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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7화 (687/978)

687화 전생의 기억 (1) 

사방화는 비옷를 입고 말 위에 꼿꼿이 체통을 지키며 앉아있었다.

이내 우두머리가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영친왕부의 소왕비마마를 뵌 적이 없는데 혹시…….”

그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사방화가 명패를 내보였다. 그에 우두머리가 다가와 명패를 확인하고는 서둘러 예를 차렸다.

“진정 영친왕부의 소왕비마마시군요. 용서하십시오, 소왕비마마. 감히 제가 소왕비를 알아보지 못하고…….”

“나와 대장공주마마께서 한 시진 전에 여운암에서 내려오기 전까진 다들 무사했다. 어찌된 일인지 아느냐?”

사방화가 손을 내저으며 그의 말을 끊었다.

“소왕비마마, 산사태 때문에 흙과 돌이 굴러 떨어져 아주 위험하니 소왕비마마께선 가지 않으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우두머리가 말했다.

“문제없다. 너희와 함께 가 내 눈으로 봐야겠어. 나라와 백성을 위해 충성을 다하시는 영친왕야와 충용후께서 여기 계셨더라도 곧장 상황을 살피셨을 거다. 내 일개 여인이긴 하나 여운암에 남아있는 저들을 두고 갈 순 없다.”

“소왕비마마, 그럼 저희 뒤를 따라오시지요.”

사방화의 결연한 답에 우두머리도 굳건한 목소리로 답했다.

곧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우두머리는 뒤를 향해 손짓을 했고, 장병 대열은 즉각 가장 선두로 길을 앞질렀다.

사방화, 사운란 일행은 이들의 뒤를 따라 함께 산을 올랐다.

* * *

반 시진 후, 여운암 기슭에 다다랐지만 산비탈의 흙무더기에 암자의 모습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심지어 자갈과 진흙이 계속해서 쓸려 내려와 발을 디디기도 힘든 정도였다.

“소왕비마마, 지금이라도 어서 돌아가시지요! 너무 위험합니다.”

우두머리가 재차 사방화를 설득했으나 사방화는 결연히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아. 좌측 구부러진 길을 통해 올라가자.”

사방화는 제안을 한 뒤 바로 사운란을 보며 동의를 구했다.

사운란도 곧장 고개를 끄덕이며 말고삐를 왼쪽으로 틀었고, 이내 장병들도 말없이 그들의 뒤를 따랐다.

산 정상에 오르자 돌과 진흙탕에 묻혀버린 여운암의 흔적이 어렴풋이 보였다. 하지만 나무가 쓰러지고 돌들이 굴러 떨어지는 탓에 산 전체가 흔들려 도저히 여운암에 근접할 수가 없었다.

“가까이 갈 수도 없는데 어찌할까요?”

우두머리 장병이 말했다.

“모두 이곳을 지키고 있거라. 운란 오라버니, 같이 가요.”

사방화의 말에 사운란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으나 시화, 시묵을 비롯한 시녀들은 즉각 사방화를 막아섰다.

“소왕비마마! 저희가 가겠습니다. 너무 위험합니다.”

“운란 오라버니와 다녀올 테니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가서 삼척 정도 되는 굵은 나뭇가지 두 개만 찾아와주고.”

“소왕비마마!”

시녀들이 입을 모아 재차 그녀를 말렸다.

“조용히 해! 너희가 간다 한들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할 거야.”

“그래, 내가 있으니 방화 누이 걱정은 마라.”

사운란이 말했다.

결국 사방화의 뜻을 꺾지 못한 시녀들은 할 수 없이 나뭇가지를 찾아 나섰고 잠시 후 돌아와 사방화에게 나뭇가지를 건넸다.

사방화는 나뭇가지를 받아 하나는 사운란에게 내밀었다.

“운란 오라버니, 이 나뭇가지로 흙을 짚어가며 올라가야 해요. 필요할 땐 경공을 쓰도록 하고 절대 진흙탕에 빠져서는 안 돼요. 한번 빠지면 묻히기 십상이니 조심하시고요.”

“알겠소!”

사운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왕비마마, 소왕비마마께 만일 무슨 일이라도 나면 이 한낱 장병들의 목숨도 부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만 멈춰주시지요.”

우두머리가 재차 사방화를 말리고 나섰지만, 사방화는 듣기 싫다는 듯 그에게 간단한 손짓만 했다.

* * *

사방화는 사운란과 함께 진흙에 파묻혀버린 여운암을 향해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역시 무공 실력이 뛰어난 이들은 나뭇가지로 진흙에 묻히지 않은 바위들을 찾아 발길을 옮겨가며 무사히 여운암이 있던 곳에 다다랐다.

사방화가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 사운란에게 물었다.

“운란 오라버니, 천재지변일까요, 누군가의 계략일까요?”

사운란이 안색을 굳히며 말했다.

“이 정도 폭우에 산사태가 일어난 거라면 지극히 정상이긴 하오. 보아하니 아무도 살아남지 못한 듯한데. 발밑이 흔들리니 우리도 어서 떠나야 하오.”

“난 천재지변이 아닌 것 같아요. 오라버니, 산 뒤를 살펴봐요.”

사방화의 안색이 일순간 어두워졌다.

“그 말은?”

사운란이 깜짝 놀라 물었다.

“산 뒤에 분명 누군가 있을 거예요.”

사방화는 곧장 산 뒤쪽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사운란도 그녀 뒤를 따랐다.

이윽고 두 사람은 천신만고 끝에 산 정상에 다다랐지만, 그 순간 갑자기 산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사방화가 놀란 사이 부서진 바위가 그녀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방화!”

놀란 사운란이 곧바로 몸을 날린 그때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바위가 그의 등 뒤로 떨어졌다.

“운란 오라버니!”

사방화가 곧장 그를 붙잡았다. 하지만 바위의 충격 때문인지 발밑이 미끄러져 흔들리며 두 사람은 산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자갈과 진흙도 그들을 따라 함께 세차게 떠밀려 왔다.

사운란이 가까스로 고개를 들고 다 쉬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방화, 날 놓으시오.”

그러나 사방화는 입술을 깨물고 아무 말도 없이 그저 그를 붙들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이제 바위보다 더 빠른 속도로 산 아래를 향해 굴러 떨어지고 있었고, 사운란은 사방화의 뜻을 꺾기 위해 거의 애원하듯 말했다.

“방화, 내 말 들으시오. 이대로라면 모두 죽소.”

“운란 오라버니, 오라버니를 절대 놓아줄 수 없단 걸 잘 아시잖아요.”

사방화는 입술을 꼭 물고 간신히 한마디를 내뱉다가, 진흙이 덮치려 드는 것을 보고 급작스레 위치를 바꿔 사운란을 낭떠러지 쪽으로 끌어당겼다.

“방화! 진강 소왕야를 잊은 것이오?”

사운란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잊지 않았어요. 우린 죽지 않아요.”

사방화가 잠시 멈칫하다 말했다.

사방화는 사운란을 낭떠러지로 끌어당기며 거침없이 뛰어내렸다. 두 사람은 그렇게 몸과 발 그 어느 곳도 디딜 곳 없이 비바람에 휘날리며 떨어졌고, 그 뒤로는 자갈이 섞인 진흙이 세차게 떠내려 와 암벽을 따라 흘러내렸다.

“진정 죽는다면? 이 절벽 아래엔 물조차 없소.”

“물이 없어도 죽지 않아요.”

사방화는 꿋꿋하게 고개를 저으며 산사태에 휩쓸려 곤두박질을 치는 이 순간까지도 절대 사운란의 손을 놓지 않았다. 이제 그녀의 비옷은 굴러 떨어지는 사이에 찢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 오래였고, 머리 위 장식 또한 다 사라져있었다. 그러나 거센 비바람에도 그녀의 표정만은 굳셌다. 

“어찌 그리 장담하는 것이오?”

사방화가 말이 없자 사운란은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매섭게 몰아치는 비바람은 뼈와 살을 에는 듯했다.

곧이어 땅에 떨어지려던 그 순간 사운란은 바로 사방화를 끌어안았다. 이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땅에 떨어져 흙탕물로 곤두박질쳤다.

잠시 후, 사방화는 사운란을 끌어내 빗물에 진흙을 씻으며 매섭게 말했다.

“운란 오라버니, 대체 왜 죽으려는 건지 이젠 말씀해 주셔야지요?”

사운란은 입술을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분명 나 혼자 힘으로 깨트릴 수 있는 바위를, 기어이 몸을 던져 막아내면서까지 이렇게 다친 이유가 뭐냐고요! 내가 옆에 있는 한 오라버니를 죽게 내버려 둘 것 같아요? 아니면 나랑 같이 죽고 싶어 이러는 건가요?”

사운란은 고개를 숙인 채 계속 묵묵부답이었고, 사방화는 그런 사운란을 아주 매섭게 노려보았다.

사운란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래서 사흘 밤낮으로 비가 내렸으니 골짜기엔 당연히 물웅덩이가 생길 거란 것도 잊은 건가요? 여긴 인적이 드물어서 여태 쌓여온 낙엽과 흙이 쌓여있었을 거예요. 그러니 그 위에 빗물이 고여 진흙탕이 되면, 그 뒤로 떨어진다 해도 기껏해야 다칠 뿐이지 절대 죽을 일은 없어요. 오라버니, 그런데도 왜 그토록 죽기만을 바란 건가요?”

사운란은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운란 오라버니! 난 오라버니를 가족처럼 생각했는데 날 이리 대하다니요! 내 혼례식 전날 내게 뭐라고 했나요? 이제와 모두 잊었단 말은 마세요. 그게 아니라면 날 그저 속이기 위해 한 말이었나요?”

사방화는 눈시울을 붉히며 사운란을 노려보았다. 그러다 끝끝내 입을 열지 않는 사운란을 보고 그를 밀쳐버렸다. 

사운란은 몸을 휘청거리다 연이어 피를 토해냈다. 

사방화는 조금 전 바위에 맞아 다친 상처로 인해 그가 있던 자리에 이미 핏물이 고인 것을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이내 사방화가 사운란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 끌고 가기 시작했다.

“어딜 가는 거요?”

사운란이 물었다.

“상처를 치료해야지요. 비를 피해야 해요.”

사운란은 말없이 그녀를 따랐다. 

* * *

사방화는 깊은 계곡을 따라 몇 리 길을 걸어 작은 동굴 하나를 발견했다. 동굴은 길고 넓어 족히 서너 명은 들어갈 수 있을 크기였다. 사방화는 곧바로 그곳으로 사운란을 데리고 들어갔다.

날씨가 궂어서, 마른 나뭇가지를 찾아 불을 피우기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사방화는 할 수 없이 내력을 끌어 모아 사운란과 자신의 옷을 말린 뒤 그의 옷을 벗겼다. 그의 등은 이미 피범벅이 되어있었다.

사방화는 치맛자락을 뜯어내고 품에서 약을 꺼내 그의 상처를 치료해주었다. 사운란은 그 순간에도 신음소리 한 번 내질 않았다.

상처를 치료한 후 사방화는 그의 맥을 짚어보았다. 곧바로 그의 미간을 살펴보니 분심술이 발작하려는 듯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곧 사방화가 비수를 꺼내 손목을 긋고 그의 입속으로 피를 흘려 넣으려 하자, 사운란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며 피했다. 

“죽으려거든 다른 데 가서 죽으세요.”

사방화는 결국 화를 내며, 그를 끌어당겨 그의 입안에 억지로 피를 흘려 넣었다. 

주변엔 은은한 약 향과 피비린내가 감돌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사운란의 미간에 보이던 기운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방화는 몸에 힘이 빠져 곧바로 바닥에 쓰러졌다.

“방화!”

“손대지 마세요!”

사운란이 사방화를 붙잡으려하자 그녀는 곧장 소리를 쳤다.

순간 사운란의 손은 허공을 부유했고, 사방화는 손목의 피를 지혈시키고는 힘없이 바닥에 드러누웠다.

사운란은 천천히 손을 떼고 어두운 안색을 한 채 벽에 몸을 기댔다.

그 후로 한동안 그 누구도 아무 말이 없었다. 

한참이 지나, 사방화가 천천히 일어나 앉아 사운란을 바라보았다.

“분심술 때문에 그런 거라면 내가 반드시 방법을 찾아낼게요.”

사운란이 갈라져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살아가는 데에 의미가 없으니, 분심술을 풀고 말고는 급하지 않소.”

사방화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노기 띤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오라버니를 그렇게 둘 것 같아요? 오라버니, 내가 8년간 무명산에 있다가 경성으로 돌아온 지 얼마나 됐다고 이래요? 오라버니를 다시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고요! 설마 벌써 마음이 변한 건가요?”

사운란은 돌연 고개를 들어 사방화를 쳐다보았다.

“누이는 이번 생에서 나와 함께한 지 얼마 되지 않았소.”

사방화가 깜짝 놀라 사운란을 바라보았다.

“그……, 그게 무슨 말이에요?”

사운란은 먼 곳을 보며 떠오르는 기억에 고통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렸다.

“내겐 전생의 기억이 남아 있소.”

사방화는 머리를 맞은 듯 큰 충격에 제대로 서있을 수조차 없었다.

‘운란 오라버니……. 전생의 기억이 남아있다고? 어째서?’

사방화의 안색은 이미 몇 번이고 변하기 시작했고, 그녀는 목이 메이는 것 같은 기분에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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