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38화 (738/978)

738화 돌아온 연석 

제언경이 남진의 내란을 틈타 변경을 친다면 남진은 실로 설상가상인 상황에 휩싸이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사운계가 어머니 사봉이 준 은위로 제언경을 막는다면, 제언경도 쉽사리 나설 순 없을 터였다. 사묵함은 사운계의 이 계획을 듣고 그간 마음에 쌓였던 응어리가 몇 번은 더 녹아드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럼 고모님이 주신 은위를 모두 막북에 두고 거기서부터 임안성까지 자네 혼자 왔다는 말인가? 자네가 제운설 공주에게 끌려갔단 소식을 듣고 사씨 염창 모든 식구들이 자네를 찾으러 갔는데 마주치긴 했었는가?”

“연석 소후야와 함께 왔습니다. 아무리 막북에 다녀왔다지만 절 오랫동안 키워주신 사씨 염창에 대한 은혜를 저버릴 수는 없지요. 제운설 공주에게서 벗어난 후 바로 서신을 보내뒀습니다.”

이내 사묵함이 얼떨떨한 얼굴로 물었다.

“연석이 돌아왔다고?”

“예, 돌아왔습니다! 영강후부에서 오랫동안 쌓아왔던 울분에다 방화 누이와도 이뤄지지 못한 서러움에 남진을 떠나버렸었지요. 방화 누이는 그런 연석에게 마음을 줄 순 없었지만, 영강후부와 황실 은위, 범양 노씨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해주기 위해 북제로 가는 길에 언신 공자를 붙여줬습니다.

그렇게 북제 소국구, 언신 공자의 보호 아래 연석은 줄곧 언신 공자의 부랑에 머물렀지요. 언신 공자는 없어도 그 아랫사람들이 어르신네와 옥가의 눈초리로부터 철저히 지켜주어 연석은 그간 아주 자유롭게 살고 있었습니다.

연석은 어릴 적부터 시원시원한 성격으로 진강 소왕야와도 잘 어울려 지냈었는데, 누이에 대한 마음으로 친우의 우애마저 저버리고 떠날 생각을 했다니, 참……. 그러다 휴서 소식을 듣고 다시 북제에서 돌아온 것이지요.”

한창 사운계의 말을 듣고 있던 사묵함은 깜짝 놀랐다.

“뭐? 떠난 지 벌써 반년이나 넘었는데도 아직 누이에 대한 마음을 떨쳐내지 못했단 말인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방화 누이의 휴서 소식을 듣곤 부리나케 달려가던걸요? 기마와 무공 모두 월등히 뛰어난 저도 도무지 따라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막북 변경에 도착해 일을 처리하는 동안에도 절 기다려주기는커녕 먼저 잽싸게 가버렸고요. 오는 길에는 그림자도 못 봤습니다.”

“그럼 연석이 자네보다 먼저 돌아왔다는 것인가? 그런데 어찌 모습이 보이질 않는 거지? 벌써 경성으로 돌아가기라도 한 건가? 아니지, 아니야. 경성으로 가려면 임안성을 반드시 거쳐야 하는데 역병으로 사방을 막아두었으니 경성으로도 갈 수가 없지 않은가?”

홀로 고민하는 사묵함을 보고, 사운계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방화 누이가 목적이니 직접 누이를 찾으러 간 듯싶습니다.”

“누이를 찾으러? 나도 누이에게 연락을 하려면 언신 공자를 통해서만 하는데 혼자 무슨 방법으로 누이를 찾는단 말인가?”

“여태 언신 공자가 연석을 보호해줬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언신 공자는 임안성을 떠났어도 두 사람은 반드시 연락할 길이 있을 겁니다. 언신 공자에게 연락이 닿는다면 방화 누이와도 연락이 되는 셈 아니겠어요?”

사묵함은 여전히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것도 그렇지만 언신 공자는 배후 세력을 유인하려고 임안성을 떠나 누이를 찾으러 간 것이네. 그렇게나 위험한 길에 연석이 함께 하도록 두겠는가? 누이도 반대할 듯싶은데.”

“하……. 아직 나이도 창창하신 분이 그렇게 걱정이 많아서 어쩌십니까? 그리 매일 걱정만 달고 사시니 몸도 서둘러 쾌차를 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후야, 그냥 더 볼일 없으시면 나가 주십시오. 피곤해 죽을 것 같습니다.”

사운계가 하품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사묵함도 그의 눈가에 짙게 드리운 그림자를 보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좀 쉬게. 저녁 식사할 때쯤 불러줄 테니.”

“성 내에 난리가 난 게 아니라면 깨우실 필요 없습니다. 전 저녁 생각이 없어서요.”

사운계는 다시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 * *

다시 거처로 돌아가는 길, 청언은 사묵함을 뒤따르며 조심스레 물었다.

“후야, 연석 소후야께서 돌아오셨다는 게 정말입니까?”

“그렇다는 구나.”

사묵함도 청언이 여태 문 앞을 지키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는 것을 다 알고 있었지만 크게 신경은 쓰지 않았다. 

청언은 본래 청하 최씨의 공자이자 진강의 외종 사촌으로서 오래도록 진강과 함께했던 인물이었다. 그만큼 수많은 세월을 진강과 함께하며 신뢰를 쌓아왔기에 사묵함도 청언을 통해 소문이 퍼져나가리란 걱정은 하지 않았다.

이내 청언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소왕야와 방화 아가씨께서 이렇게 되신 상황에 돌아오시다니, 과연 연석 소후야께선 시기를 잘 잡으시는군요. 방화 아가씨께선 연석 소후야께 마음이 전혀 없으신데 대체 다시 돌아와 뭘 하려는 것일까요? 혹여 아가씨를 채가기라도 하면 소왕야는 어떡합니까?”

“반드시 누이에 대한 마음을 접지 못해 돌아왔다고 말할 수는 없다. 게다가 진강 소왕야가 누이를 채가도록 놔둘 분 같으냐?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된 게 아니고서야……. 우선은 상황을 지켜보자꾸나.”

“그런 거라면 다행입니다.”

한숨을 폭, 쉬는 청언을 보고, 사묵함이 웃으며 그에게 손짓을 했다.

“너도 걱정이 참 많은 팔자구나. 가서 군주가 깨어났는지 보고 와다오.”

청언이 급히 달려가자, 사묵함은 침상에 기대 잠시 눈을 붙였다.

잠시 후, 청언이 다시 뛰어와 말했다.

“후야, 군주님은 아직 깨어나지 않으셨습니다. 품죽과 시녀들이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고 있으니 염려마세요. 깨어나면 곧장 말씀드린답니다.”

사묵함은 많이 고단했던지 고개만 끄덕이며 손짓을 했다.

그에 청언도 더 이상 사묵함을 방해하지 않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저 멀리 창 너머에선 저녁놀이 아름답게 지고 있었다. 석양빛은 오늘 마지막 남은 힘을 태워 온 하늘을 빨갛게 물들였고, 붉은 빛은 이 방 안 창문으로까지 스며들어 사묵함의 얼굴 위를 노닐고 다녔다.

하지만 사묵함은 이 은은한 빛 속에서도 눈가에 짙게 그늘진 시름과 근심은 전혀 지우지 못했다. 그의 걱정은 당연히 사방화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다.

한편 그 시각, 옆방의 사운계는 사묵함의 방에서 인기척이 들리지 않는 걸 확인하곤 조심스레 창문을 타 넘고 몸을 날려 서쪽 담장을 빠져나갔다.

그에 사묵함의 은위, 운엽(云叶)이 이동했다.

사묵함은 충용후부에서 데려온 은위들은 모두 다 흑자초를 찾는 데 보낸 상황이었으나 항상 그의 곁을 떠나지 않는 은위 운엽만은 제 곁에 남겨뒀다. 

운엽은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이 아닌 이상, 절대 바깥에 모습을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시선엔 보이지 않아도 그는 늘 사묵함의 곁에 있었다.

운엽은 사운계가 담을 넘자마자 곧바로 사묵함의 창가로 다가왔다.

“후야.”

사묵함은 중대한 일이 아니고서야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운엽의 부름에 즉각 눈을 떴다. 지금 임안성은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조차 모두 엄청난 일이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때에 운엽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 더더욱 엄중한 소식이 기다리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운엽, 무슨 일이냐?”

“운계 공자님께서 조금 전 몰래 마당을 빠져나가셨습니다. 어디로 향하시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대로 나가게 둘까요?”

사묵함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운계가 몰래 마당을 빠져나갔다고?”

“네.”

사묵함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임안성에 도착하자마자 언신 공자가 누이를 찾으러 떠났다는 말을 듣고는 곧장 그 뒤를 쫓아가려다 내게 저지당했지. 내가 또 가로막을까 싶어 잔다는 핑계를 대고 몰래 빠져나간 듯하구나.

사씨 나름대로도 추종술을 가지고 있으니, 조부님과 사씨 염창 식구들 또한 운계를 북제에서 데려와 어찌 키울 것인지에 대해 신중히 의논했었지. 그러다 사씨 염창 후계자 규율에 따라 키우기로 결정하고서 운계에게도 모든 걸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사씨 염창 후계자로 큰 운계가 언신 공자의 종적을 쫓는 것도 절대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배후에 숨은 자들을 유인해 임안성을 떠났으니 반드시 작은 종적이라도 남겼을 테니까.”

사묵함은 곧 계속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는 운엽에게 분부를 내렸다.

“운엽, 운계를 쫓아가 곁에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만 지켜보거라. 만약 위험한 상황이 닥친다면 막아도 좋다. 운계가 누이를 찾을 수 있도록 돕는 게 가장 좋겠지.”

운엽은 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후야, 노후야께서 소인에게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 후야의 곁을 떠나지 말라 명하셨습니다.”

“그때는 그때일 뿐이지 않느냐. 조부님께서도 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것은 절대로 원치 않으실 것이다. 게다가 남아있는 자들도 언신 공자가 유인해 임안성을 다 빠져나갔으니 더 이상 무슨 일이 있지도 않을 것이고.”

운엽은 계속해서 고개를 가로저으며 꿈쩍도 하지 않았다.

“후야의 다른 분부는 얼마든 들어드릴 수 있으나, 후야의 곁을 떠나는 건 절대 할 수 없습니다. 역병까지 걸리셨으니 내일까지 흑자초를 찾지 못한다면 반드시 후야를 모시고 흑자초를 찾으러 성을 빠져나갈 것입니다.”

사묵함이 짧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렇게 하자꾸나. 오늘 밤까지는 아무런 소동이 일어날 리 없을 테니 넌 우선 운계를 쫓거라. 날이 밝기 전에 다시 내 곁으로 돌아오면 되지 않느냐. 이 형세로 봐서 더 이상 소동을 피울 자들은 없다. 안심해도 된다.”

운엽은 어떠한 말에도 전혀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고, 사묵함도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됐다. 혼자 가도록 내버려 두거라.”

운엽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물러났다.

* * *

저녁 무렵의 임안성은 오늘의 소란은 다 잊은 듯 심히 고요했다.

사운계는 마당을 빠져나와 곧장 성문으로 향했고, 마침 시화, 시묵, 시람, 시만과 마주쳤다. 그녀들은 성문의 핏자국들을 깨끗이 청소하도록 감독한 뒤 막 거처로 돌아가던 찰나였다.

그녀들은 사운계를 보자마자 곧바로 예를 갖추었다.

그러자 사운계가 재빨리 쉿, 하며 한쪽에 몸을 감추곤 조용히 손짓을 했다. 그녀들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 사운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난 지금 방화 누이를 맞으러 성을 나가봐야 하니 임안성을 잘 지키고 있거라. 내 생각에 오늘 밤엔 딱히 무슨 일이 있을 것 같지는 않으니 잘 땐 자고, 정신만 잘 차리고 있으면 될 듯싶다.”

사운계의 속삭임을 듣고 모두가 크게 놀랐다.

“아가씨를 맞으러 가신다고요? 아가씨 행적을 아시는 겁니까?”

사운계는 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잘 모르지만 성문을 한 바퀴 둘러보니 도움이 될 만한 행적은 찾았다. 내일이 바로 최후의 날이지 않으냐? 방화의 실력이라면 반드시 흑자초를 찾아올 것이다. 그 전까지 임안성과 사묵함 후야를 잘 부탁한다.”

네 사람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그 중 한 명이 사운계에게 물었다.

“후야께는 비밀로 하고 가시는 것이지요?”

“쯧, 어린애가 이렇게 똑똑해서 어디다 쓰겠느냐!”

사운계는 짧은 타박과 함께 밧줄을 꺼내 성벽을 넘어 아래로 뛰어내렸고, 시녀들은 잠시 북서쪽으로 향하는 사운계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