뜻은 짐이 태자의 조건을 윤허해주어야 한단 말인가? 만약 실로 사방화에게 장가를 들게 된다고 해도 그것 또한 눈감아 주어야 한다?”

우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더욱 이런 시기에 이 나라의 황태자 자리가 비어서는 아니 됩니다.”

“됐다, 어서 일어나시게!”

황제는 그 사이 몇 년은 더 폭삭 늙어버린 모습으로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우상은 여전히 무릎을 꿇고 앉아 이야기했다.

“허면 소신의 여식 혼사 문제는…….”

“짐을 도와 오랜 시간 수고하여 공로를 쌓은 경의 뜻이 그렇다고 하니 어쩌겠나. 경의 딸이 참으로 마음에 들어 사돈을 맺고 싶었으나 일이 이렇게까지 됐으니 물러야겠지. 오권, 우상을 일으켜 드려라.”

황제의 손짓에 오권이 서둘러 우상을 부축했다. 우상은 다리가 저려 한참 주무르고 난 뒤에야 겨우 스스로 일어섰다.

이내 황제는 한 곳을 응시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찬란한 제왕의 이름을 가진 사내였지만, 이 순간 그는 서산에 기우는 해처럼 쓸쓸해 보였다.

“이연. 이젠 짐도, 자네도 참 많이 늙었구나.”

“그렇습니다, 폐하. 소신도 이젠 많이 늙었지요. 눈 깜짝할 사이에 벌써 이렇게 돼버렸습니다.”

“그래, 눈 깜짝하니 벌써 수십 년이 지나버렸어. 짐은 이제 더 이상 아무런 힘도 쓸 수 없을 듯하네. 짐이 아무리 탐탁지 않아 한들, 태자를 어찌할 수도, 이 나라를 어찌할 수도 없단 걸 잘 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금세 옥체가 강경해지실 것이옵니다.”

황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짐의 병세는 짐이 잘 알지, 나아질 수 없어.”

우상은 황제를 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태자가 자네에게 3대를 재상에 올려주겠다 약조했지? 짐도 그것엔 관여치 않겠네. 짐은 이제 언제 황천으로 떠나도 이상하지 않아. 눈을 감는 게 오히려 더 편할지도 모르겠어.”

이어진 황제의 쓸쓸한 목소리에, 우상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태자전하께서 소신에게 약조하신 것이긴 하나, 폐하께 한 가지는 맹세하겠습니다. 재상에 오를 만한 인재가 없다면 절대 그 뒤를 잇지 않겠습니다. 조정의 기강을 망쳐서는 아니 되지요.”

“문무를 겸비해 이 나라를 안정시킬 목청이 있지 않은가. 목청이라면 재상의 자리에 아주 잘 어울리는 인재지. 태자는 사람을 잘 쓸 줄도 알지만, 끌어들이기도 잘한다네. 이제 이 강산을 태자에게 넘겨주기만 한다면 짐은 더 이상 바랄 것도 없네. 우상, 이제 그만 가보시게나.”

우상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 나라 일은 소신께 맡겨주시고 폐하께선 편히 쉬십시오. 옥체 강경하셔야 합니다, 폐하.”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우상이 한 걸음씩 물러나 전문을 나서려던 그 순간, 황제가 외쳤다.

“파혼 성지는 오권에게 부로 보내라 명하겠네.”

“황송합니다, 폐하!”

우상은 머리를 조아리며 침전을 빠져나갔다.

* * *

우상은 밖으로 나와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었다.

때마침 불어오는 찬바람에 시린 한기가 느껴졌다. 아무래도 내내 등 뒤로 흐르던 땀이 다 식어버린 까닭인 듯했다.

그렇게 황궁을 빠져나가려는데, 순간 급히 들어오는 좌상과 마주쳤다.

“좌상, 무슨 일인데 그리 급하게 가시는가?”

좌상은 우상을 보고 깜짝 놀랐다.

“혹시……, 지금 우상도 궁에서 나오는 길이신가?”

우상이 고개를 끄덕이자, 좌상이 또 심각하게 물었다.

“폐하께선 좀 어떠신가?”

우상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어화원에서 있었던 일로 여전히 노여움이 가득하시네. 병제는 선황폐하께서 돌아가신 후, 폐하께서 반드시 사씨를 제거하고자 평생토록 염원하며 수행하셨던 것이지. 언제 용이 될지 모르는 남진의 범을 제거하기 위해서.

하지만 내우외환에 맞닥뜨리니 결국은 다시 사씨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된 상황인데 폐하의 분이 가라앉지 않으시는 것도 당연하지. 이제 사방화는 백성의 민심을 얻었고, 변경에선 사묵함이 병권을 쥐었어. 장차 태자전하께서 황위에 등극하시면 사씨는 100년도 넘게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 걸세.”

본래 교활하고 똑똑했던 좌상은 우상을 잡아끌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폐하께선 태자전하께서 병제를 바꾸라고 청했던 것 때문에 충격을 받으셨다는 말씀인가?”

“병제를 바꾼다는 건 폐하께선 더 이상 사씨와 남진의 일에 대해 힘을 쓸 수 없다는 뜻이 담겼던 걸세. 후대의 재능이 출중한 인재들이 우리 세대를 이어가는 것이지 않는가. 이젠 폐하도, 우리도 다 늙어버렸네. 태자전하께서 황위에 오르시면 병제는 언제든 바뀌게 돼있어. 낡은 것을 새것으로 바꿔야 할 때가 된 게지.”

우상의 말에, 좌상은 다시 한 번 깜짝 놀랐다.

“자네 뜻은 폐하께서 혹시…….”

우상은 어두운 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없이 황궁을 바라보았다.

우뚝 솟은 그곳은 더 이상 예전의 위풍당당하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점점 노쇠해지는 사자처럼, 서산에 기운 태양처럼 아주 적막하고, 고요했다. 그리고 저 거대한 황궁에서 부는 찬바람……, 우상의 땀도 싸늘히 식어갔다.

이내 좌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성지 하나론 막북 군사에 그다지 도움이 안 될 듯해 폐하께 병제를 바꿔 달라 청하러 온 것인데, 자네 말을 듣고 나니 그냥 안 가는 게 낫겠네.”

“그래, 가봤자 아무 소용도 없을 테니 가지 마시게.”

우상의 말에 좌상도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함께 궁을 빠져나갔다.

* * *

우상이 집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오권이 성지를 가지고 왔다.

곧 우상부의 모든 사람이 나와 황제의 성지를 받았다.

파혼 성지엔 우상의 간청에 따라 우상부 아가씨 이여벽과 황태자 진옥의 혼사를 파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우상부 모든 이들이 감사인사를 올렸고, 오권은 우상에게 성지를 건넸다.

“우상 대인이 아니고선 누구도 궁에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없었을 겁니다.”

우상이 성지를 받아들며 말했다. 

“태감이 말을 잘해준 덕분이지.”

오권은 바로 손을 내저었다.

“소인에게 그런 힘이 어디 있겠습니까? 폐하께서 우상 대인의 충심을 생각해주셨기에 가능한 일이지요. 실은 폐하께서도 정이 많으신 분입니다. 황위에 오르신 뒤로 감추고 계실 뿐이지요.”

“그렇지. 차라도 한잔하고 가시게, 태감.”

“나중에요, 오늘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오권은 인사를 올리곤 마차에 올라타 황궁으로 향했다.

이내 우상은 우상 부인의 곁에 서있던 딸 이여벽을 바라보았다.

이여벽은 봄바람에도 금방 날아갈 듯 심히 여위어 있었다. 며칠 내내 방에 틀어박혀 마음고생을 했던 탓에 웃음기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우상은 한숨을 내쉬었다.

“벽아, 인연이란 모두 운명에 정해져 있는 것이다. 인연이 아닌 것은 어떻게 해서도 가질 수 없는 법이지. 어찌 그리 네 자신을 못살게 구느냐?”

이여벽은 무릎을 꿇으며 예를 갖추었다.

“알겠사옵니다.”

“진정으로 아비의 말을 이해했다면 그걸로 됐다. 넌 아주 총명한 아이다. 그러니 쓸데없는 걱정으로 괜히 골머리 앓지 말거라. 태자전하와 너의 파혼은 우리 우상부에서 먼저 뜻을 내비친 것이니 네 이후의 혼사에는 아무런 영향도 없을 것이다. 아무 염려마라.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자꾸나.”

이여벽은 입을 오므리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우상 부인이 이여벽의 안색을 한번 살피곤 우상에게 말했다.

“나리께선 볼일 보시지요. 제가 벽이에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우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서재로 향했다.

* * *

우상 부인은 딸 이여벽의 손을 꼭 잡고 걸으며 천천히 이야기했다.

“네 아버지께서 궁에 들어가시고 내 딱히 할 일이 없어 알아보니 형양 정씨의 적자가 아직 짝을 찾지 못했다더구나. 본래 사씨 장방 큰 아가씨와 혼약이 있었는데 사씨 장방이 영남으로 유배돼 혼사가 파기됐다는구나.”

순간 이여벽은 깜짝 놀랐다.

“어머니 뜻은 제가 형양 정씨 적자에게 시집을 가야한단 말씀이신가요?”

우상 부인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형양 정씨 적자는 어릴 적부터 가문에서 길러낸 아주 훌륭한 인재다. 나도 사씨 장방에서 본 적이 있지. 본래 민 부인께서도 조군 이씨, 청하 최씨, 영친왕부의 관계를 통해 어렵게 성사시킨 것인데 다 헛수고가 됐구나.”

“어머니, 형양 정씨 적자가 아무리 좋다고 한들 이렇게 되면 전 아주 멀리 시집을 가야 합니다. 어머니께선 제가 멀리 시집가는 게 좋으세요?”

이여벽의 말에 우상 부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어미가 어찌 그러겠니. 허나 진강 소왕야께선 널 보면 죽여 버리겠다 하시고, 이젠 태자전하와 파혼까지 했으니……. 한림 대학사, 감찰 어사 공자처럼 아직 혼인하기 전인 재주 많은 공자가 널려있긴 하다만……. 모두 내막을 아니 너와의 혼인을 원치 않을 듯해서 하는 말이다.”

우상 부인은 잠시 머뭇거리다 어쩔 수 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이여벽은 눈시울을 붉히며 우상 부인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어머니, 그게 다 제 잘못인 건가요?”

우상 부인도 그런 딸의 모습에 마음이 아파왔다.

“당연히 아니지. 하지만 일이 이리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소왕야께서 대체 네게 무슨 원한이 있어 그런 말씀을 한지는 아무도 모른다. 네 아버지께서 영친왕야께 여쭤보셨지만 왕야께서도, 심지어 왕비마마께서도 모르고 계셨다. 이리 된 이상 진강 소왕야를 찾아 직접 물어볼 수밖에 없지.”

“마음에 두고 있었던 건 맞지만, 황궁에서 쇄정인으로 일이 벌어진 이후 더 이상 함부로 나쁜 짓을 꾸밀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사방화 아가씨와 혼인하는 날, 황후마마와 태자전하께서 절 황궁으로 끌어들여 함께 노설홍을 영친왕부 가마에 태웠던 것이 전부였고요.

이게 저와 무슨 상관이 있는 겁니까? 어머니, 소왕야를 마음에 품었던 게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겁니까? 대체 이게 저와 무슨 상관이 있는 겁니까? 어찌 경성에 있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단 말이에요?”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는 딸을 보고, 우상 부인도 점점 화가 났다.

“그러니 말이다. 진강 소왕야도 어찌나 마음이 독한지.”

이여벽은 한참 눈물을 쏟다 갑자기 우상 부인을 보며 단호히 말했다.

“어머니, 형양 정씨 적자가 아무리 좋은 인물이어도 전 절대 멀리 시집가지 않을 겁니다. 소왕야께서 절 죽이려 하신대도 전 경성에서 죽을 겁니다. 어쨌든 이런 상황까지 왔으니 저도 이대로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요.”

우상 부인은 깜짝 놀라 안색이 창백해진 채 이여벽을 바라보았다.

이여벽은 그런 어머니를 보며, 결심한 듯 다시 단호하게 말했다.

“어머니, 전 멀리 시집가지 않을 겁니다.”

우상 부인이 덥석 이여벽의 어깨를 붙잡았다.

“딸아,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하니? 소왕야를 그렇게나 연모해놓고 소왕야가 어떤 분인지도 다 잊은 게야? 소왕야는 뱉은 말은 반드시 행동으로 옮기는 분이다!”

“알고 있습니다.”

이여벽이 붉어진 눈시울을 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리 고집을 부려서 어쩌겠다는 게야? 네 아버지께서도 말씀하셨지 않니, 인연은 운명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다. 어찌 인연이 아닌 것에 목을 매 네 자신을 못살게 구는 것이냐?

진강 소왕야가 널 싫어하니 멀리 피하는 게 답이다. 우리가 건드리지 않으면 그게 곧 피할 수 있는 게 아니겠느냐? 게다가 미래 세상사가 어찌 될지 누가 알겠어?

지금 진강 소왕야는 행방불명이 됐고, 태자전하는 무사히 임안성에 머물고 계시다. 장차 태자전하께서 황위에 오른다면 진강 소왕야께 떨어질 콩고물이 없을지도 몰라. 두 분은 어릴 적부터 사이가 좋지도 않았잖니.”

우상 부인은 노파심에 계속해서 이여벽을 다독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