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5화 가혹한 짓 (1)
사방화는 다시 눈을 감았다가 이내 밖을 향해 소리쳤다.
“시묵!”
“네, 마마!”
시묵이 곧장 달려왔다.
“근래 이목청 공자가 뭘 하고 있는지 알아봐 줄래?”
잠시 후 시묵이 돌아와 아뢰었다.
“마마, 서산 군영에서 돌아오신 후 소왕야께선 이 공자님과 손 태의부, 형부를 다녀가시고 마마께선 금연 군주님 일로 연람 소군주님과 함께 경성을 나서셨지요.
그러다 마마께 일이 생기자 소왕야께선 수중의 일을 모두 이 공자님께 넘기셨다고 합니다. 이 공자님 홀로 철저히 사건을 수사하고는 계셨지만 마땅한 소득은 없었던 것 같았습니다. 지금은 소왕야께선 형부에 계시고, 이 공자님은 대리사에 계신답니다.”
“이여벽은?”
사방화가 다시 물었다.
“이 아가씨께선 궁에서 나와 부로 돌아가신 후로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오시지 않고 우상 부인과 함께 예불을 드리고 있다고 합니다.”
사방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묵을 내보냈다.
반 시진 후 옥작이 돌아와 창가에 서서 사방화에게 아뢰었다.
“형수님, 형님께 말씀을 전해드렸습니다. 알겠으니 더 이상 걱정 마시고 편히 쉬고 계시라고 하셨어요.”
“다른 말은 안 하셨어?”
옥작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네, 많이 바쁘셔서 알겠다고 하시곤 별다른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사방화가 아무런 대답이 없자 옥작도 자리를 떴다.
한 시진 후, 안색이 잿빛이 된 영친왕비가 낙매거로 다급히 돌아왔다.
“방화야, 아무래도 유겸왕비가 이상하구나. 손자를 잃어버린 조모라면 식사도 거르고 날이 갈수록 수척해지는 게 당연한데 어찌 꽃꽂이를 배울 여유가 있을 수 있니? 내가 부에 도착하니 마침 꽃꽂이를 배우고 있더구나.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인간이 아닌 이상 손자를 잃어버렸다는 건 거짓이다. 배후에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 건지 모르겠구나.”
“과연 그랬군요.”
사방화의 말에 영친왕비가 깜짝 놀라 물었다.
“방화야, 뭘 알고 있는 거니?”
사방화는 영친왕비를 부축해 자리에 앉혀주며 말했다.
“어머님, 제 생각엔 최근 경성 안팎에 일어나는 이 모든 일과 유겸왕부는 끊을 수 없는 관련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손자를 잃어버리고 폐하, 영친왕부, 충용후부뿐 아니라 경성의 각 부랑들에까지 도움을 청했으니 모두 아이를 찾는 데에 힘을 쏟고 있었겠지요.
그렇게 정신없는 틈을 타 경성 안팎을 한데 연루시킨 것 같습니다. 유겸 왕숙께서 오시고 사건이 터졌지만 손자를 잃어버리신 상황이니 모두에게서 쉽게 잊혀져버린 것이지요.”
“이 얼어 죽을! 그럼 이 남진 강산을 뒤집어엎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영친왕비가 탁자를 내려치며 분노했다.
“어머님, 아직 제 추측일 뿐이니 진정하세요. 서방님께도 알렸으니 뭔가 방법이 있을 겁니다.”
영친왕비도 애써 화를 가라앉히며 사방화의 손을 토닥였다.
“태자를 따라 궁에 들어왔으니 진정 유겸왕이 배후의 그들과 손을 잡은 거라면 태자는 알고 있을지 모르겠구나. 만약 태자가 뜻을 함께한 거라면…….”
“태자전하께서 남진 강산을 쥐고 놀려 했다면 더더욱 황제의 자리에 오를 자격이 없습니다. 유겸 왕숙께서도 엄연한 진씨 황손이십니다. 태자전하께서도 유겸 왕숙을 이용하시면서 어찌 양날의 검인 것을 모르셨겠습니까? 어머님도 왜 유겸 왕숙의 봉지가 영남에 있었는지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사방화가 불안한 기색이 역력한 영친왕비를 다독였다.
그러자 영친왕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그건 나도 잘 알고 있다. 우리 왕야께서 다리가 불편한 채 태어나신 까닭에 황위는 처음부터 오르실 수 없었지. 그로 인해 황자들은 덕자 태후마마와 우리 왕야를 끌어들이려 서로 갖은 경쟁을 했었다.
지금 황제폐하가 되신 당시 7황자마마는 총명하고 배우기를 좋아한데다 재능도 뛰어나 방화 네 부친 사영 세자와 명성을 날렸다. 황실에서 이런 황자가 나왔으니 당연히 나머지 황자들의 눈엣가시가 됐을 테지.
덕자 태후마마께서도 당연히 황자들 가운데 가장 총명했던 여 귀인의 아드님, 지금의 폐하를 다음 후계자로 택하셨다. 태후마마께선 7황자마마를 즉위시키고자 암암리에 치열한 사투를 거친 끝에 마침내 황위에 앉히셨지.”
이는 사방화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황자들이 유겸왕야를 남겨둔 것도 마땅한 이유가 있었다. 그해 황위를 차지하려던 황자들 중에 죽을 이는 죽고, 다칠 사람은 다치고, 역모를 일으킨 황자는 유배됐다. 하지만 유겸왕은 황위 다툼에 가담하지 않고 손에 쥐고 있던 물건도 자진해서 내놓고는 몸을 사렸지.
태후마마께선 유겸왕도 살려둬선 안 된다고 생각하셨지만, 자애로우신 우리 왕야께서는 그에 반대하셨다. 형제들은 모두 처참히 죽어 가는데 황위 때문에 다투지도 않고 자기 목숨을 지키려한 유겸왕까지 죽여서는 안 된다고.
그럼 폐하께도 은덕이 부족하단 평이 붙어 후세에도 질책을 받을까 염려하셨던 거지. 하여 폐하께서도 왕야 말씀이 일리가 있단 생각에 유겸왕의 봉지를 영남에 마련해 준 것이지.”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몇 년간 영남에만 있던 차에 덕자 태후마마께서 돌아가셨지만 미리 덕자 태후마마의 명을 받은 터라 따로 귀경하여 예를 차릴 필요도 없었다. 때문에 4년 전 영남으로 떠나 있다가 올해 폐하께서 왕야의 연회를 빌미로 유겸왕을 상경시켰다지. 이도 태자의 뜻이었다고 하더구나.”
“영남……. 이곳과는 멀리 떨어진 곳이긴 하지요. 게다가 제가 알기론 영남에서 인재가 나왔다고 들었습니다.”
사방화의 말에, 영친왕비가 물었다.
“방화야, 그 말뜻은 유겸왕에게 불신지심(*不臣之心: 황제를 배반하려는 마음)이라도 있다는 말이니?”
“정확한 건 태자전하께 여쭤봐야겠지요. 태자전하께서 유겸 왕숙을 선뜻 이용하시는 데는 반드시 그 도리가 있을 겁니다.”
영친왕비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네게 근심 걱정을 말라고 해놓고도 일이 있으면 이렇게 널 찾아와 상의하려드니 내 미안하구나. 어서 쉬거라.”
사방화가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습니다.”
영친왕비는 그녀를 토닥이고는 낙매거를 빠져나갔다.
이내 사방화는 조용히 침상에 누웠고, 금세 잠이 들었다.
* * *
얼마나 잤을까, 사방화는 얼굴 위로 뭔가 느껴져 이리저리 손을 휘저었다.
그러나 잠시 후, 그녀의 미간 위에서 또다시 움직임이 느껴졌고 사방화는 결국 손으로 뭔가를 덥석 부여잡으며 눈을 떴다.
그녀의 손에 잡힌 건 누군가의 손가락이었다. 이윽고 사방화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침상에 비스듬히 기대 앉아 웃고 있는 진강이 보였다.
“일어났소?”
사방화는 눈을 깜빡이며 그의 손가락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언제 오셨어요?”
“반 시진 전에. 해가 다 졌는데도 일어나지 않기에 내일 아침까지 잘까 싶어 깨웠소.”
사방화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어두워진 창밖을 보며 물었다.
“몇 시진이에요?”
“술시(*戌时: 저녁 7시 ~ 9시)요.”
사방화가 깜짝 놀라 말했다.
“제가 반나절이나 잠들었다고요?”
진강이 웃으며 말했다.
“그런 것 같소.”
사방화는 그의 손가락을 내려놓고 다시 자리에 누우며 말했다.
“간만에 꿈도 꾸지 않고 잘 잤는데 아쉽네요.”
“더 자고 싶소?”
사방화는 하품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진강이 그녀의 손을 토닥이며 말했다.
“안 되오. 목청이 오늘 마을에서 얻은 조기를 당신 몸보신하라며 보내왔기에 저녁으로 준비하라 시켰소.”
“조기요?”
사방화가 곧장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목청이 당신이 뭘 좋아하는지 이렇게도 잘 알고 있었다니!”
진강이 잡고 있던 그녀의 손등을 톡, 치곤 다소 삐친 듯 침상을 내려갔다.
사방화는 머리를 긁적이다 이내 그를 따라 침상에서 내려왔다.
“조사는 어떻게 돼가세요?”
“아무것도 얻질 못했소.”
진강은 탁자에 앉아 차를 따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하지만 사방화는 당연히 진강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하루 종일 나가 있었으면서 어찌 소득이 없었겠는가. 그저 자신에게 말을 해주지 않으려는 면피에 불과했다.
그러나 사방화도 진강이 말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는 조용히 입술을 삐죽이며 더는 묻지 않았다.
잠시 후 시화와 시묵이 저녁 식사를 대령했다.
사방화는 조기를 보고 웃으며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조기는 동쪽 바다에서만 나는데 보아하니 이 공자의 마을에서 누군가 동쪽 바다를 갔다 왔나 봐요.”
진강이 눈썹을 들썩이며 말했다.
“마을에 전문적으로 동쪽 바다를 따라 고기를 잡는 가게가 있다더군. 필요한 게 있으면 찾아가 보시오.”
사방화가 웃음을 터뜨렸다.
“조부님, 외숙부님, 임계 오라버니가 동쪽 바다로 떠난 소식이 퍼졌나 보네요.”
진강도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자 사방화가 다시 말을 이었다.
“안 그래도 부탁할 일이 있었는데 한번 만나야겠어요. 내일 부에서 만나 직접 얘기해야겠네요.”
“안 되오. 무슨 일이오? 내가 대신 전해줄 테니 말해보시오.”
진강이 단호하게 말했다.
사방화가 고개를 들어 진강을 바라보자 그는 더 삐친 척 행동했다.
“절대 다른 마음 품지 못하게 해야지.”
사방화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서방님께서 배 열 척 정도만 빌려달라고 말씀해 주시겠어요?”
진강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 많은 배로 뭘 하려는 것이오?”
사방화는 일부러 의미심장한 척 답했다.
“조부님께서 동쪽 바다로 나가시는 데 보태드려야죠. 제 선에서 두 척은 마련했지만 이걸론 한참 부족하지 않겠어요?”
“알겠소. 내일 전해주겠소.”
그렇게 두 사람은 담화를 나누며 저녁식사를 마쳤다. 진강은 피곤한 듯 곧 의자에 기댔고 사방화는 식사를 물린 후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었다.
진강이 한껏 그녀의 손길을 즐기며 말했다.
“내 그저 사랑하는 사람 한 명 얻고자 했을 뿐인데, 이리도 가지각색으로 재주 많은 분과 함께 살게 될 줄은 몰랐소. 안마도 잘하고, 시중도 잘…….”
사방화가 결국 진강의 어깨를 소리 나게 살짝 때렸다.
“아! 칭찬도 못 하는 것이오?”
진강이 외마디 비명과 함께 너스레를 떨자, 사방화도 웃으며 다시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주물러줬다. 진강은 차차 의자에 앉은 그대로 잠이 들었다.
이내 사방화는 손을 내려놓고 지쳐 잠든 그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고운 눈망울 속엔 정인을 바라보는 애처로운 빛이 가득했다.
사방화가 알던 진강은 늘 싱그러운 소년의 분위기를 풍기는 청년이었다. 더불어 천하에 손꼽히는 존귀한 신분임에도 언제나 소탈했으며 자유로운 바람처럼 낭만을 아는 멋스러운 사내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의 넓은 어깨위로 막중한 조정의 책임들이 쌓여갔고, 항상 자유롭고자 했던 소년에겐 점점 더 가혹한 속박의 굴레가 덧씌워졌다. 이 모든 것들을 버텨야하는 사람이라 그는 유달리 더 이 무게들을 힘겨워하는 듯 보였다.
사방화는 의자에서 잠이 든 진강을 깨우려다, 지친 그의 모습이 너무도 안쓰러워 조금 더 이곳에서 자게 내버려두곤 창밖을 내다보았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시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왕비마마.”
사방화가 문을 열었다.
“응, 무슨 일이야?”
“언신 공자님의 서신이 왔습니다.”
서신을 천천히 펼치자 안에서 또 다른 서신 하나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간단히 써 내려간 서신의 끝엔 진옥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사방화는 이를 보자마자 눈살을 찌푸리곤 언신의 서신을 꺼내 읽었다. 이 서신을 다 읽고, 사방화의 안색은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소왕비마마,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시화가 묻자, 사방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임안성에 역병이 돈다는 말이 사실이었다. 벌써 죽어 나가는 이들이 생겼다는구나.”
시화도 깜짝 놀라 안색이 급변했다.
“그럼 사 후야는요?”
“오라버니는 무사하시다. 하지만 역병이란 게 한번 나타나면 혼자 힘으론 절대 통제할 수 없지. 게다가 언신이 북제의 소국구라는 게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했으니 이 역병으로 누군가 트집을 잡으면 그 결과는 훤할 거야.”
“그럼 어떡합니까? 정말 임안성에 가기라도 하실 겁니까? 몸도 이제 겨우 나아지기 시작하셨는데…….”
“그래도 역병이 도는데 이런 몸을 이끌고서라도 가야지. 시화, 가서 떠날 채비를 해. 서방님께 말씀드리고 곧장 출발할 것이니.”
사방화가 서신을 접으며 말했다.
“예! 말씀 받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