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8화 (698/978)

698화 평생 서로를 지키다 

진강이 다시 한 번 사방화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어찌 갑자기 어린아이가 돼버렸소? 한참 자고 일어나 사람이 바뀌기라도 한 것이오?”

사방화는 아무 말이 없었다.

“우리 부인은 조용하고 냉정하고 절제력도 강해 당신처럼 쉽게 눈물을 흘리는 분이 아닌데. 당장 우리 부인을 어디다 숨겼는지 말해보시오.”

진강이 농담을 건넸지만, 사방화는 여전히 그의 허리를 껴안은 채 소리 없이 울기만 했다. 진강은 다시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만 우시오. 조만간 조부님, 외숙부님, 임계 형님께서 당신이 일어났단 소식을 듣고 몰려오실 것이오. 당신이 우는 모습을 보고 내가 해코지라도 한 줄 알고 오해하시면 어찌하고? 날 때린다면 꼼짝없이 맞고만 있어야 하오.”

사방화는 우물쭈물하다 다 쉬어버린 목소리로 겨우 한마디를 했다.

“절 괴롭히신 거 맞잖아요.”

진강은 황당함에 눈을 깜빡이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당신 곁에서 물과 약을 먹이고 식사도 거른 채 머리카락 한 올도 스칠까 조심스러워하며 당신이 일어나기만 기다렸는데 내가 당신을 괴롭혔다고?”

사방화는 눈을 감으며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절 괴롭히셨어요.”

진강은 억울한 얼굴이 됐고, 사방화는 자꾸만 동일한 말을 되풀이했다.

“절 괴롭히셨습니다.”

진강은 할 수 없이 다시 그녀를 달래주었다.

“알겠소. 내가 다 잘못했으니 그만 우시오. 그날 당신을 힘들게만 하지 않았어도 이리 쓰러지진 않았을 것이오.”

사방화는 순간 그를 안고 있던 손을 풀고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진강, 그걸 말하는 게 아니에요.”

“응?”

진강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사방화는 말을 하려다 이내 다시 입을 닫고는 눈물을 그쳤다.

진강은 순식간에 이상하리만큼 차분해진 그녀를 보고 피식, 웃음이 터졌다.

“그럼 뭘 말하는 것이오? 황숙께서 내게 하신 그 말씀 말이오?”

“……. 네.”

사방화가 잠시 침묵하다 답했다.

“그냥 황숙께서 내게 겁주려고 하신 말씀이오. 그렇지만 이 말에 당신이 깨어나게 됐으니 황숙께 감사는 해야겠소.”

진강이 웃음을 터뜨렸다.

사방화가 다시 말없이 그의 옷소매로 눈물을 훔치자, 진강이 탄식을 했다.

“당신이 직접 만들어준 옷인데 이리 눈물 닦는데다 쓰고 있으니 참으로 아깝소. 어찌 당신 옷으로 닦지 않고요?”

사방화는 붉은 기가 채 가시지도 않은 눈으로 샐쭉하게 웃었다.

“앞으로는 당신 옷으로만 닦을 거예요. 닦다가 망가지면 제가 다시 만들어 드릴 테니 이제 손수건은 필요 없어요.”

진강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주며 말했다.

“이제 내 앞에서 울겠다는 말만 마시오. 보고 있기 정말 고통스럽소.”

사방화는 콧방귀를 뀌며 한 번 더 그의 옷으로 마저 눈물을 닦고 말했다.

“자주 울 거니까 보고 있기 힘들어도 보셔야 해요.”

“세상에, 이리도 막무가내라니!”

진강이 과장되게 이마를 짚으며 능청을 떨었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굴면 절 버리기라도 하실 건가요?”

사방화가 말했다.

“그럴 리가, 내게 왔으니 그냥 참고 살아야지요.”

사방화를 달래려 부단히 농담을 건네는 진강을 보고, 결국 사방화도 웃음을 터뜨렸다.

이내 진강도 미소를 지으며 다정히 물었다.

“여태 누워만 있었는데 배는 안 고프오? 그동안 음식은 삼키질 못해 약과 물만 먹였소. 식사 준비를 시킬 테니 어서 밥부터 먹읍시다.”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손을 잡고 침상에서 내려왔다.

시화와 시묵은 안에서 인기척이 들렸지만, 함부로 들어갈 수 없어 기다리던 중 진강의 목소리가 들리자 곧바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소왕비마마, 드디어 일어나셨군요.”

시화와 시묵은 벌겋게 부어오른 사방화의 눈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러자 사방화가 웃으며 두 사람을 안심시켰다.

“괜찮아. 꿈 때문에 놀란 것뿐이야.”

시화와 시묵은 진강도 웃으며 고개를 젓는 걸 보고서야 숨을 돌렸다.

“식사 준비를 해오고 영복당에도 소식을 전해 드리거라.”

이어진 진강의 명에 시화, 시묵이 고개를 끄덕였다.

“품죽과 나머지 아이들에게 식사 준비를 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저희는 소왕비마마와 소왕야의 세안과 환복을 준비하겠습니다.”

사방화는 제 눈물에 엉망이 된 진강의 옷을 보며 잠시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야, 시화, 시묵. 시중들 필요 없으니 나가 있어. 물만 들여와 주렴.”

사방화의 손짓에 시화, 시묵이 물러갔다.

주방은 식사 준비가 시작되고, 시화와 시묵은 영복당으로 가 충용후에게 사방화가 깨어난 소식을 알렸다.

이렇게 사방화가 깨어나자 침울했던 해당원의 분위기도 활기를 되찾았다.

“두 아이 다 내보내면 누가 당신 시중을 든단 말이오?”

진강이 의아해하자, 사방화가 옷장을 뒤져보다가 하나를 건네주며 말했다.

“제가 시중을 들어 드릴게요.”

그에 진강도 웃으며 옷을 받아들고 병풍 뒤로 들어갔다.

사방화는 바로 그를 따라 들어가 옷 벗는 것을 도와주려했다. 그러자 진강이 사방화의 손을 잡고 그녀를 만류했다.

“누워 있는 동안 몸이 굳어 힘들 것이오. 나 혼자 해도 되니 어서 세수부터 하시오. 조부님과 외숙부님께서 당신 얼굴을 보시면 깜짝 놀라실 거요.”

“왜요? 조부님과 외숙부님께서 당신을 곤란하게 만들까 두려우신가요?”

사방화의 말에, 진강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쓰러지고 조부님과 외숙부님께서 날 어떤 눈빛으로 보셨는지 당신은 모를 것이오. 짙은 밤도 두 분 표정보단 밝았을 것 같소. 내 낯짝이 아무리 두꺼워도 그 시선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소.”

“알겠어요!”

사방화가 웃음을 터뜨리며 나가자 시화와 시묵이 세수할 물을 떠 왔다.

곧 사방화는 고개를 숙여 손을 물에 담갔지만 한참동안 물에 비친 그림자만 보며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소왕비마마?”

그 모습에 시화가 조심스레 사방화를 불렀다.

이내 사방화는 시화를 한번 보고 조심스레 물었다.

“오라버니께 소식이 있었어?”

시화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 사 후야께는 소식이 없었습니다.”

사방화는 다시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물에 비친 제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그때, 시화가 잠시 망설이다 이내 그녀의 귓가로 와 속삭였다.

“마마, 평양성에서 가져오라 분부하신 물건이 도착했습니다. 지금 제게 있는데 보시겠어요?”

사방화가 손을 멈칫하며 시화를 바라보자, 시화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사방화는 병풍 뒤에서 진강이 옷을 갈아입는 소리를 듣고 다시 시화를 향해 말했다.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그때 찾도록 할게.”

이윽고 사방화는 세안을 다 마치고 화장대에 앉아 시화의 도움 없이 스스로 머리를 빗어 내렸다.

그리고 잠시 후 진강이 병풍 뒤에서 나왔다.

“시화, 소왕야께도 씻으실 물을 가져다 드려.”

사방화가 시화에게 분부를 내렸다.

곧이어 진강은 세안을 마치고 거울에 비친 사방화와 눈을 맞췄다.

“도와줄까요?”

사방화는 그의 눈을 바라보곤 살짝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당신 준비나 마저 하세요. 그 아름답던 서방님은 어디로 가고 이리 꾀죄죄한 분만 남았답니까? 조금 있으면 알아보지도 못하겠어요. 저 그런데……. 얼마나 잠들어있었던 건가요?”

“어제부터 오늘까지.”

진강의 답에 사방화가 눈을 크게 떴다.

“겨우 하루 만에 이 꼴이 되신 거라고요?”

이내 진강이 긴 한숨과 함께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태의가 와서 당신 맥을 짚어주고는 걱정근심이 과해 몸이 약해지고 심계가 상했다는데 내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소? 게다가 당신이 괴로워하며 내 이름을 부르는데 내가 어찌 편할 수 있었겠소? 잠도 편히 못 자고 식사도 못하고 하루가 꼭 1년 같았소. 앞으론 절대 이리 놀라게 하지 마시오.”

사방화는 바로 자신의 맥을 짚어보고는 웃으며 말했다.

“대체 어떤 태의가 당신을 놀라게 한 건가요? 제 몸이 어디가 그렇게 안 좋다고 했죠? 며칠 힘들었던 건 사실이지만 이틀 정도 쉬면 다 괜찮아요.”

진강은 바로 콧방귀를 뀌었다.

“내가 의술을 모른다고 지금 날 놀리기라도 하는 것이오? 당신이 충용후부에 주선해 둔 의원의 말은 믿지 않았으나 태의마저 똑같은 말을 하니 믿을 수밖에 없었소. 몸이 허해진 데다 근심을 달고 살아 심계까지 상했다는데 어찌 이게 심각한 상황이 아니오? 방화, 대체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이오?”

사방화가 그를 보며 말했다.

“제가 의술을 연마했으니 제 몸은 제가 더 잘 알지요. 언신이 그리도 제 몸을 챙겨줬는데 좋아지지 않는다는 게 말이 되나요? 언신의 실력을 모르시는 것도 아니잖아요. 제가 아니라 언신 말만 믿으시는 거지요?”

“아무리 그래도 소용없소. 오늘부터 경성 내외의 잡다한 일들은 절대로 신경 쓰지 말고 가만히 요양만 하시오. 걱정근심은 금물이오.”

진강이 한 번 더 힘을 실어 강조했지만 사방화는 살짝 입술만 삐죽였다. 그에 진강이 다시 눈썹을 들썩이며 말했다.

“당신은 이번에 내가 나 자신도 못 알아볼 정도로 만들어 놓았소. 그래도 요양을 하지 않겠단 말이오? 내 말에 틀린 것이라도 있소?”

사방화는 고개를 홱, 돌리곤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알겠어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을게요.”

“당연히 그래야지!”

진강은 그제야 옥비녀를 들어 그녀의 머리에 꽂아주었다.

사방화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과 진강을 번갈아 보다가 천천히 일어나 자리에 그를 앉혀주며 말했다.

“머리를 올려 드릴게요.”

“그래, 밤새 당신을 돌보느라 온몸이 쑤시니 이번 한번은 당신 시중을 좀 받아야겠소.”

진강이 얌전히 자리에 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방화는 금세 그의 머리를 올려주고 어깨도 주물러주었다. 그러자 진강은 말없이 그녀의 손을 붙잡고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사방화는 가만히 거울에 비친 진강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그의 눈가엔 무언가 억누르고, 참고 있는 것 같은 빛이 보였다.

이내 그녀는 의자를 끌어와 앉아선, 진강을 안고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진강, 우린 한평생 이렇게 늙을 때까지 서로 보살펴주며 살 거지요?”

진강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 * *

한편, 충용후, 최윤, 사임계는 사방화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해당원으로 서둘러 달려왔다.

사방화는 바깥의 인기척을 듣고 진강의 어깨에 고개를 문지르며 말했다.

“참 빨리도 오네요.”

진강이 가볍게 그녀의 허리를 콕, 찔렀다.

“당신이 갑자기 쓰러졌는데 누가 걱정을 안 하겠소?”

곧이어 사방화와 진강이 방 입구로 마중을 나가자, 때마침 들어오던 충용후, 최윤, 사임계와 마주쳤다.

사방화는 눈을 깜빡이며 모두에게 인사를 건넸다.

“조부님, 외숙부님, 임계 오라버니. 복 어멈도 왔네.”

“아이고, 우리 마마! 드디어 일어나셨네요! 원래도 마르셨던 분이 이렇게 뼈밖에 남지 않으시다니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몸 관리 잘하셔야 해요.”

복 어멈이 눈시울을 붉히며 먼저 입을 열었다.

“응, 주의할게.”

사방화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가가 어찌 그리 붉어졌느냐?”

이어진 충용후의 말에, 최윤도 곧장 말을 거들었다.

“울었던 것 같은데?”

사방화가 얼굴을 매만지며 말했다.

“악몽에 놀라 깨면서 운겁니다.”

“방화야, 혹시 소왕야께서 널 화나게 해서 운건 아니겠지?”

최윤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진강을 바라보았다.

그에 진강이 조용히 사방화에게 눈짓하며 조용히 속삭였다.

“거봐요. 외숙부님께서 날 보시는 눈빛이 곱지 않단 말이오.”

사방화는 고개를 저으며 진강의 손을 토닥이곤 최윤에게 말했다.

“외숙부님, 앞으로 함부로 이 사람에게 누명을 씌우시면 안 됩니다. 제가 쓰러진 데에 서방님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그러자 최윤이 충용후를 보며 말했다.

“사돈 어르신, 역시 출가한 여인은 외인이 된다는 옛말이 하나도 틀리질 않습니다. 그렇게 쓰러져 놓고도 소왕야 편을 들고 있으니.”

충용후는 진강과 사방화를 번갈아 보다 콧방귀를 뀌었다.

“깨어났으니 됐다! 식사를 마치면 어서 짐을 싸 돌아가거라.”

“어딜요?”

사방화가 물었다.

“당연히 영친왕부로 돌아가야지! 그럼 여기서 계속 살겠다는 것이냐? 사람을 놀라게 하고 싶어도 그건 다 영친왕부에 가서 하도록 해라. 이 몸은 이제 늙어서 더 이상 놀라면 아니 돼.”

충용후가 그녀를 보며 말했다.

“가까스로 깨어난 손녀에게 이리 고함을 치시는 조부님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입니까? 이젠 제가 친손녀인지도 의심이 갈 지경입니다.”

사방화가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당연히 내 친손녀지! 네가 친손녀가 아니라 손자였기만 해도 일찍이 한 대 때리고도 남았다! 저런 손녀를 두고 마음 편히 쉴 수가 있어야지, 원.”

충용후가 역정을 내며 방으로 들어섰다.

이내 조용히 있던 사임계가 웃으며 말했다.

“방화 누이, 무사히 깨어났으니 됐소. 우리는 별 탈 없었다지만 소왕야가 고생이 많으셨소. 식사도 못하시고, 잠도 못 주무시고 많이 힘드셨을 거요.”

“임계 오라버니!”

사방화가 진강을 한번 보고 사임계와 인사를 나눈 뒤 방으로 들어갔다. 그에 남은 사람들도 다 함께 방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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