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6화 또 다른 누군가의 죽음
작은 서재에 다다라 문을 열자 익숙한 그림이 눈에 보였다. 사방화는 잠시 그림을 응시하다 우산을 접고 안쪽으로 향했다.
사방화가 청음으로 살던 시절, 이 서재는 어딘가 조금 허전해보였다. 그에 사방화는 시집을 오며 책을 많이 챙겨와 서재를 한 가득 메웠다. 이제 이 서재는 예전 그 허전한 느낌은커녕 빽빽하다 못해 좁아 보이기까지 했다.
사방화는 책장을 따라 한두 권 지나쳐오다, 세 번째 책장에 멈춰 섰다. 그녀가 가장 안쪽에서 꺼낸 책은 야사괴문(野史怪闻)의 여행기였다.
겉표지도 낡고 종이도 노랗게 바래버렸지만, 겉보기엔 보통 책들과 달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책 전체엔 휘갈겨 쓴 글씨로 평론이 가득 차 있었다. 한 마디, 한 마디 다 허를 찌르는 것 같은 내용이었다.
사방화는 벽에 기대 천천히 책을 넘겨보기 시작했다.
반쯤 읽었을까, 바깥에서 돌연 문이 열렸다.
사방화가 고개를 들자 어딘가 어두운 안색을 하고 서 있는 진강이 보였다. 진강은 우산도 없이 머리와 옷에 비를 쫄딱 맞고 숨을 헐떡였다.
사방화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일어나셨어요?”
그러다 그제야 진강의 모습을 발견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어찌 우산도 안 쓰시고 오신 거예요?”
진강은 문을 닫고 어두운 안색으로 사방화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어찌 내게 말도 없이 일어나 여기 와 있는 것이오?”
“잠이 오지 않아 내내 뒤척이다 일어났어요. 서방님은 잠을 제대로 못 주무신 듯해 깨우지 않고 조용히 이곳에 와서 책을 읽고 있었고요.”
사방화는 책을 내려놓고 그의 옷에 묻은 물방울을 털어냈다. 그녀의 손길이 닿은 곳은 물방울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며 금세 말랐다.
“무슨 책을 보고 있었소?”
진강의 안색이 비로소 조금 편안해졌다.
사방화가 책을 내밀었다.
“이 책이요.”
진강은 책을 잠시 바라보다 입술을 오므리며 물었다.
“책이 이리도 많은데 어찌 이걸 고른 것이오?”
사방화가 웃으며 말했다.
“손이 가는 대로 고르다보니 낭군님이 쓰신 평론이 있어 보고 있었지요. 이건 언제 쓰신 거예요?”
진강이 잠시 생각하다 답했다.
“몇 년 전이겠지.”
“그러니까 몇 년이요?”
사방화가 다시 또 물었다.
“기억나지 않소. 옷을 왜 이리 얇게 입은 것이오. 춥소, 얼른 돌아가요.”
진강은 사방화 손에서 책을 내려놓았다.
“이 책은 들고 갈래요. 낭군님께서도 서산 군영에 가지 않으시는 데다 저도 할 게 없으니 책이라도 봐야지요.”
사방화는 다시 책을 손에 쥐며 그를 향해 웃어 보였다.
“내게 옷을 만들어 줘야 하는 건 잊지 않았겠지요?”
진강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입을 건 넘치니까요.”
사방화가 웃음을 터뜨렸다.
곧 두 사람은 문 앞에 다다라, 나란히 우산을 쓰고 서재를 나왔다.
방으로 돌아온 사방화와 진강은 시화, 시묵이 준비해 둔 세숫물로 깨끗이 씻고 옷매무새를 단정히 한 후 아침식사를 했다. 사방화는 식사를 하고 책을 읽으려 했지만 진강이 이내 책을 내려두고 옷을 만들어 달라 졸랐다.
사방화는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그래도 바느질을 시작했다. 진강도 곁에서 곧바로 잔심부름을 도왔다.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 오전이 지나고 정오가 되었다. 춘란은 본원에서 점심식사를 할 두 사람을 맞으러 낙매거에 도착했다.
* * *
낙매거를 나서 수사의 벽호에 다다르니, 비가 온 탓에 물이 불어 수위가 꽤 높아진 것이 보였다. 곧 있으면 땅까지 차오를 기세였다.
사방화가 거침없이 내리는 비를 보며 말했다.
“비는 이틀은 더 내릴 것 같아요. 물난리가 나는 곳도 적지 않을듯해요.”
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본원에 도착했지만, 탁자에 앉아 둘을 기다리고 있는 영친왕과 영친왕비의 표정은 꽤나 어두워보였다.
그러다 영친왕비가 두 사람을 발견하고 손짓을 했다.
“어머니, 싸우기라도 하신 겁니까?”
진강이 탁자에 앉으며 물었다.
영친왕비는 콧방귀를 뀌며 영친왕을 힐끗 보고는 말했다.
“네 아버지가 밤새 이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시느라 나까지도 잠을 못 자게 만들었지 뭐냐. 아침에 일어나 궁으로 가시려던 걸 내가 막았더니 내게 있는 대로 화를 내더구나.”
진강이 웃음을 터뜨리며 영친왕을 향해 말했다.
“연세도 지긋하시면서 궁에 들어가 어쩌시려 하셨습니까? 물에 뛰어 들어가 홍수를 막기라도 하려던 겁니까?”
“이 몸으로 그거 하나쯤이야 거뜬하지.”
영친왕이 말했다.
“설령 궁에 가신다 한들 물난리를 막을 수는 있으십니까?”
진강의 물음에 영친왕은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 이내 입을 열었다.
“그래도 비가 이리 많이 내리는데 금방 모내기를 끝낸 논밭이 잠기고 남진 백성들이 물난리를 겪고 있을지도 모르지 않느냐. 그럼 흉년이 들어 백성이 떠나고 나라도 내려앉을 것인데 어찌 큰일이 아닐 수 있느냐?”
“걱정도 참 많으십니다. 황제도 아니신 분이 이리도 걱정이 많으셔서야……. 그럼 지금이라도 직접 물에 들어가 홍수를 막으심이 어떨는지요.”
“또 무슨 소리를 하는 게야?”
영친왕의 언성이 또 높아지자, 진강은 그를 흘낏 보고는 사방화에게 계탕을 건네주며 말을 이었다.
“제 말이 어디 틀렸습니까?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황숙께선 생병을 앓고 계신 거라고요.”
“뭐? 그게 어찌 된 것이냐?”
영친왕, 영친왕비 모두 동시에 깜짝 놀랐다.
이내 진강은 말없이 사방화를 쳐다보기만 했다. 사방화는 매번 이렇게 진강이 그녀에게 일을 떠넘기는 것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말하기가 귀찮아서인지, 그녀가 언변이 더 좋아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사방화는 또 할 수 없이 스스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황궁에서 차를 올리던 날 폐하의 안색을 살펴보았으나 십중팔구 생병을 앓는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영친왕이 깜짝 놀라 물었다.
“어찌 그리 생각하느냐?”
영친왕비 역시 놀란 빛으로 물었다.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이야? 그럼 일전에 주었던 그 약 봉투는…….”
“폐하께서 병에 걸리신 것은 맞으나 절대 이리 순식간에 심각해질 정도는 아닙니다. 제가 어머님께 보여드렸던 그 약재로 말하자면 2년도 못 살 것이라 했었지요. 그런데 어머님, 저 병이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 병세가 갑작스럽게 심해진다는 생각은 들지 않으셨습니까?
얼마 전 어머님께서도 아시듯이 저는 황궁에서 차를 올릴 적에야 병을 앓고 계신단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그 증상은 앓고 있는 병과는 다릅니다. 혈색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지요. 마치 어떤 약물을 복용해 나타난 표상 같았습니다.”
사방화가 말했다.
“확신하느냐?”
영친왕의 물음에 사방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전설에 남을 만큼 뛰어난 의술은 아니오나 제 앞에서 허상을 숨길 수 있는 사람은 없으리라 확신합니다. 저 역시 생병을 앓았던 적이 있기도 하고요.”
영친왕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란 말이냐?”
영친왕비가 분노하며 말했다.
“그러니 이대로 집에 계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만약 힘드시다면 부인에게 부탁해 약을 써서라도 병을 앓게 만들 수는 있습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근심을 덜 수 있도록 말입니다.”
진강이 말했다.
“난 좋습니다. 방화야, 내 침상 곁에서 수발을 들지언정 속이 시끄러운 건 더 이상 참지 못하겠으니 약이나 하나 내어주려무나.”
영친왕비가 말했다.
사방화는 웃으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영친왕은 한참을 침묵하다 이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폐하를 참 잘 안다고 생각했었건만 갈수록 더 모르고 있는 기분이구나. 그래, 내가 진정 앓아누우면 될 테지.”
영친왕도 심경이 복잡한 듯 잠시 멈칫하며 말을 이었다. 영친왕비도 그에 더 이상은 영친왕을 자극하지 않았다.
사방화는 곁에서 진강이 아무 신경도 쓰지 않고 밥을 먹는 모습을 보고는 수저를 들고 식사를 시작했다.
식사가 끝나자 영친왕이 직접 입을 열었다.
“방화야, 약을 하나 내어다오.”
사방화는 영친왕비와 진강의 눈치를 살폈지만 아무런 이의도 없는 것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품에서 옥병을 하나 꺼냈다.
“3일에 한 알씩 드시면 족히 한 달은 병상에 누워계실 수 있습니다. 몸에 크게 해롭지도 않은 데다 의술이 뛰어난 자가 아니면 알아볼 수도 없습니다. 하루에 반나절을 주무시게 되는 것 말고는 아무런 지장도 없습니다.”
한숨을 내쉬는 영친왕을 보고, 영친왕비가 대신 받아들며 말했다.
“제 눈으로 드시는 걸 확인해야겠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지금이야 이렇게 마음껏 움직일 수 있지만 100년 후까지 이 남진 강산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으세요? 걱정은 황제가 하도록 두고 왕야께선 부디 마음을 놓으세요.”
영친왕도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사방화는 영친왕이 이 남진 제국에 있어선 더없이 좋은 황손이라 생각했다. 다리만 불편하지 않았더라면 황위는 두말 할 것도 없는 그의 것이었을 것이고, 훌륭한 품격으로 이 남진 강산도 아주 평화로이 지켜냈을 것이다.
수명이 2년밖에 남지 않은 몸으로 생병까지 자처하며 발작을 일으킨 황제가 대체 무슨 계략을 꾸미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간 벌어진 일들을 보았을 때 분명 충용후부나 영친왕부를 노리는 것이 확실했다.
영친왕은 오직 남진 강산을 위해 반평생 조정에 몸 바쳤을 뿐이라, 생각이 없지는 않았다. 황제가 생병을 앓고 있는 것이란 걸 안 이상 그도 이젠 선택의 여지가 없이 앓아누울 수밖에 없던 것이다.
영친왕은 평생 생병을 앓아본 적도, 누군가를 음해해본 적도 없던 사람이었다. 사방화는 본래 영친왕에게 그다지 호감이 있던 건 아니었지만 지금은 그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위는 명명백백히 영친왕의 것이었다. 그러나 하늘은 영친왕에게 부귀영화를 누릴 신분을 주었어도 황제의 운명은 허락하지 않았다. 여태 그가 한 걸음, 한 걸음씩 걸어 지금에 이른 것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사방화는 진강도 속으로는 아버지를 존경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진호를 중하게 여겼던 데도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진강은 지나치게 오만하고 고집도 세 보이는데 비해 진호는 겉으로 보기엔 아주 뛰어나 보였기 때문이었다.
진호가 떠올리자 사방화는 이내 입을 열었다.
“아주버님은요? 근래 통 보질 못했습니다.”
영친왕이 말했다.
“진호 말이냐? 내가 사당에 하루 종일 무릎을 꿇게 했더니 금세 병이 나 지금 자형원에서 요양 중이다.”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진강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며 사방화의 손을 잡았다.
“가보겠습니다.”
동시에 바깥에선 희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왕야, 태자전하의 하인이 도착했습니다. 소왕야와 소왕비마마를 서산 군영으로 들라 하셨답니다.”
진강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안 간다고 전해라.”
희순이 곧장 말을 이었다.
“어젯밤 서산 군영에서 형부의 한술 대인이 잠자리에 누운 채 그대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검시관이 왔으나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답니다.”
진강이 눈을 가늘게 뜨며 장막을 걷었다.
“한 대인이 죽었다고?”
희순은 우산을 쓴 채 거세게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태자전하의 사람이 그리 전했습니다. 그리고 군영 사건, 손 태의님 사건과 오늘 한 대인의 일까지 모든 것을 소왕야께 넘기고 형부와 대리사와 함께 협조해 철저히 조사하도록 윤허한다 하셨답니다.”
그 말에 사방화는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았다.
‘진옥이 어째서 갑작스럽게 허락을 한 것일까? 한술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음을 맞이해서? 어제까지도 멀쩡히 살아서 펄쩍펄쩍 뛰던 사람이 갑자기 왜 죽은 것이지?’
게다가 한술이 잠자리에서 죽음을 맞이했는데도 검시관이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