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2화 황후마마 납시오! (1)
잠시 후, 옥작이 해맑게 웃으며 사방화를 찾았다.
“사촌 형수님, 절 찾으셨다고요?”
사방화는 차분한 표정으로 그에게 손짓했다.
“이리 와봐. 서방님이 네게 이걸 줄 때도 이런 모습이었니?”
옥작은 이상하다는 듯 보자기를 한번 살펴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 모습이었습니다.”
“내 말은 이 위에 어찌……, 피가 묻어있나 싶어서 물어보는 거야.”
옥작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저도 잘 모르겠네요. 사촌 형님께서 제게 주실 때부터 이랬습니다.”
그러다 옥작이 잠시 멈칫하며 말을 이었다.
“이게 피예요? 전 줄곧 일부로 낙매거의 매화 꽃잎을 칠해 넣은 것인 줄 알았습니다.”
“잘 생각해보렴. 네게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니?”
사방화가 손까지 벌벌 떨며 물었다.
옥작은 한참을 열심히 머리를 굴리다 끝내 고개를 내저었다.
“몇 년 전 일이라 기억이 나질 않네요. 왜 그러시는 겁니까, 형수님? 형님께 직접 여쭤보시면 말씀해 주실 텐데 어찌 제게 물으시는 것인지요?”
“그래. 내게 말씀해주시겠지……. 옥작, 나도 늑대를 다루는 법을 배워보고 싶은데 내게 가르쳐 주면 어떻겠니? 그럼 내 검보(*剑谱: 검술에 대해 기록한 책)를 선물로 줄게.”
사방화가 돌연 웃으며 옥작에게 말했다.
“무슨 검보요?”
옥작이 물었다.
“이 검보를 모두 익히면 2년 뒤엔 날아가는 기러기도 네게 상대가 되지 못할 거야.”
사방화가 말했다.
“당장 해요!”
옥작이 활짝 웃으며 답했다.
“내 혼수 함에 있는 청절검보(清绝剑谱)를 옥작에게 주도록 해.”
사방화가 시화에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화가 검보를 가져와 옥작에게 내밀었다.
옥작은 금세 매우 신난 얼굴로 받아들었다.
사방화는 보자기를 지그시 바라보다 품에 넣으며 시화에게 물었다.
“시화, 법불사 뒤에 있는 벽천애 정상에 가 본 적 있니?”
시화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소왕비마마. 혹시 분부하실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사방화는 잠시 입술을 깨물며 머뭇거리다 처음 하려던 말을 바꿨다.
“외조부님께서 남진을 떠나신 지도 꽤 됐으니 사람을 보내 어디까지 가셨는지 한번 알아봐 줘. 그리고 경가에게 소식을 전해 오늘 밤 조부님, 외숙부님, 임계 오라버니를 성에서 보내드릴 테니 즉시 준비해달라고 전해주고.”
“오늘 밤이요?”
시화가 깜짝 놀라 물었다.
사방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타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언신에게도 서신을 보내 내게 일이 있어 천기각의 천지노(天地老)가 필요하니 그들을 경성으로 보내달라고 전해 줘.”
시화는 사방화의 안색이 잠잠한 것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 * *
진강은 심히 피곤했던지 사방화가 약을 두 번이나 달여 방으로 돌아올 때까지도 깊이 잠들어 있었다.
사방화는 다시 방에서 나와 지붕 서쪽 끝으로 향했다.
담벼락에는 여전히 그때의 그림과 글씨들이 새겨져 있었다.
그녀는 담벼락의 그림을 천천히 만져보며 담장을 따라 걸어가다가 결국 자리에 아예 웅크려 앉았다.
“소왕비마마, 바닥이 차갑습니다.”
시화가 곧장 다가와 말했다.
그러나 사방화가 천천히 고개를 젓는 것을 보고 재차 말을 이었다.
“그래도 제게 방석 하나 가져오라고는 시키셔야지요. 몸도 좋지 않으신데 유의하셔야 합니다. 소왕야께서 이를 보시면 제게 소왕비마마 시중 하나도 제대로 들지 못한다고 뭐라 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래, 방석 하나만 가져와 줘.”
시화는 사방화가 이 자리를 떠나지 않을 것 같자, 할 수 없이 두꺼운 방석을 가져와 그녀 밑에 깔아주었다.
사방화는 곧 방석 위에 앉아 시화에게 손을 내저었다.
“나 혼자 조용히 있고 싶으니까 다른데 가 있어줘.”
시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사방화는 벽에 기대 무겁게 눈을 감았다.
그리곤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매화 꽃잎이 그 바람에 실려 날아오는 대로,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난무하는 그대로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 * *
반 시진 후, 진강이 방에서 나왔다.
그러다 담장 아래 앉아있는 사방화를 한눈에 발견했다.
방은 담벼락과 그리 멀지도, 가깝지도 않아서 매화나무 사이로 그녀의 화려한 옷자락과 얼굴이 연하게 보였다.
사방화는 바람결에 매화 꽃잎이 날아올라도 마치 담과 하나가 된 듯 담장에 기대 꼼짝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는 누가 봐도 마음을 아리게 만들었다.
진강은 한동안 조용히 사방화를 바라보다 이내 발걸음을 옮겼다.
사방화도 곧 진강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금세 웃음을 보였다.
“일어나셨어요?”
진강은 조금 전 담담했던 사방화의 모습이 꼭 헛것을 본 것처럼 느껴져 순간 걸음을 멈칫했다.
“어찌 여기 와서 앉아있는 것이오?”
이내 진강이 그녀 곁에 가까이 다가와 물었다.
“여기 있으면 당신의 사랑이 더 잘 느껴져서 조금 더 만끽하려고요.”
사방화의 말에 진강이 씩, 웃었다.
“방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소?”
“아무 생각도 안 했어요!”
사방화가 고개를 내저었다.
“응?”
진강이 눈썹을 들썩이자 사방화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하며 담벼락을 가리켰다.
“좀 이해가 가지 않는 게 있어서요.”
“말해 보시오.”
사방화가 벽화를 가리키며 말했다.
“당신도 한참 어렸을 나이인데 어떻게 8년이란 시간동안 절 기다리셨던 거예요? 그 나이에 어찌 사랑이란 걸 알게 되신 건가요?”
진강은 웃음을 터뜨렸다.
“생각하던 게 이거였다니.”
사방화가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상하지 않아요? 어린아이가 사랑을 알았으니 실로 놀라운 일이잖아요.”
진강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와 사방화의 옆에 나란히 기대앉았다.
“내가 말해준 적 있지 않았소? 그해, 내가 당신 머리 위에 있던 비녀를 깨트렸을 때 침착하고 아무렇지 않아 하던 당신이 재밌었다고. 그러다 당신이 뭘 하려는지 궁금해 따라나섰다가 경성 밖에서 황실 은위 무리에 스스로 섞여 들어가려는 당신의 모습을 보고 더 관심을 가지게 됐소.
하지만 진호 형님한테 해를 입어 하마터면 살아 돌아오지 못할 뻔했지. 그때부터 난 당신을 다신 잊지 못하게 됐소. 그 마음이 오래도록 쌓이고 쌓여 어느새 집념이 됐고 반드시 당신과 혼인하겠다는 굳건한 꿈이 생겼소.”
“정말 그런 것이라고요?”
사방화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진강이 그녀의 뺨을 콕, 찔렀다.
“그게 아니라면 무엇 때문이겠소? 당신이 말해보시오.”
사방화가 살짝 진강을 째려보았다.
“서방님, 볼이 다 패이겠어요. 이러다 뺨에 구멍이 생겨 머리가 나빠지면 어떡하나요? 안 그래도 요즘 머리가 나빠져 걱정이었는데 우리 낭군님 때문에 더 나빠지게 생겼네요.”
“그거야말로 좋은 일이지! 쓸데없는 걱정과 근심에 몸 상할 일도 없고.”
진강의 농담을 들으며 사방화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진강, 요새 머릿속에 시도 때도 없이 무수한 광경들이 펼쳐져요. 당신이 저번에 말했듯 난 충용후부에서 태어났고, 당신은 영친왕부에서 태어나셨으니 전생에서처럼 무명산에 가지 않았다면 이번 생에선 밥 먹듯 황궁을 드나들며 언젠가 당신을 만났겠지요? 운란 오라버니를 기억할 수도 있고, 더 많은 기억이 남아 있어야 맞는 거고요?”
진강이 입술을 깨물며 그녀의 머리를 매만졌다.
“어떤 광경이 보이는 것이오?”
사방화가 고개를 내저었다.
“뒤죽박죽이에요. 한순간 갑자기 튀어나와선 알아차리기도 전에 사라져요.”
“그게 당신 마음을 힘들게 하는 근원이란 말이오?”
“아마도요. 항상 머리가 어지럽고 무언가 제 마음을 휘젓고 다니는 기분이에요. 생각하면 할수록 오히려 머릿속이 하얘지는 느낌이고요. 또 생각지도 못할 때 이따금씩 떠올라요.”
이내 진강이 그녀를 다정히 품에 안아주며 말했다.
“억지로 떠올리려 하지 마시오. 기억나지도 않는 전생 일을 굳이 애써가며 떠올릴 이유가 무엇이오? 중요한 건 이번 생이오. 하늘이 어렵게 환생을 시켜주셨는데 전생 때문에 이번 생을 힘들게 살면 되겠소? 더군다나 당신 기억 속에 나는 없으니 더욱이 생각할 필요도 없소.”
사방화가 눈썹을 매만지며 말했다.
“제 기억 속에 당신이 없다는 걸 어찌 아세요.”
진강은 고개를 돌려 그녀에게 살짝 입을 맞췄다.
“전생에 피를 다 쏟아내고 죽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소. 내가 있었다면 당신을 그 지경으로 놔뒀을 것 같소?”
사방화가 조용히 시선을 내리자, 진강은 다시 그녀에게 입 맞추며 말했다.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지 마시오. 그럼 여태 마셨던 탕약도 아무 의미가 없잖소. 어서 회복을 해야 하지 않겠소?”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그를 밀어냈다.
“마당이에요, 이러지 마세요.”
“내 땅이니 멋대로 할 것이오.”
진강은 그대로 사방화를 안아들고 방으로 향했다.
곧 그녀를 침상에 내려둔 진강이 사방화의 위로 올라가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을 힘들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서방의 말은 듣지도 않고 쓸데없는 생각만 하고 있으니 조금 피곤하게 만들어야겠소. 몸이 피곤하면 마음이 힘들 새도 없으니…….”
진강은 천천히 사방화의 옷고름을 풀었고, 이내 화려한 비단옷 사이로 그녀의 뽀얀 속살이 드러났다.
사방화는 진강의 목덜미를 끌어안으며 한없이 그의 이름을 속삭였다.
“진강, 진강, 진강…….”
“내 이름을 더 불렀다가는 목뼈도 남아나질 않겠소.”
진강은 가볍게 웃으며 다시 진한 입맞춤을 했다.
해는 저물었지만, 바깥은 여전히 환한 대낮처럼 밝았다. 그러나 사방화와 진강이 있는 이 방은 창문 앞 장막이 빛을 가려준 덕에 온통 어두컴컴했다.
짙은 어둠만이 가득한 이 방, 휘장에 가린 침상 위엔 감미로운 봄기운이 만연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햇볕도 잠시 달빛을 숨겨줬고, 두 연인이 주고받는 말 속에선 달콤한 사랑이 싹텄다.
* * *
진강은 사방화가 지쳐 손가락을 들 힘조차 없어진 후에야 그녀를 놓아줬고, 아름다운 꿈을 꾼 듯 황홀한 하룻밤이 지났다.
사방화는 다음날 해가 중천에 떠서야 눈을 떴다.
그런데 진강이 있던 옆자리는 이미 냉기만 남아 싸늘히 식어있었다.
방 안을 둘러봐도 진강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고, 그녀는 온몸이 쑤시는 것 같은 느낌에 잠깐 자리에 머물러 있다가 옷을 챙겨 입고 문을 열었다.
“소왕비마마, 일어나셨습니까?”
시화, 시묵이 인사를 올렸다.
사방화는 잠시 문에 기대 빛나는 광경을 눈에 담았다.
앞뜰엔 어느새 맑게 긴 하늘 아래, 매화 꽃잎들이 자유로이 노닐고 있었다.
짧은 시간 아침 풍경을 보던 사방화가 다시 시화, 시묵을 쳐다보았다.
“서방님은? 어딜 가신 거야?”
시화가 웃으며 말했다.
“과연 일어나시자마자 소왕야를 찾으시네요. 아침 일찍 형부의 사람이 소왕야를 찾아와 함께 나서셨습니다. 소왕비마마께서 일어나시면 형부에 갔다고 전하라하셨는데 아마 대리사에서도 소왕야를 찾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저녁에야 돌아올 것 같으니 기다리지 마시고, 밖으로 나오기 싫으시면 낙매거에서 식사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녁에 일찍 돌아오겠다고 하셨고요.”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또 그 사건 때문이지?”
“그럴 겁니다. 그리고 마마께 제발 쓸데없는 걱정은 마시고 몸부터 잘 챙기시라고 신신당부를 남기고 떠나셨습니다.”
사방화가 눈썹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