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9화 의식을 잃고 쓰러지다 (1)
한편, 모두는 이제 다 괜찮아졌지만, 형부에 오래도록 있었던 한술만은 이런 살벌한 현장은 처음이었는지 맥없이 말 위에 엎어져 있었다. 그러자 이목청이 그를 살피며 걱정스레 물었다.
“한 대인, 괜찮으시오?”
한술은 맥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어디가 불편한 건 아니시오?”
이목청이 재차 묻자, 한술이 몸을 떨며 말했다.
“얼마 남지 않았으니 조금 더 버틸 수 있습니다. 더 이상 무슨 일이 일어나진 않겠지요?”
이목청은 고개를 내저었다.
“장담할 수 없소.”
한술은 몸을 일으키려다 이목청의 말을 듣고 다시 말 위로 엎어졌다.
“대체 어떤 놈이 이런 식으로 우리를 죽이려 드는 겁니까! 저 옥작이란 아이가 늑대를 쫓아내지 못했더라면 이미 늑대들에게 사지가 찢겨 숨통이 끊어졌을 겁니다! 반평생 살면서 형부의 어마어마한 사건들도 적지 않게 겪었으나, 오늘처럼 이렇게 살벌한 일들은 경험해본 적은 없습니다.”
이목청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일전에 태평성대라 칭하던 남진 경성은 어딜 가고 이리 줄곧 시끄러운지.”
한술도 한숨을 내쉬었다.
뒤이어 이목청은 서산 군영을 향해 고개를 돌렸지만, 빗줄기가 굵어 뚜렷이 보이는 게 없었다.
잠시 후 한술이 돌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 공자님, 소왕야의 서동이란 옥작이란 아이, 혹 신분이 어찌 됩니까?”
“왕씨 가문의 적통 아가씨께서 낳으신 아이요.”
이목청의 답에, 한술이 깜짝 놀라 물었다.
“저도 형부를 관장하고 있어 각 세가의 족보를 손금 보듯 꿰고 있습니다만, 혹 어느 아가씨를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왕경미 아가씨라오.”
한술은 안색이 급변해 더욱 목소리를 낮췄다.
“북제 옥씨 가문의 적통 공자님과 연관된 그 왕경미 아가씨 말씀이십니까?”
이목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술은 잠시 침묵하더니 돌연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제가 알기로 300년 전, 천하가 난리인 통에 왕씨 가문은 남진을 택하고 옥씨 가문은 북제를 택했지요. 막북의 난으로 인해 두 가문은 막대한 손실을 얻었고, 수년 전부터 전장에 나간 탓에 군사비도 많이 지출돼 백성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도 없었습니다.
하여 두 가문은 전전긍긍하며 버텨오다 끝내 남진과 북제로 서로 갈라섰고, 어느덧 이렇게 300년이 흘렀지요. 그 두 가문은 줄곧 서로를 원수처럼 대했는데 뜻밖에 이 세대에 왕경미 아가씨와 옥계언 공자님 사이에서 저 분이 태어난 것이로군요. 어쩐지 저 아이의 성이 옥씨더라니…….”
아무 말도 없는 이목청을 보고, 한술은 재차 말을 이었다.
“진강 소왕야께서도 겁도 없이 저 분을 서동으로 거두셨지요. 역시 폐하와 태자전하의 질책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자 잠자코 있던 이목청이 돌연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폐하와 태자전하께서 정녕 모르는 것이라 생각하시오? 왕씨 가문은 분명 덕자 태후마마의 친정인데 말이오.”
한술은 잠시 생각하다가 이내 모든 것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덕자 태후마마의 성이 왕씨이시지요. 남진 제국이 들어선 후, 여태 왕씨 가문은 제사장 한 분과 덕자 태후마마만 입궁시킨 뒤 줄곧 몸을 사려왔습니다. 왕씨 가문은 그렇게 내내 진안백에만 있었지요.”
이목청은 또 말없이 그저 미소만 보였다.
한술도 더 이상 입 밖으로 꺼내선 안 될 이야기가 있기에 입을 닫았다.
사방화는 마차 안에서 몸을 추스르며 기력을 회복하는 동시에 자연스레 귀를 쫑긋 세웠다. 한술이 아무리 목소리를 낮춘다한들, 사방화는 그의 목소리를 놓치지 않고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한술의 말을 들으며 조용히 생각했다. 왕씨 가문은 진안백에 있기를 결코 스스로 원했던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그곳에 있어야 했었을 것이다.
사실 왕씨 가문엔 큰 재주를 가진 사내가 없어 가문이 번성하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경솔한 짓을 저질렀다간, 280년을 지켜온 가문이 하루아침에 전복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왕씨 가문은 더 이상 279년 동안의 좌절과 실패를 감당할 수 없었기에 반드시 안정을 찾아야만 했다.
옥씨 가문의 상황은 또 달랐다. 옥씨 가문은 한 세대마다 특출 난 인물들이 있었으나, 한 세대에 걸출한 인물이 두 명이나 나오면서 문제가 시작되었다.
그 한명이 바로 옥계언이고, 다른 한명이 바로 옥언신이었다.
옥계언은 원수나 다름없는 왕씨 가문의 왕경미를 마음에 품었고, 양가의 허락을 얻지 못하자 결국 집을 나와 바깥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반대로 언신은 무명산에 들어갔다가 사방화와의 약속에 발목이 잡혀 비밀리에 천기각을 세우게 됐다. 언신은 이제 겨우 옥씨 가문으로 돌아가긴 했지만, 사실 사방화를 위해서 돌아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옥씨 가문과 왕씨 가문에겐 많은 사연이 있었고, 범양 노씨, 조군 이씨, 청하 최씨와 같은 다른 세가들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로 보면 사씨 집안은 가문을 나눈 뒤 아무 이익도 얻지 못하지만, 복잡한 일들에 연루된 것에서 벗어났으니 비로소 평온을 되찾은 셈이라 할 수 있었다.
* * *
사방화 일행에게는 더 이상 험난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일행은 드디어 무사히 서산 군영에 도착했다.
서산 군영의 문은 굳게 닫혀있었고, 문 앞에는 보초를 서는 병사는 긴 창을 들고 빗속에 아주 엄숙히 서 있었다.
시화, 시묵이 마차를 멈추자 옥작이 휘장을 젖혔고, 사방화는 우산을 쓰고 마차에서 내렸다. 곧 이목청과 한술도 말에서 내렸다.
옥작은 사방화를 흘낏 보고는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인 후 앞장을 섰다.
“소왕야의 명을 받아 소왕비마마를 모셔왔으니 어서 알리도록 하십시오.”
그 말에 곧장 병사 한 명이 안으로 향했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안에선 아무도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사방화는 미간을 찌푸리며 이목청을 바라봤다. 이목청 역시 안색이 한층 가라앉은 상태였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요?”
사방화는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반 시진 후에는 해가 완전히 지겠습니다.”
한술이 하늘을 한번 보곤, 옷이 다 젖어 몸을 오들오들 떨며 말했다.
이내 사방화는 입술을 깨물며 안으로 향하려 했다. 그 순간, 문을 지키던 병사들이 긴 창을 들고 그녀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병사들 중 하나가 엄숙히 입을 열었다.
“이곳은 군영이니 소왕비마마께선 걸음을 멈춰주십시오. 명 없이는 누구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무턱대고 들어간다면 죄가 되는 것이겠지?”
사방화가 물었다.
병사는 창을 쥐고 있던 손에 더욱더 힘을 줬고, 나머지 병사들도 일제히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자 이목청이 앞으로 걸어 나와 사방화에게 말했다.
“군영에 허락 없이 들어가는 건 당연히 죄가 됩니다. 무공 실력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벌떼처럼 달려드는 병사들을 어찌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삼십 만 군영은 그 누구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곳이지요. 진강 소왕야께서 이리 오라고 말씀하신 것이니 조금 더 기다려봅시다.”
사방화도 이 몇 사람으론 절대 이 군영을 뚫고 들어갈 수 없다는 걸 알기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 * *
시간이 점점 흘러 눈앞이 어둑해지려 할 때쯤, 드디어 안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아까 군영 안으로 들어갔던 병사는 노태감과 함께 나왔다.
얼굴에 한가득 어두운 안색을 하고는 급히 다가오는 노태감은 바로 오권이었다. 사방화는 단번에 그를 알아보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곧 대문이 열리고 오권은 예를 갖추기도 급했는지 곧장 그녀를 이끌었다.
“소왕비마마, 어서 드시지요.”
사방화가 곧바로 대문으로 들어서자, 이목청, 한술, 옥작, 시화, 시묵과 나머지 사람들도 그녀의 뒤를 따라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오권도 이목청과 한술이 따라오는 것을 따로 막지 않고 걸음만 재촉했다.
“소왕비마마, 어찌 이제야 오신 것입니까?”
사방화가 오권을 힐끗 보며 말했다.
“오는 길에 일이 좀 있었어요.”
오권이 사방화가 말을 얼버무리는 것을 보고는 이내 말을 이었다.
“손 태의와 함께 오시는 것이 아니셨습니까? 비가 많이 내리는 탓에 못 오신 겁니까?”
“손 태의께선 나보다 먼저 오셨었지만 성 밖 오 리쯤 떨어진 곳에서 살해 당하셨어요.”
사방화의 말에 오권은 깜짝 놀라 걸음을 멈췄다.
사방화는 뒤쪽에 있던 한술을 보며 말을 덧붙였다.
“그래서 형부의 한 대인이 함께 오신 거예요.”
오권은 황제와 오랜 세월을 함께한 손 태의의 죽음에 너무도 놀라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성급히 걸음만 옮기는 오권을 보고, 사방화가 문득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태감은 어찌 여기 계신 건가요? 폐하께서도 함께 오셨나요?”
오권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서산 군영에서 일이 터졌다는 소식을 듣고 태자전하께서 폐하께 말씀을 올렸는데 폐하께서 저를 함께 이곳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사방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방님은요? 지금 어디에 계신가요?”
오권이 곧바로 답했다.
“대영전(大营殿)에 계십니다.”
사방화도 오권의 급한 발걸음에 덩달아 마음이 급해지고 걱정도 커졌다.
“태감, 혹시 서방님께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지요?”
오권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큰일이 생겼습니다.”
“네? 무슨 일이에요?”
사방화가 깜짝 놀라 오권을 막아섰다.
“아이고, 소왕비마마! 진정하십시오. 소왕야와 태자전하 두 분께 일이 생기셨습니다. 그래서 의술에 능하신 소왕비마마께서 오시기만 학수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군영 안의 모든 의원이 살펴봤지만 무슨 연유인지 밝혀내지 못했으니 어서 가서 한번 봐 주십시오. 태자전하와 소왕야께서 두 시진 전부터 의식을 잃고 쓰러지신 후, 지금까지 깨어나지 않고 계십니다.”
사방화는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어 그 길로 곧장 빠르게 달렸다.
연무장을 지나, 일렬로 늘어선 병영을 지나 대전에 다다르자 오권은 사방화를 힐끗 본 뒤 그녀를 안으로 데려갔다.
* * *
대영전 안은 이미 사람들로 한 가득이었다.
그중 사방화가 아는 얼굴은 좌상, 영강후, 병부상서와 새로 부임한 병부 시랑 최의지가 있었다. 처음 보는 이들 중엔 어르신 몇 분과 군복을 입고 계급이 아주 높아 보이는 병장들도 자리해있었다.
오권은 다급히 사방화를 안으로 이끌었다.
“소왕비마마께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상부 이 공자님과 형부의 한 대인께서도 함께 오셨습니다.”
좌상은 딸 노설영을 구해준 사방화를 상냥히 맞아주었다.
“어찌 소왕비 혼자 오셨는가? 손 태의는?”
좌상의 말에 오권은 사방화를 바라봤고, 사방화는 다시 한술을 바라봤다.
한술은 자신보다 관직이 훨씬 높은 좌상과 영강후를 보고는 서둘러 예를 차리며 입을 열었다.
“좌상 대인, 영강후 나리. 손 태의님은 오던 길에 누군가에게 살해당하셨습니다. 보통 백성과는 신분부터 다르신 손 태의님이시기에, 소관은 태자전하께서 여기 계신단 소리를 듣고 소식을 듣고 아뢸 겸 사건을 조사하러 왔습니다.”
좌상은 깜짝 놀라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손 태의가 살해를 당했다고?”
영강후도 대경실색하며 한술을 향해 말했다.
“한 대인, 그런데 모습이 왜 이러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