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0화 황실의 종사 (1)
진강은 천천히 사방화를 놓아준 뒤 그녀의 볼을 콕, 찌르며 한숨을 쉬었다.
“이 한평생의 원수라 할지라도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겠소.”
“제가 원수라고요?”
사방화가 그를 보며 말했다.
“나요!”
그리고 진강은 밖을 향해 외쳤다.
“식사를 들여오너라!”
시화, 시묵은 곧장 준비를 하러 나섰고, 진강은 사방화의 손을 잡고 함께 탁자로 향했다.
진강은 탁자에 앉자마자 차 세 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사방화 역시 즉각 선지를 펴고서 붓을 들고 빠르게 처방전을 써내려갔다.
“약을 드셔야 해요.”
그러자 진강이 사방화를 보며 눈썹을 까딱였다.
“감기에 걸릴지도 모르니 당신 것도 지으시오.”
사방화는 괜찮다고 말하려다 진강의 눈빛을 보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후 자신이 먹을 약도 써내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화, 시묵이 음식을 내왔고 사방화에게 다시 처방전을 받아서 나갔다.
식사 후 진강이 말했다.
“오늘은 쉬고 내일 경성으로 돌아갑시다.”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진강은 의자에 기대 눈을 감고 휴식을 청했다.
그런 진강을 지켜보던 사방화는 그가 먼저 말할 생각이 없어보이자 더는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제게 물어보고 싶으신 건 없으세요?”
진강이 눈을 뜨며 말했다.
“말을 해주고 싶었던 거라면 자연히 내게 말했을 테고, 말하고 싶지 않다면 내가 물어도 말하지 않았을 거잖소.”
사방화는 고개를 숙이고 탁자를 응시하며 말했다.
“진강, 마음속 응어리는 털어내셨어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자, 사방화는 다시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남아있으신 거예요?”
진강도 사방화와 눈을 맞추며 웃음을 지었다.
“마음의 응어리와 상관없는 일도 있는 것이오.”
사방화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이곤 잠시 침묵에 잠겼다.
그러다 잠시 후, 사방화는 그간의 일들을 차분히 이야기했다. 어떻게 경성에서 나왔는지, 어떻게 여운암에 왔고 금연을 구했는지, 또 여운암에서 내려왔다가 왜 다시 올라가게 됐고, 낭떠러지에 떨어지게 된 건지까지 모두 다 소상히 말했지만 사운란 기억에 관한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았다.
진강은 그저 말없이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말을 다 끝낸 사방화는 한동안 조용히 그를 바라보다 나지막이 물었다.
“운란 오라버니께선……, 어디 계신 걸까요? 무슨 일이라도…….”
“별일 없을 것이오.”
사방화가 멍하게 진강을 쳐다보자, 그는 찻잔을 손에 쥐고 이리저리 돌리다가 탁자 위에 내려놓고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가는 매족 출신이오.”
‘조가가 매족 사람이라니!’
깜짝 놀란 사방화를 보고 진강이 살짝 눈썹을 치켜 올렸다.
“생각지 못했소?”
사방화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어찌 아신 건가요?”
“왕경미, 옥계언. 고모님과 고모부님께선 평양성 한곳에 10년이 넘도록 사셔서 자연히 그곳 사람들 속사정을 잘 알게 됐소. 처음엔 왕가, 옥가의 간섭을 피해 다니다가 점점 사람의 속내를 파헤치고 들여다보는 기술이 늘었던 거지. 두 분이 떠날 무렵 내게 주고 간 서신에 조가의 신분이 적혀있었소.”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조가의 신분을 일찌감치 알고 계셨단 말씀이세요?”
“응.”
진강이 답했다.
“조가는 언제부터 운란 오라버니의 신분을 따른 거예요?”
사방화가 물었다.
“3년 전, 사운란 공자가 경성을 떠나 평양성에 살 때부터였소. 그러나 이는 알려진 이야기일 뿐, 정확히 언제부터 따랐는지는 알 수 없소. 진정 걱정이 된다면 사람을 보내 찾게 하겠소.”
사방화는 살짝 고개를 끄덕인 뒤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니에요, 매족 사람인 조가가 오라버니 곁에서 분심을 지켜보고 있다 하고 서방님께서도 별일 없을 거라 하셨으니 굳이 애써 찾을 필요는 없어요.”
“별일 없을 거라고는 했으나 확언하진 못하오.”
진강은 다소 어두워진 안색으로 말했다. 그에 사방화는 살짝 손가락을 움츠리며 입을 열었다.
“운란 오라버니와 전 달라요. 저는 사씨의 혈맥이고 이젠 서방님께 시집을 왔으니 영친왕부의 사람이 된 것이나 다름없지요. 하지만 운란 오라버니는 사씨의 혈맥이 아닌 진정한 매족 왕실 후예입니다.
제겐 서방님, 조부님, 오라버니, 충용후부와 영친왕부가 있고 매족의 규율이나 조훈은 따르지 않으니 기댈 곳도 많지만 운란 오라버니 곁에는 아무도 없어요. 이젠 사씨 미량 노부인까지 돌아가셨으니까요.
운란 오라버니께서 무슨 선택을 하든 이기적으로 막아설 수만은 없어요. 누군가 오라버니를 데려가 무사하기만 하다면 그걸로 됐어요, 충분해요.”
진강은 사방화가 말을 끝낼 때까지 조용히 바라봐주다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생각이 정리가 됐다면 그걸로 된 것이오.”
사방화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시화와 시묵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왕비마마! 소왕야와 소왕비마마의 약이 준비됐습니다.”
“그래, 들어와.”
시화와 시묵이 약을 들고 들어와 진강과 사방화에게 하나씩 건네주었다.
사방화는 탕약의 온도가 적당한 것을 보고 한입에 다 마셔버린 뒤 그릇을 내려놓았다. 그러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만 있는 진강을 발견했다.
“어서 드세요. 뜨겁지 않아요. 약을 드시고 조금 더 쉬셔야죠.”
진강도 단숨에 탕약을 들이키곤 사방화의 손을 잡아왔다.
“함께 누워 쉽시다.”
사방화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침상에 누워 서로를 안고 눈을 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강은 곤히 잠들었지만 사방화는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는 일들로 인해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생각을 정리하던 사방화는 꽤 시간이 흐른 후에야 천천히 눈을 감았다.
* * *
“소왕야!”
저녁이 되었을 무렵, 갑자기 창가에서 월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
진강은 눈도 뜨지 못한 채 물었다.
“충용후부 노후야께서 편찮으시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월낙이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그 소리에 사방화는 곧바로 눈을 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창가로 갔다.
“조부님께서 왜?”
월낙이 고개를 숙였다.
“소왕비마마께 아룁니다. 노후야께선 며칠 전부터 본래 몸이 좋지 않으셨다가 마마께 큰일이 났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는 앓아누우셨다고 합니다.”
사방화가 곧장 물었다.
“언제 그랬다는 거야?”
“조금 전 비둘기로 서신을 받았으니 적어도 두 시진 전일 겁니다.”
월낙의 말을 듣고 사방화가 진강을 돌아보았다.
“조부님께 다 말씀하신 거예요?”
“조부님께서 연로하셨다고 해도 아직 듣는 귀가 있으신데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순 없겠지요. 어서 쾌마를 타고 바로 경성으로 갑시다.”
진강도 침상에서 내려와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사방화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장 시화, 시묵을 불러서 짐을 꾸린 뒤 진강과 함께 쾌마를 타고 경성으로 달려갔다.
* * *
비가 내린 뒤라 관도엔 물이 빠져나가지 못해 여전히 통행이 불편했다.
밤이 깊을 때까지 50리를 지났지만 아직 경성까진 60리가 더 남아있었다.
진강과 사방화는 선두에 나란히 말을 타고 달렸고 그 뒤는 시화와 시녀들이 따르고 있었다. 또 월낙은 은위들을 거느리며 암암리에 뒤를 쫓았다.
그런데 10리쯤 더 갔을 무렵, 진강이 돌연 사방화에게 말했다.
“그만 가시오, 뭔가 이상한데.”
사방화도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그간 사방화도, 진강도 경성 100리길을 다녀본 적이 수차례였다. 두 사람 모두 이곳은 매 구간마다 다른 풍경이 즐비하다고 알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숲을 지나 10리나 지나왔음에도 주위 풍경은 변함이 없었다. 꼭 한 곳을 계속 맴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내 진강과 사방화는 주위를 샅샅이 살펴보기 시작했고, 시화, 시묵을 비롯한 시녀들도 경계를 늦추지 않고 사방을 살폈다.
잠시 후, 사방화가 진강에게 물었다.
“뭔가 느껴지세요?”
“음양오행진이오. 내 어릴 적 이 진을 치며 놀았었는데 오늘날 내가 여기 놀아날 줄은 몰랐소. 그렇지만 제법 괜찮은 실력이군, 나조차도 몰라봤으니.”
진강은 말하는 동시에 비웃음을 흘렸다.
사방화는 눈을 가늘게 뜨고 진강을 바라보았다.
이내 그는 눈 깜짝할 사이 허리춤에서 비수를 꺼내 휘둘렀고, 곧 어딘가에서 짧은 외마디 비명이 들려왔다. 그 순간, 눈앞의 전경이 바뀌었다.
사방화와 진강 일행은 관도가 아닌 단풍나무 숲, 풀밭에 서 있었다.
“과연 내가 진강 소왕야를 잘못 본 것이 아니었군요! 이런 진법쯤은 소왕야 눈에 어린애 장난처럼 보이는 것 같습니다.”
돌연 숲에서 한 노인의 노쇠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강은 차갑게 얼굴을 굳히고 손을 거둬들이며 말했다.
“누구냐! 지금 당장 나오지 않는다면 내 이 숲을 싹 다 불태워 없애버릴 것이다. 그래도 어디 끝까지 숨어서 나와 얘기할 수 있는지 보자!”
노인은 한껏 쉰 목소리로 크게 웃기 시작했다.
“하하! 참 대단하십니다. 여기서 불을 질러 저 하나만 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여긴 아무것도 없는 산입니다. 소왕야께서도 도망갈 틈이 없지요.”
“그대도 참으로 주도면밀하군! 우리를 여기로 끌어들인 연유가 무엇인가?”
진강도 함께 비웃으며 말했다.
“소왕야의 소왕비마마께 볼일이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에 진강은 사방화를 바라보았다.
“누구냐? 내게 무슨 볼일이 있다는 것이냐?”
사방화가 침착하게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내가 누군지는 알 필요 없소. 소왕비마마께 있는 술법 서적을 내놓으시기만 하면 되니 말이오.”
사방화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난 그 술법 서적이란 게 무엇인지도 모른다.”
“사방화, 순순히 내놓는 게 좋을 것이오. 아니면 당신 조부님은 황천길에 오르게 될 테니.”
노인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더 매섭게 경고했다.
그의 협박에 사방화는 안색을 굳히며 말고삐를 바짝 조였고, 진강은 더 차가운 눈으로 숲을 노려보며 말했다.
“충용후부 노후야의 명줄이 언제부터 아무나 쥐락펴락할 수 있게 된 거지? 네 놈의 말은 믿을 수 없다.”
“충용후부는 이제 늙은이 하나만 남은 빈껍데기일 뿐이지. 내 실력이면 그 늙은이 목숨 따위 어렵지 않게 끊어낼 수 있소. 믿을 수 없다면 어디 한 번 더 까불어 보시구려. 그럼 충용후는 내일 아침을 넘기지 못할 것이오.”
사방화는 입술을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떻소, 내놓을 수밖에 없겠지? 내놓지 않겠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충용후의 시신을 거둘 준비나 할 줄 아시오!”
내내 침묵하던 사방화가 갑자기 입을 뗐다.
“그 책이 내 손에 있다는 건 어찌 알았지?”
“하하! 사방화, 내 모든 계략이 당신 때문에 수포로 돌아갔는데 어찌 당신 손에 있다는 걸 모르겠소? 게다가 당신에게서 배우기도 배웠지.”
노인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서산 군영의 살인 사건, 한 대인 살인, 금연 군주의 입몽주, 여운암 산사태까지 모두 고작 술법 서적을 얻기 위해 배후에서 꾸민 짓이라고?”
“제법이군!”
노인이 말했다.
“대체 어떤 놈이냐? 뭘 하려는 작정이지?”
사방화가 한껏 목소리를 깔며 말했다.
“내가 누군지 알 필요 없다 했을 텐데, 뭘 하려는 진……. 곧 알게 되겠지.”
그러자 노인의 그 쉰 목소리는 순간 형형한 살기를 드러냈다.
“고작 이런 협박으로 내가 순순히 내놓을 거라 생각하는 것이냐?”
사방화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충용후의 목숨 따위 아무렇지 않다는 것이오?”
노인이 말했다.
“조부님께선 연세가 많으셔서 어차피 몇 년 사시지 못할 것이다. 무엇보다 내가 이리 남에게 쉬이 휘둘릴 거라고도 생각지 않는 분이시지.”
<『경문풍월』24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