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3화 (693/978)

693화 깊고 두터운 마음 

사방화가 다시 엷게 웃으며 물었다.

“두 분은 여기서 얼마나 사셨나요?”

“수십 년을 살았지요! 사냥을 하고 불을 때가며 먹고 살았습니다. 그러다 몇 년 전 소왕야께서 밭을 내주신 후로는 농사를 짓고 가끔 사냥을 나가고 있습니다.”

노부인이 계단에 앉아 말했다.

“어르신 두 분만 계세요? 자녀분은요?”

사방화의 물음에 노부인은 조금 쓸쓸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몇 년 전 사냥을 나갔다가 늑대 무리를 만나 변을 당했습니다. 혼인하기도 전이라 남은 자식이라곤 아무도 없습니다.”

사방화가 깜짝 놀라 말했다.

“늑대 무리요?”

노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들과 영감 둘이서 나갔는데 소왕야가 아니었다면 전 영감까지 잃은 과부가 되어 이리 살아 있지도 못했을 겁니다. 소왕야는 참으로 좋으신 분입니다. 천하에 손꼽힐 만큼 아주 존귀하신 분인데도 저희를 조금도 얕보지 않고 성심껏 도와주셨어요. 저희 영감도 구해주시고 더 이상 사냥은 나가지 말라며 밭도 내주셨습니다.”

“읍과도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어찌 늑대가 나타난 거죠?”

이어진 사방화의 물음에 노부인은 고개를 내저었다.

“모르겠습니다.”

“정확히 몇 년 전인지 기억하세요?”

노부인은 손가락을 접어가며 기억을 떠올렸다.

“아마 7년 전일 겁니다.”

“아주 오래 전이네요.”

사방화가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젠 아들 얼굴조차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니까요. 지금쯤 환생하여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노부인이 쓸쓸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분명 좋은 분으로 다시 살아가고 있을 거예요.”

사방화가 따뜻한 목소리로 위로를 건넸다.

“네, 다음 생에는 아주 부귀한 가문에 공자로 태어나 소왕야, 소왕비마마처럼 부귀영화를 누리며 행복하게 살기만 바랄 뿐입니다.”

노부인이 말했다. 

“네, 하지만 부귀한 삶도 때론 평범한 백성들의 삶보다 못할 때가 있지요.”

사방화가 웃으며 말했다.

“네? 소왕비마마와 소왕야께선 서로 은애하시지 않습니까? 혹여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있으신 것인지요?”

노부인의 반응에 사방화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에요,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어요. 내 뜻은 이 신분으로 인해 짊어져야하는 책임감을 말한 거예요. 너무 막중하고 거대한 책임에 지치기까지 하거든요.

나도 노부인처럼 농사를 짓고, 사냥하고, 땔감을 때는 그런 평온한 날들을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어르신께는 지극히 평범한 나날들이겠지만 우리에게는 하늘에 오르는 것만큼 어려운 꿈이기도 하네요.”

노부인이 매우 뜻밖이라는 얼굴로 말했다.

“이처럼 고귀하신 소왕비마마께서 이런 평범한 생활을 원하시는 분이실 줄은 몰랐습니다. 네, 귀족 가문도 지켜야 할 것들이 많으니 힘드실 겁니다. 다 각자의 힘듦과 행복이 있는 법이군요.”

사방화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네요.”

한창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던 그때, 바깥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시화는 바로 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소왕야께서 오셨습니다!”

사방화도 고개를 돌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문 앞에 말 두 마리가 멈춰 섰다. 그 말엔 토끼 몇 마리와 멧돼지 한 마리가 묶여 있었다.

곧 진강과 영감이 말에서 내렸고, 진강은 아주 늠름한 자태로 사방화를 향해 걸어왔다. 노부인은 그 모습을 보며 사방화를 향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유, 저는 한평생 소왕야처럼 저리 멋지신 사내를 본 적이 없습니다. 천성도 따뜻하시고, 품행도 바르시고, 저렇게도 수려한 미모를 가지신 데다 재능까지 넘치시니 천하에 수많은 세가 대족의 공자님들을 모셔온다고 해도 우리 소왕야께 견줄만한 분은 없을 겁니다.”

사방화도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나도 천하에 저만한 서방님은 없다고 봐요.”

그 말에 시화, 시묵도 입을 가리며 몰래 웃었다.

이내 가까이 다가온 진강도 이 대화를 듣고 웃음을 터뜨렸다.

“다른 사람이 날 칭찬하는 건 그렇다 치지만, 부인도 날 이리 칭찬한다면 부끄럽지 않소?”

“그렇지 않아요! 좋은 분이신 걸 어떡하나요?”

사방화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진강은 더 활짝 웃으며 두 사람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어젯밤 내내 피곤하다기에 실컷 자도록 깨우지 않았소. 언제 일어났소? 아직 피곤하오?”

“괜찮아요. 조금 전에 일어났어요.”

사방화는 일순 불타듯 붉어진 얼굴을 하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진강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또 한마디 덧붙여 속삭였다.

“집에 돌아가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오.”

사방화는 더 빨개진 얼굴로 그를 밀쳤다.

진강은 다시 미소를 짓다가 시화, 시묵에게 분부를 내렸다.

“어르신이 짐승을 내리고 있으니 가서 좀 도와 드리도록 해라. 이제 점심을 먹으면 곧장 떠날 것이다.”

“네, 소왕야!”

시화, 시묵이 입구로 향했다.

“소왕야, 소왕비마마. 더 머무르시지 않고 이렇게 가십니까?”

노부인은 못내 아쉬운 듯했다.

진강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경성을 떠나온 지도 벌써 며칠이 됐소. 이젠 집에서도 걱정하실 듯하오. 경성에서도 멀지 않은 곳이니 다시 두 분을 찾아뵈러 오겠소.”

“존귀하신 소왕야, 소왕비마마께선 바쁘신 게 당연하지요. 바로 식사를 준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노부인이 나물을 챙겨들고 주방으로 향했다.

밖에선 시화와 시녀들이 영감을 도와 사냥한 짐승을 내리고 있었다.

* * *

진강은 사방화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와 문을 꼭 닫았다.

그리곤 그녀를 품에 안고 아주 깊은 입맞춤을 했다. 

한참동안 입을 맞추던 진강은 곧 사방화를 놓아주며 나지막이 물었다.

“당신에겐 정말 내가 최고의 사내요?”

“그럼요, 당연하지요.”

사방화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이자 진강은 또다시 입을 맞추려했다. 그에 사방화는 그를 살짝 밀치며 조용히 말했다.

“그만 하세요. 어르신께 인사도 해야 하잖아요…….”

진강은 참을 수 없다는 듯 또 한 번 그녀에게 입맞춤을 하며 말했다.

“당신이 이리도 짓궂었다니, 내 이제야 알았소!”

“제가 할 말이에요!”

사방화가 입술을 삐죽였다.

진강은 얼굴 한가득 미소를 머금은 채 사방화를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다 이내 짧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 전생에 얼마나 거대한 공을 세웠기에 당신 같은 여인을 만났는지……. 내 이리 당신을 얻게 됐으니 이번 생에 더 이상 바라는 것도 없소.”

사방화도 진강의 눈에 가득 담긴 자신의 모습을 보며 말했다.

“저도요. 서방님이 계시니 더 바랄 게 없습니다.”

이윽고 진강은 또 입을 맞추려 다가왔고, 사방화는 아예 손을 들어 그의 입술을 막아버렸다.

“그만해요.”

그에 진강은 초승달처럼 예쁜 눈웃음을 짓다, 사방화의 손을 천천히 내리며 그녀의 뺨에 아주 살짝 입을 맞췄다.

그러다 진강은 서서히 진지한 눈을 빛내며 사방화에게 말했다.

“어젯밤 불길에 산이 다 타버리면서 황실 은위 종사, 지봉이 화상을 입었다고 하오.”

사방화도 금세 진지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지금은 어디 있는데요?”

진강이 고개를 저었다.

“어제 우리가 떠나고 월낙이 곧장 따라갔으나 어디로 갔는지는 찾지 못했다고 하오. 허나 분명 경성 방원 100리 안에는 있을 것이오. 무명산 종사 셋이 모두 산을 볼 줄 아는 재주가 있긴 하나 월낙도 황실 은위 출신이라 그에 뒤쳐지진 않소. 

다만 화상을 입었어도 공력이 남아있으니 월낙을 따돌렸대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오. 경성 내의 일도 되도록 돌아가는 대로 얼른 해결합시다. 특히 이 황실 은위에 대한 일은 알려져서 좋을 게 없소. 조정이 동요하고 백성이 혼란에 빠지면 국정에도, 민생에도 영향을 줄 수 있으니까.”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꾸민 짓이니 어찌 해결할지 생각은 해보셨어요?”

“뿌리를 뽑지 못하면 나뭇가지와 줄기라도 잘라내야지요. 내게 생각이 있소.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니 돌아가는 길에 더 얘기합시다.”

“좋아요!”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식사를 마치고 진강, 사방화는 노부부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농가를 나왔다. 

돌아가는 길에는 그 숲을 지나쳤는데, 이미 검게 타버린 재만 남아 아무런 생기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 모습에 사방화는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젯밤 절대 순순히 물러나지 않을 것 같아 불을 내지르긴 했지만 초목도 생명이 있을 텐데 마음이 좋지 않네요.”

그러자 진강은 사방화를 꼭 껴안아주었다.

“옳은 선택을 한 것이오. 당신이 지봉의 기를 꺾지 않았다면 우린 모두 휘둘렸을 것이오. 여름인데다 며칠 내내 큰 비를 맞았으니 며칠만 있으면 금세 또 다시 자랄 것이오. 그저 바람이 세서 불길이 사나워 보였던 것뿐이오. 겨울이었다면 지봉이 엄청난 공력을 지녔다 한들 불길에 휩싸여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을 것이오.”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심성이 약하고 고우니 내 어찌 당신을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소.”

이어진 진강의 말에 사방화는 돌연 무언가 떠오른 듯 그대로 굳어버렸다.

진강도 금세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그녀에게 물었다.

“왜 그러시오?”

사방화는 멍하니 앞을 바라보다 진강에게 물었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심성이 이리도 약하고 고운 부인을 두었으니 앞으로 더 신경 쓸 일이 많아지겠다고 했소. 하……. 근래 들어 자꾸만 정신이 다른 데로 팔리는 것 같아 더 걱정이오.”

진강이 그녀의 이마를 다정히 쓸어주며 말했다.

“신경을 너무 많이 쓴 탓인가 봐요.”

사방화는 그의 손을 꼭 잡고 별다른 말을 잇지 않았다.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만 도착하면 되니 천천히 갑시다. 어젯밤에도 나 때문에 제대로 못 잤을 거잖소.”

진강이 그녀를 더 편안하게 안아주며 말했다.

사방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품에서 눈을 감았고 금세 잠이 들었다.

그러나 분명 잠들었음에도 그녀의 머릿속엔 여러 광경이 지나치고 있었다.

* * *

석양이 질 무렵, 경성에 순조로이 도착했다.

희순은 성문 앞에서 목을 길게 빼고 기다리고 있다가 사방화, 진강을 발견하고 매우 반가워하며 달려왔다.

“소왕야, 소왕비마마! 돌아오셨군요. 왕비마마께선 식사도 제대로 못하시고 눈이 빠지게 두 분만을 기다리셨습니다. 소왕비마마께선 괜찮으신지요?”

진강이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 어머니께 말씀 전해다오.”

희순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곧장 영친왕부를 향해 달려갔다.

그때, 사방화가 잠에서 깨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성벽을 바라보았다.

“깼소?”

진강이 그녀의 이마를 부드럽게 쓸어주며 물었다.

이내 사방화는 그를 바라보았고, 진강은 그녀를 보며 옅은 웃음을 지었다.

“잠에 취해 나마저도 알아보지 못하는 듯하오.”

사방화는 멍하게 그를 바라보다 이내 정신이 든 듯 품속에 머리를 묻었다.

“오는 길 내내 잔 거예요?”

“아주 푹 잤소. 희순이 시끄럽게 하지 않았다면 아직도 자고 있었을 거요.”

사방화는 입술을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진강이 영친왕부와 충용후부로 가는 갈림길에 서서 물었다.

“충용후부에 가 조부님부터 뵐까요?”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 * *

사방화, 진강은 곧 충용후부에 도착했다.

이내 두 사람이 말에서 내리자 문지기가 곧바로 예를 갖추었다.

“소왕야, 소왕비마마.”

진강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노후야께선 괜찮으시냐?”

“네, 노후야께선 무탈하십니다. 두 분이 돌아오셨단 소식만 기다리고 계셨으니 어서 가서 전하겠습니다.”

문지기가 문을 열고 두 사람을 안으로 들인 후 안마당으로 급히 달려갔다.

진강은 사방화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 순간, 사방화는 돌연 눈앞이 캄캄해지고 몸이 나른해지는 것을 느꼈다.

사방화는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렸고, 깜짝 놀란 진강이 재빨리 그녀를 붙잡았지만 사방화는 그의 품에서 다시 눈을 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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