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35화 (735/978)

735화 운계가 있어 다행이다 

이윽고 성문을 지키려는 병사들과 나가려는 백성들이 한데 뒤엉켜 더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결국 병사들의 칼에 다치는 백성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심지어는 다들 넘어지는 바람에 서로의 발에 깔려 다치는 이들도 생겨났다.

시화, 시묵, 시람, 시만은 일단 각자 동서남북 네 방위에 진을 쳤다. 먼저 저 서생을 죽이면 선동하는 이도 사라질 테니 백성들도 안정을 되찾을 것이란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복병은 저 서생이 엄청난 실력의 무공 고수라는 것이었다. 그녀들 실력으론 결코 막을 수 없는 상대라 되레 무고한 백성들만 죽어가고 있었다.

그에 진연이 시급히 뒤돌아 이야기했다.

“너희도 가서 도와줘.”

“안 됩니다! 언신 공자님 명을 받아 군주님을 꼭 지켜드리기로 했습니다. 여기서 더 어지러워진다 한들 저희는 반드시 군주님을 지켜드려야 합니다.”

품죽이 말했다.

“상황이 급하잖아. 난 괜찮으니까 어서 저놈을 죽여.”

“연 군주님, 소왕야께서 후야께 군주님 안위를 맡기셨으니 절대 군주님께 무슨 일이 일어나선 안 됩니다! 군주님이 다치시기라도 하면 소왕야께서 저희 후야께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영친왕야, 왕비마마께도 면목이 없습니다.”

단호한 품죽의 태도에 진연이 결국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오라버니는 내게 일절 관심도 없는데 뭐라고 따지겠어? 어서 도와줘.”

“군주님, 정말 양심에 손을 얹고 말씀해 보십시오. 정말 소왕야께서 친동생이신 군주님께 아무런 관심도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한창 말을 하던 품죽이 군중 사이에서 변장한 사묵함을 발견했다. 곧 내내 진지했던 품죽의 얼굴에도 순간 화색이 감돌았다.

“군주님, 일단 가만히 계셔 보십시오. 후야께서 오셨습니다. 총명하신 후야께는 반드시 무언가 방법이 있을 거예요.”

“사 후야? 어디?”

진연도 사방을 둘러보았다.

“역용술에 능한 제 눈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주 드물지요. 군주님, 이제 염려 마십시오. 후야께는 반드시 대책이 있을 겁니다.”

“알겠어!”

이내 진연도 사묵함이 왔다는 품죽의 말에 마음이 차츰 진정되었다.

엄청난 소란과 피비린내, 그렇게 어지러운 군중들 틈에 숨어있던 청언은 점점 더 심각해져가는 상황에 발을 동동 굴리며 사묵함을 바라보았다.

“후야, 어서 방법을 생각해주십시오! 이대로 가다간 더 많은 이들이 죽어 나갈 게 뻔합니다!”

“사실 시화와 아이들이 잘하는 건 무공이 아니다. 누이가 무명산에 있을 때 기예를 배운다는 걸 알고 무공 실력엔 당연히 문제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다른 부분이 부족할까 싶어 각자 중점적으로 다른 장점을 가지고 누이를 도울 수 있게 양성했었지. 하지만 엄청난 실력을 가진 고수 앞에선 아무리 덤벼들어도 소용이 없다. 내가 나설 수밖에 없겠구나.”

“후……, 후야께서 나서신다고요? 후야, 몸도 안 좋으신데…….”

“괜찮다!”

사묵함은 순식간에 몸을 날려 검에 내력을 불어넣곤 서생을 향해 금빛으로 빛나는 검을 날렸다. 마침 시화와 시녀들의 검도 나란히 서생의 명치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서생은 사묵함의 검을 보고 일순 안색이 급변했다.

사묵함은 본래 허약한 체질을 타고난 데다 현재는 역병도 걸려있는 상태였지만 그는 엄연한 남진 최고의 귀족, 충용후부의 후계자였다.

타고난 신분 외에도 당연히 그 엄청난 자리를 감당할 만큼 충분한 실력이 넘치는 인재였기에 사묵함의 문예와 무공 실력은 이미 타의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높은 경지에 올라 있었다.

사묵함은 당연히 시녀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굉장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고, 서생은 그의 검을 보자마자 저 검은 결코 피할 수 없음을 직감했다. 그러자 서생은 돌연 성벽에 서 있던 진연을 향해 전력으로 검을 내던졌다.

서생의 검은 아주 빠르고, 독하며 맹렬했기에 진연은 꼼짝없이 죽거나 다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진연은 계속해서 성벽 안쪽 동태만 살피느라 서생이 자신을 공격해올 것이라곤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문약한 서생이 모든 공력을 쏟아 부은 칼은 마치 허공을 뚫는 듯 거대한 소리를 내며 맹렬히 날아갔다.

사묵함도 진연에게로 향하는 검을 발견하고 다급히 소리쳤다.

“군주를 보호하라!”

품죽, 품청, 품훤, 품연도 진연을 향해 날아오는 검을 확인하곤 일제히 칼자루를 열었다. 그러나 서생이 모든 힘을 다 실은 검은 파죽지세의 기운으로 순식간에 네 사람의 검을 다 튕겨내고 슉- 소리와 함께 진연을 찔렀다.

성벽 가장자리에 서 있던 진연은 칼에 맞아 그대로 성벽 밖으로 추락했다. 품죽이 서둘러 손을 내밀었으나 진연의 옷자락만 찢어졌을 뿐이었고, 진연이 있던 자리엔 아주 짧은 외마디 비명의 여운만 감돌고 있을 따름이었다.

곧 품죽이 몸을 날리려하자, 품훤이 재빨리 그녀를 잡아끌었다.

“죽고 싶은 거야?”

“연 군주님께서……, 떨어지셨잖아!”

품죽의 안색은 이미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성벽이 이렇게 높은데 밧줄 없인 절대 못해. 떨어지면 그대로 죽을 거야.”

품훤이 단호하게 말했다.

품죽은 다시 추락하는 진연에게 시선을 돌렸다. 진연은 가슴에 별처럼 반짝이는 검을 꽂은 채 한 장 낙엽처럼 힘없이 떨어져가고 있었다.

“그럼 군주님은……, 군주님은 어떡해? 소왕야의 하나뿐인 동생이신데, 만약 군주님이 돌아가신다면 반드시 후야께 책임을 물으실 거야. 그럼 우리 아가씨께선 당연히 후야를 보호하려 드실 거고, 이제 두 분은 더 이상 부부도 아니니 이번 일로 인해 또다시 문제가 커지기라도 하면…….”

품죽의 말에, 이내 그녀를 붙잡고 있는 품훤의 손도 떨리기 시작했다. 품청과 품연 역시 성벽 밖으로 추락하는 진연을 보고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사묵함도 막 서생을 죽임과 동시에 추락하는 진연을 쳐다보았다.

서생은 눈을 감기 전, 사묵함에게 의기양양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내 이 천한 목숨으로 천금 같은 군주의 목숨을 앗아갔으니 여한이 없다.”

그는 그 마지막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사묵함은 몸을 파르르 떨며 손에 쥔 검을 던졌고, 검은 짧은 파열음을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백성과 사병들도 일순간 모든 걸 멈췄고, 성벽 안팎은 기이할 정도로 고요한 공기만 흘렀다.

품죽, 품훤, 품청, 품연은 차마 진연을 볼 수가 없어 일제히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무공을 익힌 그녀들도 이렇게 드높은 성벽에서 뛰어내린다면 죽거나 다칠 게 뻔한 상황인데, 하물며 진연은 가슴팍에 칼까지 맞은 상태였다.

진연은 아무 힘도 없이 이제 그대로 땅에 추락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그러나 꽤 시간이 지나도 누군가 땅에 떨어지는 그 처참한 소리가 들리질 않았다. 워낙 억겁 같은 시간이라 단순히 그렇게 체감이 되는 걸까 생각해봐도 무언가 분명 이상한 상황이었다.

그에 시녀들은 천천히 눈을 떠보았다. 아무래도 성벽 아래서 누군가 진연을 받아낸 것 같았다.

네 사람은 곧장 성벽 아래를 내려다봤다가 일제히 화색을 띠었다.

“운계 공자님!”

품죽이 소리쳤다.

“정말 운계 공자님이시네?”

품훤, 품청, 품연도 동시에 웃으며 소리쳤다.

사운계는 그녀들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가 눈썹을 까딱여보였다.

품죽은 서둘러 사묵함에게 소리쳤다.

“후야, 운계 공자님께서 군주님을 받으셨습니다!”

사묵함도 그제야 안도의 빛을 띠운 채 검을 주워 성벽으로 날아올랐다.

아래를 확인하니 정말 진연을 안아든 사운계가 있었다.

“운계! 내 자네가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진연 군주에게 큰일이라도 났다면 내 정말 왕야와 왕비마마, 소왕야를 볼 낯짝도 없었어.”

크게 한숨을 쉬는 사묵함을 보고 사운계는 진연을 슬쩍 한번 내려다봤다.

“뭐 딱히 때마침 온 건 아닙니다. 도착한지는 꽤 됐으나 성문 안으로 난리가 났기에 아래에서 몸을 피하고 있었을 뿐이지요. 이 군주님께서 정말로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겠군요. 제가 서둘러 임안성에 오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황천길로 향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말 운이 좋았어! 자네가 연 군주를 구했으니 날 구한 것이나 다름없네!”

“진강 소왕야께서 우리 방화 누이를 내친 마당에 우리 사씨가 계속 황실과 영친왕부의 눈치를 볼 필요가 있습니까? 죽으면 죽는 거지, 뭐 하러 책임까지 집니까? 후야, 어서 내려오십시오. 제가 받아내긴 했으나 명치 깊숙이 찔린 바람에 살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사운계는 시큰둥한 답변과는 다르게 시급한 진연의 상황을 알리고 서둘러 사묵함에게 손짓을 했다. 그에 사묵함도 곧장 성벽 아래로 날아갔다.

품죽은 사묵함이 가뿐히 성벽을 내려가는 모습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우리가 후야의 무공 실력만 있었어도 군주님을 저리 만들진 않았을 텐데.”

품청, 품훤, 품연도 연이어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면 무술을 더 열심히 연마해야겠어. 우선 연 군주님께서 심장을 다치지만 않았길 간절히 바래야지. 군주님께서 잘못되시면 우린 죽어서도 그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거야.”

곧 단번에 성벽을 내려간 사묵함이 서둘러 진연을 살펴보았다.

“깊게 찔리긴 했으나 난 의원이 아니라 심맥을 다쳤는지는 알 수가 없군.”

“저도 의원이 아니라 잘 모르겠습니다. 어서 언신 공자를 부릅시다! 방화 누이보다도 의술이 뛰어나다던데 심맥을 찔리지만 않았다면 반드시 살려낼 수 있을 겁니다.”

사묵함은 고개를 끄덕인 후, 서둘러 성벽 위를 향해 소리쳤다.

“어서 언신 공자님을 모셔오너라!”

품죽과 시녀들은 다급히 인파를 뚫고 달려 나갔다.

이내 사묵함은 다시 고개를 돌리고 매우 근심스런 얼굴로 말했다.

“언신 공자가 벌써 떠났을까 걱정이군. 공자가 없다면 어찌해야할지…….”

“줄곧 임안성에 함께 계시지 않았습니까? 어찌 떠났을 수 있습니까?”

사운계가 물었다.

“다른 계획이 있어 성을 나갔어. 배후에 숨은 자를 끌어내기 위해 방화를 만나러갔지. 지금쯤이면 십중팔구 성을 나갔을 거야. 생각해보니 내가 그놈을 쉽게 죽일 수 있었던 것도 이미 뿔뿔이 흩어져 성 밖을 빠져나간듯하네.”

“오, 그 다른 계획이 뭡니까? 재밌는 것이라면 저도 따라가 보겠습니다.”

“위험하니 그만두시게! 자칫하다 계획을 망쳐버릴 수도 있지 않은가. 나도 역병에 걸린 마당에 연 군주까지 생명이 위태로우니 우선 나를 도와 성 내 질서를 바로잡게 도와주게나. 언신 공자가 정말로 성을 나간 것이라면 서둘러 다른 의원을 불러 치료해야 하니.”

“알겠습니다! 일단 후야께서 군주를 좀 안아주시지요.”

사운계가 질색을 하고 사묵함에게 진연을 건네려했다. 

그에 사묵함은 사운계와 진연이 충용후부에 있을 때부터 내내 티격태격하던 것을 떠올리곤 피식, 웃음을 지으며 진연을 조심히 안아들었다.

“성문을 열어라!”

이윽고 사운계가 옷소매를 털며 성문을 향해 소리쳤다.

성을 지키던 병사들은 고개를 내밀어 세 사람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이들은 첫째로 사운계를 몰라보는 건 당연했고, 사묵함도 역용술을 쓰고 있어 전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다만 사묵함의 품에 안긴 진연만은 확실히 알 수 있어, 성문을 열어야할지 무척 망설이는 얼굴이었다.

그때, 시화, 시묵, 시람, 시만이 성문 앞으로 다가와 병사들에게 말했다.

“역용술을 쓰신 사 후야와 사씨 염창의 운계 공자님이세요. 군주님을 살리는 것이 급선무이니 어서 문을 열어줘요.”

그제야 병사들은 서둘러 성문을 열었고, 사묵함은 가면을 벗고 진연을 안은 채 사운계의 뒤를 따라 성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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