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6화 산사태
사방화, 사운란, 대장공주는 다시 발길을 돌리다가 마침 잠에서 깨 노 암주의 거처로 오던 금연과 연람을 마주쳤다.
금연이 세 사람을 보자마자 급히 물어왔다.
“어머니, 노 암주께서 머무르시던 집이 무너져 돌아가셨다던데 정말이에요?”
대장공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밤새 밖을 지키던 비구니까지 그렇게 됐단다.”
“아무리 지어진 지 오래되었다고는 하나, 제가 봤을 땐 아주 멀쩡히 튼튼했단 말입니다. 누군가 입을 막으려 일부러 그런 게 아닐까요?”
금연이 물었다.
“이곳 사람을 보내 알아보니 건물이 오래된 데다 며칠째 내리는 비에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 것이 맞는 것 같다고 하더구나. 방화도 집에 깔려 죽은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연아, 이제 어서 짐을 챙겨 집으로 돌아가자꾸나.”
대장공주는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듯 손짓을 하며 말했다.
그러자 금연이 화들짝 놀라 허둥지둥 말했다.
“어머니? 제가 입몽주……. 아니, 아니……! 제가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건 분명 배후에 누군가가…….”
“저 혼자 꿈에서 깨질 못해 사람을 놀라게 하더니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게야? 어서 준비하고 돌아가자. 방화는 너와 동년배인데도 얼마나 점잖은지 모르겠구나. 처음부터 여운암에 오겠다는 네 생떼를 받아주는 게 아니었다. 앞으론 절대 멋대로 하지 못할 것이야.”
대장공주가 금연의 말을 끊었다.
그에 금연은 그저 말없이 사방화만 바라보았고, 사방화도 천천히 대답했다.
“고모님 말씀이 맞아요. 어서 짐을 꾸려 돌아가요.”
금연은 일이 이렇게 마무리되는 것을 원치 않았지만 사방화까지 저렇게 나오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 순간, 연람이 조용히 사방화에게 다가가 그녀의 귀에 대고 말했다.
“어찌 된 겁니까? 분명 노 암주에게 문제가 있다고 우리끼리 얘기했었잖아요. 이렇게 돌연 깔려서 돌아가신 것엔 뭔가 숨겨진 게 있을 겁니다.”
사방화가 말했다.
“더 이상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이대로 경성으로 돌아갈 거예요.”
“아직 아침도 먹지 못해서 배가 고픈데요?”
연람이 배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우선 다과로 배를 좀 채우고 산을 내려가 다시 먹도록 해요.”
“알겠어요.”
사방화의 다독임에 연람도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반 시진이 지나 금연과 대장공주도 떠날 채비를 마쳤고 모두 여운암을 나섰다. 뒤로는 노 암주의 빈소로부터 들려오는 울음소리가 계속 이어졌지만, 여운암을 완전히 벗어나니 그 울음소리도 차츰 옅어져갔다.
비는 계속해서 내렸지만, 지금은 낮이라서 왔던 때보단 더 빨리 내려올 수 있었다.
한 시진이 지나 산 아래 작은 마을에 다다른 일행은 본래 돌아가는 길에 들러야할 곳은 아니었지만, 배를 채우려 잠시 이곳에 들리기로 했다.
일행은 썩 괜찮아 보이는 주루를 고른 뒤, 대장공주의 분부 하에 식사를 하러 들어갔다. 건물은 이런 마을에서 찾아보기 드물게 깨끗하고 세련된 곳이었다. 곧 주변으론 호위들이 건물을 둘러싸고 철저하게 엄호를 했다.
대장공주, 사방화, 금연, 연람, 사운란은 모두 위층 별실로 들어섰다.
그리고 음식을 주문해 반쯤 먹었을 무렵, 돌연 건물 밖에서 사람들과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대장공주가 밖을 한번 바라보곤 말했다.
“장병들이구나. 무슨 일로 저리 급한 게지?”
사방화가 밖을 향해 소리쳤다.
“시화, 시묵! 무슨 일인지 알아봐.”
시화, 시묵은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주 창백해진 얼굴로 돌아왔다.
“소왕비마마! 여운암에 일이 생겼습니다.”
“뭐?”
사방화가 그녀들을 바라보았다.
“한 시진 전쯤 산사태가 일어나, 산 중턱에 위치해있던 여운암이 흙에 모두 파묻혀버렸다고 합니다.”
시화가 말했다.
“뭐?”
금연이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고, 연람도 젓가락을 탁 떨어뜨렸다.
“정확한 것이냐?”
대장공주가 물었다.
“네, 대장공주마마께 아룁니다. 틀림없습니다.”
시화, 시묵이 곧바로 대답했다.
대장공주는 다시 사방화를 보며 말했다.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이냐?”
사방화가 입술을 깨물며 두 사람에게 물었다.
“우리가 산을 내려온 지 갓 한 시진이 지났는데, 관아에선 어찌 한 시진 전에 일어난 일을 이리도 빨리 알았다는 것이냐?”
“비구니 한 분께서 다행히 화를 피해 산을 내려오자마자 관아에 들려 어서 여운암의 사람들을 구해 달라 청했다고 합니다.”
시화가 말했다.
“우리도 얼른 가요.”
금연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우리가 나설 때만 해도 멀쩡하던 곳에서 어찌 갑자기 산사태가 일어난단 말이에요? 게다가 여운암 전체를 파묻어버렸다니 이런 불가사의한 일이 있을 수가! 여운암은 큰 곳은 아니지만 그리 작지도 않은 곳이잖아요.”
연람도 따라 일어섰지만, 사방화는 가만히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곧 대장공주가 겁에 질려 말했다.
“일찍 내려왔으니 망정이지 우리가 산을 내려오던 길이었으면 어쩔 뻔했니? 우선 모두 앉아라.”
“어머니! 이대로 외면하실 겁니까?”
금연의 말에 연람도 덩달아 대장공주를 바라보았다.
“우리가 어찌할 수 있느냐! 이 비를 뚫고 다시 산을 올라가기라도 해야 한단 말이니? 얼마나 위험한 줄 알기나 하고 하는 말이냐? 관아의 장병들이 갔다고 하니 우린 신경 쓸 필요 없다.”
대장공주가 고개를 내저었다.
“거기 있는 사람들은요!”
금연이 말했다.
“열 명이든, 백 명이든 자기 몸 하나 지키지 못하는 여인이 가서 뭘 어쩌겠다는 게냐?”
대장공주의 호통에 금연은 멍하니 선 채 잠시 말문이 막혔다.
잠시 후, 금연이 다시 사방화를 바라보았다.
“새언니!”
사방화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가만히 손 놓고 볼 수만은 없지만, 고모님 말씀처럼 우리가 간대도 아무 도움도 줄 수 없을 거예요. 이렇게 해요. 운란 오라버니, 고모님과 군주님들을 보내고 우리 둘이서 여운암으로 가 봐요.”
“좋소!”
사운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갈 거예요!”
금연이 말했다.
“네가 가서 뭘 하겠단 거야? 허튼소리 말고 잠자코 있어라! 못 간다.”
대장공주가 노기 띤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내 금연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어머니! 제가 여운암에 온다고 하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저 때문에 일어난 일이잖아요. 분명 배후에 무언가…….”
“그 입 다물어! 넌 그저 꿈에서 깨어나지 못했던 것뿐이다. 여운암에 무슨 일이 생기든 너와는 상관없어. 지금 바로 경성으로 돌아간다!”
탁!
대장공주가 탁자까지 내리치며 말했다.
금연도 처음 보는 대장공주의 모습에 놀라 더 이상 말을 잇지도 못했다.
이윽고 대장공주가 다시 사방화를 향해 말을 이었다.
“방화야, 관아에서 장병들을 보냈으니 우린 돌아가자꾸나. 연이와 연람과는 조금 다를지언정 너도 여인이잖니. 만일 네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내 무슨 면목으로 새언니와 강이를 보겠느냐?”
“고모님, 저희가 떠나고 얼마 되지도 않아 일어난 일이니 누군가는 가서 반드시 살펴봐야 합니다. 관아의 장병들이 출발했으니 천재지변인지 누군가 꾸며낸 일인지는 차차 밝혀낼 테지만 만약 누군가의 모략이라면 조금 전 여운암에서 나온 저희도 그 일에 엮이지 않을 수가 없을 겁니다. 염려 마세요. 운란 오라버니가 곁에 계시니 괜찮습니다.”
사방화가 말했다.
“그럼…… 조심해야 한다.”
대장공주가 몹시 망설이며 말했다.
사방화는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시화, 시묵도 곧장 그녀의 비옷을 가져왔다.
그 순간, 연람이 다가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도…….”
“돌아가요. 홀몸도 아니신 후 부인을 걱정시켜서는 안 돼요.”
사방화가 곧장 연람의 말을 끊어버리자, 연람도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곧 사방화가 다시 대장공주를 보며 말했다.
“고모님, 어제 왕부를 떠날 때 어머님께서 제게 호위를 붙여주셨습니다. 고모님과 함께 경성으로 갈 수 있게끔 그 호위들을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럴 수 없다! 새언니께서 네게 보내주신 호위이니, 당연히 너와 함께해야지.”
대장공주가 깜짝 놀라 서둘러 거절했다.
“이리 많은 이들과 함께 산을 오르기란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은위까지 있는걸요. 근래 들어 경성 안팎이 흉흉한 일로 떠들썩합니다. 손 태의께선 대낮에, 한 대인께서는 아무도 모르게 죽임을 당하셨지요. 게다가 금연과 연람은 무공도 익히지 않았으니 제 마음이 편하질 않습니다. 고모님, 이번만큼은 제 말을 들어주세요.”
“이 아이가……. 그럼 너는 어떡하니? 네가 더 위험하잖니.”
대장공주는 사방화의 말에 감동해 말까지 더듬었다.
“전 괜찮습니다. 가요, 오라버니.”
사방화는 웃으며 말한 뒤, 사운란을 바라보았다.
사운란이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둘은 곧장 건물을 빠져나가 말에 올랐다. 그리고 사방화는 시화, 시묵을 비롯한 시녀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호위들은 전부 대장공주에게 넘겨주었다.
두 사람이 떠난 뒤, 대장공주가 한숨을 내쉬며 금연과 연람에게 물었다.
“더 먹을 것이냐?”
금연과 연람은 곧장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도 더 들어가지 않는구나. 출발하자.”
대장공주가 말했다.
금연은 계속 근심을 지우지 못한 채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어머니, 이렇게 새언니를 보내실 겁니까? 이대로 경성에 돌아가면…….”
“너희는 모른다. 네가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게 그리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니? 대장공주부가 이 일에 엮이지 않길 바라기에 손을 떼는 것이다. 올해 경성이 이리도 흉흉하니 한시라도 마음을 놓을 수가 있어야지.”
대장공주 역시 걱정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어머니, 그럼 누가 뒤에서 이런 일을 꾸민 건지 아십니까?”
금연이 대장공주의 곁으로 다가와 묻자, 연람도 금세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대장공주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누구의 짓인지는 모른다. 서산 군영에서 일이 벌어지고 난 후, 손 태의와 한 대인에 이어 너까지 이런 일에 휘말렸으니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느냐? 방화가 있었으니 살았지, 아니었더라면 상상도 두렵구나.
보아하니 엄청난 인물이 오랫동안 꾸며온 계략이 분명하다. 더 큰 음모가 있을지도 모르니 우리는 한 걸음 물러나는 편이 좋겠어.”
“하지만 새언니는 순전히 저 때문에 온 것이잖아요. 우린 이렇게 돌아갈지라도 새언니는…….”
“저도 소왕비마마가 마음에 걸립니다.”
금연과 연람은 너나할 것 없이 사방화를 걱정했다.
“네 일 때문에 여운암에 발을 들인 게 아니라도, 저 아일 빼내긴 힘들 거다. 충용후부 아가씨가 이젠 영친왕부 소왕비라는 자리에 앉았으니, 방화는 너희들과는 달라.”
대장공주의 깊은 한숨을 끝으로 금연, 연람도 더 이상 아무 말이 없었다.
“가자!”
대장공주가 비옷을 입기 시작하자 금연, 연람도 바로 대장공주를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
곧이어 대장공주부, 영친왕부의 호위가 모여 거의 몇 백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우르르, 마을을 나서기 시작했다.
* * *
사방화, 사운란은 마을을 벗어나 곧장 여운암으로 향했다. 그러다 10리 정도 갔을 즈음 앞서가던 관아의 장병들 무리를 따라잡았다.
“거기 누구시오? 지금부터 그 누구도 여운암으로 향해선 아니 됩니다!”
장병의 우두머리가 소리치자 사방화가 고개를 돌려 시화를 바라보았다.
시화는 곧장 사방화의 뜻을 알아차리고 뒤돌아 크게 소리쳤다.
“영친왕부 소왕비마마께서 여운암이 산사태에 변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살펴보러 가시는 길입니다!”
“영친왕부의 소왕비마마요?”
우두머리가 사방화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