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2화 하늘의 뜻, 인과(因果)
본원에 다다라 문턱을 넘자마자 영친왕비가 와서 사방화의 손을 잡아왔다.
“강이는? 같이 오지 않았느냐?”
“네, 이 공자님과 한 대인 댁에 시신을 전해드리고, 손 태의의 부에서 조사를 할 것이 있어 늦으실 듯합니다.”
영친왕비가 사방화를 앉히며 물었다.
“한 대인은 어찌하다가 그리 됐다더냐? 알아낸 것이라도 있니?”
“아주 가늘고 긴 바늘에 심장을 찔려 돌아가셨습니다. 범인은 알아내지 못했고요.”
사방화가 말했다.
“그런 바늘로 사람을 죽일 수가 있다고? 어떻게?”
영친왕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사방화가 고개를 저었다.
“너와 강이, 목청이 함께 가지 않았느냐? 이런 총명한 이들이 갔는데도 알아내지 못했다고?”
영친왕비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엄청난 무공을 가진 자가 내력을 실어 바늘로 찔렀다는 것 정도만 알 수 있었습니다. 한 대인이 머물렀던 방과 창가, 침상까지 옮겨가며 살펴봤지만 아무런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사방화의 말에 영친왕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손 태의에 이어 한 대인까지……. 순식간에 중한 직책을 맡은 두 관원이 세상을 떠났구나. 범인을 찾아내지 못했으니 얼마나 마음이 쓰일꼬. 그 이윤이란 자는 어찌 됐느냐?”
사방화는 이윤과 범양 노씨 어르신들에게 최면술을 썼던 이야기를 해줬다. 그러자 순간 영친왕비는 급변한 안색으로 사방화의 손을 붙잡았다.
“최면술? 방화야, 최면술을 써서 이윤과 범양 노씨 사람들의 속마음을 말하게 했다는 말이더냐?”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영친왕비의 얼굴이 심각한 근심으로 물들었다.
“이 일이 조사에 들어갔다는 게 알려지면 방화 네가 최면술을 썼던 것도 알려지게 될 텐데…….”
사방화가 영친왕비를 보며 물었다.
“어머님, 이 최면술에 대해 아시는 게 있으십니까?”
영친왕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하 모든 술법을 기록해둔 유일한 고서적 하나에 최면술이 적혀있다고 들었다. 그 고서적은 세 권으로 나뉘어져 각각 무명산, 황궁, 충용후부에 있다더구나.”
사방화는 깜짝 놀라 일순간 멍해졌다.
영친왕비는 다시 사방화의 손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방화야, 네가 집을 떠나있던 일을 누가 알고 있느냐?”
사방화가 잠시 생각하다 답했다.
“충용후부, 영친왕부의 친지들과 이목청 공자님, 그리고 태자전하도 아실 겁니다.”
영친왕비는 짙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앞으로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충용후부의 아가씨가 손 태의와 경성의 검시관들도 하지 못하는 것을 할 수 있다는 건, 그리 좋은 일이 아니야.”
사방화는 입술을 깨물었다.
“염려 마세요, 어머님. 조심하겠습니다.”
영친왕비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목소리를 더 낮춰 물어왔다.
“무명산에 있는 그 고서적은 네 손에 있느냐?”
“그렇습니다. 황궁에 있는 것도 가져오진 않았지만 읽어본 적은 있습니다.”
“그럼 그 고서적 세 권을 다 읽어보았고, 통달했단 말이니?”
영친왕비의 물음에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영친왕비는 잠시 침묵하더니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늘의 뜻이로구나.”
사방화가 영친왕비를 바라보았다.
“그 고서적은 매족의 가보처럼 내려온 뿌리 깊은 물건이라 알려져 있지. 천 년 전, 매족은 속세에 알려지지 않고 은둔하며 살다 비로소 몇 백 년 전에야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매족은 만물 생명의 핏줄과 범상하고 엄청난 주술을 가지고 있어 눈에 띄었다. 이 대륙에 살아가는 이들은 무공을 겸비하긴 해도, 매족의 혈통을 가진 이 앞에서는 감히 그 상대가 되지 못했지. 이런 엄청난 힘을 가진 사람들을 두고 각 나라의 권력자들이 어찌 나올 것 같으니?”
사방화는 조용히 이야기를 듣다 입을 뗐다.
“그 힘을 빼앗거나, 아예 파멸을 시키지 않을까요?”
“그래, 매족은 토사구팽(兎死狗烹)의 길을 걷겠지. 머릿수가 많지도 않은 데다 세속을 떠나 살았으니 천하를 갖기 위한 욕심도, 살아남으리란 보장도 없을 테니까. 그러니 누군가에게 이용되는 것이 아니면 파멸뿐이지 않겠니?”
사방화는 심장이 내려앉는 듯했다.
“매족의 파멸은 하늘의 뜻이 아니라, 사람이 저지른 것이란 말씀이십니까?”
“하늘의 뜻은 이미 정해져 있지. 매족과 각 나라의 권력자들 각각의 이유가 모여 어떤 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모든 것이 이 인과에 따라 일어나는데,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라 말할 수 있겠니?
방화야, 너는 매족의 피가 흐르는 데다 그 고서적까지 완벽히 통달했는데, 내가 어찌 마음이 편하겠느냐. 난 그저 너와 강이가 평범히 무탈하게만 살아가길 바랄 뿐이다. 사소한 일에도 조심 또 조심해야 해.”
영친왕비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한동안 말이 없던 사방화가 곧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세요, 어머님. 조심 또 조심하겠습니다.”
영친왕비가 사방화의 손을 가만히 토닥였다.
“법불사에서 불이 난 후부터 손 태의와 한 대인의 죽음까지 이른 걸 보니, 뼛속 깊이 잔인하고 흉악함으로 가득 찬 이들이 이 모든 짓을 꾸미고 있는 게 분명하구나. 폐하도 대체 무슨 심사인지 모르는 판국에 강이까지 저리 두 손 두 발 걷어붙이고 나섰으니. 강이 성격이라면 신경도 안 쓰거나 한번 물면 끝이 보일 때까지 파고들 테니, 앞으로 어떻게 될지 그저 앞이 캄캄하구나.”
“아버님은요?”
사방화가 영친왕비를 보며 물었다.
“네가 준 약을 드시고 잠드셨다. 이대로 조정에서 물러날 수 있다면 참 좋겠구나.”
사방화는 그렇게 영친왕비와 몇 마디 말을 더 나누다 낙매거로 돌아갔다.
* * *
사방화가 낙매거에 돌아와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을 그때, 희순이 뜻밖의 소식을 전해왔다. 연람이 찾아왔다는 소식이었다. 영강후도 집으로 돌아갔는데 연람이 이 시간에 웬일이란 말인가.
“응, 연람 소군주를 이리로 모셔.”
희순은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향했다.
뒤이어 들어온 연람은 안색이 몹시 좋지 않아보였다.
“무슨 일이에요? 후 부인께 태기라도 있는 건가요?”
사방화가 곧바로 물었다.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집으로 돌아오셔서 이윤 오라버니가 무사하다는 소식을 전해주셨습니다. 소왕야께서 이윤 오라버니를 영친왕부로 모셔갔다는 소식을 듣고, 소왕야와 소왕비마마께 감사인사를 드리러 오려 했지요. 그런데 그보다 더 급한 일이 있어 이렇게 혼자 오게 됐습니다.”
연람이 다급히 이야기했다.
“무슨 일인데요?”
사방화가 물었다.
“금연 군주님께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연람의 대답에, 사방화가 깜짝 놀랐다.
“네? 금연 군주님은 저 멀리 백 리 밖에 있는 여운암으로 가시지 않으셨나요? 무슨 일이라니요?”
“어제 오후부터 지금까지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시질 않는답니다. 아랫사람들이 곧장 경성으로 서신을 보내 대장공주마마께서도 이를 아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아예 난리가 나버렸고요. 아시다시피 대장공주마마께선 금연 군주님을 가장 애지중지 하시지 않습니까?
저도 소식을 듣고 대장공주마마를 따라 여운암으로 가려 했지만, 의술을 알지도 못하는 제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급하게 소왕비마마를 찾아온 것입니다. 손 태의도 돌아가셨으니 그만한 태의를 찾을 수도 없고요.”
연람이 말했다.
“그 소식은 언제 들은 건가요?”
사방화가 물었다.
“조금 전이요. 대장공주부에선 지금 한창 떠날 채비를 하는 중입니다.”
연람이 말했다.
사방화는 금연과 연람에게 무슨 목적이 있든, 일단 도와주는 것이 급선무라 생각했다. 그녀들은 자신을 따라 굳이 황궁으로 들어와 이틀간 궂은일까지 겪으며 자신의 곁을 지켜준 고마운 이들이었다. 그러니 사방화는 당연히 금연이 위험해지는 걸 이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래요, 내 의술이라면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예요. 마차는 너무 느리니 말을 타고 가도록 해요.”
연람도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서 환복부터 하고 나오세요.”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인 후 시화, 시묵에게 말했다.
“어머님께 연람 소군주와 함께 여운암에 다녀오겠다고 전해드리거라. 옥작 공자에게도 한 대인의 집으로 가 소왕야께 이를 알려드리라 부탁드리고. 또 희순에겐 말을 준비해달라고 전해줘.”
“예! 말씀 받들겠습니다.”
시화, 시묵이 즉각 떠나고 사방화는 방으로 들어와 옷을 갈아입었다.
그때, 품죽이 방으로 들어와 사방화에게 말했다.
“소왕비마마, 저희도 함께 가겠습니다. 시화, 시묵을 제외한 나머지는 줄곧 왕부에서 한가롭게 지내고 있었으니 이제 저희가 나서야지요. 사 후야께서 저희를 이곳에 남겨두신 것도 다 소왕비마마를 지켜드리기 위함입니다. 날도 어두운데다 비까지 내리고 있어 소인들의 마음도 편치 않습니다.”
사방화는 잠시 생각을 하다 갑자기 질문을 했다.
“너희 여덟 명은 어릴 적부터 진법과 검법을 익혔다고 했었지?”
“네, 실력이 뛰어나진 못하지만 여덟 명이 힘을 합친다면 경가와 같은 고수도 저희를 당해낼 순 없을 겁니다.”
“좋아, 연람 소군주께도 비옷을 드리고 너희도 잘 챙겨 입고 날 따라오너라.”
사방화의 허락이 떨어지자 품죽이 기뻐하며 곧장 달려 나갔다.
사방화도 옷을 다 갈아입고 늘 품에 지니고 다니는 약병을 한번 확인한 후 밖으로 나왔다.
“소왕야께서 허락해 주시겠지요?”
연람이 막 나온 사방화에게 물었다.
“네, 그럴 거예요.”
사방화가 웃으며 답해도 연람은 여전히 걱정스런 눈으로 하늘을 올려봤다.
“밤길인데다 이리 비까지 오니…….”
“괜찮다니까요.”
사방화가 야명주(*夜明珠: 어두운 곳에서 환히 빛나는 구슬) 두 알을 꺼내, 한 알을 연람에게 건넸다.
“네, 이거라면 끄떡없겠습니다.”
연람이 야명주를 받아들며 말했다.
그때, 품죽과 시녀들이 준비를 다 마치고 연람에게 줄 비옷을 챙겨 나왔다. 연람도 고마워하며 서둘러 비옷을 챙겨 입었다.
“역시 소왕비마마께선 저와는 달리 철저하십니다.”
사방화도 조용히 미소를 지어주며 함께 비옷을 입었다. 마침 멀리에선 이곳으로 막 돌아오고 있는 시화, 시묵도 보였다.
“소왕비마마, 영친 왕비마마께서 호위 이백 명을 준비했으니 반드시 함께 데려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흉흉한 일도 많이 일어나는 데다 밤길이라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고, 꼭 데려가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하셨습니다.”
시화가 말했다.
“응.”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소왕야께 가신 옥작 공자님만 돌아오시면 바로 출발할 수 있습니다.”
“그래, 너희도 단단히 잘 챙겨 입고 나와. 우리는 먼저 나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사방화의 말에 시화, 시묵은 고개를 끄덕인 후 곧장 비옷을 입고 나갈 채비를 했다. 머지않아 그녀들도 낙매거를 빠져나왔다.
연람은 문득 고개를 돌려 뒤따르는 시녀 여덟 명을 바라보았다. 연람 역시 사방화와 진강의 혼례 날 이 여덟 명의 무공실력을 직접 확인했던 바가 있었다.
곧 낙매거를 나와 대문에 다다르자, 때마침 옥작이 급히 달려오는 게 보였다.
“형수님! 형님께서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저와 월낙, 태자전하의 은위 백 명 모두 형수님을 따라가라 하셨습니다.”
사방화가 깜짝 놀랐다.
“응? 월낙이랑 태자전하 은위들까지?”
“네, 진강 형님께서 금연 군주님은 황족이시니 태자전하께서 힘을 쓰셔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 월낙도 함께 왔습니다.”
옥작이 손가락으로 뒤쪽을 가리켰다. 그러자 월낙이 곧장 모습을 드러내고 사방화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인사를 올렸다.
“소왕비마마!”
“그래, 태자전하께 말씀은 드리고 온 것이냐?”
사방화가 물었다.
“예, 태자전하께서도 소왕야의 뜻을 따르라 하셨습니다.”
“그래, 좋다.”
사방화의 손짓에 월낙은 다시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췄고, 사방화는 다시 연람에게 말에 올라타라는 손짓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