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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9화 (709/978)

709화 천하에 명백히 알리다 

대장이 쓰러지자, 시위대는 공포에 질려 진강을 바라보았다.

“내 일각(*一刻: 15분)의 시간을 줄 테니 그 안에 즉시 이 문을 열어라. 그렇지 않을 시 황권을 멸시하고 황궁을 피 칠갑으로 만들었다는 죄명을 받을지언정 어떤 사정도 봐주지 않겠다.”

“소왕야, 이……, 일다경(*一茶頃: 30분)의 시간을 주십시오! 즉시 폐하께 아뢰겠습니다.”

부대장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이내 급히 황제의 침전으로 향했다.

몇 년간 궁을 지키는 이들이 바뀌기를 여러 차례 거듭했지만, 감히 진강에게 맞설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곳이 보통 사람들에게야 우러러 보는 황궁일지 몰라도 황손인 진강에겐 어릴 때부터 원하는 대로 들어갔다 나올 수 있는 집과 다름없는 곳이었다. 

그런 진강이 피 칠갑을 하겠다고 선언했다면 반드시 그 뜻을 행하리라 모두가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진강도 그나마 시위대 대장을 죽일 마음이 없었으니 왼쪽 가슴으로 정확히 빗겨 쏜 것이었다. 진강이 정말 그를 죽이고자 했다면 완벽하게 명치에 화살을 꽂았을 터였다.

* * *

잠시 후, 영친왕이 도착해 차가운 빛으로 황궁 앞에 있는 진강을 발견했다.

“강아!”

진강은 고개를 돌려 영친왕을 바라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도 이렇게 닫혀있으니 내일 다시 와 이야기하자꾸나!”

영친왕은 진강이 행여 큰일이라도 저지를까 안절부절못했다.

“사흘간 황궁을 열지 않는다는데 전 그때까지 못 기다립니다.”

진강의 말에 영친왕이 깜짝 놀라 물었다.

“어째서?”

“황숙께서 직접 내리신 지시니 황숙께 여쭤봐야지요. 몸도 편치 않으신 분이 휴서 성지를 내릴 여유는 있으시다니 대체 얼마나 심한 병이 드셨으면 이리도 우매해지실 수 있는지 제 눈으로 직접 한번 봐야겠습니다.”

“강아! 말을 함부로 하면 화를 불러들인다는 걸 모르느냐, 폐하를 그런 식으로 말해서는 아니 된다.”

진강은 차디찬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는데 제가 겁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오늘 내로 문을 열지 않는다면 이 궁 문을 피 칠갑으로 만들어 놓을 겁니다!”

영친왕은 안색이 창백해져 다급히 앞으로 다가왔다.

“그래선 안 돼!”

진강은 이미 굳게 마음을 먹은 듯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에 영친왕은 조급한 마음에 궁을 지키는 시위대에게 명했다.

“폐하를 뵈러 왔으니 어서 말씀을 올려라!”

“왕야께 아룁니다. 조금 전 폐하께 보고를 올리러 갔으니 두 분께선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영친왕이 다시 진강을 바라보았다.

“강아, 우선 진정해라. 분명 중간에 무슨 일이 있었으니 이리 하신 거겠지. 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혼인 성지 2개를 내리셨지 않겠느냐? 너희가 혼인한 지 얼마나 됐다고 휴처 성지라니. 어린아이 장난도 아니고 세상에 알려질까 두렵구나. 역사에 기록된다면 후세에 어찌 평이 될지 상상도 할 수 없다. 황제가 평생 얼마나 사기군평(史记君评)에 신경을 곤두세웠었는데.”

진강은 줄곧 아무 말이 없었지만, 영친왕은 아들이 분명 어느 정도는 알아들었을 것이란 생각에 말을 더 길게 늘여놓지는 않았다.

그리고 일다경(一茶頃)이 흘러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폐하께서 문을 열어 왕야와 소왕야를 안으로 모시라 하십니다!”

이 성지에 황궁 입구를 지키던 시위대들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서둘러 문을 열었다.

곧 문이 열리자 진강은 말에 올라탄 채 황궁에 들어섰다. 영친왕이 깜짝 놀라 얼른 막으려 했지만 이미 한발 늦어버린 뒤였다. 말에서 내리려던 영친왕은 이내 그를 놓칠세라 할 수 없이 자신도 말에 올라 황궁에 들어섰다.

* * *

단숨에 황제의 침전까지 달려온 진강이 말에서 내려와 시위대에게 물었다.

“황숙께선 안에 계시느냐?”

“소왕야께 아룁니다. 폐하께선 전 내에 계십니다.”

진강이 성큼성큼 안으로 향해도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있는 이는 없었다.

황제의 침전은 짙은 약 냄새로 가득했다.

황제는 황금색 휘장 너머 침상에 반쯤 기대 있다가 이내 진강을 발견하고 안색이 굳어졌다.

“궁 문에서 그 난리를 피워대며 짐을 만나려고 하다니, 성지 때문이냐?”

진강은 창가에 서서 한기 가득한 얼굴을 하곤 입을 열었다.

“제 성지에 평생 휴처할 수 없다고 하셨던 분이 누구셨습니까? 그런데 며칠 새 제게 휴처 성지를 내리시다니 대체 어떻게 된 건지 말씀해보십시오.”

황제는 콧방귀를 뀌며 곁눈질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돌아보지도 않고 다짜고짜 짐에게 물어보는 것이더냐? 짐에게 휴서 성지를 내리라 핍박한 것이 네가 아니면 누구이냐?”

진강이 눈을 가늘게 떴다.

“천하에 누가 감히 황숙을 핍박할 수 있겠습니까? 그 드높은 자리에 앉으신 분께서 황제의 성지를 애들 장난삼아 여기고 계시니 할 말이 없습니다.”

황제는 화가 나 침상을 두드리며 말했다.

“누가 감히 짐을 핍박할 수 있겠느냐고? 네 눈엔 지금 짐이 원통해 보이지 않느냐? 지금 짐이 드높은 자리에 앉아있다고 했어? 이젠 우리 안에 갇혀 잡히기만 기다리는 어린 양과 다를 바가 없는데 짐을 위협하려면 누구나 다 가능한 법이지! 

그런데 이제와 누가 짐의 말을 받들겠느냐? 네 놈부터 짐의 말을 들었더라면 지금처럼 황궁 문을 억지로 열고 들어와 피 칠갑을 해놓겠다 으름장을 놓지는 못했겠지.”

진강이 몹시 어두워진 얼굴로 물었다.

“그럼 대체 누가 황숙께 그런 핍박을 했는지 말씀해주십시오.”

“또 누가 있겠느냐? 당연히 잘나신 네놈의 부인이지! 그 잘난 사방화에게 물어보면 될 것을 어찌 짐을 찾아와 따지고 드는 것이냐?”

황제는 화가 나 재차 침상을 툭툭, 치며 소리쳤다.

“방……, 방화가 뭐라고 했습니까?”

진강은 순간 몸을 덜덜, 떨었다.

“사람을 보내 딱 한 마디 전하더구나. 짐에게 즉시 휴처 성지를 써 영친왕부로 전하라고. 그렇지 않으면 모든 사씨 세력을 동원해 군량미와 점포에서부터 사씨에서 남진 각지에 공급하는 모든 자원과 경제 명맥을 끊어버리겠다고 하더구나.

이게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알긴 하느냐? 비가 그친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남진 대부분이 재해를 입었다. 특히 역병까지 도는 임안에 공급이 끊기기라도 하면 이는 설상가상이란 말이다! 그리되면 이 남진이 어떤 꼴을 맞게 될지는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알겠지!”

황제가 격노해 소리쳤다.

“방화가……, 정말 그렇게 말했답니까?”

진강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재차 되물었다.

“믿지 못하겠다는 게냐? 그것도 타인이 남진 강산을 무너뜨리는 것보다 사씨가 반란의 시작을 꾀해 더 이상 물러설 수도 없을 재난을 몰고 오는 것이 더 낫다더구나.

이 남진에 환란이 불어 닥치면 사씨에게만 천년불신의 누명을 씌우고 구족을 몰살시킨다는 것이 억울하기 짝이 없으니 확실히 그러는 편이 낫다더군. 

여인인 사방화는 이 천하가 어느 가문의 것이든 전혀 괘념치 않는다. 그 아이는 그저 충용후부와 주변 이들의 목숨만 생각할 뿐이야!”

황제의 이마엔 시퍼런 핏대까지 솟아났다.

진강은 계속 몸을 벌벌 떨면서 조용히 붉은 입술만 자꾸 깨물었다.

“그 아이가 그리 단단히 마음을 먹었는데 짐이 어찌 성지를 내리지 않고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느냐? 짐더러 그 아이 손에 남진의 모든 경제 명맥이 끊기고 이 강산이 무너져가는 걸 지켜만 보라는 심산이더냐?

그리 되면 짐이 눈을 감기도 전에 남진 전체가 요동치고 두려움에 떠는 백성들로 강산이 무너질 것이다! 짐은 대체 너희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길이 없구나! 하지만 그 아이 배짱 하나만큼은 두둑하단 걸 알겠더구나.

그 아이는 남진 강산으로 짐을 위협하면 반드시 제게 성지를 내려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젠 네 놈까지 찾아와 짐을 이리 위협한다고? 너도 진정 짐의 뜻으로 성지를 내렸다고 생각한 게야?”

황제가 굳어진 안색으로 말했다.

진강은 황제의 이야기를 들으며 점차 눈에 핏발이 서고 노기가 피었지만 순간 힘이 빠지면서 똑바로 서지 못할 정도로 비틀거렸다. 

황제는 그 모습을 보며 더더욱 분노했다.

“짐이 정말이지 사방화를 우습게 봤구나! 충용후부도 자리를 비운 데다 사방화도 경성을 떠난 것이지? 충용후부에서 반란이라도 일으키려는 것이냐?”

진강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황제는 더 말을 이어가려다 일순 숨이 막혀와 거칠게 기침을 했다.

그리고 잠시 후, 황금색 손수건은 피로 가득 물들었다.

진강이 보기에도 황제는 며칠 새 더욱 야위어 기력도 남지 않은 노인이 되어있었다. 손수건 위의 선명한 핏자국도 눈에 띌 만큼 짙은 색을 발했다.

황제는 잠깐 기침이 멎자 진강의 시선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손수건을 향로 안으로 집어 던져버렸다. 곧 활활 타오르는 매캐한 연기 속에서도 황제의 기침은 계속되었고 잠시간의 시간이 지나서야 완전히 잦아들었다.

진강은 향로를 한번 보곤 눈가가 더더욱 어두워졌다.

“소왕비가 보냈던 그 사람은 누굽니까? 지금 어디 있습니까?”

“누군지도,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

황제가 답했다.

“황숙의 터전인 이 황궁에서 누군지 알아채지도 못하는 인물이 있습니까? 붙잡아 놓지도 못하셨고요?”

진강의 말에 황제는 또다시 크게 노하며 침상 머리맡의 베개를 집어 들어 그에게 던졌다. 황제가 재차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황궁이 짐의 터전이었던 건 아주 오래전이다! 짐이 누군지 알고 붙잡아둘 수 있었다면 일찌감치 사지를 다 찢어놓았지 네 놈이 이리 묻게 놔뒀을 것 같으냐! 당장 썩 꺼져라! 더 이상 네 놈을 마주하고 싶지 않다!”

진강은 날아오는 베개를 피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맞아주며 휘청거렸다.

하지만 재차 손을 휘저어도 꼼짝도 않는 진강을 보고 황제가 다시 말했다.

“안 가고 뭘 더 어쩌겠다는 것이냐? 짐은 더 이상 네게 알려줄 것도 없다.”

진강은 잠시 침묵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황실에 세 은산(*隐山: 숨겨진, 비밀스러운 산) 은위에 관한 문건이 남아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은산으로 들어가 은위가 되면 모두 그곳에 등재되지요. 황숙께서도 당신 스스로가 우리 안에 갇힌 힘없는 어린양이라 생각되신다면 감춰 두어도 쓸모없을 테니 차라리 제게 주십시오.”

“뭐라? 은산 은위의 문건을 달라는 것이냐?”

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림없는 소리!”

황제가 단호히 거절하자 진강이 더 냉철하게 말했다.

“황숙, 진정 이 남진 강산에 대란이 일어나는 걸 원치 않으신다면 문건을 제게 넘겨주십시오.”

“짐이 네게 문건을 넘겨주지 않으면 남진 강산에 대란이 일어난다고?”

황제는 더 이상 끓어오르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

“임안에 역병이 돌아 진옥은 지금 꼼짝도 할 수 없습니다. 이 경성엔 현재 저와 진경뿐이지요. 하지만 아직 어린 진경은 할 줄 아는 것이 없습니다. 황숙께서도 그 아이가 큰일을 짊어질 수 없다는 건 잘 아실 테지요.

제가 만약 이대로 경성을 떠나 조정에 관여치 않는다면 이 경성이 어떤 꼴로 변할지 황숙께서 더 잘 알게 되실 겁니다.

경성 안팎으로 끊임없이 일어난 사건들도 아직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손 태의, 한 대인에 이어 연거푸 사람이 죽어 나가니 조정과 군중, 백성들 민심마저 흉흉해져 버렸습니다. 편찮으신 황숙께선 현재 아무런 힘도 못 쓰시는 상황인데 여기서 저까지 손을 떼버린다면 그 결과가 어떻겠습니까?

황숙, 이제 경성과 남진 강산엔 필히 난리가 날 겁니다. 황숙께선 독한 마음을 품은 황실 은산의 은위들을 떼어내지 못하시고 눈앞에서 이 남진 강산이 무너지는 걸 보고만 계실 겁니까? 그럼 추후에 구천으로 가셔서 진씨 황조들을 보실 면목이나 있으시겠습니까?”

황제는 진강을 노려보면서도 어느 말 하나 반박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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