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2화 기대할 수 없다
영친왕과 좌상, 우상, 영강후도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황궁을 나왔다.
그때, 좌상이 영친왕을 향해 떠보듯 물었다.
“왕야, 병은 다 나으셨습니까?”
영친왕은 한숨을 내쉬며 말끝을 흐렸다.
“이 시국에 내 병이 뭐가 중하겠소, 덜 나았어도 나아야지.”
좌상도 영친왕의 말뜻을 이해했다. 한번 조정에 몸담았다면 꾀병은커녕 관직에서 내려와 편히 쉰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한 일인 것만 같았다.
“진강 소왕야는 뭘 하고 있는지요?”
“뭘 할 수 있겠소! 애초에 그 녀석과 방화의 혼인을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왕비의 고집에다 장가를 들겠다며 뜻을 꺾질 않으니 동의할 수밖에 없었소. 그런데 혼인 며칠 만에 이런 일을 겪고 휴서까지 나온 지경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휴…….”
영친왕은 진강의 이야기가 나오자 곧장 안타까움에 화를 냈다.
“소왕야와 소왕비 사이에 문제가 생겨 휴서까지 간 것입니까, 아니면 폐하의 일방적인 주장인 겁니까?”
좌상 또한 도대체 무슨 일인지 알고 싶었지만,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구체적으로 어떤지는 나도 잘 모르오.”
영친왕은 다시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왕야께서 참으로 수고가 많으십니다. 소왕야도 이틀 전 황궁에 온 뒤로 모습을 보이진 않았으나 이젠 임안성에 큰일이 났으니 행동을 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소왕야와 태자전하께선 어릴 적부터 뜻이 맞질 않았으나 최근 소왕야가 일련의 사건들을 맡고, 태자전하께선 치수를 맡아 서로를 돕고 계시니 앞으로는 경성에도 좋은 기운만 있을 겁니다.”
좌상의 말에도, 영친왕은 고개를 내저었다.
“진강은 낙매거에 틀어박혀 아무도 만나질 않고 있소. 심지어 아비인 나조차도 그날 이후로 얼굴 한번을 못 봤구려.”
“왕야, 그래도 소왕야의 능력이라면 반드시 흑자초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저희 좌상부에 흑자초란 약재가 있는지조차 기억이 나질 않으니 멀리 돌아가기보다 장수를 보내 부인에게 찾도록 두고 왕야를 따라 함께 왕부에 들르겠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소왕야를 나오게 해야지요. 지금 연정이 뭐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남진 강산의 미래야말로 큰일이지요.”
좌상은 한참을 돌아 끝내 이야기의 본 목적으로 돌아왔다.
영친왕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좌상의 말이 옳소. 그럼 나와 함께 부로 갑시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어마마마와 왕비 밑에서 자란 그 놈을 감당할 수가 없소이다.”
좌상은 곧장 장수를 불러 분부를 하곤 영친왕을 따라 영친왕부로 향했다.
* * *
영친왕과 좌상이 함께 떠나자, 우상과 영강후는 서로 눈을 마주쳤다.
“좌상은 태자전하께 어찌나 저리 충직한지, 그리도 탐탁지 않아 하는 진강 소왕야를 찾아 자존심까지 내려놓고 흑자초를 찾아 달라 하고 있으니, 원. 예비 장인인 우상보다도 마음이 더 조급해 보입니다.”
우상은 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예비 장인은 무슨, 태자전하는 벽이에게 관심도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폐하께서 이미 혼인 성지를 내리셨는데 태자전하께서 뜻이 없다 한들 어쩔 수 있습니까? 근래 경성 안팎으로 일어나는 사고에 막북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으셨기에 단지 정신이 없어 혼사 준비가 되지 않은 것뿐입니다.”
영강후가 말했다.
“경성에서 유하기로 이름난 영강후께서 어찌 그 이유를 모른 척할 수 있단 말입니까? 명인은 뒷말하지 않습니다. 태자전하께서 벽이에게 뜻이 없으니 혼사가 물러지는 건 조만간입니다.”
우상이 지친 기색으로 말했다.
그러자 영강후가 헛기침을 하며 답했다.
“빙빙 돌려가며 말하길 좋아하시던 우상께서 근래 많이 변하신 듯합니다.”
우상은 한숨을 내쉬었다.
“강산이 위험한 데다 나라마저 흔들리고 있으니 이 풍파의 중심에 선 영강후와 내가 물러날 수 있을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하는 얘기지요. 어느 날 백골이 되어 그 대가를 치를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영강후도 얼굴에 근심이 가득해졌다.
“지금껏 살면서 올해처럼 일이 끊이지 않는 것도 못 봤습니다. 만일 실로 이것이 마지막 황조가 된다면, 우상과 나는 역사에 이름을 남길 기대조차 하면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말대의 죄신이니 말입니다.”
“쉿! 어찌 그런 말을 합니까!”
우상이 서둘러 영강후를 제지했다.
두 사람은 바로 주위를 둘러보며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곤 말이 없어졌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근래 경성에서 일어난 사건들과 임안성의 역병이 폭풍의 시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건 마찬가지였다. 미래가 어찌 될지는 누구도 모르는 일이었다.
“태자전하께서 임안성에서의 위기를 잘 넘기기만을 바라야지요. 남진에서 태자전하가 사라지는 날엔 백만 병기를 잃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좌상께서 소왕야를 이끌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만.”
이어진 우상의 말에 영강후가 우상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소왕야라면 걱정 마세요. 선황폐하와 덕자 태후마마의 품에서 자란 적통 황손 아닙니까. 세상 물정에 아무 관심 없는 듯 보여도 이럴 때만큼은 절대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을 겁니다. 태자전하를 탐탁지 않게 여기긴 하나 사적인 감정으로 나라를 저버릴 분은 아닙니다.”
“그 정도야 나도 믿지요! 하지만 한 가지 석연치 않은 게 있습니다.”
우상은 고개를 끄덕이다 이내 무언가 떠오른 듯 한숨을 내쉬었다.
“뭐가요?”
영강후의 물음에 우상은 홀연 한 곳을 바라보며 답했다.
“충용후부 말입니다.”
곧 영강후도 따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 배후에 충용후부가 연루돼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필경, 얼마 전 노후야와 무위 장군도 몰래 경성을 빠져나가 현재 충용후부는 비어있지 않습니까? 나머지 사씨들도 일찌감치 가문을 나누어 수백 년 된 세가대족들도 소리 소문 없이 뿔뿔이 흩어졌으니 말이지요.”
우상이 고개를 내저었다.
“다른 가문이 흩어졌다면 나도 믿겠지만, 충용후부라면…….”
“우상, 이제 어서 가시지요! 폐하께서 흑자초 소식만 기다리고 계실 테니 서둘러 찾아봅시다. 부인이 회임한 뒤로 약재를 쌓아두긴 했는데 방화 아가씨가 모든 약에는 조금씩 독성분이 있어 음식으로 보양하라는 조언을 하여 그 후론 얼마 쓰지도 못했습니다. 그중에 흑자초가 있을지 모르겠군요.”
영강후가 대화를 마무리 짓자, 두 사람도 각자 자신의 부로 떠났다.
* * *
영친왕과 좌상도 금세 영친왕부로 다다랐다.
영친왕비는 소식을 듣고 한창 약재 창고에서 흑자초를 찾는 중이었다.
영친왕은 들어와 바로 문지기에게 물었다.
“왕비마마께선 어디계시느냐?”
“왕야께 아룁니다. 약재 창고에 계십니다.”
이어 영친왕이 좌상을 바라보자, 좌상이 이야기했다.
“흑자초를 찾는 게 급선무니 왕야와 저도 함께 찾아보도록 하시지요.”
“좋소!”
두 사람이 약재 창고 앞에 다다르자 이미 바깥에는 산처럼 쌓인 약재들이 보였다. 영친왕비는 하인들을 지휘하며 약재들을 바삐 살피는 중이었다.
“부인, 흑자초가 있소?”
영친왕이 다급하게 묻자, 영친왕비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뒤를 돌았다가 좌상에게 인사를 한 후 이야기했다.
“벌써 3분의 2나 되는 약재들을 뒤졌지만 지금껏 찾지 못했습니다.”
“약재를 들여올 때 있던 명부는요? 그 명부를 찾아보면 되잖소.”
“지난해 말부터 일이 많아 왕부 관리에 소홀했습니다. 게다가 설 이후 지금까지 온갖 일에 시달렸잖습니까. 특히나 혼인도 2번이나 치렀더니 그 이후로 물건들이 모두 여기저기 쌓였는데 그 와중에 약재 명단을 살필 시간이나 있었겠어요? 조금 쉴 틈이 생기면 두 며느리에게 집안일을 맡기고 왕부를 잘 정리하려 했건만 누가 알았겠어요. 이렇게 하나둘씩…….”
영친왕비가 돌연 말끝을 흐리자, 좌상 또한 다친 자신의 딸, 노설영을 떠올리며 말이 없어졌다.
그 뒤로 세 사람은 반 시진 동안 힘을 들여 모든 약재를 뒤져보았지만 흑자초는 어디에도 보이질 않았다.
“황궁의 어약방은 고사하고 경성의 약방 100여 곳도 흑자초만 다 털려버렸는데 우리 왕부에도 없으니……. 다른 곳도 기대는 하지 못할 것 같구려.”
영친왕이 안색을 굳히며 말했다.
“태자전하와 임안성 십 수만 백성의 목숨이 달려 있습니다!”
좌상은 영친왕부라면 당연히 흑자초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평소 영친왕부의 호위는 황궁보다 더 삼엄한 곳이라 황궁 어약방에선 흑자초를 훔쳐갈 수 있을지언정 영친왕부에선 바람 한 줌 훔쳐 나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거기다 이 영친왕부엔 진강이 있는데 그가 남의 물건을 훔쳐왔다면 모를까, 그 누가 감히 천하의 진강이 있는 곳에 쳐들어 올 수나 있겠는가? 그러나 그의 예상을 깨고 영친왕부에도 흑자초는 찾아볼 수 없었다.
“강이는 아직도 나오지 않았소?”
그때, 영친왕이 영친왕비에게 물었다.
“아직 안 나왔어요. 어떻게 된 일인지 아직 잘 모를 겁니다.”
“잘 모를 리 없소! 태자는 그렇다 쳐도 임안성 십 수만 백성의 목숨을 걸고서라도 가만히 둘 수만은 없소.”
영친왕은 서둘러 낙매거로 향했다.
영친왕비가 바로 그를 불러 세웠지만, 영친왕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좌상도 서둘러 영친왕의 뒤를 따랐고, 영친왕비는 영 마음이 놓이질 않아 춘란에게 재빨리 분부를 내렸다.
“춘란, 어서 뒷길로 가 강이가 돌아왔는지 먼저 확인해봐라.”
춘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장 뒷길로 향했다.
영친왕비는 약재를 모두 창고로 넣으라고 분부한 뒤, 치맛자락을 잡고 영친왕과 좌상을 쫓아 낙매거로 향했다.
* * *
춘란은 역시 영친왕과 좌상보다 먼저 낙매거에 도착했다.
“임칠, 소왕야께서 돌아오셨느냐?”
바로 임칠에게 진강의 행방을 물었지만, 임칠은 고개를 내저었다.
춘란은 금세 걱정에 잠겼다.
“왕야와 좌상 대인께서 오셨다. 태자전하께서 역병에 걸리셨으나 흑자초가 없어 소왕야께 청을 하려 하시는데 지금 계시질 않으니 어쩐단 말이냐?”
임칠은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자 옥작을 불렀다.
옥작은 머리를 긁적이며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소왕야께서 방금 전에 나가셨다고 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네요.”
“방금 전에요?”
춘란의 말에 옥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왕야께서 좌상 대인까지 모셔왔는데 형님께서 여기 안 계시다는 사실을 말할 수도 없잖아요.”
그러다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자 춘란은 서둘러 주방에 몸을 숨겼다.
옥작과 임칠은 눈을 한번 마주치곤 그들을 맞이하러 나갔다.
“강이는 어디 있느냐?”
영친왕이 입구로 다가와 옥작과 임칠에게 물었다.
두 사람은 고개를 내저었고, 영친왕은 그들을 한번 훑어본 뒤 그대로 방 문을 열고 들어섰다.
깨끗하게 정돈된 방 안을 향해 소리쳤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좌상도 곧 영친왕을 뒤따라 들어섰다.
아직 뒤편에 남아있던 영친왕비는 옥작과 임칠의 표정을 보고 진강이 돌아오지 않았음을 눈치 챘다.
그녀도 덩달아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틀째 그림자도 보이질 않는 데다 휴서 성지까지 내려져 기분마저 최악인 상태에서 나가버렸으니 어머니로서 어찌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실로 영친왕비는 요즘 잠도 제대로 못 이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