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8화 (688/978)

688화 전생의 기억 (2) 

사운란은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사방화를 쳐다보았다. 그의 옷소매와 머리카락은 비바람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누이는 더 이상 전생의 그 나약하던 여인이 아니지만, 누이의 마음만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소. 생각해 보시오. 내가 전생의 기억이 없다면 누이와 내가 처음 만났던 그날 어찌 곧바로 누이에게 다가갈 수 있었겠소? 

누이가 순진무구한 귀족 아가씨든, 무명산의 백골을 밟으며 살아온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든 난 누이의 모든 모습을 받아들일 수 있었소. 방화, 내가 왜 그랬던 건지 생각해본 적 있소?”

사방화는 아무런 소리도 낼 수 없었다. 그녀의 안색 역시 창백하다 못해 투명해질 지경이었다.

“누이는 처음에 철부지 아가씨처럼 위장을 했었지. 난 다 알고 있었지만 너무 큰 그리움이 내 마음을 더 앞질렀소. 그러다 내게 분심술이 발작하고 난 뒤로, 누이는 점차 기억을 되찾고 다시 냉정하고 침착한 모습이 됐지. 하지만 누이의 그 모습은 내겐 오히려 더 익숙하고 친근했소. 난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었지.”

사방화는 눈시울을 붉히며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고 말했다.

“어찌 내게 말하지 않았어요?”

사운란이 눈을 감으며 말했다.

“이미 진강 소왕야를 연모하게 된 누이에게 말한들 어쩌겠소? 전생으로 돌아가 우리의 그 결말을 다시 맞이하기라도 할 것이오?”

사방화는 전생에 분심술에 괴로워하던 사운란과, 그를 살려내려 온몸에 피가 마를 때까지 기를 쓰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절로 눈물이 쏟아졌다.

“누이가 날 아끼는 마음은 변하지 않지만, 결정적인 순간에서 난 진강을 이길 수 없소. 지금이 아니고서야 또 언제 죽을 기회가 오겠소?”

사방화가 세차게 고개를 돌렸다.

“내가 진강을 연모해 혼인했다고 더 이상 오라버니가 연모하게 될 여인이 없어지기라도 하는 건가요?”

사운란이 웃으며 말했다.

“난 전생에도, 또 이번 생에도 누이를 마음에 품었소. 근데 어떤 여인이 누이 자리를 대신하겠소? 하물며 이번 생에 누이를 만나기 전에는 여인을 가까이 하려고만 하면 구역질이 멈추질 않았소. 방화, 이런 내가 무슨 낙으로 살아가겠소?”

사방화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노부인께서 자운 도장을 얼마나 미워했는지는 알 것이오. 하지만 부인께서 가장 치를 떨었던 부분이 뭔지 아시오?”

사방화는 사씨 미량 노부인이 임종하던 그때를 떠올렸다. 당시 노부인은 사방화와 사운란의 손을 잡고, 사방화에게 진강과의 혼인은 접고 사운란과 혼인을 올리라는 유언을 남겼었다. 그리고 사방화가 알고 있는 건 노부인은 자운 도장이 사운란을 망친 것 같다는 생각에 평생 자운 도장을 매우 증오했다는 것 정도뿐이었다.

사운란은 한참 사방화를 바라보다가 돌연 말을 돌려버렸다.

“모르는 게 되레 좋은 일인 법도 있소. 모른다면 끝까지 알 필요 없소.”

사방화가 물었다.

“지금까지도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사운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 필요 없소.”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가 손을 들어 올렸고, 동시에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은 그대로 사방화를 감쌌고, 그녀는 뒤늦게야 깨닫고 피하려 했으나 끝내 눈앞이 캄캄해지며 땅바닥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 * *

“소왕비마마, 일어나십시오!”

사방화는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누군가 자신을 깨우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에 사방화는 천천히 눈을 떴다가 자신의 어깨를 잡고 있는 월낙을 마주했다.

“드디어 깨어나셨군요.”

월낙은 사방화가 깨어난 걸 확인하고는 곧장 뒤로 물러났다.

이내 사방화는 사방을 둘러봤지만 동굴 안에는 월낙과 자신뿐이었고, 사운란은 보이질 않았다.

“네가 어찌 여기 있는 것이냐?”

“소왕야의 명을 받아 호위들을 이끌고 찾아왔습니다. 밤새 뒤져서 소왕비마마를 찾아냈지요.”

월낙이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밤새?”

사방화는 그제야 제 옷이 찢기고 헤져 엉망진창이 된 것을 알아차렸다.

“네, 그렇습니다. 어제 정오에 운란 공자님과 여운암을 살펴보러 가셨다가 산사태에 휩쓸리셨지요. 그러다 밤새 온 산을 뒤져 가까스로 소왕비마마를 찾아낸 것입니다.”

월낙이 말했다.

“운란…… 오라버니는? 찾았어?”

사방화의 물음에 월낙이 바로 고개를 저었다.

“조금 전 도착해 이 주위의 모든 산이란 산은 다 뒤져보았으나 운란 공자님을 찾진 못했습니다.”

동굴의 주변은 그녀가 정신을 잃기 전 모습 그대로였다.

“진강 소왕야께는 소식을 전했어?”

“어젯밤에 일찌감치 전했습니다. 소왕야께서도 여태 산을 수색하고 계실 테니 곧장 소왕비마마를 찾았다 전하겠습니다.”

월낙이 곧바로 자리를 떴다.

바깥을 보니, 몇 날 며칠을 내리던 비는 드디어 그친 상태였다. 

사방화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려다 이내 힘이 빠져 다시 넘어지고 말았다.

잠시 후 월낙이 돌아와 그녀를 부축해주었다. 

“비는 그쳤느냐? 이 동굴에서 나가자.”

월낙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만 아니었어도 좀 더 빨리 찾았을 텐데 오늘 아침에서야 그쳤습니다.”

사방화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 * *

월낙의 부축을 받아 동굴에서 나오니 아주 처참한 광경이 보였다. 비가 그친 후 길 여기저기엔 물웅덩이와 힘없이 쓰러진 나무들만 남아있었다.

사방화는 힘없이 벽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발견했다.

“소왕야께서 제가 보낸 신호를 받으신 겁니다. 곧 도착하실 듯합니다.”

사방화는 고개를 끄덕이다 문득 우뚝 솟은 낭떠러지를 보며 물었다.

“이렇게나 높은데 어찌 신호를 보냈다는 거야?”

“새를 날려 보내 신호탄을 터뜨렸습니다. 보아하니 소왕야께서도 근처에 계신 듯합니다.”

과연 반 시진 후 진강이 월낙보다도 더 만신창이가 된 모습으로 사방화 앞에 나타났다.

사방화는 급히 달려오는 진강을 보며 아주 오랜만에 그를 보는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녀가 막 무명산에서 경성으로 돌아왔을 때의 진강은 앳된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이제 사방화의 든든한 남편이었다.

진강……! 바로 그가 사방화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이내 진강은 눈 깜짝할 새에 다가와 사방화가 그의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 덥석 그녀를 품에 안았다.

사방화도 빗속에 자신을 찾아다니느라 온통 젖어버린 진강을 꼭 껴안았다. 그를 안자마자 느껴지는 시린 한기에 사방화의 눈시울은 절로 뜨겁게 붉어졌다.

“진강…….”

사방화의 나지막한 목소리를 듣고, 진강이 다 쉬어버린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 내가 왔소.”

사방화는 재차 그를 불렀다.

“진강…….”

“그래, 나 여기 있소. 이제 괜찮소. 내가 왔소…….”

진강의 목소리가 점점 더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사방화를 달래며 그녀를 더 세게 감싸 안고 계속해서 조용히 중얼거리듯 말했다.

사방화는 진강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가만히 그의 심장소리를 들었다.

한참 후, 진강은 천천히 사방화를 놓아주고서 그녀를 안아 올렸다.

“나갑시다.”

사방화는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 * *

진강은 말없이 그녀를 안고 바깥으로 향했다. 

곧 골짜기를 빠져나가 풀숲에 다다랐고, 주변엔 풀을 가로지르는 소리만 들려왔다. 

한참이 지나 사방화가 나지막이 물었다.

“얼마나 남았어요? 내려 주세요. 제가 걸을게요.”

“멀지 않소! 난 괜찮으니 이렇게 갑시다.”

진강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잠시 후 시화, 시묵과 시녀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왕비마마!”

사방화는 다 쉬어 갈라진 그녀들의 목소리를 듣고 진강에게 내려달라 손짓했지만, 진강은 내려 주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녀들이 가까이 다가왔다.

“소왕비마마, 괜찮으십니까? 저희가…….”

“걱정마, 난 괜찮아.”

그녀들도 사방화를 찾느라 밤새 고생을 했던지 모습이 말이 아니었다. 

그때, 진강이 휘파람을 불자 말 한 마리가 달려왔다. 

진강은 사방화를 안고 그대로 말에 올라타 시녀들에게 말했다.

“우선 이곳에서 가까운 면진(绵镇)으로 가자.”

시녀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진강은 빠르게 말을 몰아 골짜기를 나섰다.

이 골짜기는 인적이 끊긴 지 오래였지만 출구가 없어 나갈 수 없는 곳은 아니었다. 다만 들어가고 나가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잠시 달리던 진강은 사방화의 몸 상태가 별로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금세 말 속도를 천천히 늦췄다.

* * *

반 시진 후, 산을 돌아 나온 일행은 면진에 이르렀다.

진강은 면진에 들어오자마자 객잔을 찾아 작은 방 하나를 빌린 뒤 사방화를 안고 들어갔다.

“주인장에게 뜨거운 물 두 통만 끓여오라 전해라.”

진강이 뒤따라온 시녀들에게 분부했다.

“네, 소왕야!”

시화가 곧장 밖으로 향했다.

이내 진강이 사방화를 침상에 눕히려 하자 그녀가 진강의 팔을 붙잡았다.

“내려 주세요. 온통 흙투성이라 이대로 누웠다간 침상이 다 더럽혀져요.”

“돈으로 갚아주면 그만이오.”

진강은 그녀를 그대로 침상에 편히 눕혀주곤, 머리맡에 기대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사방화는 그 강한 시선을 받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걱정하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이번만 넘어가오. 두 번은 없소.”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진강은 다시 그녀를 안고 한참을 말이 없었다.

사방화는 그의 품에 안겨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가만히 눈만 깜빡였다. 그는 월낙에게서 소식을 들은 후 이곳에 돌아오기까지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단 한 번도 묻지 않았다. 알고 있는 걸까, 모르는 걸까…….

“소왕야, 물이 준비되었습니다. 안으로 들일까요?”

문 밖에 시화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안으로 들여라.”

진강이 사방화를 놓으며 말했다.

시화와 시녀들은 즉각 따뜻한 물을 들여와 병풍 뒤에 놓아주며 말했다.

“소왕야, 소왕비마마. 식사 준비를 할 테니 목욕을 마치시면 불러주세요.”

“그래!”

사방화의 대답에 시화는 방문을 닫고 밖으로 나섰다.

곧이어 진강은 사방화의 옷을 벗겨준 후 그녀를 안고 병풍 뒤로 들어가 목욕통에 조심히 앉혀주었다. 그리곤 밖을 향해 말했다.

“옷 두 벌과 새 이불 하나를 사오너라.”

“예, 말씀 받들겠습니다!”

이내 진강도 병풍 뒤로 들어와 옷을 벗고 옆의 목욕통으로 들어갔다.

따뜻한 물에 들어가 있으니 차가웠던 사방화의 몸도 서서히 훈훈해졌다.

“고모님, 금연, 연람은 무사히 경성으로 돌아갔겠지요?”

진강은 다소 지친 듯 목욕통에 몸을 기대 눈을 감고 말했다.

“도중에 자객을 만나긴 했으나 당신이 어머니께서 보내주신 호위들을 보내준 덕에 큰 문제는 없었소. 연람이 중상을 입은 것 외에는.”

“크게 다친 건가요?”

사방화가 깜짝 놀라 물었다.

“생명엔 지장이 없소.”

진강의 말에 사방화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대체 누구기에 돌아가는 길마저도 자객을 깔아놓는 거죠? 그날 손 태의부에서 뭔가 알아낸 거라도 있으세요?”

진강이 돌연 안색을 굳히며 말했다.

“손 태의의 이낭이 집안의 마부와 정분이 난 걸 태의께 들키고는 아무 처신도 못했소. 태의께선 그대로 군영으로 떠나야 했고. 하여 그 여인은 기회를 틈타 마부에게 손 태의를 죽이라 시켰던 것이오. 그 마부는 본래 무공을 익힌 사람인지라 손 태의께서 방심한 새 그를 죽이고, 집안의 과모(寡母)와 어린 동생들에게 누를 끼칠까 함께 변을 당한 척했소.”

“그런 일이 있었다고요? 그럼 한 대인은요?”

사방화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눈이 더 커다래졌다.

“여전히 미궁 속이오.”

진강이 말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