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7화 바늘로 심장을 찌르다
사방화가 심각한 눈빛으로 진강을 바라보았다.
“소왕비와 함께 즉시 군영으로 가겠다고 전하라.”
진강도 안색을 굳히며 말했다.
희순은 곧장 답을 하고는 총총걸음으로 물러났다.
이어 쾅,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격분한 영친왕이 탁자를 내리친 것이었다.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조정 훌륭한 인재인 손 태의와 한 대인이 연일 이렇게 남의 손에 목숨을 잃다니, 어떤 놈이 이리도 악독한 것이냐!”
“흥분 좀 가라앉히시고 앉으세요. 폐하께선 궁에 잘 계신데다 서산 군영에 있는 태자가 우리 아이들을 불러 모았으니 이제 아이들에게 맡기면 됩니다.”
영친왕비가 영친왕을 말리며, 사방화와 진강에게도 당부의 말을 이었다.
“되도록 은위를 많이 데리고 조심해서 다녀오너라.”
“염려 마세요, 어머님.”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 대인처럼 그리도 강직한 관리가 허무하게 가버리다니.”
영친왕비가 탄식하며 말했다.
진강은 안색을 굳힌 채 사방화와 함께 방을 나섰고, 시화, 시묵과 옥작이 그 뒤를 따라나섰다.
* * *
서산 군영으로 가는 길에 대단히 챙겨갈 물건은 없어서 진강과 사방화는 곧장 부 입구로 향했다. 대문 앞엔 희순이 일찌감치 준비해둔 마차가 있었다. 이내 두 사람이 마차에 오르자 시화, 시묵, 옥작은 마차를 출발시켰다.
마차가 성 입구에 다다랐을 즈음, 우상부 마차가 보였다. 여태 이곳에서 사방화와 진강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했다.
이목청이 곧 마차에서 고개를 내밀어 인사를 건넸다.
“서산 군영으로 가시지요? 저도 갑니다.”
옥작이 뒤돌아 진강에게 말을 전했다.
“사촌 형님, 이 공자님께서도 군영에 함께 가신답니다.”
“소식이 참 빠르구나. 함께 가자.”
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옥작이 길을 가로질러 먼저 성을 나섰고, 이목청의 마차는 그 뒤를 따랐다. 두 마차는 그렇게 나란히 성을 빠져나와 관도를 타고 서산 군영으로 향했다.
이틀 내내 내리는 비로, 관도엔 사람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하여 마차는 비를 맞으며 인적이 없는 관도를 질주해 달려갔다.
반 시진 후 산길로 접어든 마차는 거대한 바위를 맞닥뜨렸던 곳에 다다랐다. 옥작, 시화, 시묵은 정신을 집중해 사방의 동태를 살폈지만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주변은 아주 평온했다. 늑대 무리를 만났던 자리도 무난히 지나쳤다. 서산 군영으로 가는 길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한 분위기로 흐르고 있었다.
군영을 눈앞에 두고 결국 옥작이 시화, 시묵에게 운을 뗐다.
“살수가 없어. 너무 이상하단 말이야.”
시화, 시묵이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
“좋은 거 아닌가요?”
“그렇긴 하지만 이상해서 말이지.”
옥작이 머리를 긁적였다.
시화, 시묵은 날이 밝기도 전에 경가가 보내왔던 서신을 떠올리며 마차 안쪽을 흘낏 보고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 * *
마차는 군영의 대문 앞에 다다라 멈춰 섰다.
반나절이나 문전박대를 당했던 어제와는 달리 군영의 대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그때, 장병 하나가 여러 병사를 거느리고 오다가 진강과 사방화가 도착한 것을 보고 바로 인사를 올렸다.
“소왕야, 소왕비마마.”
진강과 사방화는 마차에서 내려 안쪽을 살펴보았다. 군영은 아주 조용했고 비 때문인지 분위기는 지나칠 정도로 고요했다. 스산한 것이 아니라 고요하기만 한 이 분위기는 결코 좋게 느껴지진 않았다.
진강이 고개를 끄덕이며 안쪽으로 향했다.
뒤이어 이목청이 마차에서 내리자, 장병이 말했다.
“태자전하께서는 소왕야와 소왕비마마만을 청하셨기에 이 공자님께선…….”
“조사를 돕기 위해 온 것이다.”
진강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답했다.
장병은 그 말을 듣자마자 곧장 이목청을 군영 안으로 들여보내주었고, 이목청은 우산을 쓴 채 웃으며 진강과 사방화를 따라 안쪽으로 향했다.
세 사람이 모두 들어가자 군영의 문은 천천히 닫혔다.
연무장을 지나 영전에 다다르니 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오권이 보였다.
“소왕야, 소왕비마마, 드디어 오셨군요. 이 공자님께서도 오셨습니까.”
이목청도 웃으며 인사했다.
곧이어 진강이 오권을 흘낏 쳐다보자 그는 급히 문을 열었다.
“태자전하께선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한 대인께서 이리도 소리 소문 없이 하루아침에 명을 달리하시다니 가여워서 어쩐답니까? 소왕비마마께서 얼른 한번 살펴주시지요.”
진강이 사방화와 함께 안으로 들어섰다.
안에는 진옥, 좌상, 영강후, 범양 노씨 어르신들이 일제히 앉아있었다.
진옥은 진강과 사방화를 보고 서둘러 일어났다. 그의 혈색은 어제보다 훨씬 더 나빠 보였다.
“한 대인은 방에 있소.”
진강은 진옥을 향해 차디찬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 군영에서 진을 치고 계시던 분이 황태자전하신데 소리 소문도 없이 사람이 죽어나갔다? 좀 웃기지 않는가?”
진옥이 입술을 오므리며 말했다.
“밤새 그 어떤 인기척도 듣지 못했다.”
오권도 곧장 답했다.
“소왕야, 소인이 장담할 수 있습니다. 밤새 태자전하의 방을 지키고 있던 소인도 아무 인기척도 듣지 못했사옵니다. 영강후, 좌상 대인께서 태자전하의 옆방에 머무르셨고 한 대인께선 영강후 대인 건넌방에 계셨습니다.”
영강후도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입을 열었다.
“부인이 걱정돼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으나 한 대인 방에선 그 어떤 인기척도 듣지 못했소. 아침에 일어나서야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소.”
“한 대인 건넌방에는 누가 있었습니까?”
진강이 물었다.
“소왕야께 아룁니다. 제가 머물렀습니다.”
진강과 사방화를 안까지 안내했던 장병이 말했다.
진강은 그를 슬쩍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곧 오권은 진강과 일행을 이끌고 한술이 있던 방으로 안내했다. 시위대들은 그 앞을 지키고 있다가 진강과 진옥을 보고는 서둘러 문을 열어주었다.
진강이 가장 앞장서서 안으로 들어갔다. 사방화는 진강의 뒤를 따라 문턱을 넘었다. 장막이 걷힌 침상 위, 누워있는 한술이 보였다.
진강은 먼저 침상으로 가 한술을 자세히 살핀 뒤 사방화에게 눈짓을 했다.
한술은 괴로운 표정도 없이 마치 잠든 것 마냥 아주 평온한 모습을 하고 죽어있었다. 이내 사방화가 진강에게 말했다.
“몸을 뒤집어 주세요.”
진강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술의 몸을 조심히 뒤집었다.
옷을 입은 채로 잠든 까닭에 여기저기 구겨진 자국이 있었다.
사방화는 한술의 맥을 짚어보며 한참을 말이 없었다.
“어찌 된 것이오? 노예 공자처럼 독충술에 걸리기라도 한 것인가?”
진옥이 물었다.
“아닙니다.”
사방화가 고개를 내젓자, 진옥이 깜짝 놀랐다.
“죽은 모습이 노 공자와 다를 바가 없는데 어찌 독충술이 아니오? 그렇다면 사인이 무엇이란 말인가?”
“누군가 등 쪽에 바늘로 혈을 뚫어 정확히 심장을 찔러 죽인 것입니다.”
사방화의 대답에 진옥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바늘? 어찌 알아낸 것이오?”
사방화는 침상에서 벗어나 진옥을 보며 말했다.
“지금 바로 운기조식을 써 내력으로 빨아들인다면 분명 등에서 아주 길고 가는 바늘이 나올 것입니다.”
진옥은 이해가 가지 않는 듯했다.
“분명 좀 전에 검시를 했을 때도 온몸을 살펴보았건만 바늘이 있었더라면 찾아냈었을 텐데.”
“엄청난 무공 실력을 가진 데다 바늘을 잘 쓰는 사람이 쇠털처럼 가는 바늘을 쓴다면 바늘구멍을 남길 리가 없지요. 태자전하께서도 무공을 익히셨으니 못 믿으시겠다면 직접 확인해 보십시오.”
사방화가 진강을 제 뒤로 안전하게 끌어당기며 말했다.
진옥도 곧 고개를 끄덕이며 한술의 옷을 걷어 올렸다.
뭇사람들의 시선도 함께 돌아갔지만 한술의 등은 상처 없이 아주 매끈해 바늘구멍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진옥 역시 한참을 살피다 겨우 등 한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여기란 말이오?”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옥은 한술에게서 조금 떨어진 후 기를 모아 그의 등을 향해 흡력을 사용했다. 모든 이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한술의 등과 진옥의 손을 바라봤다.
잠시 후, 한술의 등에서 쇠털처럼 가는 바늘 하나가 서서히 올라왔다.
일동 전체가 경악했고, 진옥의 안색도 돌변했다. 눈이 나쁜 사람이라면 하루 온종일 찾아도 찾을 수 없을 만큼 쇠털처럼 가는 바늘이었다.
진옥이 다시 사방화를 향해 말했다.
“한 대인 혈색과 맥만 짚었을 뿐인데 어찌 이 바늘을 찾아낸 것이오?”
모든 이도 놀라 두려워하면서도 사방화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봤다.
“맥을 짚어본 결과 심장마비로 죽은 것인데 이상하게도 온몸을 제외하고 심장 쪽에 흐르는 기가 막힌 것으로 보아 곧바로 숨이 멎은 것은 아닌 듯합니다. 분명 무언가에 심장이 찔린 것 같은데 그 흔적도 보이질 않으니 아주 날카로운 물건에 찔린 것이라 볼 수밖에 없지요.
그럼 무엇이겠습니까? 쇠털만큼 가늘고 날카로운 바늘만이 흔적도 없이 심장을 관통할 수 있겠지요. 제 생각엔 바늘이 맞는 듯합니다.”
사방화의 설명에 진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좌상이 입을 열었다.
“일 리가 있소. 소왕비, 그럼 그 의술로 한 대인이 곧바로 죽지 않았다는 것까지 알 수 있는 것이오?”
사방화가 고개를 내저었다.
“의술이 아무리 출중하다한들 무엇이든 다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의술을 동원해 알아보는 동시에 그 주변 환경과 한 대인께서 남긴 단서를 조합해보았을 뿐이지요.”
“무슨 단서 말이오?”
진옥이 곧장 물었다.
사방화는 한술이 입은 옷을 들추며 말했다.
“한 대인께선 어젯밤, 잠에서 깨 창문을 여셨을 겁니다.”
“응?”
진옥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영강후가 곧장 답했다.
“그럴 리 없소. 내가 바로 건넌방에 있었는데 한 대인의 방에선 밤새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소.”
“영강후께선 그 말씀에 책임지실 수 있으십니까? 인기척이 전혀 없었단 말씀이시지요?”
사방화가 영강후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영강후는 곰곰이 생각하다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했지만, 인기척이 전혀 없었냐고 묻는다면……. 그 말엔 책임을 질 수가 없소.”
사방화가 담담히 말했다.
“군영의 전각은 아주 튼튼해서 큰 인기척이 아닌 이상 누군가 침상에서 내려와 창문을 여는 사사로운 소리까지는 들을 수 없습니다. 건넌방에서 애써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듣기 힘들지요.”
“맞소.”
영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떻게 한밤중에 창문을 열었다는 것인가?”
진옥이 의문을 품었다.
“옷에 남은 이 주름들은 단순히 옷을 입고 잤기 때문에 눌려서 생긴 것이 아니라 비를 맞아 생긴 것입니다. 이렇게 비가 거세게 내리는데 밖으로 나서진 않았겠지요. 간밤에 창문을 열어두고 자는 새에 비바람이 몰아쳐 이렇게 입고 있던 옷이 비와 습기를 머금은 것입니다. 그 탓에 이렇게 옷이 주름진 것입니다. 손으로 만져 봐도 거칠고요.”
사방화가 말했다.
“정말 그렇군.”
진옥이 직접 만져보며 말했다.
“그럼 어찌 한밤중에 창문을 열었다는 것이오?”
영강후가 물었다.
“야밤에 한 대인의 창가에서 무슨 알 수 없는 일이 있었는지 알아봐야겠지요. 아무 이유 없이 한밤중에 창문을 열었을 리는 없을 테니 말입니다.”
사방화의 답변에 진옥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언제 창문을 열었고 죽은 것인지 알 수 있소?”
“자정 자시(*子時: 밤 11시 ~ 새벽 1시)입니다. 옷이 젖은 정도로 미루어보면 창문을 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무언가를 하려던 찰나, 등에 바늘이 꽂힌 것입니다.”
사방화가 말했다.
“바늘에 찔렸다면 고통에 소리라도 쳤어야하는데 아무 소리도 없었다면 곧바로 죽은 것이 아닌가? 게다가 바늘에 찔리고 쓰러진 그 자리에서 발견된 것이 아니라 침상에 누워 죽은 채로 발견되었소.”
진옥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건 태자전하께서 들고 계신 그 바늘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엄청난 무공 고수는 이런 쇠털만큼 가느다란 바늘로 한 대인을 공격했지만, 무공을 배운 적이 없는 한 대인에겐 그저 벼룩에게 물린 듯 잠깐 따가운 정도였을 겁니다. 그러니 하려던 것을 마저 하고 다시 침상에 누웠었겠지요.”
모두가 탄식을 하며 사방화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