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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5화 (675/978)

675화 밤새 부로 돌아가다 (2) 

영친왕은 다시 이마를 매만지며 진강을 향해 말했다.

“태자가 군영을 나가지 못하게 해 사건의 조사권을 넘겨주면 가지 않겠다고 했다고? 이렇게 돌아온 걸 보니 태자가 응하지 않았나 보구나.”

영친왕비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어찌 감히 응할 수 있겠습니까? 그 배후에서 함께 손을 썼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지요. 생각해 보세요. 오늘처럼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 날, 실력이 없는 이라면 연쇄 살인을 저지를 수나 있겠습니까?”

“뭐? 이게 다 태자가 꾸민 짓이란 말이오?”

영친왕이 깜짝 놀라며 묻자 영친왕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영친왕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나도 어릴 때부터 옆에서 태자가 자라온 모습을 쭉 지켜봐왔소. 백부된 자로서 한마디 하자면 태자는 그래도 심성은 올바른 아이요.”

영친왕비는 곧바로 코웃음을 쳤다.

“심성이 바르다니요? 왕야께서 지금 누구 때문에 생병을 앓으며 집에만 머물고 계신지 잊지 않으셨지요? 태자가 아니라면 누구 때문이랍니까? 어딜 봐서 심성이 바르다는 건지.”

“겉만 봐선 모르오. 진강, 네가 말해봐라. 앞으로 어떡하면 좋겠느냐?”

영친왕이 고개를 내저으며 진강에게 말했다.

“사건이 이렇게나 커졌는데 형부와 대리사가 손을 잡는다 한들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해결했다 한들 절대 깊게 파고들 수는 없을 겁니다. 어서 쉬십시오. 저희도 돌아가 보겠습니다. 아버지께선 병가 중이신 데다 마음 쓸 기력도 없으시고 저도 더 이상 군영의 사람이 아니니 아무것도 생각지 않고 이틀 동안 푹 쉬려 합니다.”

진강이 차가운 웃음을 지으며 사방화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그대로 다시 사방화와 우산을 쓰고 방을 나서는 진강을 보고, 영친왕비가 그를 불렀지만 진강은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사방화도 그렇게 어쩔 수 없이 진강의 손에 이끌려 돌아갔다.

“저놈이 대체 뭔 말을 못하지.”

영친왕은 화가 난 채로 진강의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아들 말이 맞습니다. 어서 자러 가요. 피곤해 죽겠습니다.”

결국 영친왕비도 방으로 들어갔다.

영친왕은 진강이 나선 후 펄럭이는 장막을 바라보다,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곤 영친왕비를 따라 방으로 들어섰다.

* * *

시화, 시묵, 옥작은 먼저 앞서 등을 들고 길을 터주었고, 진강과 사방화는 바로 세 사람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말없이 곧장 낙매거에 다다랐다.

입구에 다다르자 품죽과 시녀들이 마중을 나왔다.

“소왕비마마, 두 분께서 오셨다는 말을 듣고 생강탕을 끓이고 물을 데워 두었습니다. 소왕야와 목욕을 하시고 몸에 한기를 쫓으신 뒤 생강탕도 드시고 주무십시오. 감기에 걸리면 안 되십니다.”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진강과 함께 방으로 들어섰다.

품죽과 시녀들은 진강과 사방화를 뒤따라 들어가 꽃잎이 둥둥 뜬 따뜻한 물을 목욕통에 붓고 병풍 뒤에다 가져다 두었다. 곧 품연도 생강탕을 들여와 탁자 위에 올려 두었다. 

사방화와 진강의 특별한 분부가 없자, 이내 모두 방에서 물러갔다.

사방화가 외투를 벗고 옷걸이에 걸고는 진강에게 말했다.

“생강탕부터 마셔요.”

진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탁자 앞에 앉았다. 사방화도 자리에 앉아 두 손으로 생강탕을 받쳐 들고 조금씩 홀짝이며 마셨다.

그런데 진강은 마시지 않고 사방화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사방화는 진강의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들었다.

“응? 왜 그러세요?”

진강은 고개를 내저으며 시선을 돌리고는 생강탕을 마시기 시작했다.

진강이 말을 하지 않으니, 사방화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한참 후, 진강이 돌연 입을 열었다.

“빙응결은 무명산에서 배운 것이오?”

사방화는 눈썹을 들썩이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그럼?”

진강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내 사방화는 뜨거운 생강탕을 단숨에 다 마셔버리고는 땀을 흘리며 말했다.

“빙응결은 어머니가 가지고 계시던 서적에서 봤어요. 제가 중생을 하고 돌아가셨으니 혼자 배운 것이라 할 수도 있지요.”

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러세요? 뭔가 잘못된 것이라도 있는 건가요?”

사방화가 다시 묻자 진강은 생강탕을 다 마시고 그릇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고는 사방화의 손을 잡아왔다.

“아니오. 그저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오. 이제 목욕하러 갑시다.”

사방화는 얼굴을 붉히며 그를 따라 병풍 뒤로 들어갔다.

* * *

내실의 등불 빛이 병풍 뒤로 은은히 비쳐오고 있었다.

진강은 천천히 옷을 벗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사방화는 이미 목욕통에 들어가 목만 쏙 내밀고 앉아있었다. 이내 진강이 웃음을 터뜨렸다.

“동작이 참으로 빠르오.”

사방화는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고개를 돌려 눈도 맞추지 않았다.

이윽고 진강이 자신의 목욕통으로 들어가지 않고 사방화가 있는 곳으로 발을 내밀었다. 사방화는 깜짝 놀라 눈이 더 커졌다.

“어찌…….”

“쉿. 힘들어서 혼자 못 씻겠소. 당신도 힘들었을 테니 서로 씻겨 줍시다.”

진강이 손으로 살짝 사방화의 입을 막곤 목욕통으로 완전히 들어와 그녀를 껴안으며 말했다. 사방화는 입이 막힌 그대로 얼굴을 붉히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진강은 그녀를 더 꼭 안아주며 웃었다.

“첫 합궁을 한지도 며칠이 지났는데 여전히 부끄러운 건 아니지?”

사방화는 두 뺨을 붉힌 채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낭군님께서 이리도 저돌적이신데 제가 뭘 부끄러워하겠어요?”

진강은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목욕통 물도 따뜻한 데다 두 사람이 함께 들어가니 물 온도는 점점 뜨끈해지는 듯했다. 더불어 조금 전 생강탕을 마신 탓에 사방화는 꼭 온몸이 불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마음 같아선 진강을 밀어내고 싶었지만, 사방화의 두 손은 이미 진강의 목을 끌어안고 있었다.

진강의 호흡도 더 가빠졌다. 그는 사방화의 손을 꼭 잡아주며 더 깊은 입맞춤을 했다.

한참 후, 사방화가 숨을 가쁘게 쉬자 진강이 천천히 입술을 뗐다. 이내 진강은 사방화의 어깨에 살포시 기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날 씻겨 줄 힘이 남아 있소? 없다면 곧장 침상으로 가고.”

사방화는 숨을 고르며 그를 톡, 쳤다. 그에 진강은 또 기분 좋게 웃었다.

“아직 힘이 남아있나 보네.”

사방화는 손에 물을 묻혀 서서히 그의 등을 부드럽게 매만져주었다. 진강도 곧 그녀의 등을 천천히 매만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진강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러다 큰일 나겠군.”

“응?”

사방화는 한참 꽃잎을 포개 그의 허리를 따라 아래쪽을 씻겨 주고 있었다.

진강은 결국 사방화의 손을 잡아 일으킨 뒤, 그녀를 안아 옆에 있는 목욕통에 넣어주었다. 사방화는 목욕통에 가만히 앉아 한참동안 눈을 깜빡이다가 진강에게 물었다.

“왜 그러세요? 자리를 옮기시려고요?”

“당신에게 씻겨 달라 할 수가 없소. 내 숨이 넘어갈 듯해서.”

진강은 눈을 감고 깊은숨을 내뱉었다.

사방화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두 목욕통은 가까이 붙어있어서, 진강은 언제라도 손만 뻗으면 사방화에게 닿을 수 있었다. 

그 순간 진강이 홀연 그녀의 허리 쪽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사방화가 온몸에 전율이 느껴져 그의 손을 피해버리자, 이에 그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런 느낌이란 말이오. 알겠소? 참을 수 없을 것 같으니 그만해야겠소.”

사방화는 수줍은 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업자득이지요.”

진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애초에 한 목욕통에 함께 들어간 자신을 탓하며, 다시 눈을 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방화는 병풍 뒤로 은은히 비쳐오는 불빛에 기대 진강을 바라보았다. 목욕통에 누워 평온히 쉬고 있는 그를 바라보자 두근두근, 세차게 뛰어대던 심장도 점차 가라앉았다.

사방화도 진강을 따라 함께 목욕통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그렇게 너무도 조용한 분위기에 몹시 피곤했던 사방화는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잠시 후, 고요해진 주변에 진강이 눈을 떴다. 어느새 잠이 든 사방화를 확인한 진강의 입가엔 잔잔한 미소가 피었다.

진강은 바로 목욕통에서 나와 그녀를 안아들고 수건으로 꼭 감싸주었다.

사방화가 뒤척이며 잠에서 깨려하자, 진강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 씻고 잡시다.”

“응.”

사방화는 그대로 진강의 품에 안겨 그가 물기를 닦아주는 동안 다시 편안히 눈을 감았다.

진강은 사방화를 먼저 침상에 눕히고 자신도 깨끗이 물기를 닦은 뒤 다시 그녀를 품에 안았다. 사방화는 그의 품에서 무언가를 중얼대다 잠에 들었다.

아주 작은 목소리였지만 진강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잠시 넋을 놓고 깊이 잠든 그녀의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다 입가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눈을 감았다. 

사방화가 중얼거리던 말은 이러했다.

“의안.”

‘의안……? 갑자기 의안이라니…….’

비는 온종일 그칠 줄을 모르고 거세게 내렸다. 그 덕에 방은 아주 조용했고 품에 있는 사방화의 숨소리도 아주 크게 느껴졌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 삼경(*三更: 밤 11시 ~ 오후 1시)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렸다. 진강은 이때가 돼서야 슬슬 잠에 들었다.

* * *

사방화는 잠에서 깨어나 천천히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렸다.

진강은 곁에 곤히 잠들어있었고, 바깥은 하늘이 부옇게 밝아 보였지만 비로 인해 몇 시진인지는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몸을 뒤척이다 밤새 식은땀을 흘린 걸 보고는 천천히 진강의 손을 내려놓았다. 순간 진강의 미간이 살짝 움직이자 사방화가 귓가에 속삭였다.

“더 주무세요. 물 좀 마시고 올게요.”

진강은 이내 안색이 편해져, 다시 잠을 청했다.

사방화는 천천히 침상에서 내려와 옷을 걸치고 탁자로 걸어왔다. 따뜻한 차 한 잔을 따른 그녀는 곧 창가에 가서 조용히 차를 마셨다.

비는 여전히 그칠 기미도 없이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이대로 며칠 더 이어진다면 어느 한 곳은 물에 잠길 듯했다.

그녀가 차를 다 마시고 고개를 돌리자 여전히 잠들어있는 진강이 보였다. 미간은 살짝 찌푸려져 어딘가 편해 보이진 않았지만 일어날 낌새는 없었다.

사방화는 잠시 창가에 서서 장막 사이로 그를 한참 바라보다, 옷을 입은 뒤 우산을 들고는 천천히 방을 나갔다.

시화, 시묵이 소리를 듣고 급히 달려오자 사방화가 얼른 조용히 속삭였다.

“쉿, 아직 주무시고 계시니 조용히 해줘.”

시화, 시묵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껏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소왕비마마, 진시(*辰時: 오전 7 ~ 9시)도 되지 않았는데 어찌 이리 일찍 일어나셨습니까?”

온종일 내린 비에 낙매거는 전체가 다 떨어진 매화 꽃잎으로 물들어있었다. 사방화는 잠시 그 광경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잠이 안 와서. 경가가 보낸 소식은 있었어?”

시화, 시묵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옷소매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주었다.

종이엔 글 한 줄이 적혀 있었다. 사방화는 글을 읽고는 이내 종이를 부숴 가루로 만든 뒤 우산 밖으로 손을 내밀어 씻어 내렸다.

“서재에 다녀올 테니 경가에게 서신을 전해 줘.”

사방화가 분부를 남긴 뒤 손짓으로 시화를 불렀다. 이내 사방화가 시화에게 귓속말로 몇 마디 속삭이자 시화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사방화는 곧 우산을 들고 서재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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