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1화(24권) (691/978)

691화 황실의 종사 (2) 

사방화의 답에 노인이 다시 웃으며 말했다.

“사씨의 부귀영화를 이어받아 세가 대족을 이루고 효도와 인의를 중시하는 충용후부의 적출 아가씨는 지혜롭고 재주가 넘치지. 그런데 충용후가 고생스레 키워 올린 손녀딸이라는 인물이 할아비의 명을 파리 목숨처럼 여기고 있으니 천하가 당신을 어찌 욕할지 두렵지도 않소?”

“귀신도 모르는 이가 조부님 명줄로 날 협박하고 있는데 내가 순순히 따르는 게 더 순진한 것 아닐까? 천하에 떠도는 소문 따위에 신경 써본 적이 없으니 네 놈이 숟가락 하나 더 얹는다 한들 내겐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한다. 충용후부의 기개를 지키는 것이라면 조부님도 날 나무라지 않으실 것이다.”

“과연 충용후부의 여인답군. 그럼 당신의 오라비 목숨이라면?”

노인이 갑자기 더 노기를 띠며 말했다.

“오라버니께선 이미 경성을 떠나신 지 오래다.”

사방화가 말했다.

“경성을 떠나면 어디든 마음 놓고 살 수 있을 것 같소? 내가 죽이려 마음먹으면 어려운 일도 아니오.”

노인이 말했다.

“조부님과 오라버니를 죽일 배짱은 있으면서 어찌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긴 두려우냐? 네 하찮은 진법으로 우릴 어찌해보려 했다면 생각이 짧았다. 그마저도 내 서방님께 들켜버리는 수준이라니, 할 줄 아는 것이라곤 뒤에 숨어서 비겁하게 협박하는 것뿐이구나! 네 수준이 보인다.”

사방화가 비웃으며 말했다.

“이 쥐방울만한 계집이, 내 본때를 보여주마!”

노인이 극에 달한 분노로 소리를 친 그 순간, 숲속에서 순식간에 엄청난 바람이 휘몰아치며 여러 금빛이 사방화를 향해 날아들었다. 

바로 그때, 진강이 재빨리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손을 휘둘러 내공으로 그 금빛들을 모두 다 쳐냈다. 

그에 사방화가 한 걸음 앞으로 나가 비수를 던지자 숲속에서는 키득거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엄청난 칼날들이 두 사람 앞으로 떨어졌다. 

결국 진강은 팔에 상처를 입고 피를 쏟아냈다.

사방화가 다급히 진강의 팔을 잡고 피를 억누르려 했지만, 그는 이미 뼈가 보일 정도로 깊은 상처를 입었다. 

“또 어디 다치셨어요?”

사방화가 곧장 팔의 혈도 두 군데를 짚으며 다급하게 물었다.

진강은 조용히 고개만 저었고, 사방화는 돌연 무섭게 숲을 응시했다.

“폐허가 된 무명산에서 산송장이 기어 나왔을 줄은 몰랐구나. 종사 셋 중 누구냐?”

진강은 순간 놀란 듯 사방화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윽고 잠시 조용했던 숲에서 노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충용후의 손녀가 무명산에 기어들어 왔다기에 내 처음에 믿지 않았건만 그 계집이 진정 너였구나. 어쩐지 네 손에 그 책이 들려있더라니.”

“고인(古印), 장봉(藏锋), 지봉(持奉) 모두가 살아있단 말은 하지마라.”

사방화가 비웃으며 말했다.

“수백 년에 걸쳐 내려오던 무명산을 고작 너 따위가 단번에 무너뜨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느냐? 순진하다 해야 할지, 멍청하다 해야 할지. 그러나 무명산을 무너뜨려 우리가 하고 싶어 했던 일을 할 수 있게 해줬으니 마지막으로 감사의 인사는 해야겠구나. 네게 신분을 들켰으니 할아비와 오라비, 네 목숨도 여기서 끝인 줄 알거라.”

노인의 말에 사방화가 눈을 가늘게 떴다.

“황실 은위의 종사 세 사람도 남진 강산에 충성했던 인물은 아닌가 보군.”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어서 책이나 내놓으시오! 목숨만은 살려줄 테니.”

노인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술법 서적은 이미 내 손에 타버린 지 오래다. 내 기억 속에만 남아있지. 누가 누구의 목숨을 살려줄지는 두고 봐야 알 텐데.” 

사방화는 여전히 침착하게 말에 앉아 이야기했다.

곧 그녀는 화석을 꺼내 횃불을 켜고, 안장주머니에서 물통을 꺼내 바닥에 뿌린 뒤 그쪽으로 횃불을 던졌다.

불은 땅에 뿌려진 기름과 맞닿아 펑, 하는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급속도로 번지기 시작했다. 때마침 바람도 순풍이어서 불은 기름과 땅의 마른 초목과 만나 숲으로 빠르게 번져나갔다.

“가자!”

사방화가 진강을 이끌고 말머리를 돌렸다.

진강도 고개를 끄덕이며 사방화를 따라 채찍을 휘둘렀고 두 사람이 탄 말은 번개처럼 날쌔게 떠나갔다. 시화와 시녀들도 깜짝 놀라 다급히 그들의 뒤를 따랐다.

“그래, 사방화 네가 이렇게 나온다 이거냐!”

노인은 무섭게 번지는 불에 놀라 노발대발했다. 빠져나오려 해도 불길에 꼼짝없이 갇혀 무엇도 할 수가 없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한 노인이 다시 한 번 크게 소리쳤다.

“내 오늘 반드시 네 할아비, 오라비와 사씨 모두를 가만두지 않겠다!”

사방화는 돌연 말을 멈춰 세웠다.

분명……. 전생에도 같은 말을 들었던 적이 있었다.

사방화가 멈춰 서자 진강도 말을 세우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뒤쪽은 이미 산 전체가 불바다가 되어 형체도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에 반해 사방화는 유난히도 창백한 안색을 띄고 있었다.

진강이 말을 돌려 그녀에게 다가가 물었다.

“왜, 무슨 일이오?”

그대로 몸이 굳어버린 사방화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상태인 듯했다.

“어찌 멈춰 섰소?”

진강이 사방화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그녀의 손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사방화는 진강의 손길에 돌연 정신을 차리고, 그에게서 손을 빼낸 채 곧장 뒤를 돌아보았다.

숲에선 불길이 하늘로 치솟고, 점점 그 기세를 더해가고 있었다.

잠시 후, 사방화의 머릿속에 한 장면이 떠올랐다. 어두운 밀실, 누군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광경이었다.

‘사방화, 네가 내 호의를 저버렸으니 사씨에게 그 죄를 갚게 하겠다.’

그런 뒤 사씨 가문은 실제로 모두 다 무너져버렸다. 거가대족(*巨家大族: 지체 높고 번창한 가문)이 무너지고, 백골이 산을 이루고, 피는 강물을 이루고……. 남진 제국에 더 이상 사씨 성을 가진 이는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이내 사방화는 몸을 휘청거렸다.

“왜 그러시오?”

진강이 재빨리 다시 그녀의 손을 잡아주자, 사방화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진강을 바라보았다. 그칠 줄 모르고 타오르는 불길 아래 진강도 다소 창백해진 얼굴이었고, 그녀를 바라보는 두 눈에도 걱정이 가득했다. 

사방화는 그를 한참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에요. 저들의 짓이란 걸 알고 너무 갑작스러워 놀라 멍해졌나 봐요.”

진강은 그녀를 자신의 말 앞으로 끌어와 품에 꼭 안으며 말했다.

“불길이 우리까지 덮치기 전에 어서 떠납시다.”

사방화는 고개를 끄덕였고, 진강은 그녀를 품에 안은 채 말을 몰았다.

* * *

반 시진 정도 지나 강가에 이르렀다.

“경성으로 가는 길이 막혀 아마 내일은 돼야 도착할 듯하오.”

진강이 말했다.

“내일 가지요, 뭐.”

그러자 사방화가 말에서 내리며 대답했다.

진강도 그녀를 따라 말에서 내리며 이야기했다.

“그럼 조부님은…….”

“경성을 나올 때 충용후부에 모든 준비를 하고 나왔으니 조부님께는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조부님께서 앓아누우셨다는 것도 누군가 거짓으로 알려온 소식일 거예요. 제가 다급히 경성으로 돌아가는 이유도 그저 절 가만두지 않으려는 배후의 인물이 궁금했던 것뿐이에요.”

진강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것이었소?”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진강이 다시 또 물었다.

“그럼 어찌 내게 말하지 않았소? 난 당신이 급히 떠나자 해서 당연히…….”

“너무 힘들어 보이셔서요.”

사방화가 말했다.

“그래요?”

진강이 눈썹을 들썩였다.

사방화는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돌리고는 불길에 새빨갛게 타오르는 하늘을 보며 말했다.

“무명산의 세 종사가 제 손에 있는 책 때문에 이런 짓을 저질렀을 줄은 몰랐어요.”

진강은 아무 말이 없었다. 

사방화는 다시 그에게 물어보았다.

“저들이 살아 있단 걸 알고 있었어요?”

진강은 안색을 굳힌 채 고개를 저었다.

“무명산이 무너지면서 함께 묻혔을 것이라 생각했소.”

사방화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분명 무명산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무너뜨렸는데 어찌 살아있는 걸까요?”

진강은 뒷짐을 지고 잠시 붉게 물든 하늘을 바라보다 무겁게 입을 열었다.

“황실 은위 소굴은 무명산에만 있는 것이 아닐 것이오. 무명산은 그저 천하에 다 알려진 곳일 뿐이고.”

사방화가 깜짝 놀랐다.

“네? 정말요?”

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째서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걸까요? 서방님께서도 제게 말씀해주신 적 없으셨잖아요.”

사방화의 말에 진강은 잠시 침묵에 잠겼다.

“나도 근래에 안 사실이오.”

사방화는 진강의 얼굴에서 쓸쓸하고 어두운 기운을 느꼈다. 그렇게 진강을 바라보던 사방화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진강, 난 당신과 부부가 되고 나서 오히려 우리 사이 거리가 더 멀어진 것 같은 느낌이에요.”

진강은 바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을 했다.

“어째서요?”

사방화는 진강의 눈 밑에 어둡게 지는 그늘을 보고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제게 솔직해지라고 하시기에 저는 줄곧 노력해왔어요. 간혹 조금씩 숨기는 게 있으면 죄책감도 들었고요. 그런데 서방님께선 제게 숨기는 것 없이 늘 솔직하셨나요?”

진강이 입술을 깨물었다.

“알고 싶은 걸 내게 물어보면 아는 선에서 다 말해줄 수 있소.”

사방화는 한참 그를 바라보다 등을 돌리며 말했다.

“그러세요?”

“그렇소!”

진강의 대답을 듣고 사방화가 나지막이 말했다.

“전엔 서방님 성격이 복잡하고 다가가기 힘든 사람이라 생각한 적도 있지만, 그때도 분명 마음은 똑똑히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사람이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서방님께서 폐하 때문에 황궁에서 큰 부상을 입으시고, 제가 서방님을 뵈러 황궁에 들어갔다가 나온 후 서방님은 돌연 운란 오라버니댁에서 제게 정을 끊어버리셨지요.

그때부터였어요. 서방님을 더 알 수 없다고 느낀 건. 그 후로는 서방님 앞에 안개가 낀 것처럼 당신 마음을 하나도 읽을 수 없었어요.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그렇소?”

진강이 천천히 사방화의 뒤로 다가왔다.

“네.”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강은 그 후로 말없이 사방화의 뒤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이내 사방화는 천천히 몸을 돌려 그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저와 혼인을 올릴 때 폐하와 무슨 조건을 맞바꾼 거예요?”

진강이 미간을 찌푸렸다.

“어찌 그런 걸 묻는 것이오?”

“제가 묻지 않으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으실 거잖아요.”

진강은 또 다시 아무 말이 없어졌고, 사방화는 결국 언성이 높아졌다.

“제가 물으면 아는 선에서 다 말씀해주신다면서 어찌 또 말이 없으세요?”

진강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엷게 웃다가 그녀를 품에 안고 말했다.

“무슨 조건이 있었겠소? 당신과 혼인하게 해주지 않으면 이 남진 강산을 다 불태워버린다 했겠지. 황숙께서 남진 강산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잖소.”

사방화는 그의 품에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강, 저를 속일 생각은 마세요. 저도 폐하께서 남진 강산을 얼마나 아끼시는지 잘 알아요. 하지만 폐하는 서방님의 숙부님이시잖아요. 당신이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성장과정을 모두 다 지켜보신 분이 당신을 모르실까요?

폐하께선 당신이 분명 이 남진 강산을 절대로 어떻게 하지 못할 것을 잘 알고 계신 분이세요. 남진의 선조님과 서방님의 조모님, 덕자 태후마마께 죄송해 절대 그러지 못할 분인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세요.”

말없이 미간을 찌푸리는 진강을 보고, 사방화가 그의 손을 꼭 잡아왔다.

“진강, 사실대로 말해주세요. 대체 어떻게 해서 폐하의 두 번째 성지를 받아내신 거예요?”

진강은 순간 짧게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

“부인, 내 상처를 조심해주시오.”

하지만 사방화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남진 강산이 벌써 황실 은위에게 지배당한 건가요? 아니면 폐하께서 황실 은위에게 지배를 당하고 계신 건가요? 분명 폐하께 두 번째 성지를 받아낼 때 무언가 거래가 있었을 거예요. 그건 꼭 폐하가 아니라 황실 은위를 장악한 어떤 누군가일 수도 있겠지요. 이번에 태자전하와 손을 잡으신 것도 황실 은위가 남진 강산을 위협했기 때문이지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