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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3화 (683/978)

683화 심야에 향하는 길 

연람은 밤길에 백 리나 떨어진 곳을 가야한다는 생각에 걱정이 태산이었지만 사방화의 시녀 여덟 명에 영친왕비가 붙여준 호위 이백 명, 진옥의 곁을 지키는 최고의 은위와 나머지 은위 백 명을 보고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그렇게 연람은 뛰어난 기마 실력으로 아주 빠르게 영친왕부를 벗어났다.

말 2마리가 막 길을 빠져나왔을 때쯤, 말을 탄 누군가가 앞에서 길을 막고 있는 것이 보였다. 사방화는 그 사람을 확인하고 급히 말고삐를 당겼다.

“운란 오라버니,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비옷을 입고 있는 사운란은 이미 이 자리에서 한동안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누이가 여운암에 간다기에 따라 나왔소.”

사운란이 말했다.

“몸도 안 좋으시면서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시려고…….”

사방화는 깜짝 놀랐다.

“분심만 일어나지 않는다면 문제없소. 소왕야께서 안 계시니 내 마음이 편치 못해서 나온 거라오.”

사방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연람은 사운란을 이리저리 살펴보다 사방화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소왕비마마는 걱정해주시는 분도 참 많으십니다. 저는 오라버니가 떠나신 후로는 아무도 찾지 않던데.”

사방화가 조용히 웃음을 터뜨렸다.

“영강후부에도 동족 친지가 계시지만, 군주와 친하지 않은 것뿐이잖아요.”

연람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맞습니다. 그간 부모님 밑에서 오냐오냐 자란데다 제 신분에만 기대 떵떵거리며 살다보니, 오라버니가 떠나신 후론 제 곁엔 아무도 없더라고요.”

사방화가 그녀의 손을 토닥이며 말했다.

“오라버니께선 꼭 돌아오실 테니 너무 걱정 말아요.”

연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 내리는 밤길엔 사방화, 사운란, 연람이 말을 타고 시화와 시녀들, 그 뒤로는 200명의 호위들이 길을 이었다.

거대한 행렬은 성문을 나서 관도에 올라 곧장 여운암으로 향했고, 어느 정도 떠나왔을 즈음 앞쪽에 한 사람들과 말을 발견했다.

“대장공주부의 대열일 겁니다.”

연람의 말에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연람이 한 대열을 따라잡고 외쳤다.

“앞쪽엔 대장공주마마가 계시지?”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호위부병 대장이 뒤를 돌았다.

“누구시오?”

“영친왕부 소왕비마마와 영강후부 연람이다. 여운암에 계신 금연 군주님께 병환이 생겼다기에 보러 가는 길이다.”

호위대장은 그제야 연람, 사방화, 사운란을 확인하고 마차로 다가가 이를 알렸다. 그러자 마차 휘장이 걷히며 대장공주가 얼굴을 내밀었다.

“이리로 오실 수 있게 길을 비켜드려라.”

호위대장이 즉각 길을 내주자 사방화와 연람이 말을 타고 앞으로 왔다.

사방화가 먼저 인사를 올렸다.

“고모님!”

대장공주는 진강의 고모이니, 사방화도 그에 맞춰 고모라 불러야 마땅했다.

연람도, 사운란도 함께 다가와 뒤이어 인사를 올렸다.

“대장공주마마!”

대장공주는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얼굴에 근심이 너무 가득해 안색이 심각할 정도로 나빠 보였다.

“그래, 연이 때문에 여운암에 가는 길이니?”

연람은 소식을 듣고 사방화를 찾아갔단 이야기를 해준 뒤, 대장공주를 안심시키려 말을 덧붙였다.

“소왕비마마와 금연 군주님, 그리고 저는 서로 친자매나 다름이 없습니다. 소왕비마마의 의술이라면 문제가 없을 테니 이렇게 서둘러 달려왔지요.”

그에 대장공주도 사방화의 의술이 높다는 것을 떠올리며 곧장 답했다.

“그래, 그래! 내 정신이 없어 태의 두 분만 더 모셔오라 했다. 정말 고맙구나, 어서 가자!”

“고모님, 저희가 먼저 앞장서겠습니다.”

사방화가 말했다.

그러자 대장공주도 곧장 소리쳤다.

“나도 말을 타야겠구나. 여봐라! 말을 대령하라!”

“대장공주마마, 몸도 편치 않으신데……. 그냥 마차에 타고 오시지요.”

연람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내 소싯적 기마와 궁술은 어느 여인에게도 지지 않았다. 이 정도 100리 길은 거뜬하니 걱정 말거라.”

대장공주의 답에 연람도 더 이상 아무 말이 없었다.

곧 말 한 필을 내오자 대장공주는 비옷을 걸치고 사방화에게 말했다.

“가자꾸나.”

사방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화와 시녀들에게 말했다.

“고모님을 안전하게 보호해다오.”

“네, 소왕비마마.”

사방화와 연람, 사운란이 선두에 앞장을 서고, 대장공주는 이들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시화와 시녀들은 대장공주를 안전하게 둘러쌌고, 호위들도 꼬리를 물고 그 뒤를 따랐다. 이 밤, 수백 명의 행렬은 거리를 가득 다 메울 정도였다.

* * *

한 시진이 지나자 완전한 밤이 찾아왔다.

빗길이 더 험난해지자 사방화, 연람, 사운란은 야명주를 꺼내 들었다. 그에 사방은 순식간에 환하게 밝아졌다.

행렬은 그 후로 반 시진 만에 관도를 빠져나와 산길에 올랐다.

하지만 2, 3일간 밤낮으로 내린 비에 길바닥엔 자갈이 가득해서 말의 속도도 더뎌지고 있었다. 사방화는 한번 산길을 둘러보다가 연람에게 물었다.

“여운암엔 가본 적 있어요?”

연람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 모습에 사운란이 대신 답을 이었다.

“여운암까지는 이제 삼십 리가 남았소. 하지만 산길이 험하고 가파르니 말에서 내려 걸어 가야할 수도 있겠소.”

대장공주도 연이어 입을 열었다.

“연이를 보냈을 땐 날이 좋아 길이 이렇게까지 험난하진 않았는데 말이다. 사실 여운암보다 좋은 암자는 더 많았지만, 여운암은 가는 길이 험해 잡인도 드물고 해서 고른 곳이었다.”

사방화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좀 더 나아가자 역시나 길이 험해졌다. 반 시진 정도는 어떻게 버텨보았지만 도저히 답이 나오질 않아 모두 말에서 내려 걷기 시작했다.

그래도 사방화와 연람은 거뜬해보였지만 대장공주는 무척 힘겨워 보였다.

어느 정도 걸었을 즈음, 결국 사방화가 대장공주를 만류했다.

“고모님, 그만 말에 오르시지요. 시화, 시묵에게 말을 끌라 하겠습니다.”

대장공주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시화와 시묵은 대장공주가 탄 말을 끌었다.

아무리 삼십 리 산길이라 해도, 맑은 날이라면 한 시진 반 정도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하지만 지금 시각은 밤인데다 비까지 내리고 있고, 거기다 대장공주까지 살피며 가야해서 보통 험난한 여정이 아니었다.

결국 일행은 두 시진이 넘어서야 여운암에 도착했다. 길이 고되긴 했지만 모두 아무런 사고 없이 무사히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 * *

날은 매우 깊어져, 주변엔 칠흑 같은 어둠만 가득했다.

산 중턱에 자리한 여운암의 작은 뜰에는 불이 밝혀져 있었다. 몇 사람들은 곧장 말에서 내려 산길을 올라가 여운암의 대문을 두드렸다.

문을 몇 차례 두드리자 남자 하인 한 명이 나왔다. 그러다 대장공주를 발견하곤 금세 만면에 화색을 띠었다.

“대장공주마마! 오셨습니까?”

“그래, 어서 군주에게로 안내해다오.”

대장공주는 이미 힘이 빠질 대로 빠진 터라 힘없이 손짓만 했다.

암자로 들어서자 비구니가 나와 대장공주에게 금연의 상태를 알렸다. 비구니 의 말로는 아침에 금연이 나오지 않기에 경서를 베끼다 지쳐 잠든 줄 알고 깨우지 않았으나, 점심때가 되어서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아 서둘러 대장공주부에 서신을 전했다고 했다.

“지금은 어떠한가?”

대장공주가 곧바로 물었다.

“아직 깨어나지 못했습니다.”

비구니의 말에 대장공주는 마음이 더 급해졌다. 어제 정오에 잠들어 오늘 한밤중까지 깨어나지 못하는 것은 결코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모두가 마당으로 들어서자, 비구니는 먼저 마당의 북쪽에 있는 본채로 급히 들어갔다. 

본채엔 등불이 밝혀져 있고 금연의 몸종인 한 시녀가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대장공주는 서둘러 방으로 들어섰고, 사방화와 연람도 즉각 그 뒤를 따랐다. 그러나 사내인 사운란은 바깥마당에서 자리를 지켰다. 

* * *

금연은 침상에 깊이 잠들어있었다.

“연아! 이 어미가 왔다. 어서 일어나보거라!”

대장공주가 침상으로 달려와 금연을 흔들며 소리쳤지만, 금연은 죽은 듯이 잠들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대장공주는 금연을 한참동안 흔들어보다가 급히 사방화를 돌아보았다.

“방화야! 대체 무슨 일인지 어서 좀 봐주겠느냐?”

사방화는 금연을 자세히 살펴본 후 맥을 짚어보았다.

그때, 내내 금연 곁을 지키며 시중을 들던 시녀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어제 군주께서 점심을 드신 후 피곤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군주께서 여운암에 와 적응을 하시느라 지치신 것 같아, 감히 깨우지도 못하고 잠을 청하게 해드렸습니다.

그러나 오늘 아침까지 한 번도 깨지 않으셔서 뭔가 이상하다 싶어 암자에 계신 의술에 능통한 비구니 한 분더러 와 달라 청했습니다. 스님께선 군주를 살피시곤 병환이 있는 것 같지도 않지만, 또 잠들어 있는 것 같지도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조금 더 지켜보려 했으나 도저히 걱정을 거둘 수 없어 서신을 보냈사온데, 모두 이 미천한 노비가 군주를 잘 돌보지 못한 탓입니다. 대장공주마마, 소인을 죽여주시옵소서!”

시녀는 눈물을 쏟으며 무릎을 꿇었다.

대장공주는 내내 사방화만 지켜보다가, 급한 마음에 시녀에게 손짓만 했다.

“그래, 어서 일어나라. 일단 소왕비께 어찌 된 영문인지 살펴보게 하고 그때 가서 얘기하자꾸나. 실로 네게 잘못이 있다면 용서치 않을 것이다.”

“네! 대장공주마마.”

시녀가 급히 몸을 일으켰다.

사방화는 금연의 맥을 짚으며 입술을 깨물고는 천천히 손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대장공주는 초조한 눈빛으로 사방화를 바라보았다.

“왜? 무슨 병환이라도 있는 것이니? 알아낼 수 있겠어?”

사방화는 대장공주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딸 걱정에 초췌해진 어머니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여기서 자칫 잘못해 큰일이 났다는 이야기라도 했다간 대장공주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태세였다.

사방화는 고민 끝에 살짝 고개만 끄덕였다.

“무슨 병인지 알아냈다는 거니?”

대장공주는 병명을 알아냈다는 것에 잠시 기뻐하다 사방화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대체……, 무슨 병인 것이야? 살릴 수 있겠어?”

연람도 초조한 마음에 서둘러 입을 열었다.

“설마……, 살리기 힘든 건 아니겠지요?”

사방화가 고개를 저었다.

“고모님, 군주께선 그저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제게 방법이 있어요. 어려운 건 아닙니다.”

대장공주가 그제야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럼 어서 깨워다오.”

연람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 사방화의 안색이 신경 쓰였다.

“어렵지 않다고 하면서 어찌…….”

사방화가 다시 대장공주를 보며 말했다.

“고모님, 운란 오라버니의 도움을 받아 힘을 좀 써야 합니다. 하지만 규수의 방인지라 들어오지 못한 듯합니다.”

“그래, 그래. 연이만 살려낼 수 있다면 불가능할 게 뭐가 있겠느냐.”

대장공주가 말했다.

“고모님께서 윤허해주셨으니 운란 오라버니를 들이겠습니다! 그러나 아주 조용히 치러야 해서 모두 나가주셨으면 합니다.”

사방화가 말했다.

“그래, 모두 나가자꾸나!”

대장공주는 곧장 뒤돌아 밖으로 향했다.

이내 연람이 사방화를 보며 말했다.

“정말 제 도움은 필요 없는 겁니까?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사방화가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아요. 밖에 잘 계셔주시면 돼요. 여긴 아무도 들어와선 안 돼요.”

“알겠습니다. 그럼 금연 군주님을 부탁하겠습니다.”

연람과 함께 모든 이가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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