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5화 운란자초 (2)
잠시 후, 네 사람은 다시 사씨 염창 문 앞에 다다랐다.
하지만 이곳엔 커다란 자물쇠가 걸려있었다.
영친왕, 좌우상, 영강후는 동시에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때, 초조해하던 좌상이 먼저 앞으로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안에 누구 있는가?”
쿵쾅쿵쾅, 자물쇠가 채워진 빗장은 한동안 요란한 소리를 냈지만 안에선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질 않았다. 나와 보는 문지기조차 없었다.
“됐소. 그만하시오. 문 앞에 잡초가 이렇게나 자란 걸 보아하니 한 달도 넘은 것 같구먼.”
영친왕이 말리자, 좌상이 몹시 다급한 안색으로 말했다.
“왕야, 제가 어찌 초조해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태자전하께서 위독하신 상황인데……. 대체 어딜 간 걸까요?”
“주위 이웃에게 한번 물어봅시다.”
우상의 말에, 영강후가 이웃집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누군가 고개를 내밀었다가 서둘러 예를 갖추었다.
“저 사씨 염창부에 어찌 문이 걸어 잠겼는가? 모두 어딜 간 건지 아는가?”
영강후가 물었다.
“운계 공자님께서 사라지신 뒤로 모두 공자님을 찾으러 떠나셨습니다. 문지기 하나만 남아있었는데 한 달 전, 집에 일이 생겨 문을 걸어 잠그고 지금껏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영강후는 뒤돌아 나머지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내 영친왕이 먼저 손을 내저었다.
“사씨 육방에 가 보지요.”
* * *
곧 네 사람은 사씨 육방에 다다랐다.
그중 좌상이 가장 서둘러 문을 두드리자 하인이 나와 황급히 예를 갖췄다.
“나리와 부인은 계시느냐?”
“예, 계십니다.”
좌상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서 나리와 부인을 뵈러 왔다고 전하거라.”
잠시 후, 사씨 육방 노부인, 가주, 명 부인이 급히 이들을 맞으러 나왔다.
사씨 육방의 노부인은 임 태비와 친한 친우관계였다. 물론 믿음으로 다져진 사이긴 하나 엄격한 계급과 서열은 존재하고 있었다.
영친왕, 좌우상, 영강후 역시 신분은 육방 노부인보다 높았으나 노부인은 이들보다 나이가 많았기에 네 사람은 노부인에게 정중히 예를 갖추었다.
이내 육방 노부인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왕야, 저희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입니까? 어찌 전부 다 오셨습니까?”
영친왕이 고개를 내저었다.
“안심하시오, 부인. 나라에 큰일이 생겨 부탁을 좀 청하고자 왔소.”
영친왕처럼 존귀한 사람의 입에서 부탁이란 말이 나오자, 노부인은 깜짝 놀라 아들과 며느리를 돌아보았다.
현재 사씨 육방의 가주는 몸이 약해져 조정에 나가지 않고 육방의 일만 도맡고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총명한 사씨 가문 인물이기에 곧바로 영친왕의 뜻을 이해하고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네, 모두 안으로 드시지요.”
* * *
육방 가주는 안채에 모여 다과를 준비시키고 모든 하인을 물렸다.
영친왕은 먼저 찾아온 이유를 얘기한 뒤 흑자초가 있는지를 물었다.
“이 일로 오셨던 것이었군요. 반 시진 전에 태비마마께서 서신을 보내셔서 흑자초가 있는지 물어보셨습니다. 그에 저도 임안성에 일이 났다는 걸 알게 됐지요. 하지만 줄곧 이곳에 흑자초는 없었습니다.”
육방 노부인은 나이가 들었어도 결코 우둔하진 않았다.
“응? 태비마마께서 부인께 먼저 서신을 보냈단 말씀이시오?”
영친왕이 깜짝 놀라 물었다.
“네, 현재 태자전하가 없어 8황자마마께서 대신 나라를 지키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아직 나이가 어려 이처럼 큰일은 감당할 수가 없으니 태비마마께서도 8황자마마를 위해 제게 흑자초의 여부를 물었던 것이지요.”
그때, 좌상이 육방 노부인에게 물었다.
“노부인, 사씨 육방은 모든 사씨 가문을 논하자면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곳입니다. 모든 사씨 집안에 개인 창고가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게다가 육방 대인처럼 몸이 허한 분이 계신 댁엔 보통 모든 약재가 다 갖춰져 있는 게 맞지 않습니까? 어찌 지금껏 흑자초가 없었다는 것인지요?”
육방 노부인은 잠시 망설였다.
“그게…….”
“노부인, 무슨 숨겨진 속사정이라도 있으신 게요?”
영강후의 물음을 시작으로 영친왕과 우상도 육방 노부인을 바라보았다.
그에 노부인은 아들과 며느리를 바라보았고, 육방 가주와 명 부인도 확실히 뭔가 있긴 하지만 말하긴 꽤 난처한 듯 보였다.
이어, 영친왕이 차분한 목소리로 세 가족을 설득했다.
“노부인, 그리고 육방 대인, 명 부인. 임안성에 역병이 돈다는 사실은 일찌감치 알고 계셨겠지. 지금은 태자와 임안성 십 수만 백성의 생사가 달려있소. 다들 현재 흑자초만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라오.
하지만 임안성 방원 500리를 돌아도 흑자초를 구할 순 없는 상황이오. 오늘 폐하께서 경성의 큰 약방과 부랑의 창고를 뒤져 흑자초를 찾아내라 하셨지만, 지금껏 한 포기조차 나오는 곳이 없소이다. 하여 사씨처럼 세가대족이라면 흑자초가 있을 것이란 생각에 절박하게 이리로 와본 것이오.”
우상도 금세 말을 이어받았다.
“그렇습니다. 흑자초가 없으면 태자전하와 임안성 백성들은 꼼짝없이 죽은 목숨입니다. 거기다 충용후부의 사 후작도 막북으로 가던 중 폭우로 임안성에 발이 묶였던 데다 역병까지 도는 바람에 지금껏 임안성에만 있다합니다.
돌아가신 사씨 육방 어르신은 노후야와 더불어 유일한 사씨 적통 형제이셨던 지라 평소 충용후부와 사씨 육방은 평소 가장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태자전하는 차치하더라도 사 후작에게도 큰일이 날 수 있는데 이는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육방 노부인이 양옆을 바라보자, 그녀의 아들 육방 가주와 며느리 명 부인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노부인은 그제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실은 속사정이 있어 말하지 못했던 것인데 태자전하와 사 후야의 안위까지 걸려있는 문제니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겠군요.”
영친왕과 세 사람은 모두 일제히 귀를 쫑긋 세웠다.
“네 분 모두 남진의 중요한 일만 도맡아오셨으니 손금 보듯 훤히 들여다보시는 일이 있는가 하면, 또 아무것도 모르는 일이 있을 테지요. 사씨 미량의 공자 운란은 지금껏 기이한 병이 있었습니다. 그 병은 흑자초가 있어야만 해서 모든 사씨는 흑자초를 얻게 되면 모두 운란에게로 보내줬습니다.”
노부인의 말에, 네 사람은 깜짝 놀랐다.
“어찌 이런 일이 있는지도 몰랐을까요?”
우상이 말했다.
“조정에 몸을 담고 계시니 사사로운 일엔 마음 쓸 겨를이 없으셨던 게지요. 운란이 뛰어난 재주를 가지긴 했으나 여태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일을 도맡고 3년 전에는 또 평양성으로 휴양을 갔었으니 병에 대한 사실은 자연스레 아무도 몰랐던 것입니다.
게다가 우리 사씨에게 있어서도 병에 대한 일은 알려서 좋을 것이 없으니 숨길 수 있는 대로 숨겼던 거지요. 네 분께서 모르셨던 것도 당연합니다.”
명 부인이 말했다.
“참으로 완벽히 잘 감추셨소. 여태 폐하께서 사씨의 동태를 살펴오셨지만 모든 사씨가 흑자초를 사씨 미량에 줬다는 건 들어본 적이 없었소.”
이어진 영친왕의 말에 명 부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네, 폐하를 비롯한 조정 대신들께선 모두 남진의 경맥만 주시하고 계셨던 터라 임안성과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았더라면 흑자초쯤은 아주 사사로운 일에 불과했겠지요.”
“맞는 말이오! 그럼 사씨 어디에도 흑자초는 없단 말씀이시오?”
좌상이 물었다.
“지금은 흑자초가 자라는 계절이 아닙니다. 예년엔 흑자초가 잘 익고 나면 가장 좋은 계절에 아주 신선하게 보관해뒀다가 모두 운란에게 보냈습니다. 운란의 집엔 흑자초 약효를 가장 잘 살리도록 보관하는 방법이 따로 있었으니 운란의 집 말고는 어디에서도 흑자초를 찾을 수는 없을 듯합니다.”
명 부인이 말했다.
네 사람은 다시 근심에 잠겨있던 중, 영친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운란은 여운암에 간 뒤로 지금껏 행적을 알 수가 없으니 어찌할꼬!”
그때, 좌상이 명 부인에게 물었다.
“부인, 매년 흑자초를 어디로 보냈었소?”
“운란의 집으로 보내다가 이젠 평양성으로 보내고 있지요. 운란의 곁에 조가라고 하는 한 신의가 있는데 그 조가가 흑자초를 받고 있어요. 운란이 사라졌어도 조가는 평양성에 남아있으니 조가를 찾는다면 흑자초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좌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한시가 급하니 어서 갑시다.”
영친왕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며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평양성에 가잔 말이오?”
“폐하께 말씀을 드려 평양성으로 사람을 보내야지요!”
좌상의 말에 우상이 곧장 입을 열었다.
“폐하께 말씀드리러 황궁에 갔다가 누군가의 귀에 소식이 들어갈지도 모르네. 황궁 어약방에 있던 흑자초도 사라진 걸 보면 얼마나 지독한 놈인지 알 수 있잖소.”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소?”
좌상이 물었다.
“어찌 됐든 태자전하를 구하는 게 급선무요.”
우상이 좌상을 보며 말한 뒤, 다시 영친왕을 돌아보았다.
“왕야, 소왕야는 언제 돌아온답니까?”
영친왕은 고개를 내저었다.
“내 어찌 알겠소.”
“가능하면 어서 소왕야를 찾아 나설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어쩌면 조가에게 있는 흑자초가 유일한 것일지도 모르잖습니까. 다른 이를 보냈다가는 흑자초를 가져오리란 보장도 할 수 없습니다. 또 만에 하나 배후의 인물에게 흑자초를 뺏기기라도 하면 어찌 다시 뺏어올 수 있겠습니까?”
우상의 말을 듣고 영친왕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오. 우선 왕비에게 강이를 찾을 수 없겠느냐 물어보겠소. 강이가 목숨을 잃을 뻔했던 후로 왕비가 몸에 특별한 향을 심어뒀소. 새를 날려 보내면 향을 따라 강이를 찾게 할 수 있을 것이오. 임안성의 일이 심각하니 이 방법을 쓸 수밖에 없겠구려.”
영친왕의 말에 좌우상과 영강후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 말고는 딱히 다른 방법도 없을 듯했다.
그렇게 네 사람이 떠나자, 육방 노부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운계에 이어 운란까지 사라진 바람에 사씨 미량과 염창이 두 공자를 찾으러 떠나버렸고 충용후부마저 자리를 비웠으니 이제 남진에 남은 사씨 대호는 우리뿐이구나.”
“노후야께서 떠나시기 전 서신으로 잠시 떠나는 거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명 부인이 말했다.
“시국이 이러하니 언제까지 떠나계실지도 모르겠다.”
“네, 몇 달이 될지, 1, 2년이 될지, 몇 년이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일 것 같습니다. 경성 안팎이 다 아수라장인데 세상에 조용한 곳이 남아있긴 할까요? 여행을 떠나신다던 노후야께서도 어딜 가실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명 부인의 말에, 육방 가주가 말했다.
“우리도 경성을 떠나 잠시 피해있는 게 어떻겠소?”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음전에 기대 살다 지금까지는 또 충용후부의 기둥 아래 살아왔습니다. 부중에 있는 거라곤 하인과 호위 몇 명뿐인데 경성을 나간다 한들 어딜 갈 수 있겠습니까?”
부인의 답을 들은 육방 가주는 쓸쓸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그렇지, 다 내가 못나서 부인과 어머니를 고생만 시키는구려.”
“그런 말 말아라. 약하게 태어난 네가 한평생 무탈하게 사는 것만으로도 이 어미는 더 바랄 게 없다.”
육방 노부인이 아들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그러자 명 부인도 남편을 위로하고 나섰다.
“어머님 말씀이 맞습니다. 전 당신이 높은 벼슬을 달고 후한 녹봉을 받길 바라지도, 타산에 밝길 바라지도 않아요. 사씨 장방도 지금껏 바쁘게 굴려 왔지만, 결국 어떻게 됐습니까? 방화 아가씨가 임계를 잡아둔 것 외에 나머지는 모두 그 꼴이 났잖아요.
저는 늘 이렇게 평온히 지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충용후부와 사씨 미량, 염창이 비었다 한들, 다른 사람의 입에서 사씨 집안에 사람이 없다는 말을 하게 둬선 안 되잖아요. 그러니 우리 사씨 육방이 이 경성에 우뚝 자리 잡고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있는 이상 사씨는 건재할 겁니다.”
노부인은 탁자까지 쳐가며 며느리 명 부인을 칭찬했다.
“그래, 맞는 말이다! 우리 사씨는 이 세대에 사활을 걸어 이 험난한 난관만 넘는다면 이제 100년은 더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난관을 넘지 못하면 그 또한 하늘의 뜻일 테지. 우린 그 어디도 가지 않는다.”
육방 가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머니와 부인 말씀을 듣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