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11화 (711/978)

711화 살기 (2) 

이목청은 고개를 숙이며 고개를 저었다.

“저도 폐하께서 왜 그런 성지를 내린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진강 소왕이 시위대 대장을 쏜 것 말고는 폐하의 침전에서도 큰 소란 없이 이야기만 나누다 나왔다던데. 왕야께선 아직 황궁에 남아계시고. 조금 전 마주쳤을 때 어찌 된 일인지 묻지 못했어? 폐하께서 진강 소왕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라면 그 성격상 아무리 황궁이라도 뒤집어엎고야 말았을 텐데.”

우상의 말에도 이목청은 여전히 고개만 내저을 뿐이었다.

“심각한 얼굴을 하고 누이에게 경고만 하고는 왕부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소왕비를 뒤쫓지 않고?”

“네.”

우상은 이리저리 생각해봐도 답이 나오질 않자 미간을 매만지며 말했다.

“남진 각지가 수해를 입은 데다 임안성에 역병까지 돌아 황태자가 발이 묶여 있으니……. 조정에 처리할 일들도 넘쳐나는 긴박한 상황에 돌연 사흘간 조회를 면하신다니 이것도 참 이해가 되질 않는구나. 하……. 됐다. 답이 나올 것 같질 않으니 그냥 지켜보자꾸나.”

아버지 우상의 손짓에 이목청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 즈음이면 네 누이도 아직 깨어있을 때니 직접 가서 한번 물어보자꾸나. 어릴 적부터 꾀도 많고 집요한 데다 진강 소왕을 오랫동안 연모했으니 우리 뒤에서 무언가를 꾸몄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하지만 이목청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내저었다.

“아버지께서 가보십시오. 전 성을 나갔다 오겠습니다.”

우상이 곧 놀란 눈을 하자 이목청이 한숨과 함께 말했다.

“아무래도 소왕비마마가 마음에 걸립니다. 근래 경성 안팎에서 일어난 일들도 자세히 알아보니 모두 소왕비마마를 노린 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야밤에 여인 홀로 경성을 나갔다가 무슨 일이라도 당하면 어찌합니까? 아무리 뛰어난 무공 고수라도 숨은 모략엔 당할 자가 없습니다.”

우상이 곧바로 반대했다.

“서방인 소왕도 나서질 않는데 네가 가서 뭘 어쩌겠다는 것이냐?”

“두 분은 더 이상 부부가 아닙니다. 폐하의 성지가 내려와 각 주와 현에 고시되면 내일 오전쯤에는 천하가 다 알게 될 겁니다.”

“그래도 안 된다! 일찍이 소왕과 소왕비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르던 무렵 네가 끼어들어 쟁취하려해서 나도 그 혼약이 깨지길 바랐다. 나도 사랑한다는 그 마음이 얼마나 좋은지 겪어온 사람이기에 널 막지 않았던 거야. 하지만 한번 누군가의 짝이었던 여인은 절대 네 배필이 될 수 없으니 꿈 깨라.”

그러자 이목청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버지, 지금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그런 마음이 아니라 이전에 사방화 아가씨에게 약조한 것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오라비의 마음으로 도와주겠다고 말입니다.

전 어릴 때부터 사 후야와도 사이가 좋은 친우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사 후야께서 경성에 계시질 않으니 방화 아가씨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더더욱 제가 나서서 가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버지께서 제게 어릴 적부터 군자는 약조한 것을 잘 지켜야한다고 가르쳐 주시지 않았습니까.”

“너…….”

우상은 반박할 말이 없어 이목청을 노려보기만 했다.

이목청은 다시 우상에게 예를 갖춰 말했다.

“허락해주십시오. 소왕야께서 누이에게 살의를 띠는 연유를 말해 주질 않으니 소왕비마마를 찾아봬야지요. 물어보면 답해줄 겁니다. 어찌 누이를 한평생 소왕야 눈을 피해 살아가게 할 수 있겠습니까? 누이가 체념했다 한들 같은 경성에 살고 있는데 그게 가능하긴 하겠습니까? 사방화 아가씨를 만나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우상은 이야기를 듣더니 이내 손을 휘저었다.

“그래. 네 말도 맞구나. 어서 가봐라. 날이 어두우니 호위들을 여럿 데리고 조심해서 다녀오너라.”

“감사합니다, 아버지!”

이목청은 서둘러 서재에서 나와 숨을 깊게 한번 들이마시고는 밤하늘을 한번 올려다보았다. 그런 뒤 그 길로 곧장 우상부에서 빠져나왔다.

잠시 후, 이목청은 호위를 데리고 성문으로 향했다.

* * *

우상은 서재에서 더 시간을 보내다 이여벽의 뜰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창 책을 읽던 이여벽은 우상을 보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 날도 이리 어두운데 어찌 주무시지 않고요?”

우상은 등불 아래에 선 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여벽은 정숙하고 온화하며 미모도 수려해 만리 길에 하나 나올까 말까한 여인이었으나 진강의 눈에는 들지 못했다. 아니, 진강뿐 아니라 진옥의 눈에도 차지 못한 여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이여벽이 우상의 친딸이어도 사방화가 이여벽보다 한 수 위라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천성, 미모, 모든 면에서 그러했다.

그러나 기질을 두고 보면 사방화는 그 가녀리고 연약한 용모 속에 거칠고 강한 성정을 지닌 여인이었다. 물론 인물로 보자면 나무랄 데가 없는 호걸이라 할 수 있겠으나 화목한 가정을 이루기엔 이여벽이 훨씬 더 제격이었다. 이여벽은 그만큼 얌전하고 단정한 최고의 현모양처감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천하제일의 인재라 할 수 있는 진강과 진옥 모두 이여벽을 원하지 않았다. 세상 가장 존귀한 황가의 자손들이기에 어릴 때부터 황궁에서 지내며 이미 아리따운 여인이라면 질리도록 보고 자라온 두 사람이었다. 

둘에겐 더 이상 겉으로 보이는 미모만으론 아무런 감흥도 없을 테지만 사방화는 미모뿐 아니라 행실이나 품성까지 모든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면을 갖추고 있었다. 말하자면 남진의 대가 귀족 아가씨들 중 단연코 군계일학 같은 존재라 칭할 수 있었다.

그러니 최고의 기재인 진강과 진옥이 역시 제일의 기재인 사방화에게 이끌리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우상은 입구에 서서 다시 마음을 다잡고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안자고 있었느냐?”

이여벽은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잠이 오질 않아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독서는 되도록 낮에 하고 밤에는 무리하지 말거라.”

우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섰다.

이내 이여벽은 직접 우상에게 차를 우려내줬고, 우상은 차를 한입 마시곤 이여벽을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벽아, 근래 뒤에서 뭔가를 하고 다닌 것이 있느냐?”

이여벽도 우상이 분명 무슨 일이 있으니 이 시간에 자신을 찾아온 것이란 것쯤은 미리 눈치 채고 있었다. 

“밤늦게 무슨 일로 찾아오신 겁니까? 그동안 어머니를 모시고 불공을 드린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정말이냐?”

“네, 아버지를 속일 수는 없지요. 저와 관련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말씀해 주세요.”

우상은 진실 된 딸의 표정을 보니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게 잠시 망설이던 그가 진강이 이목청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전해주었다.

이윽고 이여벽의 안색은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무엇 때문이랍니까?”

우상은 말없이 고개만 가로저었다.

그에 이여벽이 몸을 덜덜, 떨며 말을 이었다.

“진강 소왕야께는 일찌감치 체념했습니다. 사실 사방화 아가씨보다 제가 더 낫다고는 생각하지만……. 소왕야의 노여움을 샀던 적은 없습니다!”

우상은 결백한 딸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더 아파왔다.

“오늘 밤 소왕비는 시녀들을 데리고 영친왕부를 떠났다. 영친 왕비마마께선 곧장 그 뒤를 쫓아가셨고, 영친왕부에선 태의를 불러 쓰러진 진강 소왕을 살폈지. 그리고 폐하께선 진강 소왕에게 휴처 성지를 내리셨다.

결국 격노한 소왕이 그 길로 황궁을 찾아갔다가 나올 무렵, 네 오라비가 소왕 앞을 막아섰다더구나. 그러자 소왕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네 오라비와 소왕은 어릴 때부터 친한 친우이니 분명 장난삼아 한 얘기는 아닐 것이다. 소왕이……. 네 얘기를 할 때 살기가 형형했다고 한다.

이 아비도 참 이해가 되질 않는구나. 너도 모른다니 당분간은 생각하지 말도록 하자꾸나. 네 오라비가 조금 전 소왕비를 만나러 경성을 나섰으니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보자. 당분간은 집에서 불공을 드리는 데만 힘쓰거라.”

창백해진 이여벽의 얼굴엔 눈물까지 한가득 맺혔지만 그녀는 내내 조용히 듣고 있기만 했다. 그러다 이여벽은 애써 울음을 참으며 겨우 답을 이었다.

“네, 아버지 뜻에 따르겠습니다.”

우상은 이 일이 지난 날 황제와 황후가 진강에게 최정인을 썼던 일에 비하면 그리 심각하진 않다는 생각에 딸의 어깨를 다독이며 위로해주었다.

“착하구나. 괴롭게 해서 미안하다. 더 생각지 말고 어서 쉬거라.”

이여벽이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자, 우상은 금방 이여벽의 뜰을 떠나갔다.

아버지가 떠난 뒤, 이여벽은 침상으로 달려가 이불 속에 얼굴을 파묻은 채 차마 소리도 내지 못하고 한참동안 눈물에 잠겨 있었다.

* * *

한편, 사방화는 대략 경성에서 5리쯤 벗어난 상태였다. 

그 무렵 성문 어귀에서 갑자기 인기척이 들려왔다.

시화, 시묵은 바로 뒤를 돌았다가 그들이 영친왕부 병사들임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그녀들은 즉시 사방화에게 다가가 말했다.

“아가씨, 뒤에 영친왕부 사람이 쫓아온 것 같은데 혹시 소왕야이실지…….”

“왕비마마이실 거다.”

사방화는 무표정한 얼굴로 담담히 말했다.

“아가씨를 쫓아 나오신 것 같은데 어떡하지요?”

시화와 시묵은 깜짝 놀랐다.

“상관할 거 없어.”

사방화가 말했다.

“왕비마마께서 계속 쫓아오시면요?”

시화와 시묵이 물었다.

“30리만 더 가면 산줄기가 바뀌는 산맥이 나온다. 그곳에 진법을 써서 왕비마마를 막으면 돼. 그리고 산길을 돌아 종적을 찾을 수 없게 만들어 쫓아올 수 없게 하면 된다.”

시화, 시묵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품죽과 나머지 시녀들 역시 약속이라도 한 듯 하나같이 같은 생각을 했다.

사방화는 분명 진강을 그토록 사랑하고 영친왕비를 존경했건만 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하루아침에 단호해진 걸까. 가까이서 사방화의 시중을 드는 그녀들도 당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일행은 계속 앞으로 달렸고 병사를 대동한 영친왕비는 그 뒤를 쫓았다.

영친왕비가 대동한 이 부병들은 영친왕부 내에서 특수 훈련을 거친 정예 기병들로 말을 따라잡는 데 능했다. 영친왕비가 탄 말, 동청도 빠르기로 소문난 말이었다.

하지만 사방화 또한 쾌마를 타고 있었고 기마술 역시 뛰어나 그녀의 뒤를 따르는 시화와 시녀들도 사방화를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사방화는 그녀들과 함께 가는 일행이 아니던가. 조금씩 뒤처지는 시녀들의 속도에 맞추다보니 30리 길을 지나 산줄기가 바뀌는 곳에 다다랐을 무렵, 사방화와 영친왕비의 거리는 채 3리도 안될 만큼 가까워졌다.

이내 영친왕비가 소리쳤다.

“방화야, 멈추거라!”

사방화가 고개조차 돌리지 않자 시화와 시녀들도 꿋꿋이 앞만 바라보았다.

그러자 영친왕부의 정예 기병들도 다함께 목소리를 보탰다.

“소왕비마마, 멈추십시오!”

그들의 우렁찬 외침은 말발굽 소리와 함께 멀리로 울려 퍼졌다.

그때, 사방화는 산모퉁이를 돌아 갑자기 말에서 내렸고 시화와 시녀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에 그녀들은 곧장 사방화의 뒤를 둘러쌌다.

사방화는 바로 검을 꺼내 들고 나무 아홉 동이를 벴다. 그리곤 바위 9개를 옮겨온 후 머리에 꽂았던 비녀를 아홉 조각을 내 진을 치기 시작했다.

시화와 시묵도 짧게 진법을 배워보긴 했지만, 사방화가 현재 등을 지고 있어 무슨 진법을 쓰려는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사방화가 있던 자리에서 안개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뒤이어 안개가 걷히더니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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