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0화 봉란(凤鸾)의 주인
그렇게 언신이 떠나고, 사묵함이 입을 열었다.
“언신 공자가 있어 참 다행입니다.”
진옥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언신 공자가 있어 다행이지요. 아니었다면 이렇게 후야를 마음 놓고 여기 두지도 않고 다른 일을 하러 갔겠지.”
사묵함은 순간 멍한 얼굴이 됐다.
“태자전하, 방금 그 말씀의 뜻은……?”
“총명하신 사 후야께서 어찌 내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오? 임안성의 안위를 해결할 관건은 성 안이 아닌 성 밖에 있다는 것이오. 방화 아가씨가 여기와도 흑자초가 없으면 우리처럼 이렇게 곤경에 빠져 허우적댈 수밖에 없으니 차라리 오지 않는 게 낫지요.”
진옥이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태자전하 말씀은 누이가 임안에 오지 않는 게 언신 공자 때문이라는…….”
“사 후야, 이제 남진의 모든 각 주현마다 성지 휴서 고지가 가득 붙었소. 진강과 방화 아가씨도 더 이상 부부가 아닌 남이 됐군요. ……, 후야. 이 모든 게 결국은 진강과 아가씨 사이엔 인연이 없음을 말하는 게 아니겠소?”
진옥은 빙그레 웃으며 화제를 완전히 돌려버렸다.
사묵함은 그런 진옥을 보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진옥은 그럼에도 별 개의치 않는다는 듯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럼 나와 아가씨가 인연이 있을지도 모르지요.”
사묵함은 순간 그의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태자전하! 진강 소왕야와 누이가 이 지경까지 와버린 것은 사실이나 어떻게 된 일인지는 아직 아무것도 모릅니다. 게다가 누이는 이미 누군가의 부인이 됐던 사람으로 다시 태자전하의 반려자가 되긴 더더욱 과분합니다.
그러니 태자전하, 다신 그런 생각하지 마십시오. 태자전하의 정혼자는 우상부 이 아가씨입니다. 안 그래도 떠들썩한 시기에 이 같은 전하의 생각이 우상부에 전해지기라도 한다면 조정에 만만치 않은 영향력을 가진 우상 대인께서 어떻게 나오실지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후야, 나도 가만히 있는데 어찌 후야께서 더 걱정하시는 것이오?”
진옥이 웃음을 터뜨렸다.
“전하께선 남진 강산과 백성을 위해 늘 신중히 행동하셔야지, 절대…….”
“알겠소, 알겠소. 후야, 아직 나이도 어리고 창창하신 분께서 어찌 조정 노인장들 마냥 말끝마다 나라와 강산을 달고 다니는 것이오?”
진옥이 손을 휘저으며 사묵함의 말을 끊었다.
사묵함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진옥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내 진옥은 입가를 실룩이며 입을 열었다.
“근 300년간 번성해온 남진이 계속해서 번성할지, 쇠락할지는 지금에 달렸소. 한 황조가 지금껏 이어져 방대한 번영을 이루는 가운데, 더럽고 추악한 모습을 감춘 세대는 얼마나 있을까요?
대대적인 단속에 나서지 않고 뿌리 뽑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는 망하고 강산은 무너지게 돼 있소. 그러나 대체 어떻게 해야 썩어 문드러진 것들을 완전히 뿌리 뽑을 수 있을까요, 무조건 제압한다고 해서 효과가 있을까요?”
사묵함은 입을 오므리며 사색에 잠겼고, 진옥은 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이미 탄압과 억제는 할바마마께서 쓰신 정책이오. 그러니 아바마마 세대에선 더 이상 먹히질 않지. 어떤 것들은 벌써 손 쓸 새도 없어져 버렸고. 아바마마께선 지금 연세도 드신 데다 병까지 드셨으니 이젠 아무런 힘도 쓸 수가 없소.
태자인 내게 황위와 강산은 아직 한 걸음 아니, 만 걸음도 멀었다 할 수 있소. 나는 숨어있는 악한 것들은 모두 끄집어내야 한다는 생각이오. 성공할 수는 없더라도 그것이 바로 인에 어긋나지는 않는 것 아니겠소?”
사묵함은 잠시 침묵하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전하 말씀이 백번 옳습니다. 이 강산을 위협하기 시작해 통제할 수 없게 되느니 없애버리는 게 낫지요. 여지없이 완전히 뿌리를 뽑아버려야 합니다.”
“그러니 평생 임안성을 벗어나지 못하면 여기서 생을 마쳐야할지도 모르겠소. 명이란 그리도 짧은 것인데 그 누가 죽고 사는 걸 장담할 수 있겠소. 운명이 현재 진강과 방화 아가씨가 부부가 아니라 말하는 거라면 내 짝이 되지 않으리란 법도 없소. 아가씨의 진정한 운명은 바로 나일 수도 있소.”
사묵함은 한동안 말없이 진옥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진옥은 그를 향해 의미심장한 웃음을 보였다.
“후야, 법불사 보운 대사가 나와 진강에게 괘후괘(卦后卦)를 봐주셨다는 사실을 아시오?”
사묵함이 어리둥절한 빛으로 물었다.
“무엇을 괘후괘라 하는지요?”
“운명을 점치고 한 번 더 점괘를 봐주는 것이오. 당시 진강은 화가 나 먼저 자리를 떠버렸지요. 후야께서도 진강의 그 성격상 불도인은 믿지 않는다는 걸 잘 가실 거요. 점괘를 봐도 값도 내주지 않겠지. 하지만 나는 계속 그 자리에 남아 보운 대사께 점괘를 한 번 더 봐 달라 청했소.”
“처음 듣는 얘기입니다.”
사묵함이 말했다.
“나와 보운 대사만 아는 점괘니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았지. 후야께서 모르시는 게 당연하오.”
이내 진옥은 사묵함의 눈을 또렷이 바라보며 말했다.
“괘후괘에서 말하길, 봉란의 주인은 사씨 여인이라 했소.”
봉란의 주인은 사씨 여인이라.
봉란이란 이른바 봉란궁 즉, 제국의 국모인 황후를 뜻하는 것이었다.
남진 수많은 사씨 여인 중 진정한 사씨 적녀라 할 수 있는 여인은 오로지 사방화 한 사람 뿐, 예언은 굳이 많은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사묵함은 이런 괘후괘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에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에 진옥은 그를 향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보운 대사께서 이 점괘를 끝으로 한 마디 덧붙여주신 말이 있지요. 나와 방화처럼 하늘의 뜻으로 이루어진 사람들이 있다고 말이오.”
사묵함은 도저히 그 뜻을 헤아릴 수 없었다.
“무슨 뜻입니까?”
“그 당시 나도 이해가 되질 않아 보운 대사께 다시 여쭈었지만, 그분께서도 아직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 하시며 때가 되면 알게 될 거라 하셨소. 이제야 조금 알게 됐다고 말할 수 있겠군.”
진옥이 천천히 눈을 감으며 말했다.
“지금 시국을 말하는 것입니까?”
사묵함이 재차 넌지시 물어도, 진옥은 웃으며 같은 말을 했다.
“하늘의 뜻이라 했소.”
사묵함은 여전히 갈피를 잡을 수 없었지만 조용히 눈을 감은 진옥을 보고 더 이상 아무 말도 잇지 않았다.
진옥은 경성을 나온 내내 치수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거기다 임안성에 역병의 바람이 불어 여태 한 번도 제대로 쉰 적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 오늘은 또 이런 사고를 겪었으니 사묵함도 더 이상 그를 방해하기가 미안해졌다. 사묵함은 그 길로 일어나 자리를 비켜주었다.
* * *
입구에 다다르자 마침 암실에서 나오는 언신이 보였다.
“검시는 마쳤습니까?”
사묵함의 말에 언신은 고개만 가만히 끄덕였다.
“어떻습니까?”
언신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역병에 걸린 지 이틀째로 태자전하의 칼에 맞아 죽은 것 말고는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몸에 지니고 있던 물건도 없고요.”
“신분은 알아냈습니까?”
“태자전하의 명을 받아 임안성 시신 문건을 살펴봐야 합니다. 그리고 이 역병에 걸린 시신과 오늘 아침 폭동에 죽은 시신은 모두 불태우는 것이 좋겠습니다. 나머지 폭동을 일으켰던 이들과 접촉한 사람은 격리 수용하도록 하고요. 만일 성 전체에 역병이 옮기 시작하면 사흘 내로 흑자초를 찾아온다한들 손도 쓸 수 없을 겁니다.”
“태자전하께선 충분히 무리하셨으니 이제 내가 나서겠습니다.”
“후야, 후야께선 당신 스스로를 최우선으로 생각하셔야지요. 태자전하와 접촉까지 하셨으니 즉시 제가 새로 내어드리는 약을 드십시오. 후야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전 주인님을 뵐 면목조차 없습니다. 임안성 하나, 아니 임안성 10개라도 후야보다 중요하진 않습니다. 주인님께서 지금껏 고생하며 지켜 오신 것도 모두 노후야와 사 후야를 위해서란 것을 잘 아시잖습니까.”
“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묵함은 고개를 끄덕인 뒤, 청언에게 분부를 내렸다.
“청언, 임안성 부대와 현아 관원들을 태자전하의 의사당으로 불러와다오.”
청언도 사묵함이 수고스러워지는 게 불만이었지만, 서둘러 밖으로 향했다.
* * *
사묵함도 곧장 의사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잠시 후, 진연이 숨을 헐떡거리며 뛰어왔다.
“사 후야!”
사묵함은 그녀를 보곤 미간을 찌푸렸다.
“연 군주, 위험한데 어찌 여기까지 온 것이오?”
“태자 오라버니께서 다쳤다는 말을 듣고 걱정이 되어 왔습니다. 어디 계세요? 많이 다치신 겁니까?”
“심하진 않다만 역병에 걸린 이에게 상처를 입은 터라 반나절은 지켜봐야 한다고 했소.”
진연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태자 오라버니께선 지금 어디 계십니까?”
“방에 계시긴 하나 들어가진 마시오. 소왕야께서 내게 군주를 잘 보살펴달라고 신신당부를 했소. 이 역병이 번진 임안성에서 혹 감염이라도 되면…….”
하지만 진연은 사묵함의 말은 다 듣지도 않고 진옥의 방으로 달려갔다.
사묵함이 뒤늦게 소리쳤지만 진연은 아랑곳도 않았다. 사묵함은 한숨과 함께 이마를 매만지다가 이미 소용이 없음을 깨닫고 그냥 의사당으로 향했다.
* * *
진연은 방으로 들어가 침상에 누워있는 진옥을 발견했다.
그녀는 문을 열며 큰 소리를 내긴 했지만, 진옥을 깨우진 않았다. 그리곤 입을 틀어막은 채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진옥의 팔은 면포로 잘 감싸져 있었고, 침상 가장자리에 걸쳐져 있었다. 하지만 상처 위로도 어렴풋한 핏자국이 비쳤다.
진연은 미간을 찌푸린 채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다시 뒤돌아 나갔다. 그러나 밖에 사묵함이 보이질 않자 마침 지나가던 하인을 붙잡고 물었다.
“사 후야께선 어딜 가신 거야?”
“의사당에 가셨습니다.”
진연은 서둘러 의사당으로 향했다.
* * *
의사당으로 가자, 아직 다른 이들은 도착하지 않아서 사묵함 홀로 앉아있었다. 진연은 곧바로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혼자 답답하게 갇혀 있으니 차라리 여기서 일을 돕겠습니다.”
사묵함은 고개를 내저었다.
“군주는 존귀하신 분이잖소. 이런 험한 일을 할 게 아니라 돌아가 쉬도록 하시오. 혼자 있기 지루하면 방화의 시녀들이 왔으니 함께 있어도 좋소.”
진연은 바로 두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같은 여인인 새언니도 얼굴을 비추시는데 어찌 저만 안 된다는 겁니까? 충용후부 아가씨는 어디 존귀하지 않은 분입니까? 거기다 분명 태자 오라버니께선 후야께도 요양에 힘쓰시라고 하셨는데 왜 나와 계시는 건가요?”
“방화와 군주를 어찌 비교할 수 있겠소? 나는 또 군주와 어떻게 같고?”
사묵함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몰라요! 절 무시하지 마세요! 전 다른 이들처럼 세상사에 무지한 그런 여인이 아닙니다. 임안이 곤경에 처했으니 제가 도울 수 있다면 기꺼이 나서야지요. 여기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을 테니 그리 아세요.”
진연이 고집을 꺾지 않자, 사묵함도 결국 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내 허락 없이 행동해선 안 되오. 멋대로 굴었다간 태자전하께 군주를 다시 경성으로 보내라 하고 나를 따라 막북에 갈 수 없게 할 것이오.”
“알겠습니다!”
진연이 흔쾌히 대답했다.
반 시진 후, 임안성 부대와 현아 관원들이 분주히 의사당으로 도착했다.
<『경문풍월』25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