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0화 (670/978)

670화 의식을 잃고 쓰러지다 (2) 

한술의 얼굴에는 크진 않지만 이미 비에 젖어 하얗게 염증이 올라오기 시작한 상처들이 보였다. 옷도 군데군데 찢어진 자국이 있었다. 한술이 이렇게 허름한 모습으로 있는 건 아주 이례적인 일이었다.

한술은 여전히 겁에 질린 얼굴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오는 길에 말도 안 되는 연쇄 모살을 겪어, 하마터면 이곳에 발을 들이지도 못할 뻔했습니다.”

영강후가 곧바로 캐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한술이 말을 하려던 순간 사방화가 그를 가로막고 오권에게 말했다.

“서방님은요? 어서 그쪽으로 데려가 주세요.”

“내전에 계십니다. 어서 드시지요, 소왕비마마.”

오권은 곧장 그녀를 인도해 안으로 향했다.

사방화도 빠른 걸음으로 그의 뒤를 따랐고, 이목청도 사방화와 함께 했다.

좌상 역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태자전하와 소왕야의 안위가 급하니 나머지는 후에 다시 이야기합시다.”

좌상이 내전으로 향하자 영강후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 뒤를 따랐다.

남은 몇몇 사람들도 서로 눈빛을 주고받고는 뒤따라 움직였다.

* * *

내전에 들어서자 침상에 나란히 미동 없이 누워있는 진강과 진옥이 보였다. 사방화는 서둘러 진강의 곁으로 다가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런데 진강과 사방화의 손이 닿자마자 진강의 손에서 자색 빛이 뿜어져 나와  찌릿한 충격을 안겼다. 사방화는 그 힘을 미처 피하지 못해 순간 뒤로 밀려났다.

너무나 갑작스러워 사방화는 아예 무방비상태였지만 다행히 곁에 있던 이목청이 그녀를 방 바깥으로 밀려나지 않게 꼭 잡아주었다.

사방화는 곧장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진강의 손과 맞닿았던 부분에선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목청도 그 모습에 순간 안색이 급변했다.

“어찌된 일입니까?”

사방화는 고개를 내저었다.

오권 역시 앞으로 나와 사방화의 손을 보고 당황하며 입을 열었다.

“아이고! 소왕비마마께 진작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데, 이게 다 늙은 제 탓입니다. 태자전하와 소왕야께서 쓰러지신 후부터 누군가 건드리기만 해도 몸에서 엄청난 힘이 나와 상대를 튕겨내고 있습니다.”

사방화가 눈가를 찌푸리며 물었다.

“어쩌다 쓰러지신 거죠?”

“소왕야께서 먼저 군영에 도착하셨고 소인은 태자전하를 모시고 뒤늦게 군영에 도착했습니다. 소왕야께선 범양 노씨 노예 공자의 시신을 부검해야 한다고 하셨지만, 범양 노씨 가문에선 부검을 하면 시신이 훼손되니 땅에 묻혀서도 편안하지 못하다며 안 된다고 반대하셨습니다. 

태자전하, 좌상 대인도 같은 뜻이셨고요. 하지만 소왕야께서 부검을 하지 않으면 정확한 사인을 밝혀내지 못할 것이라며 뜻을 굽히지 않으셨고 결국 두 분께선 다툼을 벌이시다 돌연 의식을 잃고 쓰러지셨습니다.”

“얼마나 심하게 싸우신 거죠?”

사방화가 물었다.

“얼마 가지 못하고 일제히 쓰러지셨습니다. 소인도 곁에 있었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오권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말을 이었다.

“어디서 다툼이 일어났나요?”

사방화가 물었다.

“외전(外殿)입니다.”

오권이 답했다.

“그런데 손을 대지도 못한다면서 침상까진 어찌 옮겼어요?”

사방화가 재차 묻자 오권이 또 곧바로 답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소왕야께는 손을 댈 수가 없지만 태자전하께는 가능했습니다. 두 분은 쓰러지시면서 손을 맞잡은 후 절대 떨어지지 않아 태자전하를 끌어당겨 소왕야를 함께 침상 위로 옮긴 것입니다.”

사방화는 돌연 앞으로 다가와 재차 진강에게 손을 댔다.

“조심하십시오, 소왕비마마!”

오권이 즉시 소리쳤다.

이목청도 곧장 사방화를 가로막고 말했다.

“참으로 이상합니다. 미간에 은근한 기류가 흐르고 온몸엔 경락(*經絡: 경맥과 낙맥)과 진기가 뒤섞여 마구 흐르고 있는듯합니다. 아무래도 주화입마(*走火入魔: 몸속 기가 뒤틀려 통제할 수 없는 상태)인 듯한데.”

사방화가 고개를 내저으며 뒤쪽을 바라보았다.

“주화입마가 아닙니다. 오 태감, 이 공자님만 남고 다들 나가주십시오.”

좌상이 안색을 굳히며 말했다.

“소왕비, 그게 무슨 뜻이오?”

“살리려는 겁니다. 저는 사람을 살릴 때 누군가 곁에서 지켜보는 걸 좋아라하지 않습니다. 영강후께서도 잘 아시지요? 영강후 부인을 구할 때에도 제 곁에 아무도 있지 못하게 했었습니다.”

사방화가 말했다.

“그래요, 좌상 대인. 나가서 기다립시다.”

영강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진정 태자전하와 소왕야를 살릴 수 있는 것이오? 어찌 된 연유인지 아는 것인가?”

좌상은 계속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건 태자전하께 여쭤보아야겠지요. 궁금하시다면 태자전하께서 깨어나시거든 여쭤보십시오.”

사방화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일순간 멍해진 좌상을 두고, 사방화는 더 이상 다른 말은 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재차 나갈 것을 청했다.

곧 좌상이 소매를 걷으며 일어나 나가자 나머지 사람들도 그 뒤를 따랐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목청과 오권만이 남게 되었다.

사방화가 이목청에게 말했다.

“주화입마가 아니라 일전에 태자전하께서 내게 동심술을 썼던 것을 낭군님께서 막아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다시 발작을 일으킨 겁니다.”

이목청이 깜짝 놀랐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평양성에서의 그날, 사방화는 진옥의 아주 은밀한 계략에 걸려 칠성을 구하지 못했었다. 당시 그녀는 진옥에게 나름 상처를 입히긴 했으나, 그에게 그 수도 다 읽혀버렸었다.

그때 진강이 그 저주를 스스로 제 몸에 옮기지 않았더라면 사방화는 꼼짝없이 동심술에 걸려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됐다면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이는 진강과 진옥이 합심해 누구도 알지 못하게 했으니 이목청이 모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목청의 도움이 필요했다.

“제가 뭘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이목청은 잠시 깜짝 놀랐다가 침상에 누워있는 두 사람을 보며 물었다.

“동심술 해법은 모르지만 쓸 만한 방도가 하나 있습니다. 동심술 제거는 못해도 두 분을 떼놓을 순 있어요. 떼어놓기만 하면 자연히 일어날 겁니다.”

사방화가 말했다.

“무슨 방법입니까?”

이목청이 물었다.

“태자전하의 명치에서 빼낸 피요. 조금만 빼내 주세요.”

사방화의 말에 이목청은 순간 멍해졌고, 오권은 아예 아연실색을 했다.

“소왕비마마! 어찌 태자전하의 옥체를 그리 할 수 있단 말입니까! 황제폐하와 황후마마께서 낳아주신…….”

“오 태감! 사실 폐하께서도 생병(*生病: 거짓으로 병을 앓는 척 함)을 앓고 계시지요?”

사방화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오권은 깜짝 놀라 온몸이 얼어붙은 채 사방화를 바라보았다.

사방화는 다시 웃으며 이목청을 향해 말했다.

“못하시겠다면 내가 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이목청은 오권이 사방화의 말에 더 이상 고개를 들지 못하는 것을 보고는 서둘러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며 품에서 비수를 꺼냈다. 곧 이목청이 침상으로 다가가 진옥의 명치에 칼을 댔다. 

진옥의 피가 흘러나오자 사방화는 그릇도 쓰지 않고 공력을 이용해 흐르는 피를 하나로 뭉쳤다. 기를 모아 진강의 미간 쪽으로 당겨가니 진강의 미간에 어슴푸레 팥알만 한 크기의 무언가가 금세 피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얼마 뒤 돌연 진옥의 손이 움직임을 보였다.

사방화가 곧장 이목청에게 말했다.

“손을 거두세요!”

이목청은 비수를 거두고 침상에서 뛰어내려왔다.

사방화가 손을 떼려던 순간 진옥이 돌연 눈을 떠 그녀의 손을 붙잡으려 했다. 그때, 바로 곁에서 손 하나가 나와 그보다 더 빨리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은 바로 진강의 것이었다. 사방화는 그와 손이 맞닿았지만, 더 이상 뒤로 튕겨 나가지 않았다. 세차게 흘러나오던 기류도 갑작스럽게 평온해지며 아무런 기복도 보이질 않았다.

사방화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진강을 바라보았다.

“일어날 수 있으시겠어요?”

“잡아주시오.”

진강이 답했다.

사방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일으켜주었고, 진강은 천천히 침상에서 내려와 뒤쪽을 바라보았다.

진옥의 명치에선 여전히 피가 흘러 옷을 적시고 있었고 사방화를 향해 뻗었던 손은 어느새 제자리로 돌아가 있었다. 그는 조용히 자리에 누워 진강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진강이 차가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동심술까지 불러일으켜 스스로를 끌어들이다니 대체 어쩌려는 셈이냐?”

진옥은 눈을 가늘게 뜨고 곧장 사방화를 향해 말했다.

“이 방법으로 동심술을 제거할 생각을 하다니.”

“낭군님을 다치게 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 명치에서 흘러나오는 피로 끝날 것이 아니라 심장을 도려내 저주를 끊어내 버리려 했습니다.”

사방화는 진옥이 동심술을 썼던 그날을 떠올리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내 진옥이 비웃음을 흘렸다.

“진강을 그리도 아껴준단 말인가? 내가 죽기까지 바라면서?”

사방화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진강은 제 낭군님이십니다.”

진옥이 사방화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대의를 품었던 그대가 아니오? 태자인 내가 죽는다면 남진이 한바탕 날 리가 날 건 뻔한 일 아닌가? 나를 깨우치려하던 그 말들은 진심으로 대의를 생각한 게 아니라 그냥 날 위해서 했던 말들이었소?”

“이 나라 황태자전하께서 어찌 저와 같겠습니까? 저는 한낱 연약한 여인일 뿐입니다. 나라의 대의도 그냥 몇 마디 할 수 있는 것이 전부이지요. 저처럼 미천한 사람이 나서면 세상이 다 비웃지 않겠습니까? 저는 단지 제 낭군님을 건드린다면 절대로 그냥 넘어가진 않을 거란 걸 깨달았을 뿐입니다.”

사방화는 줄곧 싸늘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한낱 연약한 여인이라고?”

진옥이 웃음을 터뜨리며 진강을 바라보았다.

“진강, 부인 말씀에 득의양양해졌겠구나.”

진강은 그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진옥이 다시 말을 시작했다.

“일전에 말했듯 너와 난 꾀를 내 계략을 쓰는 것도, 마음이 독한 것도 모두 비슷하게 닮았지만, 진강 너는 단지 팔자를 하나 더 타고났을 뿐이다.”

진옥은 또 사방화를 향해 말을 이어갔다.

“피를 빼낼 줄만 알고 다시 감싸주진 않는 것이오? 내가 죽으면 우리 진강 아우님도 살 수 없을 텐데.”

“칼에 찔려도 죽지 않던 분이 그 정도 피 가지고 어찌 될 리가 있겠습니까. 오 태감, 이건 지혈약이에요.”

사방화는 품에서 병을 꺼내 오권에게 내밀었다.

오권은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채 덜덜 떨리는 손으로 병을 받았다.

“송구하오나 이 늙은이는 할 줄을 모릅니다.”

“군영에 의원이 있잖아요.”

사방화가 짧게 답한 뒤 진강을 부축해 바깥으로 향했다.

오권은 진옥을 보며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의……, 의원을 부르면 전하께서 상처 입으신 것도 알려질 텐데…….”

“진강 소왕을 살리기 위해 이 태자의 몸에 손을 댔다는 것이 알려지면, 과연 천하 백성들은 어찌 떠들어 댈까?”

진옥이 사방화를 보며 말했다.

“제가 언제부터 그런 것에 연연했다 생각하십니까?”

사방화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면 영친왕부가 뭐라고 입에 오르내리든 연연하지 않는다는 것이오? 두 분께선 그럴지 몰라도 과연 백부님도 그러실까? 그래, 이 나라 태자 따위는 아끼지 않아도 좋소. 그렇지만 이 남진 강산을 위해 전전긍긍하며 한 발짝 내딛지도 못한 날들은 다 저버리고 이젠 남들의 지탄을 받겠다는 말이오?”

진옥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사방화는 결국 발걸음을 멈추고 맹렬히 고개를 돌렸다.

“전하, 황태자전하께서 백성을 이리 협박하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진강이 저지른 수많은 뻔뻔스러운 짓들은 그대가 두 눈으로 보지 못했을 뿐, 나보다 더 심한 짓을 할 때도 많았는데 진강에게는 부끄럽지 않냐 말해본 적 있소?”

진옥의 말에 사방화는 입술을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