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9화 단 한 번의 허락
“나머지 일은요?”
사방화가 재차 묻자, 진강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형부로 압송돼 옥살이를 하던 범양 노씨 두 어르신이 옥중에서 죽었소. 좌상 대인은 혈육이란 이유로 마음이 약해져 황숙께 관용을 베풀어 달라는 상소를 올렸고. 그러나 어제 아침 황숙께선 조정에 올라 범양 노씨 3대는 이제 그 누구도 관직을 얻지 못하도록 황명을 내리셨소.”
“범양 노씨를 황급히 내치는 걸로 서산 군영의 일을 종결짓는다는 거예요? 한 대인의 배후에 있던 그 자는 어떡하고요?”
사방화도 진강을 마주보며 물었다.
“종결짓는 것이 아니라 우선 서산 군영의 군심을 잠재우는 것뿐이오.”
진강이 말했다.
“태자전하는요?”
“진옥은 주와 현으로 나가 수재를 입은 곳을 살펴보러 갔소. 조정과 각 주, 현의 관리들도 모두 치수를 감독해야 하나 황태자가 없다면 분명 소홀히 할 테니 유민들의 폭동을 막기 위해 직접 나선 것이오.”
사방화는 더 이상 아무런 말이 없었다.
“소왕야, 분부하신 물건을 대령했습니다!”
“응, 들여오너라.”
갑자기 밖에서 들린 한 시녀의 목소리에 진강이 답했다.
곧 시녀가 문을 열고 들어와 옷과 이불을 들여놓곤 서둘러 문을 닫았다.
진강은 목욕통에서 나와 새 옷으로 갈아입고는, 사방화의 옷을 들고 들어와 옷걸이에 걸어주며 말했다.
“산속 한기에 몸을 떨었으니 조금 더 있다가 나오시오.”
사방화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진강은 다시 병풍 뒤를 나와 침상으로 가서 더럽혀진 이불을 새것으로 갈고는 밖을 향해 소리쳤다.
“누구 없느냐?”
“예, 소왕야!”
“영친왕부와 충용후부에 소왕비는 무사하다 서신을 전해다오.”
시녀가 진강의 분부를 받고 곧장 물러났다.
진강은 한참동안 창밖을 바라보다 이내 침상으로 돌아와 몸을 뉘였다.
그리고 사방화가 목욕통에서 조금 더 몸을 녹인 뒤 새 옷으로 갈아입고 나왔을 땐 진강은 이미 잠든 뒤였다.
그녀는 조심스레 침상으로 다가가 한쪽에 걸터앉곤 잠든 진강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진강은 잠든 이 순간까지도 여전히 미간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어제 소식을 듣고 경성에서 부리나케 달려가 여태 비를 맞으며 사방화를 찾았을 테니 당연히 피곤할 만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이제껏 사방화에게 그 어떤 것도 묻지 않았다.
사방화와 사운란이 산사태에 휩쓸려 골짜기로 떨어졌을 때는 오시(*午時: 오전 11시 ~ 1시)였다. 또 그녀가 등의 상처를 치료해주고 분심술을 진정시켰던 때가 미시(*未時: 오후 1시 ~ 3시)였고, 그 후로 사운란은 사방화를 잠재웠었다. 그러다 사방화는 오늘 아침에서야 월낙에 의해 잠에서 깼다.
‘운란 오라버니는 어째서 날 재웠던 거지?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못하게 하려고? 그러면 지금은 어디에 있는 걸까?’
사방화는 침상에 걸터앉은 그대로 잠시 생각을 하다 방문을 열었다.
“소왕비마마!”
시화, 시묵은 시중들 채비를 갖추고 그 자리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방화는 지친 기색이 역력한 둘을 보며 그녀들을 데리고 마당으로 갔다.
* * *
세 사람은 마당의 대추나무 아래로 가 앉았다.
“우리가 그렇게 되고 나서 너넨 뭐했니?”
사방화의 물음에 시화, 시묵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소왕비마마와 운란 공자님께서 그렇게 되셨다는 걸 알고 깜짝 놀랐으나 너무 멀어 도저히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그 자리에서부터 온 산을 뒤지는 수밖에 없었지만, 낭떠러지로 뛰어내리셨을 줄은…….”
“어쩔 수 없었어.”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밤중에 소왕야께서 오시곤 두 분께서 낭떠러지에 떨어진 것 같다고 하시어 골짜기를 따라 밤새 찾아 헤맸습니다.”
시화의 말에 사방화가 나지막이 물었다.
“진강이 왔을 때 어땠는지 기억나니?”
시화는 잠시 주변을 살피다 말했다.
“비도 오고 날이 너무 어두워 표정까진 못 봤으나 소왕야께서도 엄청 놀라신 듯했습니다. 소왕비마마를 지키지 못했다며 쓸모없다고 하시기도…….”
“너희 잘못이 아니다.”
사방화가 손을 내저었다.
“소왕비마마, 위험한 걸 아시면서도 어찌 가셨던 겁니까?”
시화가 말했다. 그에 사방화는 잠시 입술을 깨물다가 여운암이 있는 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미심쩍어서.”
시화가 그녀를 바라보자, 사방화가 다시 또 한 번 물었다.
“산을 뒤지는 동안 운란 오라버니는 보지 못했니?”
“그 누구도 보지 못했습니다. 소왕비마마, 운란 공자님께선 마마와 함께 낭떠러지로 뛰어내리신 겁니까? 무슨 일이 생기진 않으셨겠지요?”
시화는 고개를 내저은 뒤 아주 조심스럽게 질문을 했다.
‘운란 오라버니는 대체 어디로 간 걸까? 전생의 기억이 남아있다고 털어놓고는 내게 뭔가를 숨기려 잠을 재운 것일까? 아니면 다시는 날 보지 않으려고 마음을 먹은 걸까?’
사방화는 눈앞에 자욱한 안개가 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시야가 흐릿해 무엇이 잘 보이지도 않았고, 무엇도 잘 알아볼 수조차 없었다.
시화와 시묵은 그렇게 한참동안 말없이 먼 산만 바라보는 사방화를 보고 걱정이 됐는지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소왕비마마? 운란 공자님을 걱정하시는 것이지요? 저희를 빼고 나머지 호위들은 산에 남아있으니 운란 공자님을 찾아 내려가도록 하겠습니다.”
사방화가 입술을 깨물었다.
“조금 걱정이 되네.”
“경가는 달리 맡은 바가 있던 데다 월낙도 황실 은위를 데려와 따라오지 않았습니다. 소왕비마마, 혹여 충용후부의 호위로 부족하다 싶으시면…….”
“우선 너희가 알아서 찾아봐.”
사방화는 시화의 말을 끊고는 잠시 후 월낙을 불렀다.
“월낙!”
“예! 부르셨습니까, 소왕비마마.”
월낙이 곧장 사방화 앞에 나타났다.
사방화는 옷매무새를 아주 단정히 한 월낙을 보며 말했다.
“경성에서부터 여운암으로 올 때까지 줄곧 아무도 모르게 날 따라왔느냐?”
“소왕비마마께 아룁니다. 그렇습니다.”
월낙이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이상한 걸 본 적은 없었느냐? 여운암 노 암주의 집이 어찌 돌연 무너졌는지, 나와 운란 오라버니가 여운암을 살펴보러 갔을 때 아무런 동태도 느끼지 못했어?”
월낙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방화도 그런 그의 눈에서 무언가 생각을 읽은 듯했다.
“거리낌 없이 다 말해다오.”
월낙은 재차 조금 망설이더니 목소리를 한껏 낮춰 말했다.
“소왕비마마께서 금연 군주님을 구하시고 쉬실 즈음, 자시(*子時: 밤 11시 ~ 새벽 1시)가 조금 넘었을 무렵 바로 앞에 있던 집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소왕비마마께 바로 아뢰려 했으나 운란 공자님께서 막으셨고요.”
“응? 운란 오라버니께서 뭐라고 하셨는데?”
사방화가 물었다.
“금연 군주님을 구하시느라 힘을 많이 쓰셨고 조금 전에야 겨우 잠드셨을 거라고 깨우지 말라 하셨습니다.”
월낙이 말했다.
“그리고?”
사방화가 물었다.
“제가 사람을 보내 확인해보겠냐고 여쭈었으나 이미 벌어진 일이니 날이 밝으면 다시 이야기하자고 하셨습니다. 저도 그러는 게 낫겠다고 생각해 살펴보지 않았습니다.”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리고는?”
월낙은 돌연 안색이 어두워졌다.
“어젯밤 소왕비마마와 운란 공자님께서 낭떠러지로 떨어지신 후 산을 따라 수색하면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이건 자연적으로 일어난 산사태가 아니라 누군가 화약을 묻어 고의로 여운암을 폭파시켰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폭우에 화약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 분명 산의 지세와 지형을 잘 알고 있는 자가 비가 내려 산사태가 일어난 것처럼 꾸민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그리고?”
사방화는 그다지 놀랍지 않은 듯했다.
이내 월낙은 잠시 본방을 돌아보며 재차 아무 인기척이 없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산에서는 소왕비마마와 운란 공자님의 행방을 찾지 못해 골짜기로 들어서자 이미 누군가 먼저 골짜기를 수색했던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수초를 밟고 나온 것 같은 흔적이 남아있었습니다.”
사방화가 눈을 가늘게 떴다.
“언제 골짜기를 살펴봐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던 것이냐?”
“소왕비마마와 운란 공자님께서 실종되신 지 두 시진이 지난 후였습니다. 저희가 뒤늦게 깨닫고 골짜기를 내려온 것도 아니었으나 동굴이 아주 깊고 으슥한 곳에 있던 데다 방향을 잘못 잡아 시간을 지체했지요. 그로 인해 오늘 아침에야 소왕비마마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흔적으로 봤을 때 어떤 자인지 알 수 있겠더냐?”
월낙이 고개를 내저었다.
“수초에서 나온 약간의 흔적뿐이라 딱히 알아낼 수 있는 건 없었습니다.”
“운란 오라버니께서 사라지신 게 그 자들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
사방화가 물었다.
“제가 동굴에서 소왕비마마를 찾았을 땐, 마마는 혼수상태셨습니다. 운란 공자님 말곤 다른 이는 없었던 것으로 사료됩니다. 소왕비마마께서 무사하시니 공자님도 무사하실 겁니다. 혹여 공자님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고요. 주변에 수풀을 밟은 흔적도 없었고 동굴엔 소왕비마마 혼자 계셨습니다. 저희가 도착하기 전에 떠나신 듯합니다.”
사방화가 입술을 깨물었다.
“진강 소왕야께도 다 말한 거야?”
월낙이 고개를 숙였다.
“소왕야께선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습니다.”
“그럼 태자전하는?”
“조금 전 태자전하께 서신을 보냈습니다.”
이어진 사방화의 물음에도 월낙은 아예 바닥만 보며 답했다.
“그래, 이만 가봐.”
사방화의 손짓에 월낙이 물러갔다.
사방화는 그 자리에 남아 잠시 생각을 하다 이내 방으로 향했다. 그러자 시묵이 곧바로 뒤에서 물어왔다.
“소왕비마마, 식사 준비는 다 되었습니다. 소왕야와…….”
“응, 지금은 주무시고 계시니 일어나시면 다시 부르도록 할게.”
* * *
사방화는 조심스레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진강은 여전히 잠든 상태라 그녀는 문을 닫고 신을 벗은 뒤 조용히 침상 머리맡에 기대앉았다.
그렇게 반 시진이 지났을 무렵, 사방화는 누군가 제 손을 잡아오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돌린 사방화는 금세 환한 미소를 보였다.
“일어나셨어요?”
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고프시지요? 상을 차리라 분부할게요.”
그러나 진강은 그녀의 손을 꼭 잡고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사방화는 잠시 어리둥절해하다 다른 한 손으로 그의 맥을 짚어보았다.
진강은 금세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부인이 의술에 능하니 참 좋군. 태의를 곁에 둔 것 같다고 할까?”
“태의도 제 앞에선 맥을 못 추려요.”
사방화의 답에, 진강이 아예 눈썹을 들썩이며 웃어보였다.
“그렇지, 그 어떤 태의도 우리 부인께는 못 당하지. 그래도 자화자찬보다는 내가 칭찬해주는 게 더 낫지 않소?”
사방화도 웃으며 그와 농담을 더 나누려했지만, 금세 미간이 찌푸려졌다. 진강의 맥박이 이상하게 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디 다치셨어요?”
“당신을 찾던 중에 누군가와 칼을 겨누었소. 큰일은 아니오.”
진강은 아무렇지 않게 답했으나 상처는 말처럼 그리 가볍진 않아보였다.
사방화가 더 심각해진 얼굴로 물었다.
“어떤 숨은 고수이기에 이런 내력을 쓰신 거예요?”
진강이 고개를 내저었다.
“모르오.”
사방화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낭군님 실력으로 어떤 자인지 신분조차 알아내지 못하셨다고요?”
진강은 다시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에게 난 모르는 것도 없고, 무엇이든 해내는 그런 서방인가 보오.”
사방화는 아예 그의 손을 뿌리쳐버렸다.
“이렇게 다치셨으면서 농담할 기운은 남아있으세요? 제가 알게 되기 전까지 계속 이리 숨기실 생각이셨나요? 몸도 안 좋으시면서 저를 안고 그 먼 길을 걸으셨다니 정말…….”
“쉴 새 없이 잔소리하시는 걸 보니 무슨 조상님을 만난 것 같소.”
진강이 갑자기 손을 들어 사방화의 입을 막아버렸고, 그녀는 다시 또 진강의 손을 뿌리쳤다.
“진강!”
이내 진강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그녀를 폭, 감싸 안았다.
“앞으로 절대 혼자 위험을 무릅쓰고 나서지 마시오. 내가 절대 허락할 수 없소. 이해가 되지 않고, 의혹이 있다 한들 제발 날 생각해 주시오. 당신에게 큰일이 생기는 것에 비하면 내가 다치는 건 아무것도 아니오.”
사방화는 돌연 마음 한구석이 답답해짐과 동시에 눈가가 시려왔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