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7화 파혼의 뜻
같은 시간, 우상부에서도 동일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우상 부인은 늘 단정하고 우아한 품행으로 우상부 내원을 깔끔히 가꾸며 가문의 명성에 해가 되는 일을 하지 않았다. 내원의 사소한 일로도 우상을 귀찮게 하지 않아 지금껏 부부가 서로를 존경하며 화목하게 지내왔다.
하지만 급변하는 시국은 우상 부인의 고요함도 무너트렸다.
진옥은 수해와 역병에 빠진 임안성을 무사히 구해내고, 사방화도 흑자초를 찾아 임안성 수십만 백성들 목숨을 구한 구세주가 되었다. 현재는 임안성을 비롯한 천하 백성들이 이들을 찬양하고 있었다.
이렇듯 황태자와 충용후부의 적통 아가씨가 함께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까닭에 정작 황태자의 정혼자가 우상부 적통 아가씨란 건 까마득히 잊혀진듯했다. 더불어 남진 전역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방화와 진강의 이혼 소식도 이젠 모두 다 완전히 잊어버린 것 같았다.
상황이 이러하니 줄곧 고상하고 점잖았던 우상 부인도 더 이상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우상이 조회를 마치고 서재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는 곧장 남편이 있는 서재로 달려갔다.
우상은 마침 부중의 막료와 의사를 나누려던 참이었으나 부인이 왔다는 소식에 막료를 바로 돌려보냈다.
“나리, 의사를 방해한 건 아닌지요?”
우상 부인이 들어와 말했다.
“괜찮소! 무슨 일로 이리 급히 찾아온 것이오?”
우상 부인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태자전하와 사방화의 일에 대해 아시는 줄은 압니다. 다만 걱정되는 것이 있어…….”
“그 일 때문이었구려. 내 부인께도 말해주지 않았소? 벽이와 태자전하는 서로에게 아무 마음도 없소. 폐하께서 혼인 성지를 내리셨을 때도 태자전하께선 일찍이 내게 혼인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었소. 그러지 걱정 마오.”
“태자전하께서 벽이에게 장가를 들지 않는다 해도 임안성 소식이 천하에 퍼졌으니 사람들이 우리 벽이를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아무리 황태자전하라 하셔도 그런 제멋대로인 행실로 우리 벽이의 앞길을 망쳐선 아니 되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태자전하께선 애초에 혼인할 생각도 없으셨으면서 어찌 폐하께 파혼을 논하지 않고 바로 응했던 거랍니까?”
“독불장군 같은 황제폐하께 아드님인 황태자전하께서 무슨 힘을 쓸 수 있었겠소? 또한 황제폐하의 황명이니 당연히 혼사를 응할 수밖에. 자, 여기 이미 태자전하의 파혼 서신을 받았소이다.”
우상이 돌연 서신 하나를 꺼냈다.
“파혼 서신이요?”
우상 부인이 깜짝 놀랐다.
“그렇소. 전하께서 800리 급보로 각각 폐하와 우상부로 보낸 것이오. 부인도 읽어보시오. 아무리 화낸들 전하께선 파혼의 뜻을 굽히지 않을 것이오.”
우상 부인은 서둘러 서신을 가져와 눈을 부릅뜨곤 읽어 내려갔다. 그러나 정작 서신을 다 읽고 난 뒤엔 그녀의 얼굴엔 환한 화색의 빛이 감돌았다.
“이번 일로 우상부에게 해를 끼친 데에 대해 사과의 뜻을 밝히고 우상부 3대를 재상의 집안이 될 수 있도록 하겠답니다. 그럼 우리 목청이 당신을 뒤이을 테니 이젠 청이의 자손 3대까지 모두 재상이 될 수 있단 말이지요?”
우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우상 부인이 크게 기뻐했다.
“그럼 우상부는 정말 제대로 된 높은 재상의 집안이 되어 적어도 100년은 걱정 없이 살 수 있게 되는 거네요.”
우상이 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나리, 벽이의 혼사로 우상부의 창창한 앞날을 얻게 됐으니 태자전하께서도 우리에게 성의를 다한 셈입니다.”
우상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소, 이리도 큰 보상을 주었으니 태자전하께서도 마땅한 성의를 보인 것이지요. 이러니 우리 우상부가 무슨 불만이 있겠소? 벽이도 입궁을 꺼리던 차에 잘 된 것이오.”
“소첩, 태자전하께 불만이 참 많았었는데 서신이 이리도 제시에 왔으니 더 이상 아무런 악감정도 없습니다. 하지만 태자전하께서 나리께 직접 폐하를 찾아가 파혼을 논하게 하셨으니 우리 우상부 체면도 말이 아니게 됐습니다.
지금은 임안성에 남은 일도 처리해야 하시고, 막북 변경 병력의 움직임으로 막북에도 가보셔야 된다니 영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아니지요. 그러나 혼인 성지로 약조된 혼사인데 폐하께서 과연 응해주실까요?”
“태자전하께서 폐하께 드리는 서신을 따로 또 보냈소. 파혼을 논할 때 폐하께 그 서신을 드릴 것이오.”
“그 서신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우상 부인이 물었다.
“여기 있소.”
우상은 잘 밀봉된 서신 한 통을 꺼냈다.
“뭐라고 써져있습니까?”
우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태자전하께서 폐하께 드리는 밀서인데 내 어찌 사사로이 뜯어보겠소?”
“그것도 맞네요. 그럼 나리께선 언제 황궁에 들어가실 생각이십니까?”
우상 부인이 물었다.
“곧 갈 것이오. 이런 일일수록 빨리 처리하는 게 우리 벽이에게도 좋은 일이니. 벽이가 근래 마음이 많이 다친 듯해 참 걱정이구려.”
“그렇습니다. 그럼 소첩은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우상 부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서재를 떠나 내원으로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은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우상 부인이 떠나고, 뒤에서 막료가 나와 우상에게 공수를 올리며 말했다.
“우상 대인, 폐하께선 병세가 불안정하여 그 기세가 예전보다 못하시지만 태자전하께서 확실히 황위에 오르시기 전까진 그분은 어쨌든 이 제국의 황제폐하이십니다. 대인, 항상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러니 태자전하께서 대인께 드린, 3대를 재상으로 임한다는 서신을 폐하께 꼭 보여드리는 게 옳을 듯합니다.”
우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럴 생각이었네.”
우상은 다시 관복으로 갈아입은 후 서둘러 황궁으로 향했다.
* * *
황제가 침전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우상이 왔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황제는 어화원에서 막 돌아온 터라 화가 채 가시질 않은 상태였다.
“우상은 어쩐 일로 왔다느냐?”
“소인이 한번 가서 여쭤보고 오겠습니다.”
오권이 말했다.
“됐다. 들라하라!”
오권은 서둘러 우상을 맞이하러 나가 그에게 속삭였다.
“태자전하와 문무 대신들께서 병제를 바꾸라고 하신 것 때문에 아직 많이 화가 나 계십니다. 부디 조심하십시오.”
우상은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고맙네, 오 태감.”
전 내로 들어서자, 역시나 어두운 안색의 황제가 보였다.
“우상, 무슨 급한 일이기에 그리 땀까지 흘리며 오셨는가?”
우상은 바로 무릎을 꿇고 근심스런 얼굴로 황제에게 서신 2통을 내밀었다.
“폐하께 아룁니다. 소신……, 폐하께 아뢸 것이 있어 왔사옵니다. 태자전하께서 조금 전 저희 우상부로 서신을 보내오셨습니다. 한 통은 소신에게 온 것이고, 나머지 한 통은 폐하께 드리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서신을 보고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할 수 없다 생각되어 곧바로 궁에 들었습니다.”
“무슨 서신인가?”
황제가 물었다.
“보시면 알게 되실 것입니다.”
“오권, 짐에게 가져오라.”
오권은 서둘러 우상이 공손히 내민 서신 두 통을 가져와 황제에게 건넸다.
황제는 진옥이 우상에게 보낸 서신을 먼저 펼쳐 보았다. 하지만 채 몇 줄 읽기도 전, 금세 안색이 어두워졌고 마지막까지 다 읽은 후엔 안색이 더더욱 구겨져버렸다. 한동안 말이 없던 황제는 다시 자신에게 온 밀봉된 서신을 펼쳤다. 이내 황제의 안색은 비라도 내릴 듯 우중충해졌다.
오권은 황제의 안색을 살피며 계속 뒷걸음질을 쳤고, 우상은 황제에게 서신을 건넨 뒤로 금방이라도 땅에 붙어버릴 지경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일순간 황제의 몸에서 분노의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가 싶더니, 그가 급기야 서신을 바닥에 던져버렸다.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오권과 우상은 잠시 숨조차 쉬지 못했다.
황제는 곧 일어나 내전을 이리저리 걷다가 우상의 앞에 멈춰 섰다.
“태자가 짐에게 쓴 서신에 뭐라 적혀 있었는지 아시는가?”
우상은 연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폐하께 아룁니다. 소신, 서신을 받고 열어보지 않아 잘 모르옵니다.”
“사방화에게 장가를 들겠다고 한다!”
우상은 이미 다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고개를 들고 황제를 향해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황제는 계속 분노에 몸을 벌벌 떨며 말을 이어갔다.
“게다가 짐을 위협하기까지 하더군. 짐이 윤허하지 않을 시 황태자 노릇도 하지 않을 테니 8황자 진경에게 황위 계승을 하라고.”
이는 우상도 예상하지 못했던 터라 정녕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 되었다.
“그래, 우상도 믿기 힘드나보군. 짐이 그 사방화에게 장가를 드는 걸 윤허하지 않을 시 황태자 노릇도 관두겠다하네. 연정이 뭐라고 이 짐의 강산과 같은 선상에 놓을 수 있단 말인가, 미친 게 아니고서야 어찌 이럴 수 있어!”
우상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진옥은 겉보기엔 온순해보여도 사실 그 속내가 어떤지는 누구도 파악하기 힘들었다. 세속을 막론하고 멋대로 행동하는 부분에 있어선 천하의 진강에게도 결코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사방화는 이미 짐의 조카에게 쫓겨난 부인이다. 그런 여인을 짐의 이 위대한 남진 강산과 비교한다고? 대체 무슨 생각이지?”
우상은 황제를 한번 올려다보고 다시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이 없었다. 그에 황제가 우상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우상, 자네가 말해 보시게. 태자가 미친 게 아니고서야 대체 뭘 하려는 것이란 말인가? 이 강산을 연정 따위와 같은 선상에 두고 비교했던 자가 있는가? 거기다 이미 혼인한 적도 있는 여인을?”
“연정은……, 당연히 강산과 비교될 수 없습니다.”
“그럼 태자가 어찌 짐에게 감히 이런 말을 했다고 생각하는가?”
우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넌지시 대답했다.
“태자전하께선 사방화를 연모하고 계시나 폐하께서 사방화를 석연치 않게 생각하시어 윤허하지 않을까 염려돼 그런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황제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짐이 사방화를 탐탁지 않아 하는 건 사실이지.”
우상은 긴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운을 뗐다.
“폐하, 소신의 직언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태자전하께선 실로 사방화를 연모하고 계시옵니다. 사방화가 소왕야와 혼인하기 전부터 흠모하셨지요. 하지만 대혼 날까지도 아무런 훼방을 놓지 않았고 수일을 괴로워하셨습니다.
소신은 제왕이 이 나라와 연정 모두 다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진 않사옵니다. 약을 구하기 전의 임안성은 자칫하면 한 성이 무너질 뻔한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는 크게 보면 남진 제국의 국가적인 위기였지요.
하지만 사방화가 대량의 흑자초를 찾아내 임안성을 역병의 위기에서 구했고 수십만 백성들 생명까지 살렸습니다. 사방화의 덕행과 재능이 출중하다는 명성은 온 천하에 널리 알려져 백성들의 추앙을 받고 있습니다.
태자전하와 사방화 모두 서로 뜻이 있다면 미래 남진 강산의 복을 불러오는 천생연분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황제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우상을 노려보았다.
“태자와 사방화가 뜻이 있다고? 정말 그 계집이 그럴 것 같으냐?”
“태자전하께서 보내신 서신엔 은연중에 사방화가 어쩌면 태자전하께 이미 이 혼사에 응했겠단 느낌이 있었습니다. 폐하께서 윤허해주시기만 하면 태자전하께선 당장이라도 사방화와 혼인할 수 있다 장담하고 계신듯했습니다.
폐하, 잘 생각해 보십시오. 북제가 병력을 움직이고 남진이 내우외환에 빠진 이 상황에 폐하께서 윤허해주지 않으시어 8황자마마를 황태자 자리에 앉히신다면 그 어린 8황자마마께서 어찌……. 이렇게까지 말씀하신 걸 보면 십중팔구 뜻을 굽히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상은 중간에 황제의 눈치를 살피며 이야기했지만, 이미 딱딱하게 굳어버린 황제의 안색은 펴질 줄을 몰랐다. 외려 분노만 더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진강이 태자와 사방화의 혼인을 동의할 리가 있겠는가?”
우상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답했다.
“진강 소왕야께서 동의하지 않으신다 해도 어쩌겠습니까? 태자전하와 진강 소왕야께선 어릴 때부터 지금껏 아웅다웅 다투셨던 형제들입니다. 폐하께선 그저 옆에서 지켜만 보십시오. 그래도 태자전하, 소왕야 모두 정도를 아시는 분들이니 결코 이 강산을 망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사방화가 바로 화의 근원이구나!”
우상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