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7화 (697/978)

697화 내가 여기 있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밖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황제폐하 납시오!”

충용후, 최윤, 사임계를 비롯해 충용후부에 있는 모든 하인들까지 입구로 나와 서둘러 문을 열었다.

황제는 평상복을 입고 옥련에서 내려와 충용후에게 손을 내저었다.

“충용후, 최윤 장군. 모두 편히 하시게나.”

충용후와 최윤은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그대가 사씨 장방 공자 사임계인가?”

이윽고 황제가 사임계를 바라보자 그는 곧장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네! 그렇습니다.”

황제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 물었다.

“태자에게 듣길, 짐은 그대가 문무를 겸비한 대단한 인물이라 들었다만 지금은 이리 충용후부에서 손님이나 접대를 하고 있는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훌륭한 인재를 낭비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사임계가 말했다.

“황송 하옵니다, 폐하. 소인 그저 작은 재주가 있을 뿐입니다.”

“겸손할 필요 없다. 사씨 장방이 경성을 떠나기 전에도 짐은 그대의 명성을 익히 들은 적 있으니 말이다. 태자가 치수를 하러 떠나고 조정엔 아직 어린 8황자만 남아 있어 짐이 신경 써야 할 것이 많다. 몸도 좋지 않아 문서를 보조해 줄 사람이 있었으면 한데 그대가 내일부터 짐을 돕도록 해라.”

황제의 명에, 사임계가 깜짝 놀라 허둥대며 말했다.

“소인 자질이 부족해 감히 폐하의 보조를 하긴 무리인 듯합니다.”

황제의 안색이 굳어졌다.

“싫단 말이냐?”

사임계가 고개를 들어 충용후를 바라봤으나 그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그에 사임계가 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황제폐하께 아룁니다. 태자전하께서 소인을 경성에 남도록 해주시어 소인은 소왕비마마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소왕비마마의 뜻을 따라 현재는 충용후부에서 서무를 맡고 있사옵니다.”

“네 뜻은 지금 짐이 사방화의 동의를 얻어야 한단 말이냐?”

사임계는 고개를 숙인 채 침묵으로 답했다.

이내 황제가 코웃음을 쳤다.

“하늘 아래 천자의 땅이 아닌 것이 없고, 그 땅을 이끄는 제후 또한 천자의 신하이거늘. 이 남진 땅에서 짐을 안중에도 없이 여기는 이가 있는가? 사운계, 지금 이 태도는 짐을 업신여기는 것이 아니더냐?”

사임계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군자는 하인과 다른 법입니다. 소인은 비록 죄를 지은 사씨 장방의 사람이나 소인에게는 세가대족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또, 소인은 어려서부터 성현지서(*圣贤之书: 성인, 현인의 책)와 공맹지도(*孔孟之道: 공자, 맹자가 주장한 인의의 도)를 연구해 천리강산을 받들어 왔습니다. 

천자이신 폐하께선 물론 이 천하의 모든 것을 살리고 죽일 수 있는 권력을 지니셨으나 그 힘을 결코 멋대로 휘둘러선 아니 될 것입니다. 소인 비록 죄인의 후예이나 아직 정직한 품성은 남아 있습니다. 

태자전하께서 소인을 소왕비마마께 넘겨주셨으니 그 뜻을 따라야 합니다. 그러니 소왕비마마께서 동의해주신다면 자연히 폐하의 뒤를 따르겠습니다.”

황제가 옷소매를 펄럭이며 소리쳤다.

“짐이 지금 억지를 부리고 있단 말이더냐!”

사임계가 고개를 숙였다.

“절대 그런 뜻은 없었습니다.”

황제의 안색이 더 어두워진 것을 보고 충용후가 헛기침을 하며 걸어 나왔다. 그렇게 충용후는 사임계를 보호하려 살짝 그의 앞에 나서서 물었다.

“폐하, 이곳까진 무슨 일로 오신 것입니까?”

황제가 곧 목소리를 가라앉히며 말했다.

“방화가 여운암에서 일이 있었다기에 짐이 이리 친히 보러 왔네.”

충용후가 연신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하늘과 같은 성은에 감사드립니다. 방화는 아직 깨어나지 못했습니다.”

“내 직접 그 아이를 볼 테니 길을 안내하라!”

황제의 명에, 이번엔 최윤이 앞으로 나섰다.

“폐하, 방화는 폐하를 뵐 수도 없으니 귀하신 걸음하지 마시고…….”

“잔말은 필요 없다. 어서 길을 안내하라.”

황제가 그의 말을 끊고 손짓을 했다. 

결국 충용후는 황제에게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고, 길게 늘어선 황제의 의장대까지 모두 함께 해당원으로 향했다.

* * *

한편, 해당원에서도 진강이 소식을 전해 듣고 침상에서 일어나 구겨져 주름진 옷자락을 바로하며 방에서 나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가 해당원에 나타났다.

진강은 안에서 나와 긴 행렬과 함께 등장한 황제를 보고 눈썹을 치켜떴다.

“황숙, 옥체는 좀 나아지셨습니까? 어찌 황궁에 계시지 않고 이 충용후부까지 놀러 오신 겁니까?”

황제는 미처 옷매무새도 가지런히 하지 못하고 제대로 쉬지도 못해 미간에 피로가 극에 달한 진강과 마주했다. 분명 진강의 말투는 전과 다름없이 거친 면이 있긴 했으나 황제와 입씨름 할 생각은 전혀 없어보였다.

“짐이 오 태감을 보냈는데도 궁에 들어오지 않기에 대체 병세가 어떠해서 못 오는 것인지 짐이 직접 확인하러 왔다.”

“그럼 들어가 직접 보시지요!”

진강이 입구에서 살짝 비켜나주었다.

황제는 미심쩍은 듯 그를 바라보며 방으로 들어섰다.

방 안, 걷힌 휘장 아래 창백한 얼굴로 죽은 듯 누워있는 사방화가 보였다.

황제는 침상으로 다가가 유심히 그녀를 바라보고는 진강에게 물었다.

“태의가 왔다 갔다던데 뭐라고 하더냐?”

“노심초사한 데다 걱정과 근심이 많다고 했습니다. 심신이 모두 상한 상태에 충격까지 받아 깨어나질 않고 있습니다.”

황제는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고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충용후부 해당정의 해당화가 절경이라 하더구나, 짐에게도 한번 보여 다오. 어렵게 얻은 부인 곁에서 잠시도 떨어질 수 없단 말은 하지 말고.”

진강은 멈춰서 꼼짝도 하지 않다가 꽤 오랜 후에야 먼저 방을 나섰다.

“잠시라 하셨으니 오래 계셔선 안 됩니다.”

황제는 콧방귀를 뀌며 그의 뒤를 따라 나와 충용후에게 말했다.

“충용후, 그만 들어가 쉬시게. 짐은 외인도 아니니 저 녀석이면 충분하오.”

충용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강은 곧 황제와 함께 뒤뜰의 해당정으로 갔다.

최윤은 뒤뜰 한편에 서서 충용후를 바라봤고, 그는 손짓으로 최윤을 사방화의 방으로 불러들였다. 두 사람은 그렇게 잠시 사방화를 살펴보곤 충용후의 방으로 돌아갔다.

얼마 후 황제와 진강은 함께 해당정을 나왔다. 황제는 항상 진강과 입씨름을 할 때마다 그랬듯 안색을 구긴 채 나왔다.

이내 황제가 소매를 펄럭이며 분부를 내렸다.

“궁으로 돌아간다.”

오권은 곧장 하인들과 그 뒤를 따랐고, 충용후와 최윤이 배웅을 했다.

* * *

황제가 충용후부를 떠나고, 진강은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진강은 사방화의 손을 잡으며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황숙께서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당신이 일어나기만을 기다린다면 당신을 내쫓고 성지를 내려 내게 다른 여인을 보내줄 거라 했소.”

사방화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이내 진강은 몹시도 처연한 눈빛으로 사방화의 팔을 살짝 흔들었다.

“부인……. 방화, 내 말이 들리오? 제발 어서 일어나시오. 저 노인장은 한다면 하는 분이오. 이러다 진정 내게 다른 여인을 보내기라도 하면…….”

“안 돼요!”

사방화가 갑자기 소리를 쳤다.

진강은 깜짝 놀라 그녀를 내려다봤지만, 사방화는 여전히 눈을 뜨지 못하고 미간만 찌푸린 채 입술을 꼭 오므리고 있었다. 몇 번을 깨어나려 허둥댔지만 결국 깨어나지 못하고 다시금 움직임이 잦아들었다.

진강은 조금 전 보다 힘을 실어 사방화의 팔을 흔들었다.

“방화, 뭐가 안 된다는 것이오? 이리 누워서 안 된다고만 하면 무슨 소용이 있소? 어서 일어나 황숙 앞에서 당당히 말씀해주시오.”

한참 후, 사방화에게 다시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뜨려 애를 쓰고 있었다.

진강은 곧바로 사방화를 부축해주며 그녀의 뺨을 감싸 안고 말했다.

“방화, 날 봐요. 계속 이리 자다간 다 늙어버린 내 모습만 보게 될 거요.”

사방화는 다시 천천히 눈을 떠 서서히 초점을 맞추며 멍하게 깨어났다.

진강은 눈 깜짝할 새도 아까운 듯 그녀를 간절히 응시하며 말했다.

“일어난 것이오?”

사방화는 한참동안 진강을 바라보다 힘없이 그의 뺨을 만지며 물었다.

“진강……?”

진강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깨어났군! 이 방법이 통할 줄 알았다면 이리 오랫동안 자게 내버려 두진 않았을 텐데. 진정 당신이 못 깨어나는 줄 알았단 말이오…….”

사방화는 손을 뻗어 진강의 눈썹, 턱, 쇄골을 천천히 쓸어보았다. 아무래도 꿈인지, 생시인지를 확인하는 듯했다. 

한참 후, 사방화는 구슬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진강을 끌어안았다.

“진강, 진강, 진강…….”

“어찌 우는 것이오?”

진강이 더 당혹스런 얼굴로 그녀를 달랬다.

“꿈에서 다시는 당신을 만나지 못하는 줄 알았어요. 다행히도…….”

사방화가 구슬피 울며 말했다.

진강은 일순간 그대로 굳어선 심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꿈을 꾸었소?”

사방화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를 안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강은 한참이 지나도 울음을 멈추지 못하는 그녀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꿈일 뿐이오. 내가 여기 있잖소. 걱정근심이 과해 그런 꿈을 꿨을 것이오. 이렇게 울다 몸이라도 상하면 이제 난 누구 앞에서 울어야 한단 말이오?”

사방화는 진강의 말을 듣지 못한 듯 끊임없이 눈물을 흘렸다.

진강은 아무리 말해도 통하지 않자 고개 숙여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그러자 사방화는 고개를 흔들며, 진강의 품에 더 깊이 머리를 파묻고 그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서러운 눈물은 좀처럼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진강은 현재 얇은 여름옷을 입고 있긴 했지만, 제 가슴을 다 적시는 사방화의 뜨거운 눈물에 마음이 다 무너져 내릴 듯했다. 그는 할 수 없이 사방화를 품에 안고 그녀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주었다.

혼수상태에 빠져 사운란을 외치던 사방화의 모습도, 그녀의 이 눈물 앞에 모두 다 힘없이 잊혀져버렸다. 진강도 사방화가 지금 온전히 자신만을 위해 울고 있다는 것이 너무도 절절히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 어떤 것들도 이 순간만큼은 전부 무겁게 가라앉는 듯했다. 진강은 입술을 깨물고 제 품에서 애처롭게 울고 있는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세상 그 무엇과도 비할 수 없이 소중한 자신의 아내, 사방화였다.

한참 후 통곡을 하던 사방화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진강도 더 견디기가 어려워 품에서 그녀를 떼어냈지만 벌겋게 부어버린 그녀의 눈을 보자 마음이 더 미어질 듯 아파왔다.

“그만 우시오. 사내는 가벼이 눈물을 흘려선 안 된다던데 당신이 이렇게 울면 나도 울고 싶어진단 말이오. 아니면 같이 껴안고 울기라도 할까요?”

사방화는 여전히 흐느끼며 말도 잇지 못하고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곧 진강이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려 하자, 사방화는 진강의 손을 밀치곤 그의 옷소매를 당겨와 눈물을 닦았다.

진강은 잠시 굳어서 그녀를 내려다보다 헛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이 쓰러지고 한 번도 갈아입지 못한 옷인데 이걸로 눈물을 닦아도 괜찮겠소?”

사방화는 연연치 않는다는 듯 말없이 계속해서 눈물을 닦았다. 

진강은 아예 손수건을 한쪽으로 던져버리고 물었다.

“이제 손수건은 필요 없는 것이오? 내 소매만 있으면 충분하오?”

사방화는 옷소매를 내려놓고 다시 그의 품에 안겨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강은 어느새 축축이 젖어버린 제 옷소매를 내려다보았다. 사방화는 눈물을 닦으면서도 울고 있었던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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