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0화 한 줌 재가 되어버린 사랑 (1)
최의지는 바로 진강의 옆에 나란히 앉아 물었다.
“형님, 그런데 매범문은 어찌 알아보시는 겁니까? 형님께 이런 능력이 있다는 것은 소문으로라도 들어본 적이 없는걸요.”
진강은 눈을 감고 담담히 말했다.
“기예를 배울 때 사부님 밑에서 자주 들어 자연스레 익히게 됐다.”
“온통 매범문으로 이뤄져있는데 설마 여기가 매족의 거처라도 되는 걸까요? 매국은 여기서 만리나 떨어진 곳 아니었습니까? 게다가 이미 나라도 멸망했다고 들었는데요. 하지만 여긴 누군가 매일 청소라도 하는 듯 먼지 한 톨 보이질 않습니다.”
최의지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국가에는 지계가 있지만, 사람에겐 그 경계가 없는 법이지. 매족인들이 천하 어느 곳곳에 남아있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것도 그렇지요! 형님, 저 매범문 국조 조훈에는 뭐라고 쓰여 있습니까? 전 알아보질 못해서요.”
최의지는 매족과 관련된 일이라면 늘 호기심을 갖고 재미있어했다.
“모르는 게 낫다. 신시 삼각이 되면 날 깨워다오.”
진강은 대답대신 그냥 지친 듯 눈을 감아버렸다.
최의지는 전혀 말해 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진강에게 불만이 가득했지만, 여태 수영을 하고, 암벽을 타며 이 장치들을 풀기 위해 힘들었을 그를 생각하니 또 별수 없이 불만을 삭힐 수밖에 없었다.
“네, 깨워드리겠습니다.”
진강은 그대로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
최의지는 금세 잠든 진강을 보고 킥킥대다가 매범문을 한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내 무수한 바늘이 눈을 찌르는 것 같은 고통에 깜짝 놀라 서둘러 눈을 가려버렸다.
잠시 후, 통증이 가라앉자 최의지는 땀을 뻘뻘 흘리며 손을 내린 뒤 다시 진강을 돌아보았다. 진강은 여전히 잠들어 있었고, 그는 다시 매범문을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 * *
신시(申時) 이각(二刻), 최의지가 진강을 깨웠다.
“형님, 일어나십시오.”
“그래, 시간 다 됐느냐?”
진강이 눈을 뜨면서 물었다.
“신시 이각이라 조금 남았습니다. 형님, 여길 들어가면 정말로 사방화 아가씨를 만날 수 있을까요?”
진강은 또 아무 말이 없었다.
최의지는 어떠한 표정도 읽을 수 없는 그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진강은 막 잠에서 깬 까닭에 한결 편해진 안색이었지만 알 수 없는 그 깊은 눈빛만은 변함이 없었다.
세상은 그에게 아직 나이가 어려 한없이 가볍고, 예의와 도리 따위엔 전혀 얽매이지 않으며, 늘 제멋대로 굴고 거칠기 짝이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지만, 최의지는 이번 기회로 그와 함께하며 소문이란 역시 떠도는 바람처럼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임을 깨달았다.
실제로 겪어본 진강은 세상의 그 박한 평가와는 전혀 다른 인물로 보였지만, 그렇다고 또 명확하게 정의내리기에도 다소 복잡한 감이 있었다. 사실 진강은 아주 이해하기 힘든 인물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신시(申時) 삼각(三刻)이 되자 정말 진강의 말처럼 천천히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 * *
문은 아주 무거워 보였지만 소리 없이 천천히 열렸고, 네 명은 족히 들어갈 만큼 매우 넓었다.
“형님! 정말 형님 말씀대로 문이 열렸습니다.”
최의지의 말에 진강은 고개를 한번 끄덕인 후 안을 들여다보았다.
문 안쪽으론 옅은 안개가 껴있었고, 진강은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최의지가 바로 그의 뒤를 따라가자 문은 다시 천천히 소리 없이 닫혔다.
최의지는 점점 호기심에 진강을 앞질러가다 결국 그에게 팔을 잡혔다.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싶지 않으면 멈춰라.”
최의지가 깜짝 놀랐다.
“낭……, 낭떠러지요?”
“아까 내하 절벽에서 봤던 그 안개와 다를 게 없지 않느냐? 못 믿겠다면 직접 뛰어내려 봐도 된다.”
최의지는 연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어떻게 건너갑니까?”
진강은 잠시 몸을 숙여 낭떠러지 끝을 바라보았다.
“벽 쪽에 밧줄이 있으니 차례로 내려가면 된다.”
그에 최의지가 짧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더 이상 암벽은 무리였는데 밧줄이 있다니 다행입니다.”
곧 진강이 주먹보다 굵은 밧줄을 잡아당겨 밑으로 뛰어내렸고, 최의지도 줄을 잡아당겨 함께 줄을 타고 내려갔다.
* * *
이곳 주변은 구름과 안개로 가득했고 돌 벽과 밧줄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한 반 시진이 지나자 바닥에 아주 맑은 호수가 보였다.
그에 최의지의 안색이 또다시 창백해졌다.
“또 그 절벽의 호수는 아니겠지요?”
“아니다.”
“전 헤엄칠 줄 모릅니다.”
최의지는 아예 밧줄을 잡아당겨 절벽에 발을 디디고 멈춰 섰다.
그러자 진강은 허리춤에서 자물쇠를 빼내 밑으로 던졌다. 또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고리에 뭔가가 걸린 것 같았고 진강은 힘껏 그 무언가를 잡아당겼다. 서서히 딸려오는 것은 바로 대나무 뗏목이었다.
“대나무 뗏목이 있으니 걱정마라.”
“뗏목이 있다니 다행입니다!”
최의지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두 사람은 밧줄을 다 풀고 대나무 뗏목 위로 올랐다.
* * *
진강은 대나무 장대를 들고 뗏목을 저었고, 이내 두 사람은 호수를 따라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호수 위로 짙게 깔린 안개 탓에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어서 최의지는 허공에 한번 손을 뻗었다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형님, 이건 보통 안개와는 다릅니다. 차갑고 축축한 게 아니라 미지근하고, 촉촉하고, 부드럽고 편안한 느낌입니다. 호수 위로 차가운 습기도 느껴지질 않습니다.”
“안개가 아니다.”
“안개가 아니라고요? 그럼 뭡니까?”
“매족의 안개술일거다. 사방의 산석 초목이 생기가 넘쳐 보이도록 만드는 안개술인 것이지. 안개인 것 같지만 진짜 안개는 아니다. 생각해봐라, 지금이 몇 시진인데 이렇게 안개가 낄 수 있겠느냐?”
“맞네요. 신시(*申時: 오후 3 ~ 5시) 삼각(*三刻: 45분)에 들어와 여기까지 오는데 반 시진이 더 걸렸으니 지금은 아직 유시(*酉时: 오후 5 ~ 7시) 일각(*一刻: 15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진강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그때, 최의지가 수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물에도 뭔가 방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진강도 아래를 내려다보고는 대나무 장대를 치워보았다.
누구도 뗏목을 젓지 않음에도, 뗏목은 계속 물길을 따라 앞으로 나아갔다.
“이 앞엔 또 뭐가 있을지 궁금합니다. 형님을 따라 나오니 안목도 넓히고 좋네요. 과연 세상엔 별의별 것이 다 있다는 말이 진짜였습니다. 제 평생 이런 천연 요새와 정교한 장치는 처음 봅니다.”
진강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아무런 말도 없었다.
봉령은 사방화를 찾는 두 사람을 이곳으로 이끌었다. 최의지는 그녀가 있을 거라 추정되는 곳을 따라가다 어느덧 천혜의 땅까지 이르게 된 지금을 보고 과연 그녀는 보통의 인물은 아니라는 걸 절절히 느끼게 됐다.
그에 문득 순간적으로 진강이 결국 사방화를 찾아내는데 성공한다 해도 그 결과가 반드시 좋을 것이라고는 장담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넓고 너른 호수를 따라 반 시진 즈음을 흘러왔을까. 맞은편 너머로 어렴풋이 정자 누각이 보이기 시작했다.
“형님, 저길 보십시오!”
진강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 * *
잠시 후, 대나무 뗏목은 기슭에 이르렀다.
짙은 안개가 걷히자 비로소 맞은편 누각도 뚜렷하게 보였다.
보통은 이런 곳에 거의 다 쓰러져가는 산장이나 작은 마을이 있을 것이라 상상하기 마련이겠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이곳엔 누각의 궐전이 층층이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수도 몇 십 곳은 되어보였다.
그중 가장 높은 궐전엔 한 사람이 서 있었다. 화려한 치마에 아름다운 구슬 비녀를 꽂은 여인, 얼핏 보면 구천의 선녀라 생각될 만큼 매우 아리따운 미인이었다.
“사방화 아가씨입니다!”
최의지의 외침에 진강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저 여인이 어찌 방화란 말이냐?”
최의지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다시 그녀를 잘 살펴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영락없는 대갓집 귀족 아가씨의 자태라 최의지의 눈엔 자꾸만 그녀가 사방화처럼 보였다.
아……. 그러나 계속 시선을 집중하니 화려한 치마를 입은 저 미인은 사방화가 아니었다. 언뜻 보기엔 사방화와 무척 닮은 듯했으나 분명 사방화보다는 나이가 조금 더 많아 보이는 낯선 여인이었다.
“형님, 역시 형님의 시력이 더 좋으시네요. 저 여인은 누굴까요? 형님께선 아시는 분입니까?”
“평양성 연지루의 주인, 월낭이다.”
“말로만 듣던 그분이군요! 그런데 누군가와 참 닮은 듯합니다. 그…….”
“월낭의 남동생이 바로 월낙이다.”
“어쩐지 태자전하의 은위와 닮았다했더니, 월낙에게 저런 누님이 있었군요! 그런데 그 주인장이 어찌 저기 있는 겁니까? 설마……, 매족 사람인 걸까요?”
“아니, 북제 옥가의 사람으로 이름은 옥월낭이다. 부모를 잃고 어릴 적 월낙과 헤어졌지. 그렇게 남매는 각자 방화와 진옥의 곁에 남게 됐다.”
“그럼 사방화 아가씨도 분명 여기에 계시겠군요.”
진강에게선 더 이상 아무런 표정도 읽을 수 없었다.
* * *
이윽고 두 사람은 대나무 뗏목에서 내려 기슭 가장자리 돌계단을 따라 가장 높은 궐전으로 향했다.
마을 분위기는 실로 쥐죽은 듯 고요해서, 궐전에 서 있는 월낭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틀림없이 이곳엔 아무도 없을 것이라 단정 지어 버렸을 것 같았다.
그런데 두 사람이 궐전에 다다르기도 전, 월낭이 먼저 날아와 두 사람을 가로막고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주인님께서 떠나시기 전, 소왕야께서 오실 거라 말씀하셨는데 정말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분은 청하 최씨의 둘째 공자님이시지요? 소문대로 참 수려하시네요.”
최의지는 표정이 서서히 굳어갔다. 멀리서 보기엔 대갓집 귀족 아가씨로 보일만큼 우아하기 그지없던 그녀가 바로 앞에서 농염한 교태를 부리는 모습에 그만 얼굴이 굳어버린 것이었다.
월낭은 아예 습관이 된 듯 입 꼬리를 씰룩거리며 그야말로 기방 주인의 정석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고, 최의지는 점점 더 할 말을 잃어갔다.
예로부터 충용후부는 시서와 예를 갖추고 갖은 탐욕을 금기시하는 역사와 유서 깊은 세가대족이 아니던가. 그런 훌륭하고 거대한 가문의 유일한 적통 아가씨 사방화는 어째서 이런 기녀를 부하로 가까이 두고 있는 것인지…….
“벌써 떠났단 말이냐?”
급속도로 굳어버린 진강의 얼굴을 보고, 월낭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젯밤 떠나셨습니다. 주인님께서도 소왕야께서 오실 걸 알고 계셨는지 어제 미리 떠나신 듯합니다. 사실은 오늘 떠나실 계획이셨거든요.”
진강이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어디로 간 것이냐?”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월낭의 답에, 진강은 갑자기 보검을 꺼내 들고 월낭의 목을 겨눴다.
“내가 널 못 죽일 거라 생각하느냐.”
“아이고, 소왕야! 절 죽이셔도 소용없습니다! 제가 어찌 소왕야께 거짓을 고하겠나이까. 주인님께선 정말 어제 떠나셨습니다. 제게 여기서 소왕야를 기다리라 분부하시곤 서신 하나를 남기셨으니 못 믿으시겠다면 서신을 드리겠습니다. 소왕야께서도 보면 아시겠지요.”
진강이 굳은 얼굴로 말없이 손만 내밀자, 월낭이 서둘러 서신을 꺼내줬다.
서신 위엔 수려한 필체로 쓰인 진강의 이름이 있었다. 사방화의 글씨였다. 진강은 이내 보검을 거두고 서신을 펼쳐보았다.
그런데 그 순간, 서신은 눈 깜짝할 사이 까만 재로 변해 바람을 타고 흩어져버렸다. 진강이 아무리 빠르다 한들 날아가는 바람을 잡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