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1화 (671/978)

671화 사인 없는 죽음 

진옥은 다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역시 누가 저질렀느냐가 더 중요한 것 같군. 우리가 똑같은 짓을 했어도 그대 눈엔 아우님이 한 것은 옳고, 내가 한 것은 틀렸다고만 보이겠지.”

“적어도 낭군님께선 마음이 여리실 뿐 아니라 최소한 양심이란 게 있습니다. 하지만 태자전하는요? 군영에 일어난 살인 사건은 안중에도 없이 동심술을 일으켜 낭군님과 함께 정신을 잃으셨습니다. 대체 무슨 속셈이십니까?”

사방화도 끝내 참지 못하고 화를 내기 시작했다.

진옥은 금세 안색이 어두워졌다.

“어찌 진강에게 묻지 않고 내게 그러시오? 범양 노씨 사자인 노예의 시신을 어찌 그리 쉽게 부검을 할 수 있단 말이오? 범양 노씨 사람들도, 좌상께서도 동의하지 않으시는데 강제로 고인의 시신을 건드려야 한단 말이오? 내가 윤허라도 했다면 그 결과가 어찌 될지 상상이라도 해 봤소?”

“부검을 하시려 한데는 반드시 연유가 있었을 거란 것만 압니다.”

사방화의 대답에 진옥은 코웃음을 쳤다.

“그렇지. 우리 진강 아우님이 하시는 일엔 모든 연유가 있는 법이겠지.”

사방화는 진옥을 더 이상 상대하지 않고 진강을 부축했다.

“가요.”

그때, 진강이 진옥을 보며 담담히 말했다.

“다른 이들은 노예의 죽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지 몰라도 너랑 난 분명히 알고 있다. 시신에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알아보지 못할 수가 없지.”

진옥이 진강을 바라보았다.

“알아보지 못한다면? 꼭 그 내막을 밝혀내야만 하는 것이냐?”

“왜, 하면 안 될 짓이라도 하는 것이란 말이냐?”

진강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누구에게도 좋을 게 없다. 영친왕부가 엮일까 두렵지도 않나보군.”

진옥이 말했다.

“겁날 게 뭐가 있느냐?”

진강이 답했다.

“그럼 남진 강산은? 우리 모두 진씨 황손들이거늘, 할마마마께서 하신 말씀은 벌써 다 잊은 것이냐!”

진옥이 흥분하자 명치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그에 오권이 화들짝 놀라 서둘러 가까이 다가왔다.

“태자전하! 노하시면 아니 되십니다. 진정하시지요.”

이내 오권이 사방화가 진옥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을 듯하자 떠보듯 물었다.

“소인, 군영의 의원을 불러올까요?”

“그럴 필요 없소, 태감. 내가 해드리지. 내 의술은 그저 수박 겉핥기에 불과하나, 상처를 치료하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소.”

이목청이 말했다.

“아이고, 이 공자님께서 계시다는 걸 잊고 있었습니다! 공자님께서 해주시면 되겠습니다.”

오권은 서둘러 이목청에게 약을 건넸다.

이목청은 약을 받아들고 침상으로 다가갔다. 진옥은 이제야 이목청이 있었다는 것을 발견한 듯 그를 힐끗 보며 입술을 삐죽였다.

“사방화가 공자는 믿는 것 같군.”

이목청이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혈을 해드릴 테니 움직이시면 아니 됩니다.”

진옥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강은 이목청이 진옥의 옷깃을 내리는 모습을 보고 이 한마디를 던진 후 사방화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내 황조모님께서 하신 말씀은 잊지 않았다. 외려 잊은 건 너인 듯한데.”

* * *

외전에서 기다리던 이들은 진강이 멀쩡한 모습으로 사방화의 손을 잡고 나오는 것을 보고 일제히 다가와 인사를 올렸다.

좌상이 물었다.

“소왕야, 태자전하는 좀 어떠시오?”

“괜찮습니다.”

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께서 돌연 동시에 쓰러지시다니 대체 어찌 된 일이란 말이오? 또 소왕비는 어찌 두 분을 살려낸 것이고요?”

좌상이 곧장 캐묻기 시작했다.

“안으로 들어가 태자전하께 여쭤보시지요.”

진강이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멍해진 좌상을 두고, 영강후가 곧장 다가와 말했다.

“소왕야, 정말 괜찮으시오?”

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으시다니 다행이오. 태자전하와 소왕야께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면 우리 모두 폐하의 화를 면치 못했을 것이오. 수고 많았소, 소왕비.”

영강후가 감지덕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사방화가 곧 영강후에게 물었다.

“노 공자의 시신은요?”

영강후가 진강을 흘낏 보고는 곧장 답했다.

“태자전하와 소왕야께서 쓰러지신 뒤 시신을 잠시 보관 중이었소.”

“시신을 여기로 옮겨와 주시지요.”

진강의 말에, 한 어르신이 다가와 급히 입을 열었다.

“소왕야, 부검은 아니 됩니다. 이미 충분히 잔인할 대로 죽음을 맞았거늘 시신까지 온전치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잘나지 못한 범양 노씨의 아들이었으나 이리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누가 범양 노씨를 괴롭혔다는 말입니까?”

진강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조군 이씨와 청하 최씨, 영친왕부, 충용후부에 서로 인척이 있다는 사실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우리 범양 노씨 일가만 여태 인척 모임에 참여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소왕야께서도 자연히 조군 이씨를 위해 이윤의 살인 누명을 벗기려 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어르신의 말에 진강이 코웃음을 쳤다.

“나라엔 국법이 있고 집안엔 규율이 있는 법이지요. 이윤이 진정 살인을 했다면 그 누구도 감쌀 수 없으나 이 죽음에 숨겨진 것이 있다면요? 진범은 이 모든 걸 피해 나가는 것 아닙니까?”

“수사에 따르도록 하겠지만 절대 노예의 부검에 동의할 수는 없습니다.”

어르신은 뜻을 굽히지 않았고 나머지 사람들도 한마음이었다.

이어 좌상도 말을 덧붙였다.

“소왕야, 부검은 극악무도한 죄를 저지른 자에게나 행하는 것이지 노예는 그렇지 않소. 게다가 군영에서 아무 잘못도 저지른 적 없이 평온히 지내던 사람에게 부검이란 더욱 말이 되지 않소. 그래도 소왕야께서 그 뜻을 굽히지 않으신다면 이 목숨을 내놓는 한이 있어도 절대 동의할 수 없소.”

그때, 사방화가 말했다.

“제 의술로는 부검 없이도 살펴볼 수 있으니 급하게 굴지 마세요.”

어르신들은 일제히 사방화를 바라보았다.

이내 진강이 강경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신을 가져오너라!”

“알겠습니다!”

하인들이 곧장 밖으로 나섰다.

남은 어르신들은 서둘러 나서서 가로막으려했지만 그 순간, 내전에서 진옥이 나왔다. 진옥은 모습을 비춤과 동시에 사방화에게 말했다.

“부검만 아니라면 어찌 살펴보든 상관없소.”

어르신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진옥에게 예를 갖추었다.

“태자전하, 괜찮으십니까?”

좌상이 다가와 진옥을 걱정했다.

“괜찮소.”

진옥은 이상한 낌새 없이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좌상은 진옥이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진옥과 진강이 언급하지 않는 일이라면 더 이상 물어봐선 안 된다는 걸 잘 알기에 그냥 침묵을 지켰다.

뒤를 따라 나온 이목청과 오권의 표정에서도 무언가 읽히는 것은 없었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범양 노씨 공자, 노예의 시신을 들고 왔다.

노예는 뜻밖에도 앙상하게 여윈 문약한 서생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군영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외형의 소유자라, 당초 범양 노씨 가문에서 어떻게 이 사람을 군영으로 보낼 생각을 한 건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다.

사방화가 곧 가까이 다가가 시신을 한번 훑어보고는 말했다.

“장갑과 집게, 교도(*交刀: 교도), 바늘을 가져오너라.”

교도라는 말을 듣자마자 한 어르신이 앞으로 나왔다.

“소왕비마마, 시신을 훼손해서는 아니 됩니다.”

사방화가 고개를 들어 그를 흘낏 보며 말했다.

“시신에 손을 대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르신은 못 믿겠다는 듯 재차 물었다.

“그럼 교도는 어디에 쓰시려는 겁니까?”

“쓸 데가 있습니다.”

사방화의 단호함에 어르신은 다시 진옥을 바라보았다.

“태자전하…….”

“노 대인께선 잠시 가만히 계시게.”

어르신은 진옥의 말을 듣고서야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이내 사방화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날은 곧 어두워지려 하고 있었다.

“일주향(*一炷香: 30분) 밖에 남지 않았군요.”

“무슨 말이오?”

진옥이 물었다.

“이 시신을 아무도 건드리지 않아도, 곧 있으면 뼈와 살 하나 남지 않고 완벽하게 사라질 것입니다.”

사방화가 답했다.

“뭐?”

노인들은 일제히 깜짝 놀랐다.

좌상도 다급히 앞으로 나왔다.

“소왕비, 말씀을 멋대로 해서는 아니 되오.”

사방화는 싸늘한 웃음을 지었다.

“저는 한 번도 거짓을 말한 적이 없습니다. 독충술에 걸려 죽은 것으로 보이나 오늘 진시(*辰時: 아침 7 ~ 9시)에 또 누군가 이시산(*离尸散: 시신의 뼈와 살을 없애버리는 약)을 쓴듯합니다. 이시산을 쓰면 여섯 시진까진 시신이 온전하나 끝내는 뼈와 살이 사라지고 머리카락조차 남지 않게 됩니다.”

모든 이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소왕비마마, 혹시라도 그런 말씀으로 놀라게 하시면 안 됩니다.”

한 어르신이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사방화는 그를 향해 담담히 말했다.

“소왕비, 조금 전 말씀하신 독충술은 어찌 된 일이란 말이오?”

좌상이 물었다.

“좌상 대인, 예전 법불사에서 있었던 화재와 살인 사건을 기억하시지요?”

좌상이 고개를 끄덕이자 사방화는 다시금 말을 이었다.

“당시 법불사 무망 대사도 서방님을 찌른 후 독충술에 걸려 명을 달리했습니다. 지금 노예의 모습과 같은 상황이었지요. 매족 주술의 일종으로 사람을 통제시키는 주술로 알고 있습니다.”

좌상은 안색이 급변했다.

“무망 대사 시신이 사라지고 후에 법불사 모살 사건이 유야무야됐던 기억이 나는구려. 그럼 노예는 어찌 무망 대사와 같은 독충술에 걸렸단 말이오?”

“주술을 쓴 자에게 물어봐야겠지요.”

사방화가 답했다.

“소왕비마마, 이것이 정녕 독충술이라 확언할 수 있으십니까?”

이어진 한 어르신의 질문에 사방화는 또 담담히 말했다.

“의술을 배운 자가 고서를 통달하지 않으면 의술을 배웠다할 수 없겠지요.”

어르신은 순간적으로 말이 없어졌다.

“가만, 금일 진시(辰時)에 누군가 이시산을 썼다 하지 않았소? 노예는 이미 진시에 숨을 거둔 상태였소.”

좌상이 말했다.

“그 문제라면 우선 누가 시신에 손을 대고 이시산을 썼는지 밝혀야겠지요.”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시산이 무엇이오? 어찌 뼈와 살을 없애버리고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만든단 말이오? 화시분(*化尸粉: 인간의 피와 맞닿으면 시신을 황토물로 녹여버리는 가루)과는 또 다른 것이오?”

좌상이 재차 물었다.

“화시분도 일종의 시신을 처리하는 방법이긴 하나 머리카락마저 없애지는 못합니다. 이시산은 여섯 시진 내로 시신의 뼈와 사지를 천천히 분리시켜 다시 녹여버리기 때문에 머리카락조차 남지 못하지요.”

사방화가 말했다.

“소왕비, 검시관들도 알아내지 못한 이 사실들을 소왕비의 한 말씀으로 어찌 다 믿을 수 있겠소?”

좌상이 재차 물었다.

사방화는 이제 좌상의 질문엔 답하지 않고 뒤쪽을 돌아보았다.

“내가 말한 것들은 가져왔느냐?”

“예! 소왕비마마께 아룁니다. 모두 가져왔습니다.”

누군가 앞으로 나와 사방화가 말했던 물건들을 건네주었다.

사방화는 소매를 걷어붙인 뒤 장갑을 끼고 바늘을 집어 긴 실을 하나 꿰었다. 그런 뒤 주위를 둘러싼 모두를 보며 말했다.

“지금 바로 믿을 수 있게 해드리지요. 허나 누구도 소리를 내선 안 됩니다. 만약 소리를 내는 분이 있다면 그 분이 바로 훼방을 놓는 범인일 겁니다.”

모든 이들의 안색이 일제히 어두워졌다.

곧 사방화가 한술을 보며 말했다.

“형부를 장관하시는 한 대인께서도 손 태의 살인 사건과 이 사건을 관련지어 하나의 사건으로 보려 하십니다. 한 대인께선 공평하고 사심 없기로 정평이 나신 분이니 여러분들 모두 대인께 도움을 청하는 데 이의는 없겠지요.

이 역시 이 사건의 공정함을 보여드리기 위함입니다. 손 태의의 죽음을 저 혼자 힘으로 모두를 설득할 순 없는 데다 제가 손을 썼다는 누명을 쓰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하고요.”

그에 한술이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한 발자국 나왔다.

“좋습니다! 소왕비마마의 증인이 되어드리겠습니다.”

사방화는 살짝 고개를 끄덕인 뒤 오권에게 말했다.

“오 태감, 명치 부분 옷깃을 열어주세요.”

“예! 소인, 비록 손발이 둔하긴 하나 명을 받들겠습니다.”

오권도 즉각 앞으로 나와 노예의 옷깃을 열었다. 노예의 명치 부분은 겉으로 봐선 아무 이상이 없어보였다.

이내 사방화는 바늘로 자신의 손목을 살짝 찌르고는 흘러나온 피를 노예의 명치에 떨어뜨렸다. 그런 뒤 곧장 바늘로 찔러선 바늘에 꿴 실 한쪽을 한술에게 건네주었다.

“한 대인, 잘 들고 있어요. 잠시 후 뭔가를 봐도 절대 움직이면 안돼요.”

한술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접시와 그릇 하나씩 더 가지고 오너라.”

이어진 사방화의 분부에 하인은 곧바로 밖으로 향했다.

그리고 모두는 그저 멀뚱히 노예의 명치 부분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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