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4화 죽거나 다치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준비를 마치고 몰래 담장을 넘어 빠져나왔다.
온 성에는 썩어가는 냄새가 진동했고, 담장을 넘으니 어렴풋이 성문에서 전해지는 고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서 가자!”
사묵함은 발걸음을 재촉하며 성문으로 향했다.
거리엔 수많은 백성들이 성문으로 도망치듯 황급히 달려가고 있었다.
“태자전하께서도 이젠 가망이 없으신 데다 사 후야께서도 역병에 걸리셨어! 흑자초가 없으니 우리 모두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태자전하께선 돌아가시게 생기셨고 사 후야는 원래 몸이 약하시잖아. 여태 흑자초가 없으니 우리 정말 이대로 죽는 거 아닐까?”
“난 죽기 싫어!”
“누군들 죽고 싶겠어? 성문이 열렸다고 하니 어서 빠져나가자!”
“성문이 정말 열렸대?”
“안 열렸어도 열어야지! 관원들께서도 반 이상이 역병에 걸리셨는데 이제 누가 우릴 위해서 흑자초를 구해다 주겠어? 황궁에서 자라 김도 맬 줄 모르실 연 군주님께서 뭘 하실 수 있겠냐?”
“맞는 말이다, 어서 가자!”
몇 사람이 선두에 서니 나머지 백성들도 이끌려 일제히 성문으로 향했다.
* * *
잠시 후, 거리는 공포에 질린 얼굴을 한 백성들로 물샐틈없이 붐볐다.
청언은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친 듯 달아나는 백성들의 모습을 보며 안색이 하얗게 질려버렸고, 덥석 사묵함의 옷깃을 붙잡으며 말했다.
“후야, 어떡합니까? 저희가 간다 해도 막을 순 없을 것 같습니다.”
사묵함도 언신의 선견지명이 옳았다는 걸 깨달았다. 이대로라면 사방화가 흑자초를 가져오는 걸 기다리기는커녕 임안성 전체가 역병으로 뒤덮이기도 전에 무너질 듯했다. 임안성 수십만 백성들이 모여든다면 제 아무리 강력한 병사도 아무런 힘을 쓸 수 없었다.
“우선 성문으로 가 상황을 보고 결정하도록 하자.”
청언은 간담이 서늘해지는 공포에 휩싸여 고개를 끄덕였다.
백성들의 인파를 따라 성문에 다다르니, 여전히 굳게 닫힌 성문과 삼엄하게 사방을 지키고 있는 병사들이 보였다.
그리고 진연은 전쟁에 나가는 대장군처럼 손에는 검을 쥔 채 성벽 위에 서서 엄숙히 앞을 주시하고 있었다. 비록 안색은 창백할지언정, 저무는 석양 아래 있어도 눈빛만은 태양처럼 강하고 굳센 빛을 반짝였다.
또 진연의 뒤론 시화, 시묵, 시람, 시만, 품죽, 품훤, 품람, 품청이 서 있었다. 시화와 품죽은 진옥의 숙소에서 나와 사묵함을 만나러 가려다 언신에게서 사묵함이 무사하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분부를 따라 진연을 돕기 위해 성문으로 온 것이었다.
진연은 난리 통에 휩싸인 성문을 보고 어찌할 바를 몰랐으나 시화와 시녀들을 만나게 되자 어떤 일에도 침착하고 담담히 맞서던 사방화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에 진연의 마음속 깊은 곳에도 강렬한 의욕이 타올랐다.
진연은 그렇게 서슬 퍼런 보검을 꺼내 들고, 덤벼드는 이에겐 인정사정 봐주지 않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평생 한 번도 직접 사람을 죽여본 적은 없었지만 이런 특수한 상황에서는 결코 마음이 여려져서도 안 됐다.
“성문을 여시오!”
“어서 성문을 열어주시오!”
누군가의 외침을 선두로, 나머지 백성들이 함께 따라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소리만 외칠 뿐, 문 앞을 지키고 서 있는 병사들로 인해 누구도 감히 덤벼들지는 못했다.
진연은 선두로 소리친 사람을 한번 바라보았다. 그는 겉보기엔 사묵함보다도 더 야위고 힘없는 문약한 서생처럼 보였다. 그러나 꽤 호소력이 있는 인물이었던지 그가 입을 열자 모든 백성이 물꼬가 트인 듯 들끓기 시작했다.
그 순간, 품죽이 진연에게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
“군주님, 저 서생은 분명 무공을 가진 자일 겁니다. 허약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도 다 위장한 것이고요. 역용술을 정통한 제 눈에는 다 보입니다.”
진연은 급속도로 안색이 어두워졌다.
“과연 누군가 음모를 꾸미고 있는 거구나! 무공 실력은 어떤 것 같아? 죽일 순 없겠어?”
“백성들 틈에서 민심을 이용해 일을 벌이려는 것뿐입니다. 저희가 죽일 수 있다 한들 함부로 나섰다간 백성들의 분노를 살 테니 그럴 수도 없습니다.”
시화가 말했다.
“그럼 어떡해?”
진연은 덜컥 겁을 먹었다.
“우선 진정하시고 좋게 설득해보십시오. 그래도 안 된다면 저 자를 선두로 배후에 숨은 자들이 역병을 틈타 임안성을 무너뜨리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백성의 민심을 잡아야 국면을 통제할 수 있어요. 임안성 백성들은 대대로 이곳에서 살아왔으니 목숨이 달린 일이 아니라면 굳이 임안성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려 하지 않을 겁니다.”
“네 말이 맞아. 그렇게 하자.”
시화의 말을 들으니 진연도 마음이 조금 안정되는 듯했다. 그에 진연은 다시 결연한 눈빛을 반짝이며 백성들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태자전하께선 뛰어난 의원, 언신 공자께서 처방한 약으로 역병을 이겨내고 계시고 흑자초를 찾을 수 있게 사람도 보내뒀다! 사 후야도 아직 증상이 심각하지 않으니 지금쯤 깨어나셨을 테고, 반드시 괜찮아질 것이다. 그러니 모두 다른 이의 꼬드김에 넘어가지 말고 흑자초를 찾을 때까지 기다려라.”
“벌써 며칠 짼데 아직 흑자초가 없단 말입니까? 연 군주님, 규방에서 편히 쉬고 계셔야 할 여인이 성문을 막아서서 뭘 어쩌시겠다는 겁니까? 폐하께서도 여인이 정사를 맡는 걸 가장 금기시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누군가의 말에, 진연이 격노해 소리쳤다.
“내가 여인인 게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 나는 늘 규범을 지키며 사내가 할 수 없는 일까지 하는 몸이다. 임안성이 위기에 빠지고 태자전하와 사 후야 모두 역병에 걸리셨으니 내가 모든 일을 맡게 된 건 당연한 일 아니겠느냐?
나는 당당한 영친왕부의 적녀로서 태어날 때부터 황제폐하와 황후마마의 가르침 아래 자랐다. 임안성 질서를 지키는 데에도 성별이 필요 하느냐? 위기를 타파하는 것이 정사에 참여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지?
누가 감히 군주에게 이런 말을 한 것이냐? 틀림없이 심보가 틀려먹은 이겠지! 마음을 곱게 먹은 이라면 감히 내게 이런 말을 할 리가 없다!
나는 일찍이 태자전하, 사 후야와 함께 임안성 백성들과 난관을 극복해 갈 것을 맹세하였다. 여봐라! 방금 입 뗀 자를 찾아 매우 쳐라!”
백성들은 일순간 모두 조용해졌다.
조금 전 진연에게 소리친 사람은 문약한 서생 곁에 있던 자였다. 그는 진연이 곧장 자신에게 칼을 들이댈 거란 건 전혀 생각지 못한 듯 겁에 질려 문약한 서생을 향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러자 서생이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군주님, 부디 노여워 마십시오. 성 내의 백성 절반이 역병에 걸린 데다 흑자초는 여태 소식이 없습니다. 매일같이 쌓여 불태워지는 시신들을 보십시오. 저희는 뼛조각도 남기지 못한 채 저렇게 죽고 싶지 않습니다. 저희는 역병에 걸리지 않은 자들이니 성만 빠져나가게 해주십시오.”
그렇게 성을 빠져나가겠다고 소리치던 백성들은 순식간에 그를 따라 절절한 간청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평소 마음씨 좋은 진연도 이번만은 억지로 마음을 강하게 먹고 있었지만, 점점 더 높아지는 백성들의 간절한 목소리에 마음이 약해지려 하고 있었다.
그때, 시녀들 중 누군가 곧바로 진연의 마음을 다잡아주었다.
“군주님, 참으셔야 합니다! 절대 마음이 약해지셔선 아니 됩니다. 백성들이 가엾긴 하지만 이중에 역병에 걸린 이가 따라 나가기라도 한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게다가 역병은 초기에 아무런 징후도 보이지 않습니다. 태자전하와 후야를 생각해보십시오.”
그에 진연이 다시 표정을 고치고 소리쳤다.
“뭘 두려워하는 것이냐? 흑자초는 반드시 있을 것이다! 흑자초가 없다면 나 역시 그대들과 함께 죽겠다고 약조하겠다!”
그러나 서생이 또 그녀의 말을 바로 이어받았다.
“군주님은 천하제일 존귀한 황족이십니다. 그런 존귀한 군주님께서 저희와의 약조를 저버리신다한들 저희가 달리 무슨 반박을 할 수 있겠습니까? 군주님께서도 상황이 급박하면 언제든 말씀을 바꾸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만일 흑자초를 찾기도 전에 홀로 성을 빠져나가시면 저희는 어떡합니까?”
진연은 입 놀리는 실력이 만만치 않은 이 서생이 바로 배후의 그들과 한패라는 걸 눈치 챘다.
“하늘에 맹세하노라! 임안성을 버리고 떠난다면 불벼락을 맞을 것이다!”
본래 옛사람들은 맹세를 가장 중시해 이 한 마디에 모두가 잠잠해졌다.
진연은 적통 황손인데다, 당당한 영친왕부의 군주로서 태어날 때부터 황후의 손에 자라오기까지 했었다. 황실 공주들보다도 더 귀하고 드높은 신분인 그녀가 위기에 빠진 임안성에서 생사를 함께하겠노라 맹세했으니 어찌 감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백성들은 실로 여걸중의 여걸인 진연의 강인한 면모에 순간적으로 깊은 호감과 감명을 느꼈다.
그때, 다시 서생이 백성들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아무리 군주님께서 맹세를 하신들 흑자초가 없으면 우리 수십만은 이미 다 죽은 목숨입니다. 생사의 기로에서 군주님 맹세가 얼마나 중하겠습니까?”
역시 또 백성들은 서생의 말에 금세 맞장구를 치기 시작했다.
“어서 성문을 열어주십시오!”
“성문을 열어주십시오!”
서생을 필두로 하여 백성들이 또 한 목소리로 외치고 나왔다.
“성문을 열지 않으시면 뛰어들겠습니다! 물론 이 나약한 몸으로 군주님 보검을 당해낼 순 없겠으나 여기 이 마을 사람들을 살릴 수만 있다면 기꺼이 죽겠습니다! 자, 다들 모두 겁먹지 마세요! 군주님께서 성문을 열지 않으시면 이제 우린 다 같이 뛰어드는 겁니다! 하나가 나가든 둘이 나가든 우리 마을 사람들을 살릴 수만 있다면 모두 그 공로를 인정받는 것입니다!”
또다시 서생이 선동하고 나서자 백성들도 목소리를 드높였다.
“맞습니다! 맞습니다! 어서 뛰어듭시다!”
“군주님 보검을 두려워 말고 어서 뛰어듭시다!”
“뛰어들자!”
백성들은 순식간에 한데 엉킨 밧줄처럼 몰려들어 병사들에게로 향했다.
“모두 멈춰라! 누구든 덤벼들면 죽여 버릴 것이다!”
격노한 진연이 크게 소리쳤지만, 그녀의 소리는 돌진해오는 백성들의 거대한 목소리에 파묻혀버리고 말았다. 백성들은 반드시 살아나가야겠다는 일념 하에 주변 그 누구의 말도 들리지 않는 상태였다.
진연은 덜컥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어떡해?”
“군주님, 저놈을 죽이겠습니다.”
시화도 더 이상은 진연의 말이 소용없을 거란 생각에 손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무고한 백성이 죽거나 다칠 수도 있겠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좋아, 얼른 죽여 버려. 조심해. 저놈 말고도 몇몇이 더 숨어있는 것 같아.”
진연의 걱정에 시화는 고개를 한번 끄덕여준 후, 시묵, 시람, 시만을 불러 일제히 검을 빼들었다.
그녀들 4명이 한꺼번에 서생을 향해 달려들었으나 서생은 이 혼란한 틈을 타 한 백성을 붙잡아 자신의 방패로 삼았다.
시묵은 단칼에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뛰어난 검술 실력의 소유자였다. 시묵의 검은 그렇게 돌이킬 새도 없이 그 백성의 심장에 꽂혀버렸다.
이내 서생은 서둘러 백성을 놓아버리곤 크게 소리쳤다.
“진연 군주님께서 사람을 죽였다!”
주위에 있던 백성들은 심장에 칼을 맞고 쓰러진 사람을 보고 격분을 했다.
“군주님은 좋은 분이 아니었어! 죽기 전에 어서 도망치자!”
진연은 제 어설픈 무공 실력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무공 실력만 좋았다면 직접 저 서생을 죽일 수도 있었을 텐데, 그녀도 들끓는 분노에 휩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