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4화 설성에 병력을 요청하다
“그럼 제언경이 변경에 군사를 움직이는 것은 관여하지 않을 생각이오?”
이어 진옥이 물었다.
“옥씨 가문 대부분 세력을 쥐고 있긴 하나 몇 년간 북제를 떠나 와있는 탓에 병력에 있어선 저도 갑의 위치가 아닙니다. 그래서 저도 그들을 막는 데에는 아무런 힘도 쓸 수가 없습니다.”
언신의 답을 듣고, 사운계도 연달아 말을 이었다.
“저도 후야를 도와 시간을 끄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전하께선 같은 황위의 후계자시지 않습니까? 같은 입장에서 잘 생각해보시지요.”
“내가 직접 북제로 갈 수만 있다면 제언경은 전혀 겁나지도 않지. 몸도 좋지 않으신 사 후야께서 막북에 가 군영을 이어받으실 걸 생각하니 견디지 못하실 것 같아 그게 걱정이지요.”
진옥은 사묵함을 보며 대답을 했다.
“경성을 떠나올 때 태자전하께서 제게 보내주신 초지가 있지 않습니까? 저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 태자전하. 제언경 황자가 군사를 일으키는 것쯤은 저도 두렵지 않습니다.”
사묵함이 차분한 목소리로 진옥을 안심시켰다.
“남진과 북제의 30만 병마가 각각 모두 막북에 주둔해 있으니 북제 군영에 움직임이 있다면 우리가 모르는 북제의 근처 병마에도 움직임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막북에 반년 남짓 있으면서 30만 병권을 받은 것이 전부인데 그럼 남진의 다른 곳에선…….”
진옥은 말을 하다 무언가 떠오른 듯 잠시 멈칫했다.
“왜 그러십니까? 병갑을 움직일 수 있는 다른 곳이 있는 것입니까?”
사묵함이 바로 물었다.
“남진과 북제의 병제는 다소 차이점이 있소. 북제는 한쪽이 움직이면 팔방이 다함께 움직이지. 어려움이 닥치면 200리 내 변경을 지키는 병사들은 근처 군대로 이동할 권리가 있으나 남진은 그런 권리가 없소.
북제 황실과 북제의 옥가, 남진 황실과 남진의 사씨 가문을 놓고 비교해본다면 북제 폐하의 전략은 옥자를 견제하되 제거하진 않는 것이었소. 그래서 군신과 외척의 관계에 매우 적당한 균형이 있었지.
하지만 우리 남진은 전혀 달랐소. 아바마마께선 한평생 사씨를 엄격히 사수하고 매사에 간섭하며 온갖 방법을 동원해 제거하려고만 드셨소. 막북 군영 군권과 장군의 권리를 견제하려 사방의 주, 군, 현에다 각각 관리를 세워두고 막북 장군의 명에 따르지 않게까지 만들었지.
내가 아바마마께 서신을 보내면 아바마마께서도 이제 사방에 도움을 요청하실 테지만 이미 늦었소. 설사 기회가 있더라도 이미 갈라선지 꽤 됐으니 뜻을 모으기도 힘들 것이오.”
진옥이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묵함도 그를 따라 한숨만 내쉴 뿐 달리 할 말은 없었다.
그 순간, 사운계가 입을 열었다.
“어쩐지 제언경이 시기를 참 잘 맞춘다 했더니……. 곧 죽어도 병력을 움직이려던 게 남진에 내란을 일으키는 것뿐 아니라 막북 변경의 군제가 깔려있어서 그랬던 것이군. 확실히 믿는 곳이 있었어.
후야, 그러지 말고 지금이라도 어서 태자전하와 함께 몸을 숨기세요. 이리 된 이상 후야께서 가신다 해도 제언경을 꺾진 못할 겁니다. 제가 알기로 북제 200리에 있는 모든 병력을 모은다면 적어도 20만 병마는 됩니다.
거기다 북제의 병력까지 합치면 50만 병마는 훨씬 더 될 텐데 이마저도 제언경의 다른 속셈은 고려치 않은 수준이에요.”
그러자 사묵함은 사운계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운계,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아니 되네. 우리 사씨는 태조 황제폐하의 청을 받아 충심으로 나라를 받들겠다고 굳은 약조를 한 집안일세. 그렇게 조정에 들어오게 된 우리인데 황실에서 우리 사씨를 필요로 한다면 절대 물러날 수 없지. 나라가 무너지면 집이 설 곳은 어디 있겠는가?”
결연한 사묵함의 눈빛을 보며 사운계도 결국 입술만 깨물었다. 그러다 잠시 후, 다시 진옥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태자전하, 뭐 떠오른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면 좋은 방도라도 있나요? 여태 남진 군제에 이런 허점이 있었던 걸 잘 아셨으면서 왜 보완을 하시지 않으셨던 겁니까? 황태자전하라면 충분히 예방하실 수 있었을 텐데요.”
진옥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래, 난 태자지 황제가 아니오.”
그의 답에 사운계는 콧방귀만 뀌었다.
그러다 진옥이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위기를 넘길 방법……. 아주 힘들지만 좋은 방법이 하나 있긴 한데.”
“무슨 방법입니까?”
사묵함이 바로 물었다.
“설성에 10만 병력을 요청하는 것이오.”
“설성이요?”
“응, 설성. 설성은 남진과 북제 사이에 있어 양국의 접경에 속해 관할의 구속도 받지 않지. 남진과 북제는 근 300년간 대립해왔으나 그 사이에 설성이 나타나 버렸소. 만약 설성의 그 10만 용병을 동원할 수 있다면 제언경도 더 이상 북제 군사를 일으킬 수는 없을 것이오.”
진옥이 꺼낸 해결책에, 사운계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답했다.
“말이 쉽지 설성의 그 병력이 태자전하 말씀 한마디로 그리 쉽게 빌려진답니까? 만천하가 설성이라면 학을 뗍니다. 미친 성주와 미친 백성들, 극악무도한 불량배와 천하에 악명을 떨치고 다니는 해적들뿐이라고요.”
“쉽다고 말한 적 없소. 아주 좋은 방법이긴 하나 어렵다고 했지.”
진옥이 말했다.
“설성에 출병을 요청하는 건 실로 어렵긴 합니다. 남진과 북제가 여태 변경에서 마찰을 빚는 와중에도 양국 모두 설성을 쉽게 건드리진 못했지요. 설성의 10만 병마는 30만 병마에 맞먹는 수준인 데다 한 성은 한 나라의 경계에 다다를 수 있기까지 하니까요.
하지만 아무리 어렵더라도 모실 수밖에 없지요. 전하, 제가 지금 바로 막북으로 가 군심을 안정시킨 후 직접 설성에 용병을 청하러 다녀오겠습니다.”
사묵함이 정중히 공수를 올리며 말했다.
진옥은 말없이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성주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자라 쉽게 뜻을 내비치지 않는다고 들었으나 사씨에겐 줄곧 우호적인 태도로 떠받들어 왔소. 그럼 내가 서신을 써 드릴 테니 사 후야께선 이 서신과 함께 성주를 찾아가시오.
성주를 설득할 수 있다면 가장 좋지만, 만약 불가능하다면 이틀만 시간을 끌어주세요. 내가 아바마마께 말씀드려 군제를 바꿀 수 있도록 뜻을 내려달라 전하겠소. 동시에 조정 병력을 동원해 후야를 도와드릴 수 있도록 할 것이오. 그럼 후야께선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까지만 수고해주시오.”
“나라를 지키는데 수고랄 것이 있겠습니까. 전하께선 막북에서 성주와 일면식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럼 더할 나위 없는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사묵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봤던 정으로 출병할 수 있게 도와주기만 바래야지.”
진옥이 말했다.
“예, 저는 그럼 시급히 짐을 챙겨 밤사이 떠나야겠습니다.”
사묵함이 서둘러 방을 나서자, 사운계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말했다.
“저도 조금 더 자야겠습니다.”
그렇게 사운계도 바로 사묵함의 뒤를 따라 방을 나갔다.
* * *
어느덧 방엔 진옥과 언신, 단 둘만이 남게 되었다.
진옥이 먼저 언신을 향해 운을 뗐다.
“소국구께서 세우신 천기각이 설성과 꽤 자주 왕래를 하는 것 같던데 줄곧 암암리에 움직이면서 설성주와도 친분이 있으시겠지요? 사 후야께서 저렇게 가신다면 설성이 도움을 좀 줄 것 같소?”
“역대 설성주가 사씨를 떠받든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설성은 눈 때문에 생겨난 해충이 곡식을 대량으로 갉아먹는 바람에 해충을 없애기 위해 모든 눈을 녹여버렸었지요.
당시 사씨는 사씨 미량, 염창, 이런 구분이 없이 모두 다 같은 한 집안이었습니다. 그렇게 천하의 소금과 곡식은 모두 사씨에게서 나왔기에 설성주가 직접 사씨 가문에 도움을 청했었지요.
사씨 가문은 흔쾌히 백만 분의 곡식을 빌려줬고 설성은 비로소 무사히 위기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사씨 충용후부 유일한 적통 후계자인 사 후야께서 직접 설성주께 출병을 청하신다면 반 정도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언신의 말을 듣고, 진옥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사씨 충용후부와 설성의 인연을 생각해 사 후야를 보낸 것이긴 하오. 하지만 이는 양국 간 싸움이 연관된 문제니……. 설성은 줄곧 양국 병정의 규율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던 터라 쉽게 장담하기는 힘들겠소.”
그러자 언신이 웃으며 말했다.
“계획은 하늘의 뜻에 달려있고, 성패는 사람이 만드는 법이지요.”
문득 진옥이 언신을 보며 말했다.
“그런데 제언경 황자는 소국구의 친조카님 아니오? 옥가 적통인 소국구께선 옥가의 뜻을 따를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군요.”
“예, 저는 옥가 출신에 제언경도 제 친조카인 건 맞습니다. 하지만 긴 세월 동안 제 마음속의 집은 오직 천기각 뿐이었습니다. 천하가 300년 동안 너무 태평했던 탓이겠지요. 부유한 삶에 권태를 느낀 누군가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니 고생은 틀림없이 애꿎은 백성들에게로 돌아갈 것입니다.”
언신은 그렇게 한 마디를 남긴 채 자리를 떴다.
모두가 떠난 방, 진옥은 홀로 의자에 앉아 입술을 깨물며 생각에 잠겼다.
* * *
사묵함은 방으로 돌아와 청언에게 짐을 챙기라고 분부한 뒤 사방화의 숙소로 향했다. 시녀들은 바로 사묵함에게 깍듯이 예를 갖췄다.
“후야, 이리 늦은 밤에 어쩐 일이십니까? 아가씨께선 아직 깨어나지 않으셨습니다.”
“북제 군영에 병사들의 움직임이 있어 곧장 막북으로 가 봐야 한다. 그 전에 누이를 한 번 살펴보고 가야 하지 않겠느냐.”
시녀들이 깜짝 놀랐다.
“후야께선 아직…….”
“괜찮다.”
사묵함이 빠르게 화당으로 들어서자 시녀들이 서둘러 등을 밝혀주었다.
사방화는 아직도 얼굴에 발간 홍조를 띤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내일까지도 일어나긴 힘들 듯하구나.”
사묵함이 한숨을 내쉬었다.
“언신 공자님께서 저녁 무렵에 한번 살펴보시곤 내일 저녁쯤 깨어나실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후야, 정말 이리 급하게 떠나셔야 합니까? 아가씨께선 아직 후야를 뵙지도 못하셨는데요.”
“생명에 지장만 없다면 안심할 수 있다. 언신 공자가 이곳에 남아 누이를 돌봐주기로 했으니 더더욱 마음을 놓을 수 있어.”
사묵함이 말했다.
“후야께서도 몸을 살피셔야 하잖습니까!”
“초지가 함께 막북으로 가기로 했다.”
그러자 품죽이 홀연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우리 아가씨 눈에 거슬리는 것밖에 없는 것 같던데 대체 무슨 쓸모가 있어서 데려가시는 겁니까? 처방 하나도 못 내리던걸요? 언신 공자가 아니었으면 임안성은 절대 무사하지 못했을 겁니다.”
사묵함은 바로 품죽을 보며 말했다.
“초지의 의술이 언신 공자보다 못한 건 맞지만, 약에 있어선 절대 지지 않는다. 게다가 초지에게도 그만한 신분과 재능이 따로 있으니 언신 공자와 비교해서도 안 되지. 초지만 있다면 내 건강도 문제 될 건 없을 것이다.”
품죽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누이가 깨어나면 절대 함부로 행동하지 말고 몸조리에만 신경 쓰라고 전해주거라. 난 아무 일도 없을 테니 내 걱정은 말고, 누이만 건강하다면 조부님과 나도 더 이상 안절부절못할 일도 없을 거다.”
“예, 말씀 받들겠습니다!”
시녀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묵함은 또 한동안 말없이 사방화를 들여다보다 천천히 방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