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2화 상고 시대의 진법
일각(*一刻: 15분)이 지나, 산모퉁이 전체가 온통 짙은 안개로 뒤덮였다.
외곽에 서 있던 시화, 시묵은 돌연 짙은 안개에 휩싸여 아무것도 보이질 않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얼마 뒤, 그 안개 속에서 빠져나온 사방화는 외곽에 서서 잠시 조용히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말발굽 소리가 가까이 들려왔다.
“왕비마마, 조심하십시오! 안개가 깔려있습니다!”
영친왕비는 말고삐를 당기곤 안개가 짙게 낀 산모퉁이를 바라보았다.
“안개가 어찌 이리 짙게 깔렸지? 방화가 여기로 뛰어들기라도 한 건가?”
“길은 하나뿐이니 소왕비마마께선 아마 안개를 뚫고 지나가셨을 겁니다.”
“뒤쫓는다!”
영친왕비는 양쪽에 호위를 동원한 채 망설임 없이 안개 속으로 향했다.
잠시 후, 누군가 소리쳤다.
“왕비마마! 더 이상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안개가 더욱 짙어졌습니다. 지금 마마와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도 거의 보이질 않습니다.”
“안 된다, 쫓아라! 방화가 뚫고 지나간 길이니 우리도 가능하다.”
호위들은 말없이 그녀의 명령에 따라 좀 더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또 잠시 후,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왕비마마, 무언가 이상합니다.”
“응? 무엇이 말이냐?”
영친왕비가 물었다.
“이렇게 멀리 왔는데 반도 못 온 걸 보면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듯합니다. 아마도……. 진법인 것 같습니다.”
호위가 갑자기 무언가 깨달은 듯 말했다.
“뭐라?”
영친왕비는 깜짝 놀랐다.
“그렇습니다, 왕비마마. 안개로 사람들을 눈속임하는 진법 같습니다. 계속 안개를 뚫고 나아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는 겁니다. 어릴 적부터 스승님과 아버지를 따라 진법을 익혀 조금 알고 있는데 참으로 기묘한 진법입니다.”
“그럼 이 진법을 깰 수 있느냐?”
영친왕비의 물음에 호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들어본 적도 없고 실제로 처음 보는 훌륭한 진법입니다. 진안, 방위, 길까지 모두 가로막아 보이질 않습니다. 어릴 적 진법을 익힌 것으로나마 이것이 진법이라는 걸 깨달았을 뿐입니다. 이 정도라면 삼일 밤낮으로 연구해도 이 진법은 깰 수 없을 듯합니다.”
영친왕비는 한참을 침묵하다 이내 입을 열었다.
“네 말을 듣고 보니 진법 같기도 하구나. 오늘처럼 날씨가 좋은 날, 그리 깊지도 않은 산에 이렇게 짙은 안개가 낄 리가 없긴 하지. 방화가 날 떼어놓으려 쳐놓은 진법 같구나.”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도 속으로 사방화의 실력에 감탄만할 뿐이었다.
그때, 영친왕비가 안개 너머를 바라보며 외쳤다.
“방화야! 거기 있느냐?”
근처에 서 있는 사방화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방화야, 강이와 그리 힘들게 부부가 되었거늘, 중간 중간 있었던 고난도 다 잘 이겨내지 않았느냐? 부부가 한마음이면 이 세상에 헤쳐 나가지 못할 고난이 어디 있겠느냐? 이 어미 말을 듣고 돌아오렴, 응? 강이가 잘못한 거라면 내 그 놈을 혼쭐을 내줄게!”
사방화는 조용히 입술만 깨물었다.
“그래도 내 아들인데 이 어미인 내가 제일 잘 알지 않겠느냐. 그 놈 마음속엔 오직 방화 너 한 사람뿐이다. 무슨 오해가 있었던 거라면 툭 터놓고 이야기를 하면 안 되겠니?
너희들은 혼인한 이래로 단 하루도 둘이서 마음 편히 좋은 날을 보낸 적도 없지 않느냐. 너도 이제 강이를 사랑하지 않아서 이렇게 단호해진 거라는 말은 믿지 않는다.
10년을 걸쳐 함께 배를 타고 유람을 하며 100년을 걸쳐 동침을 하게 된다는 말도 있듯, 이 어미가 보기엔 너희들은 하늘도 갈라놓을 수 없는 깊은 인연이다. 너희는 명명백백히 짙고 긴 인연을 지닌 짝이 확실해.”
사방화는 계속해서 아무 말이 없었다.
“방화야, 대체 폐하께 휴서 성지를 내려달라고 한 이유가 무엇이더냐? 이미 너희를 위해 2번이나 혼인 성지를 내려주셨는데 이제와 또 휴서 성지를 내리라고?
2번째 성지엔 분명 한평생 절대로 휴처는 할 수 없다고 했었다. 이제와 휴처 성지를 내린다는 건 당신 스스로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이것이 결코 폐하의 뜻일 거라곤 생각하지 않아.
방화야, 우리 아가. 이제 그만 나와 경성으로 돌아가자꾸나. 폐하께는 내가 직접 성지를 거둬 달라 말씀을 올리마. 응?”
사방화는 눈을 감은 채 끝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시화, 시묵과 시녀들 역시 숨을 죽인 채 영친왕비의 절절한 호소에 애써 귀를 기울이려고도 하지 않았다.
계속된 영친왕비의 설득에도 사방화는 굳게 침묵만 지켰다.
그에 결국 보다 못한 춘란이 다가와 영친왕비를 말렸다.
“왕비마마, 소왕비마마께선 이미 떠나신 듯합니다.”
영친왕비는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저 아이가 그리한 것일까? 내가 이렇게 쫓아왔는데도 그 이유 하나 말해 주지 않고 이대로 떠나다니, 나와 한 마디 말조차 나눌 여지도 남겨주질 않았구나.”
춘란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소왕비마마께선 이렇게 매정히 돌아서실 분이 아닙니다. 그 화살을 맞고도 한 치 망설임 없이 소왕야와 혼인하겠다고 말씀하신 당당한 분이십니다. 아마도 정말로 어쩔 수 없는 일이 있으셨나 봐요.
왕비마마, 지금 남진 경성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왕야께서 깨어나셨는지도 모르고 있으니, 진법을 깰 수도 없다면 이제 더 이상 힘 빼지 마시고 돌아가는 게 좋을 듯합니다. 혹시 또 경성으로 돌아가면 실상을 알 수도 있지 않을까요?”
영친왕비는 그다지 내키진 않았지만, 춘란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녀도 이젠 사방화를 떠나보낸 아들 진강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이미 진에 들어와 버렸는데 어찌 나가느냐? 진법을 깰 수는 없긴 해도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아느냐?”
“왕비마마께 아룁니다. 이 진법이 기묘하다고 했던 이유가 바로 거기 있습니다. 앞으로 갈 수도 없지만, 뒤쪽도 곳곳이 비어있는 곳이 많으니 조금 전 오신 그 길을 따라 그대로 나가야만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정말 소왕비마마께서 쳐놓은 진법이라면 아마 왕비마마를 피하려는 의도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 방화가 이렇게까지 한 것을 보면 실로 더 이상 내가 뒤쫓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됐다, 이만 돌아가자꾸나!”
영친왕비는 한숨을 내쉬며 손짓했다.
잠시 후, 일행은 모두 진에서 무사히 빠져나왔다.
하지만 앞은 여전히 짙은 안개가 끼어있어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소왕비마마께선 참으로 재주가 넘치시는 분입니다. 여인은 고사하고 보통 사내도 이런 진은 칠 수 없을 겁니다.”
춘란이 말했다.
“그래, 옥완도 재주가 넘치는 기재였지만, 지금의 방화에겐 견줄 수가 없구나. 과연 먼저 난 머리보다 나중에 난 뿔이 무서운 법이다. 참으로 안타깝고 애석할…….”
영친왕비는 차마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왔던 길로 말 머리를 돌렸다.
춘란과 영친왕부의 호위들은 민첩하게 영친왕비를 둘러싸 보호했고, 그렇게 그들의 말발굽 소리는 점차 더 멀어져갔다.
사방화는 짙은 안개 속에서 직접 쳐놓은 진을 바라보며 한 가닥 실오라기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저 안개 너머에 있는 사람들이 그녀를 볼 수 없듯, 사방화 역시 이 안개 너머의 사람들을 볼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아가씨?”
사방화가 그 자리에 서서 한참 동안 움직이질 않자, 시화와 시묵이 걱정스레 다가와 물었다.
사방화는 천천히 시선을 옮기며 고개를 들었다.
“다시 가자.”
시화가 조심스레 물었다.
“이 진은…….”
“날이 밝으면 안개가 자연스레 사라지면서 진도 풀릴 거야.”
사방화는 다시 말에 올라타 앞으로 달려갔다.
그러자 시화와 시묵도 일제히 말에 올라타 그녀의 뒤를 따랐다.
* * *
영친왕비가 호위를 이끌고 10리쯤 지났을 무렵, 전방에 횃불을 들고 달려오는 사람과 말이 보였다. 영친왕비는 한눈에 그가 이목청임을 알아보았다.
이목청은 서둘러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추었다.
“왕비마마!”
윗사람인 영친왕비는 말에 올라탄 채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물었다.
“그래, 목청. 어찌 이 야밤에 경성을 나온 것이냐? 급한 일이라도 있어?”
이목청은 영친왕비의 무리 중에 만나야 할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마음을 가다듬으며 사실대로 말했다.
“왕부에 문제가 생겨 소왕비마마와 왕비마마께서 경성을 나서셨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이 되어 왔습니다. 진강 소왕야께선 현재 경성을 나오실 수 없으니 제가 대신 와본 것입니다.”
영친왕비의 얼굴에도 잠시 밝은 미소가 떠올랐다.
“어찌 이리도 맘이 고울까!”
이목청은 멋쩍게 엷은 미소를 그리다 물었다.
“왕비마마, 소왕비마마는 뒤쫓으셨습니까?”
영친왕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거의 다 따라잡았었는데 방화가 구환산에 진을 쳐 우릴 그곳에 가뒀다. 진법을 깨는 방법도 몰라서 어쩔 수 없이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단다. 아마도 단단히 마음을 먹고 못 쫓아오도록 만든 것 같구나.”
이목청은 잠시 사색에 잠겼다.
“왕비마마께서 경성을 나서시고 일이 좀 생겼습니다.”
“무슨 일이냐?”
영친왕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목청은 사방화와 영친왕비가 경성을 나선 후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먼저 태의를 불러 진강이 깨어났고, 그 후로 휴서 성지가 내려졌으며 그 일로 진강이 황궁에 들이닥친 이야기부터 길에서 만나게 된 일까지 모두 세세한 이야기를 전달했다.
특히 이목청은 진강이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앞으로 이여벽이 눈에 보이기라도 하면 죽여 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놨던 것을 강조해 말했다.
그러자 영친왕비도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여벽이 대체 뭘 했기에 노여움을 산 게냐? 강이는 함부로 그런 말을 할 아이가 아닌데……. 설영이 몇 년간 성가시게 괴롭혔을 때도 그냥 마음으로만 설영을 미워한 게 다였다. 결국엔 강제로 진호와 연결해주긴 했어도 죽이겠다는 말은 결코 한 적이 없었어!”
이목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이 부분이 잘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아버지께도 여쭤보았지만 누이는 줄곧 어머니를 따라 불공을 드리며 집 바깥으로는 나온 적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대체 진강 소왕야께 어떠한 미움을 샀기에 죽여 버리겠다는 말까지 나온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영친왕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강이는 자비심이 넘치는 아이다. 설영은 고사하고 진호도 아주 못마땅해 한다만, 그래도 형제라는 이유로 매번 용서해주는 아이야. 강이 성격에 그런 말까지 했을 정도라면 네 누이가 아주 단단히 성을 돋워 놓은듯한데…….”
“저도 어릴 적부터 진강 소왕야와 함께 자란 친한 친우가 아닙니까. 친우로서 본 소왕야의 성격 또한 왕비마마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였습니다. 하지만 길까지 막고 물어보아도 그 무엇도 얘기해주질 않았습니다.
때문에 아버지께 허락을 받고 이리 뒤쫓아 오게 된 것입니다. 소왕비마마의 안위가 걱정되기도 했지만 만나서 그 이유가 무엇인지 꼭 묻고 싶어서요.
평생 한 경성에 살아갈 제 누이고 한평생 진강 소왕야를 피해 숨어살 수만은 없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이는 곧 우상부와 영친왕부, 양 가문의 관계와도 이어지는 것이니 말입니다.”
“네 말이 맞다. 하지만 다시 방화를 쫓을 방법은 없는 듯하구나. 진을 쳐놓은 게 얼마나 감쪽같은지 나도 자연적으로 생긴 것인 줄로만 알았어.”
“진강 소왕야가 궁으로 갔을 때 왕야께서도 함께 동행 하셨습니다. 그 후, 진강 소왕야가 나오고 폐하께선 왕야를 모셔서 이야기를 더 나누자고 하셨답니다. 아, 참! 왕비마마께서 경성을 나서신 후, 폐하께서 휴서 성지를 내리셨습니다. 각 주와 현에도 고시해 진강 소왕야의 휴처 사실을 천하에 알리라고 하셨답니다. 내일 아침이면 모두가 이 일을 알게 될 것입니다.”
순간 영친왕비의 안색의 급변해 불꽃같은 노기를 띠었다.
“뭐라? 황제는 지금 대체 뭘 하려는 게냐? 핍박해 죽이기라도 할 셈이야?”
이목청은 서둘러 그녀를 진정시켰다.
“왕비마마, 우선 진정하시고 일이 이렇게 됐으니 경성으로 가셔서 폐하께 고시를 거둬들여 주실 수 있는지 확인해보심이 좋을 듯합니다. 저는 소왕비마마가 쳐둔 진을 확인해보고 뚫을 수 있다면 뚫어보겠습니다. 이곳은 제게 맡기십시오. 알게 된 게 있으면 곧장 서신을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알겠다! 그럼 부탁하마!”
영친왕비도 경성으로 돌아가는 게 가장 급선무라 생각해 다급해졌다.
이목청은 손짓으로 뒤쪽 사람들에게 길을 비켜주도록 했고, 영친왕비는 지체 없이 말을 몰아 황급히 경성으로 향했다.
말발굽 소리가 멀리 사라지자 이목청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들을 위해 이리 직접 행동하시다니, 참으로 대단하시구나. 만약 내게 이런 일이 있었다면 우리 어머니께선 단 한 걸음도 못 내딛으셨을 것 같은데……. 이것이 바로 어마어마한 차이인가…….”
작은 소리로 뱉은 혼잣말이었지만, 이목청 주위에 있던 이들은 모두 다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일제히 이목청을 보고 있다 조심스레 물었다.
“공자님, 계속해서 쫓을까요?”
“물론!”
이목청이 다시 말에 오르자 친위대들이 일제히 그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