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6화 가혹한 짓 (2)
사방화가 다시 방 안으로 돌아가자 진강은 이미 잠에서 깨어나 있었다. 그에 사방화는 진강에게 바로 서신을 건넸다.
“임안이 수재를 맞은 뒤에 역병이 돌고 있다고 해요.”
진강은 서신을 다 읽곤 미간을 찌푸렸다.
“진옥, 형님, 언신에 초지까지 있는데 역병 하나 통제하지 못한단 말이오?”
“언신은 북제 소국구라는 신분 때문에 함부로 나설 수가 없어요.”
“황태자전하가 서신 한 장도 채우질 못한다니 볼수록 참 쓸모가 없군.”
진강이 코웃음을 쳤다.
“진강. 오라버니도, 진연도 임안에 계시니 보고만 있을 순 없을듯해요. 예로부터 역병은 도시 하나를 무너뜨릴 수 있단 기록이 있는 만큼 쉽게 봐서도 안 되고요. 지금 잡지 않으면 결과는 불 보듯 뻔해요. 임안에 무슨 일이 있는지 제가 가봐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한 가지 말씀드릴 게 있어요.”
“무슨 일 말이오?”
사방화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원랜 조금 더 쉬다가려 했는데 임안에 역병이 돈다고 하니 며칠 서둘러 다녀올게요.”
진강이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봉이 으름장을 놓았을 때도 술법 고적을 내놓지 않은 건, 저와 충용후부 그리고 사씨를 위해서였어요. 하지만 제가 조부님, 외숙부님, 임계 오라버니를 떠나보낸 것도 이제 더 이상 비밀이 아니게 됐어요. 그럼 반드시 그 길에 누군가 따라붙을 거예요. 만발의 준비를 해두긴 했지만 그래도 직접 가서 살펴보는 게 아니면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아요. 제가 가봐야 해요.”
“안 되오.”
진강이 곧바로 답했다.
그에 사방화가 더 한껏 목소리를 낮췄다.
“진강, 전 당신의 품 아래 이 낙매거에서 무탈하게 지낼 순 있지만 마음은 결코 편할 수 없어요. 제 마음의 병은 충용후부와 사씨 그리고 제 가까운 사람들을 보호하려는 데에서 오는 거예요. 조정이 요동치고 경성 안팎이 불안하니 하루도 마음이 편하질 않아요. 마음의 병은 마음의 약으로 고쳐야 한다는 말도 있듯 제가 실마리를 찾은 이상 그냥 지나칠 수만은 없어요.”
진강이 더욱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당신이 조부님, 외숙부님, 임계 형님이 가시는 길에 붙여둔 사람 외에 내 사람들까지 보내뒀으니 걱정 마시오. 아무 일 없을 것이오. 게다가 진옥이 역병이 난 그 성 하나 통제하지 못한다면 어찌 이 제국의 황위에 오를 수 있겠소? 당신은 제발 여기서 당신 건강이나 더 챙기시오.”
사방화가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
“정말 아무 일 없이 돌아온다고 약조할게요.”
“그래도 안 되오!”
진강이 단호하게 소리쳤다.
“분명 오늘 아침 나서시면서 희순에게 절 찾는 사람과 모든 일들을 저에게 숨김없이 말하고 제가 결정할 수 있게 해주라고 분부하셨잖아요. 그런데 이제와 말씀을 바꾸시는 건가요?”
“방화, 지난번 여운암에 있는 금연을 찾아갈 때도 난 흔쾌히 당신이 떠나도록 해줬잖소. 하지만 결국 그런 내게 돌아온 소식이 뭐였소?
여운암 산사태로 당신에게 사고가 난 후, 낭떠러지 아래에서 당신을 찾아냈을 때의 내 심정을 알기나 하오? 사운란을 끌어당겨 함께 낭떠러지로 떨어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내 마음이 얼마나 아팠는지 아느냔 말이오!
당신이 혼수상태에 빠져 사운란 이름만 부를 때 내가 얼마나 괴로웠을지 생각해본 적 있소? 임안에 역병이 돌지언정 황태자 진옥과 형님, 의술이 뛰어난 언신과 초지까지 있는데 대체 뭘 걱정하는 것이오?”
사방화는 고개를 번쩍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진강은 그녀의 뺨을 쓰다듬으며 애처롭게 말을 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그저 이 기회를 빌려 홀로 배후에 숨은 자를 찾아내려 하는 것이오? 그럼 그 안에 숨어있을 위험까지도 다 감당할 수 있겠소? 당신은 대체 날 어느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오? 당신이 없을 동안 걱정에 잠 못 이루며 식사도 거를 내 생각은 하나도 안 하는 것이오?
방화, 내 당신을 얻기 위해 몇 년을 기다린 줄 아시오? 겨우 당신 마음을 얻어 그 대가를 치르고 부인으로 맞을 수 있었소. 그렇지만 방화, 잘 생각해보시오. 우리가 혼인한 이래 단 하루라도 마음 편히 지낸 날이 있긴 했소?”
사방화는 입술을 깨물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진강은 잠시 사방화의 눈을 빤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여기 화살비가 내리던 그날……. 내가 당신에게 왜 그리 모질었는지 아시오? 당신도 그날 이후로 내가 변했다는 걸 느꼈다했잖소. 확실히 난 그날 이후로 내 마음속 응어리를 풀긴 했소. 당신도 내가 왜 그랬는지 수많은 이유를 떠올렸을 것이오. 방화, 내가 그날 진정 당신을 포기하려했다면 믿겠소?”
사방화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진강을 바라보았다.
“지……, 지금 무슨 말씀이세요?”
진강은 침통함이 감도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날, 내가 당신을 포기하려 했었다는 말이오.”
사방화는 아주 오랜 시간 후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
“당신이……, 어……, 어째서요?”
진강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과 사운란을 이어주기 위해서였소.”
사방화는 순간 안색이 돌변했다.
“운란 오라버니는 그저 제…….”
“친 오라버니보다 더 가까운 오라버니일 뿐이라고? 그런데 어째서 항상 그를 떨치지 못하는 것이오?”
사방화가 급히 답하기 시작했다.
“전생의 기억 때문이라 말씀드렸잖아요. 그 정도로…….”
“그 전생의 기억이 얼마나 깊기에 아직도 잊지 못하고 현생에서까지 얽매일 정도란 말이오? 그리도 뼛속 깊이 새겨 사무치게 그리워할 정도인 것이오? 그럼 난 대체 당신한테 무엇이오?”
진강의 목소리가 점차 차가워져갔다.
“당신은 당연히 다르지요.”
사방화의 답에 진강이 코웃음을 쳤다.
“다르다고? 내가 사운란과 어디가 어떻게 다르단 말이오? 당신은 날 연모하니까? 그럼 사운란한텐 연모하는 마음이 없소? 정말 당신이 내게 느끼는 감정이 사운란에게 아예 없다고 확신할 수 있소?
방화, 진실로 그대 스스로에게 한번 잘 물어보시오. 당신은 분명 사운란에 대한 기억과 모든 감정을 마음속 깊이 새기고 있소. 당신이 내게 가지고 있는 마음, 그게 어느 정도로 얼마나 깊은지는 생각해본 적 있소? 사운란이 차지하고 있는 그 마음을 흔들리게 할 정도는 되는 것이오?”
사방화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진강……, 어찌 그렇게 비교할 수 있어요?”
“그럼 어찌 비교해야 맞는 것이오? 난 당신이 날 사랑하고 나와 혼인을 해준 것만으로도 이미 하늘이 내게 엄청난 선물을 주신 거라 생각하고 있소. 당신이 날 선택해주신 거니까 당신 마음속에도 한평생 흔들림 없이 내가 있을 것이라 확신했소.
하지만 정작 우리가 혼인한 후로 당신이 항상 마음속에 품고 떨치지 못한 사람은 내가 아니었소. 당신은 내게 숨기는 것이 너무 많소. 대체 난 당신 마음속에 몇 번째 정도 되는 것이오?”
사방화는 결국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진강! 제가 당신에게 숨기는 게 많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럼 당신은요? 당신은 제게 솔직하다 말씀하실 수 있나요? 저 하나만을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말씀하실 수 있나요?”
“그럼! 난 평생 당신 하나만 사랑했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오.”
진강이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사방화는 돌연 눈물을 닦고 차갑게 이야기했다.
“얼마나 사랑하시는데요? 전생과 현생의 마음이 다르긴 한 건가요? 진강, 우리가 전생에 어찌 서로 몰랐을 수 있냐고 말씀하셨죠? 아니요, 전 전생에 당신을 알고 있었어요. 그러나 전생에 운란 오라버니는 분심으로 목숨을 잃고, 전 그 곁을 지키며 피를 쏟아내고 죽음을 맞이했지요. 이 결말이 어째서 이렇다고 생각하세요?”
진강이 순간 그녀의 말에 놀라 얼어붙어버렸다.
“근래 제가 몸이 상할 정도로 근심이 는 건 어째서일까요? 이 모든 건 당연히 제 머릿속에 떠나지 않는 전생의 기억들이 절 괴롭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한 이틀간 마음을 내려놓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무언가 깨닫게 된 게 있어요. 전생에 우린 분명 서로 알고 지냈고 그 뿐 아니라 현생의 우리 모습과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는 것을요.
진강, 당신은 영친왕부의 소왕야시고 전 충용후부의 적통이에요. 덕자 태후마마께서 살아계실 때에 의지로 맺어주신 인연이지요. 전생에서의 저는 성년이 되고부터 오매불망 당신에게 시집가는 그날만을 기다렸어요. 하지만 결국 그런 제게 돌아온 소식이 뭔지 아세요?
바로 조부님, 오라버니가 돌아가시고 충용후부와 사씨는 구족이 연루돼 몰살당하는 것이었어요. 남진 강산엔 사씨 사람들의 백골이 산을 이루고 강물은 온통 핏빛으로 흘렀지요.
그 후 저는 운란 오라버니의 도움을 받아 겨우 목숨을 건지지만, 인적이 끊긴 깊은 산속에서도 남진 경성의 경사 소식은 아주 성대하게 들리더군요. 그 소식이 무엇인지 아세요?”
사방화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하지만 그대로 굳어버린 진강은 계속해서 아무 말이 없었고, 사방화는 끝내 서러움에 한껏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진강 소왕야, 당신이 십리 길의 붉은 치장을 지나 다른 여인과 혼인을 한다는 경사였습니다!”
그제야 진강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어찌 그럴 수 있소?”
사방화는 웃음을 터뜨렸다.
“어찌 그럴 수 있냐고요? 제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긴 해요. 허나 소왕야, 이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럴 리 없소!”
“진강, 당신이 아내로 맞은 여인이 누구인지 알고 싶으세요?”
진강은 더 차가운 목소리로 사방화를 막았다.
“터무니없는 소리 그만하시오!”
“이여벽이에요. 우상부 아가씨이자 목청 공자의 누이, 바로 그 이여벽이요. 전생에 그녀는 태자전하의 반려자가 되기로 했지만, 결국 당신의 아내가 됐어요. 물론 이번 생엔 제가 당신과 혼인을 하긴 했지만, 근래 남진 경성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전생과 별반 다를 것이 없어요.
제 기억으론 사씨와 충용후부가 몰락하기 전에 이 경성에 엄청난 일들이 많이 일어났거든요. 그렇게 이리저리 연루되기 시작하다 결국엔 모든 게 충용후부에게 넘어가고, 사씨도 하루아침에 몰락하게 됐으니 그 얼마나 비극적이고 비참한 일인가요.
그때 당신과 전 정혼만 한 사이였지만, 지금은 이미 혼인을 해 부부가 됐어요. 하지만 역사의 궤도가 다시 한 바퀴를 돌 때엔 조그마한 편차가 있을 진 몰라도 결국엔 같은 결말을 맞이하게 될 거예요.”
끝내 진강도 격한 분노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헛소릴 하는 것이오? 내 사전엔 절대 언행불일치란 없소. 내 사람이라 확신한 사람은 옥황상제의 어르신이 와도 갈라놓지 못하오. 내가 황조모님께 당신과의 혼약을 승낙 받았다면 내가 당신을 버리고 다른 여인에게 갈 리가 없소. 충용후부가 몰살되더라도 난 당신과 혼인할 것이오. 그런데 내가 어찌 이여벽에게 갈 수 있단 말이오?”
사방화는 눈을 꼭 감으며 울음을 그쳤다.
“저도 믿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그 생각이 든 순간 의식을 잃고 혼절한 거예요.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수많은 장면이 제 머릿속을 헤집어놨어요.
진강, 제가 운란 오라버니를 뼛속 깊이 새겨 잊지 못한다고 하셨던 말도 맞아요. 하지만 제가 운란 오라버니가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저 피를 쏟아내기만 했던 이유가 뭐였다고 생각하세요?
당신 때문에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은 바로 진강 당신이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