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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1화 (731/978)

731화 한 줌 재가 되어버린 사랑 (2) 

진강은 민첩하게 손을 뻗었지만 결국 손바닥에 남은 건 다 타버린 재뿐이었다. 말없이 제 손을 내려다보던 진강은 다시 천천히 월낭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월낭도 깜짝 놀라 매우 당황한 얼굴로 외쳤다.

“소왕야! 어찌 보지도 않으시고 재로 만들어 버리신 겁니까?”

“내가 한 거라고?”

진강이 눈을 가늘게 떴다.

“소왕야가 아니면 어찌……, 서신이 재가 돼버릴 수 있겠습니까?”

월낭은 진강의 서늘한 눈빛에 압도돼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떠날 때 남긴 말은 없었느냐?”

진강이 그녀를 차갑게 응시했다.

“이곳에서 소왕야를 기다리다 서신을 전해드리라는 말 외에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일언반구도 없었다고?”

“그렇습니다.”

진강은 안색이 더 차가워지는가 싶더니 결국 분노를 드러냈다.

“날 대체 무엇으로 보는 것이냐! 이 서신 하나로 그 사랑하던 마음이 한 줌 잿더미가 됐다고 말하려는 것인가! 하, 참 꿈도 크구나!”

월낭은 진강과 까맣게 변한 그의 손만 번갈아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진정 내가 너 하나 죽이지 못하리라 믿는 것인가.”

진강은 다시 서슬 퍼런 보검을 들고 월낭의 목을 겨눴다.

“사촌 형님!”

월낭은 깜짝 놀라기만 할 뿐 진강의 검을 피하지도 못했고, 깜짝 놀란 최의지만이 크게 소리칠 뿐이었다. 

진강은 한참 칼날보다 서늘한 눈빛으로 월낭을 바라보다 결국 그녀의 목에 검을 완전히 바짝 가져다댔다.

그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 갑자기 연기 한 줄기가 피어올랐다. 연기는 절묘하게 월낭 앞에 다다른 보검을 튕겨냈고 검은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돌에 부딪혀 떨어졌다. 진강도 그 연기의 탄성에 잠시 한 발짝 뒤로 밀려났다.

월낭은 바닥에 주저앉아 바로 자신의 목을 더듬어봤다. 연기에 튕겨 나가긴 했지만, 워낙 빨랐던 검술 탓에 그녀의 목에선 빨간 피가 묻어나왔다.

월낭은 그 피를 보자마자 크게 소리를 지르다 이내 실신해버렸다.

최의지도 이 광경에 잠시 멍해졌다가, 월낭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 연기가 사라지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곧 진강도 천천히 뒤돌아 연기가 사라지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가장 높은 누각의 입구엔 진강과 최의지에게도 모두 익숙한 사람이 서 있었다. 여운암 산사태에 낭떠러지로 떨어져 실종된 사운란이었다.

최의지는 진강의 검을 튕겨낸 그 연기가 사운란의 옷소매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눈이 다 휘둥그레졌다.

“사운란 공자가 어찌 이곳에……?”

사운란은 짙은 색 비단 옷에 얇은 검정색 비단 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는 안색이 매우 창백한 데다 상태도 몹시 좋지 않아보였지만, 그럼에도 단 한 줄기 연기만으로 진강의 보검을 튕겨냈다. 실로 찬사가 나오는 실력에 감탄도 나왔지만, 저런 몸 상태에서 얼마나 상당한 힘을 썼을지 차마 상상하기도 벅찰 만큼 아주 위태로워보였다.

“최 시랑! 소왕야!”

사운란은 일단 최의지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후, 진강을 향해서도 담담히 인사를 올렸다.

“어……, 어찌 공자가 이곳에 계신 것입니까? 방금 그 연기도 공자가 만들어내신 겁니까?”

사운란은 누가 보기에도 아픈 몸을 요양 중인 모습이었다. 

“그렇습니다. 내가 왜 여기 있냐는 물음에 대한 답이라면……. 여기가 내 집이기 때문이지요.”

최의지는 깜짝 놀라 진강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어디로 간 것입니까?”

이어진 진강의 물음에 사운란이 담담히 대답했다.

“방화를 말하는 것입니까? 어제 떠났습니다.”

“어딜 간 겁니까?”

“흑자초를 가지고 임안성으로 떠났습니다. 사 후야께서도 임안성에 계시니 큰일이 나진 않을 것입니다.”

이내 진강이 말없이 눈만 가늘게 뜨고 사운란을 바라보자, 또 그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답을 덧붙였다.

“제가 소왕야께 거짓을 고할 필요도 없다는 걸 잘 아시잖습니까.”

진강은 그제야 시선을 거두고 사방을 살폈다.

“여긴 어디요?”

“심수간(寻水涧)입니다.”

“들어본 적도 없는 곳이군.”

그에 사운란이 웃으며 말했다.

“여긴 물과 산뿐입니다. 보통 사람은 차마 찾아올 수도 없는 곳인데다 남진의 국도에도 기록되지 않은 곳이니 들어보신 적이 없는 게 당연하지요.”

그때, 도저히 궁금증을 참지 못한 최의지가 끼어들었다.

“여기가 왜 공자의 집이란 말입니까? 공자의 집은 사씨 미량 아닙니까?”

“난 사씨 미량에서 태어난 것뿐입니다. 살림만 차리면 만천하 어디든 내 집이 될 수 있는데 어찌 이곳이라고 다르겠습니까? 최 시랑께 봉령이 있는 걸 보니 시랑의 선조와 나의 선조와는 인연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오신 이상, 이곳은 매족의 은거지라는 것과 내가 바로 매족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있어야 할 겁니다.”

최의지는 일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 봉령의 이름을 듣고 입을 열었다.

“봉령은요? 지금 공자께 있습니까?”

사운란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방화가 데려갔습니다.”

“정말입니까?”

사운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새가 자신을 찾아낸 걸 알고는 거둬들여 버렸습니다. 아마 더는 행적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겠지. 나 같아도 누군가 내 체취를 따라 날 찾으려 든다면 기분이 썩 좋진 않을 것 같습니다.”

진강의 안색이 굳어졌다.

반면, 최의지는 비로소 조금은 안도할 수 있었다. 봉령이 죽었다면 집안에 어찌 알려야 할지 앞길이 막막했겠지만 살아있다니 그걸로 된 셈이었다. 

“형님, 이제 임안성으로 갈까요? 아니면…….”

“운란 형님과도 인연이 있는데 어찌 집까지 와서 들어가 보지도 않겠느냐? 이젠 날도 어두워졌는데 형님께서 우릴 바깥에 남겨두기야 하겠느냐.”

진강은 눈썹을 까딱이며 더 이상 사방화를 쫓아가지 않겠단 뜻을 밝혔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사운란이 문을 열어주자, 진강은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섰지만 최의지는 잠시 쓰러진 월낭을 보고 머뭇거렸다.

“괜……, 괜찮겠지요?”

사운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뒤에 있던 하인에게 분부를 내렸다.

“월낭을 조 선생에게로 모셔가거라. 용모를 목숨같이 여기니 조 선생에게 흉이 남지 않도록 잘 치료해 달라 전하고.”

“예! 말씀 받들겠습니다!”

하인은 월낭을 안고 조가에게로 향했다.

* * *

누각 안은 아주 아담하고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진강은 그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유심히 살펴보며 걸었다.

“모두 방화가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하군. 형님도 참 세심하십니다.”

사운란은 마침내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누이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전력투구해야지요. 결국…….”

“결국?”

진강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사운란을 바라보았다.

“누이가 있다면 여기도 누이의 집이 되지 않겠습니까.”

진강의 눈빛이 삽시간에 날카로워졌다.

“집?”

사운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과 현생 모두 이리저리 돌아다니느라 힘을 썼으니 여기야말로 편안히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집이지요.”

“내가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곳이 집이라면, 반드시 여기라 말할 순 없지.”

진강은 차디찬 웃음을 지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지나간 여파에 주렴은 탁탁, 부딪히며 잠시 소란한 소리를 냈다.

사운란은 흔들리는 주렴을 보며 입술을 오므리다 최의지를 돌아보았다.

뒤편에 있던 최의지는 여기서 사운란을 만나게 됐다는 것이 놀라울 뿐, 진강과 그의 이야기는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했다. 다만 둘의 분위기가 매우 심상치 않다는 것만 조용히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운란 공자, 좀 실례하겠습니다.”

이어진 최의지의 말에, 사운란도 기꺼이 그를 안으로 안내했다. 

* * *

한편, 조가는 진강과 최의지가 왔다는 소식에 막 나서려던 찰나, 하인에게 안겨오는 월낭을 보고 깜짝 놀라 물었다.

“공자님께서 다치셨느냐?”

하인이 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공자님께선 무사하십니다. 그러나 월낭이 소왕야의 보검에 상처를 입었으니 흉이 지지 않게 잘 치료해 달라고 청하셨습니다.”

조가는 이내 월낙의 목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날카로운 보검이구만. 공자님께 염려하지 말라고 전해드려라. 소왕야처럼 검술에 뛰어나신 분이 이렇게 살갗만 살짝 스친 상처를 낸걸 보면 애초에 죽이려던 생각은 아예 없으셨던 것 같구나. 

정말 죽이려던 생각이셨다면 공자님께서 막으셨어도 이렇게 얕은 상처로는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공자님은 현재 분심이 도지셔서 천하에 가장 뛰어나다 할 수 있는 무공 고수인 소왕야를 막는 것도 한계가 있는 상태다. 내게 있는 좋은 약을 바르면 흉은 지지 않을 테니 이 정도는 큰일도 아니다.”

하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월낭을 침상에 눕혔다.

이어 조가는 월낭의 상처를 치료해준 뒤 천천히 그녀를 흔들어 깨웠다.

월낭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하얗게 질린 얼굴로 조가의 팔을 잡고 물었다.

“얼굴에 흉이 지진 않았나요?”

조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염려 마시오. 살갗이 벗겨진 것뿐이오.”

“정말요?”

“정말이지.”

월낭도 그제야 조가의 말을 받아들이고 서서히 안정을 되찾았다.

“소왕야는요?”

“공자님 거처에 계시오. 그 많은 장치를 풀어내 여기까지 찾아오시다니, 과연 작은 주인님께서 마음에 담으신 분답게 아주 대단하시더군.”

월낭은 곧장 입을 삐죽대며 말했다.

“이제와 무슨 그런 얘기를 해요? 두 분은 더 이상 부부도 아닌데. 만천하에 휴서 성지가 알려졌으니 이젠 아무 상관도 없는 분이에요. 여기까지 쳐들어와 주인님의 명을 받들어 이곳에 있는 절 죽이려 드시다니 참으로 너무하세요. 주인님께서 괜히 정을 떼려는 게 아니네요.”

그러자 조가가 월낭을 보며 말했다.

“소왕야께선 당신을 죽일 마음이 전혀 없으셨소. 그저 공자님을 나타나게 하려던 것뿐이셨지.”

월낭은 순간 어리둥절해졌다.

“주인님께서 떠나셨다는 게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아셨다면 공자님께서 여기 계신다는 것도 눈치 채셨다는 말인가요? 그럼 그냥 공자님을 불러 만나면 될 것을 그런 방식으로 만날 건 또 뭐예요?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당연히 그렇게까지 하지 않았다면 공자님께선 만나려 하지도 않으셨을 테니까. 천연 요새인 이곳에 장치들마저 모두 풀고 들어오셨으니 소왕야께선 십중팔구 매족에 대해 잘 알고 계신 것이 틀림없소. 게다가 공자님께서 매족 왕실 후계자인 것도 알고 계시니, 작은 주인님을 찾아온 이곳에 공자님도 계시리란 걸 자연스레 눈치 채신 것이지.”

조가의 설명에 월낭도 이젠 진강이 자신을 죽이려던 게 아님을 알게 됐지만 그래도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공자님 댁에 계시다면 오늘 밤 여기서 머물겠단 뜻일까요?”

“나도 그쪽 상황은 잘 모르오. 잠시 후에 가서 보면 알게 되겠지.”

“전 안 갈래요. 주인님 곁에 아무도 없지 않은 이상 제가 다시 또 가서 괜한 불똥을 맞고 싶진 않네요.”

월낭은 바로 고개를 젓다 상처를 건드렸는지 잠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아야……. 조 선생, 상처는 언제쯤 다 낫게 될까요?”

“가장 좋은 약을 썼으니 건드리지만 않으면 열흘이면 충분하오. 그나저나 어젯밤 작은 주인님께서 떠나셨으니 가장 가까운 길로 가셨다면 이제 곧 임안성에 도착하시겠군. 벌써 하루 반나절이 지났으니. 어서 사 후야를 무사히 구하셔야 할 텐데.”

조가의 말에 월낭이 고개를 끄덕이며 걱정스레 말했다.

“가는 길에 주인님께 큰일만 생기지 않으면 좋겠어요.”

조가는 바로 손을 내저었다.

“공자님께서 암위들을 따라 붙이셨으니 작은 주인님께서도 반드시 무탈하게 임안성에 흑자초를 가져다줄 수 있을 것이오.”

이내 월낭은 목을 감싸 쥐었던 손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역시 운란 공자님이 가장 좋다니까요! 주인님은 왜 하필 그 좋은 운란 공자님이 아닌 소왕야를 사랑하셨을까요? 운란 공자님과 이어지셨다면 주인님을 걱정할 일도 참 많이 줄어들었을 텐데 말이죠.”

“작은 주인님께서 여길 찾아오시고 당신을 남겨두신 건 여길 집으로 삼겠다는 뜻이오. 작은 주인님과 공자님 일은 어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 이젠 더 이상 소왕비마마도 아니시니 말이오.”

“그러니까요! 사실 소왕야보다 운란 공자님이 몇 배는 더 호감가거든요!”

월낭은 갑자기 화색을 띠었다.

“그래, 소왕야를 뵈러 가지 못하겠다면 돌아가 쉬시오. 상처가 낫기 전까진 매운 음식은 피하시고. 나는 공자님께 다녀오겠소.”

그렇게 조가가 방을 나서자 월낭은 상처를 매만지며 혼잣말을 했다.

“그럼 그때까지 술도 못 마시는 거잖아? 그거야말로 죽을 맛인데…….”

잠시 미간을 찌푸리던 그녀도 곧 침상에서 내려와 방을 나왔다.

자신의 숙소로 돌아온 월낭은 한동안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러다 그녀는 손짓으로 매를 불러들이고, 서신 하나를 써 먹물을 잘 말린 후 고이 접어 매의 다리에 묶어주었다.

잠시 후, 매는 먼 하늘 구름 속으로 날아올라 심수간을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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