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장. 다녀왔어
“좋은 아침입니다.”
평소와 같이 인사하며 조용히 사무실로 들어서는 신라를 보고, 신후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구겼다. 어제까지 멀쩡하던 그녀의 오른 손목에 반깁스가 되어 있었다.
“다쳤어?”
“네. 밤에 운동을 하다가요.”
퇴근 후에 곧장 집으로 향하는 일이 드문 신라였다. 밤마다 어디를 그렇게 돌아다니는지, 간혹 오피스텔 앞에서 마주치면 항상 땀투성이였다. 처음에는 헬스라도 다녀오나 싶었지만 감추지 못한 생채기들을 보면 평범한 운동은 아닐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신라에게 다가갔다. 힘겹게 코트를 벗어 내려놓은 신라가 의아한 눈초리로 그를 마주 봤다.
“왜 그러세요?”
신후는 그녀의 깁스 부위를 조심스럽게 쥐었다.
“병원은 제대로 다녀온 거야?”
“네.”
“새벽에 다쳤을 테니 응급실에라도 다녀왔나 보군.”
“…신경 쓰지 말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조 박사도 네가 이렇게 위험한 일을 하고 돌아다니는 걸 알아?”
무의식중에 나온 지칭인지는 모르겠지만, ‘네가’라고 말했다. 신라는 당황한 마음을 감추며 대답했다.
“위험하지 않아요. 운이 나빴을 뿐이에요.”
“함수진 양이 나를 보고 무언가 사라졌다는 식으로 말했었지. 예전에는 나도 당신이 하고 돌아다니는 일을 했던 거겠지?”
“……”
“숨길 생각 하지 마. 날 잘 알았었다면 내가 얼마나 집요하고 날카롭게 파고드는 성격인지 알 거 아니야.”
예전에는 한신후를 포기시키려면 어떤 방법을 썼더라. 잠깐 궁리한 끝에, 신라는 문득 그의 생일이 다가오고 있음을 떠올렸다.
“생일 때 스케줄 있으세요?”
“뭐?”
마치 데이트를 하자는 식으로 말해버린 신라는 아차 싶어 말을 바꾸려 했다.
“아, 마침 그날이 주말이길래, 얼른 약속을 잡지 않으면 심심하실까 봐….”
“스케줄 없어.”
신후가 제법 단호하게 얘기했다.
“그러시구나. 그러면 금요일에라도 교수님들끼리 간단히 저녁 식사라도 하는 건-”
“아침 10시. 주차장에서 기다릴 테니까 내려와.”
“…네?”
신후는 통보와 같은 말을 남기고 다시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신라는 멍한 모습으로 자리에 앉았다. 일단은 당장의 위기를 모면해 다행이었지만, 더 큰 일을 만들고 만 것이다.
‘난 바보인가 봐….’
자책하며 시무룩하게 노트북을 켜는 그녀를 보고, 신후는 홀로 작게 웃었다.
신후가 선택한 드라이브 코스는 신라도 한 번 와본 적이 있는 곳이었다.
- 차를 타고 좀 가야 하는 곳. 설경이 일품이라 매년 혼자 다니던 장소거든.
그는 오늘 향수를 뿌리고 나왔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마지막으로 그에게 선물했던 향수와 같은 향이었다. 낯익은 머플러도 하고 있었다. 신후가 떠나고 그의 집에 보관해두었던 건데, 짐을 아래층으로 옮기면서 함께 옮겨졌던 모양이었다.
혹시나 기억할까,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곳에 큰 고목이 있다고 하던데… 혹시 아세요?”
신후는 작게 입가를 당겼다.
“매년 오는 곳인데, 그런 곳이 있는 줄은 몰랐네.”
역시 전생이나 귀신에 연관된 내용들은 그의 머릿속에서 모두 사라진 상태이었다.
드라이브 도중 시장해진 그들은 근처에 보이는 닭백숙집으로 들어가 점심을 먹기로 했다.
“계십니까.”
문은 열려 있는데 안에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때 뒤따라 들어온 여인이 난처한 듯이 얘기했다.
“여기 종업원인데, 이 댁 어린아이가 갑자기 쓰러졌다는 연락이 와서, 사장님 내외가 부랴부랴 집으로 가버렸어요. 식사는 가능하니까 들어오셔요.”
두 사람은 백숙 중 자를 시켜놓고 좌식 식탁에 마주 앉았다. 어색하게 다른 곳을 쳐다보는 신라를 보고 신후가 식탁 위를 가볍게 두드렸다.
“생일에도 투명 인간 취급을 받고 싶지는 않은데.”
“제가 언제 교수님을 투명 인간 취급했나요?”
“아직 축하 인사 못 들었어.”
애처럼 보채는 남자가 귀여워 결국 웃음이 났다. 신라는 미소의 여운이 남은 얼굴로 말했다.
“생일 축하해요.”
“……”
신라가 순순히 말할 줄 몰랐던 신후는 그답지 않게 민망함을 숨기려 냉수를 들이켰다.
그들이 따뜻한 국물로 한창 몸을 녹이고 있을 때, 사장 내외로 보이는 이들이 어두운 낯빛으로 식당에 들어섰다. 종업원이 달려 나와 그들에게 물었다.
“애는 좀 어때요?”
“말도 마. 혼자 숲에 들어갔다가 벌레에 물린 모양인데, 병원에 데려가서 혈액 검사를 해봐도 독은 없대. 원인 불명이라네.”
“그럼 아직도 의식을 못 차린 거예요?”
“의식은 차렸는데 아직도 멍-해. 일단은 집에 데려다 놨지.”
대화를 들으며 식사에 집중하던 신라는, 갑자기 멀리서 느껴진 수상한 기척에 숟가락을 멈췄다. 이상한 동태를 보이는 그녀를 보고 신후도 함께 식사를 멈췄다.
“왜 그래?”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식사가 끝나고, 카운터에서 지갑을 꺼내는 신후를 밀어낸 신라가 먼저 현금으로 계산을 했다. 떨떠름한 신후의 표정을 보고 신라는 조용히 웃었다.
신후가 가게를 나선 뒤, 신라는 사장 내외에게 물었다.
“댁이 혹시 이 근처신가요?”
“예… 왜요?”
“음… 산벌레에 대해 잘 아는데, 한 번 봐 드릴까 싶어서요.”
“아이고, 정말입니까!”
신라는 부부 내외를 따라나서며 바깥에 서 있던 신후에게 미안한 얼굴로 얘기했다.
“저분들 집에 잠시 다녀올게요. 차에서 기다려주실래요?”
“무슨 일이야?”
“그냥 걸리는 게 있어서요.”
“……”
신후는 말없이 차로 돌아갔다. 따라올 기미가 없어 보이는 그를 보고 안도의 숨을 내쉰 신라는 부부 내외를 따라갔다.그런데 잠시 후 뒤에서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두 사람의 외투를 챙겨온 신후였다.
“괜히 먼 데 데려와서 감기 들게 하고 싶지 않아.”
“……”
“방해 안 할 테니까 없는 사람 취급해.”
투명 인간 취급하지 말라고 할 때는 언제고, 빠르게 태세 전환을 한 신후를 보고 신라는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백숙집 사장 내외가 사는 곳은 허름한 단독 주택이었다. 신후는 신라가 불편해할 것을 고려해 바깥바람을 쐬고 있겠다고 했다.
아이는 마치 넋이 나간 것처럼 벽에 기대앉아 있었다. 신라는 아이의 안색을 살피고, 발목의 물린 자리도 꼼꼼히 살폈다.
‘요괴에게 당한 상처구나.’
부부가 눈치채지 못하게 조용히 일용도를 소환한 그녀는, 분명히 집 안에 숨어 있을 작은 요괴의 모습을 찾았다.
치익-
그때 머리 위에서 소름 끼치는 소리가 울렸다. 고개를 쳐들고 보니 손바닥만 한 거미가 천장에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너구나.’
그녀는 주저 없이 일용도를 내질러 거미의 몸을 꿰뚫었다. 애초에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었던 거미는 그 자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다음은 아이의 몸을 잠식하고 있는 귀기였다. 신라는 아이의 어머니에게 마시는 정수를 부탁했다. 그곳에 맑은 기운을 불어넣은 다음 아이에게 조금씩 마시게 했다.
“얘, 정신이 드니?”
해로운 귀기가 몸에서 빠져나가자 아이는 조금씩 정신을 차렸다.
“어…. 누나는 누구예요?”
“그냥, 지나가던 사람.”
신라는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부부 내외는 크게 기뻐하며 신라에게 거듭 감사의 뜻을 전했다.
“저런, 눈이 그새 많이 내렸네요. 밤새 폭설이라더니….”
아이의 아버지가 창밖을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바깥에 있을 신후가 걱정된 신라는 서둘러 집 밖으로 나가보았다.
“교수님-!”
눈보라가 몰아치기 시작하는데 신후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는 서둘러 핸드폰을 꺼내 그에게 전화를 걸어봤다. 집 뒤편에서 그의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교수님!”
그런데 그곳에 한신후는 없었다. 주인 잃은 핸드폰만 바닥에 덩그러니 떨어져 있을 뿐이었다.
“한신후…?”
신라의 안색이 금세 새하얗게 질렸다.
뒷목이 찌르르 쑤시는 기분 나쁜 통증을 느끼며 신후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인기척이라고는 없는 깊은 산속이었다. 몸이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기분이 들어 내려다보니 사지가 끈끈한 실 같은 것에 휘감겨 있었다.
‘마치 거미줄에 걸린 먹이 같군.’
자조적으로 생각함과 동시에, 머리 위에서 실 뭉텅이가 뚝뚝 떨어졌다. 분명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었다.
“꿈…은 아닌 것 같은데.”
그때 멀찍이서 사람 발소리가 들렸다.
“한신후-!”
신라의 목소리였다. 그는 반가워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난처하게 고민했다. 씩씩하게 달려온 여인은 이번에도 손에서 무언가를 꺼내 드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휘두르기 전 거센 바람에 휩쓸려 뒤쪽 나무에 세게 부딪히고 말았다.
“유 교수!”
“가만히 있으세요!”
신라의 눈앞에는 아까 보았던 거미보다 수십, 수백 배는 더 큰 거미 요괴가 서 있었다. 동족이 당한 것을 알고 해코지를 하기 위해 신후를 데려온 모양이었다.
“사람 잘못 골랐어….”
얼얼한 오른 손목을 감싸며 일어난 신라는 왼손에 일용도를 쥐고 모든 귀력을 그곳에 집중시켰다. 그리고 달려드는 거미귀의 배를 정확히 갈랐다.
신후는 헐거워진 거미줄을 완력으로 뜯어내고 신라에게 달려와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괜찮아? 상처는?”
“괜차… 괜찮아요.”
어지러운 듯이 이마를 짚는 신라를 보고 신후는 심각하게 표정을 굳혔다.
“괜찮지 않으면서 무리하지…”
안색을 확인하려 그녀의 손을 억지로 걷어냈다.
“…유 교수.”
“흑….”
신라는 울고 있었다. 마치 세상을 다 잃은 것처럼 서럽게 울었다. 아이처럼 우는 신라를 달랠 방법을 몰라 신후는 그 앞에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가 이렇게 우는 이유는 모두 자신에게 있음을 눈치를 챘으니까.
- 교수님은… 저 때문에 모든 걸 잃었어요.
또 눈앞에서 잃게 될까 봐 많이 두려웠던 모양이다.
‘또…?’
자기도 모르게 든 생각에 신후는 의문을 품었다.
이대로 두었다간 호흡곤란이 오거나 혼절하거나 둘 중 하나는 할 기세여서, 신후는 그녀를 끌어당겨 품에 꽉 안았다. 가슴팍에 닿는 울음소리가 더 커지는 듯했지만, 온기를 전하고 있으니 더 마음이 놓였다.
“미안… 많이 놀랐구나.”
신라는 한참 후에야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신후의 품에서 떨어졌다. 울음의 여운으로 아직까지 헐떡이면서도 그녀는 신후의 손을 꽉 잡아 끌어당겼다.
“가, 흑, 가요.”
“난 이제 괜찮아.”
“…알아요, 흑.”
파르르 떨리고 있는 가녀린 손가락이 애처로워, 신후는 그녀의 손을 고쳐 쥐었다. 조금 걷다 보니 거꾸로 신후가 그녀를 데리고 걸어가는 모양이 되었다.
“좀 진정이 됐어?”
“…누구 때문인데요.”
“밤마다 저런 걸 때려잡고 다니는 거야?”
“설마 보였어요?”
“유 교수가 날아가는 것만 보였지.”
하늘에서는 눈보라가 세게 휘몰아쳤지만 울창한 나무숲 안에서는 포근한 함박눈처럼 내렸다. 빠르게 돌아갈 필요가 없어진 두 사람은 걸음의 속도를 조금 늦추었다.
“당신이 다니는 길목에는, 항상 잡귀들이 있어요.”
신라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당신이 약해졌다는 소문을 듣고 해코지를 하려고 몰려드는 거예요. 그래서 밤마다 나가서 그 길들을 정리해요.”
신후의 걸음이 멈췄다. 그의 표정이 심각해져 있었다.
“밤마다 생채기를 만들어 오는 게, 나 때문이라는 거야?”
“의뢰를 받아서 나갔다 올 때도 있지만, 그때에도 늘 돌아오면서 그 길을 정리해요.”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야?”
“당신도 그랬으니까요.”
신라가 웃으며 말했다. 사뭇 아파 보이는 미소였다.
“이제 궁금증이 풀렸어요?”
“……”
“돌아가요. 이 정도 눈이 쌓였으면 도로가 봉쇄됐을 수도 있겠다. 그럼 백숙집에 방 하나만 빌려달라고 하죠, 뭐.”
앞서 걸어 나가는 신라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신후가 빠른 걸음으로 따라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아 세웠다.
“난 괜찮으니까 앞으로 그런 일은 하지 마.”
“…이게 직업인 걸요.”
“적어도 날 위해서는 하지 마. 그럼 밤마다 나갈 필요 없잖아.”
“당신을 위한 거예요.”
“네가 다치잖아!”
그의 화난 목소리가 숲길을 울렸다.
신라의 눈에 다시금 눈물이 차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당신을 또 잃는 것보다는 나아.”
“……”
신라는 다시 몸을 틀었다.
신후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답답함에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결국 몸이 따르는 대로 신라를 멈춰 세운 그는 그녀의 젖어 있는 뺨을 감싸 쥐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 밀어낼 힘이 없어 주춤주춤 뒷걸음만 치는 그녀를 나무 기둥까지 몰고 가 기대 세운 그는 더 진하게 키스를 이어갔다.
‘왜 나도 울 것 같은 기분이 들까. 유신라.’
혼란스럽던 머릿속이, 그녀의 포옹에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 신라는 어느새 차분히 눈을 감은 채 스스로 그의 입술을 찾고 있었다.
신후는 깨어나고 처음으로 그의 심장을 빠르게 뛰게 한 여인을 홀린 듯이 바라봤다. 이 여인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머리 대신 온몸이 외치고 있었다.
가까이서 신후의 뺨을 어루만지던 신라가 작게 속삭였다.
“불행해져도 좋아…. 당신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
“돌아가요. 오늘 일은… 그냥 잊어버려요, 우리.”
신라는 표정을 숨긴 채 먼저 자리를 떠났다. 그녀를 바라보는 신후의 심장이 아직도 세차게 뛰고 있었다.
백숙집 사장 내외는 두 사람에게 기꺼이 방 하나를 내어주었다. 순식간에 불어온 눈 때문에 신라의 예상대로 도로가 완전히 봉쇄됐다. 새벽부터 날이 갠다고 했으니 오늘 밤만 버티면 될 것 같았다.
신라에게 침대를 양보한 신후는 바닥에서 낮잠에 들었다. 신라는 그가 잠든 사이 거미귀에게 쏘인 뒷목의 상처를 귀력을 이용해 치료해주었다.
“잘 쉬고 있어요.”
작게 속삭인 그녀는 외투를 집어 들고 밖으로 나섰다. 눈발이 조금 약해진 틈을 타 꼭 들르고 싶은 곳이 있었다. 걸어서 30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는 동산이었다. 그곳에는 신후가 전생에 벌목으로부터 지켜냈다는 오래된 고목이 있었다.
“오랜만이야.”
- 우리가 매년 이 나무를 볼 수 있을까요?
- 매년 내 생일 때마다 왔었는데. 같이 와줄래?
- 물론이죠.
그와 매년 보러 오기로 했던 설경은, 추위도 잊게 만들 정도로 여전히 아름다웠다.
이곳 나무 기둥 아래에서 회귀향을 피웠던 것이 생각났다.
- 길 잃지 말고 돌아오라고 주는 거예요.
- 그거 알아? 회귀향은 다 피워서 사라지고 나서도 그 사람이 돌아오고 싶어질 때 그 장소로 인도해준대.
신라는 그와 함께 꽂았던 회귀향의 자리를 기억을 더듬어 찾았다. 그리고 무릎을 굽히고 앉아 그 자리를 손끝으로 쓸어보았다.
“덕분에 잘 돌아왔잖아…. 그러니 괜찮아. 이 정도 슬픔은 참아낼 수 있어.”
추억은 누군가 잊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어떤 형태로든 항상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유신라.”
숨을 멈춘 신라가 천천히 일어나 뒤를 돌아봤다. 분명히 잠이 들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나왔건만, 신후는 거짓말처럼 눈앞에 서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왔어요?”
“모르겠어. 그냥 정처 없이 걸었어.”
“이곳까지요?”
“뭔가가… 날 인도하는 것 같았거든.”
신라는 희미한 연기가 어딘가에서 피어올라 신후에게 닿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연기의 시작은 방금 신라가 매만지고 있던 자리였다. 신후는 회귀향의 자취를 따라 이곳까지 온 것이다.
“이 연기가… 보였어요?”
“네가 말하니까, 점점 보이는 것 같기도 해.”
그는 팔을 들어 연기의 자취를 손끝으로 천천히 그려냈다. 그리고 천천히 미간을 좁혔다.
무언가 어렴풋이 떠오르려 하고 있었다.
- 나와 거래를 한 번 해볼까?
- 이상해, 너는. 널 보고 있으면, 잊고 있었던 뭔가가 떠오르려고 하거든.
- 그 말, 겨울이 되면 또 해주겠어? 듣기 좋아서.
- 울지 마. 적어도 저놈 앞에선….
- 넌 내 마지막 생에서야 비로소 만난, 속죄의 시작이자 종점이니까.
- 사랑해.
신라의 앞에 서면 항상 느껴지던 불안함, 조급함의 정체도 회귀향을 타고 신후에게로 흘러들어왔다.
- 약속할게. 그동안 네가 불행했던 과거마저 지울 순 없겠지만, 앞으로의 불행은 없을 거야.
지키지 못했던 약속이었다.
혼이 바스라져 가면서도 그 약속이 계속 생각나 마음 놓고 사라질 수가 없었다.
그 미련이 마지막 힘을 다해 이 혼을 붙들었는지도 모른다.
평범한 인간들은 존재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천상의 공간, 고요한 강가 나루터에 앉은 한 남자가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의 옆으로 다가온 지국천왕이 조용히 몸을 앉혔다.
“좀 잡히십니까?”
“머리가 좋아서 다들 피하는군.”
낚시꾼은 애초에 물고기를 낚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지국천왕이 그에게 지나가듯 물었다.
“그를 용서하신 겁니까?”
“용서라…. 실은 자네가 아는 바대로 운명의 신들이 모르게 묻어가려 했다. 하지만 인간 여인이 하도 호되게 꾸짖길래, 운명의 신들에게 모두 털어놓았다.”
- 사랑한 게 죄야…? 그러는 신도, 당신을 사랑해서 어머니의 목숨을 빼앗아 당신에게 준 거잖아. 이렇게 다 뒤집어쓰고 떠나는 건 불공평해….
“이 모든 일이 당신 손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말입니까?”
“그래. 내가 죄를 지어 반인반신을 낳았고, 그가 똑같은 죄를 지어 운명을 어지럽혔지. 그리고 그 꼬인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사악한 요괴가 나의 죄를 볼모로 활개를 치고 다녔으니, 모든 건 이 손에서 시작된 것이지.”
“그걸 알고도 운명을 관장하는 신들이 유신라의 운명을 되돌려놓은 겁니까?”
“내 흠을 잡았으니 얼마나 즐거웠겠는가. 내친김에 내 후생 중 하나를 그 못난 녀석에게도 붙여 달라 청했다네. 애초에 내가 모두 인정했으면 쉬웠을 일이지.”
지국천왕은 소리 없이 웃었다. 조각난 신후의 혼을 모아 오랜 시간에 걸쳐 회복시켰음을 다문천왕도 이미 알고 있을 터였다.
“그때 비형랑을 없애며 그의 몸 안에 박혀 들어간 ‘신의 죄’는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
“이미 모두 알게 된 것을 더 어찌하겠는가. 귀혼은 박살 났어도 그것을 지니고 있는 한 제 몸 하나 지킬 정도의 힘은 쓸 수 있게 될 터. 그러면 비로소 더는 날 원망하지 않겠지.”
“하하…. 그의 원망을 신경 쓰고 계실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놀리기는….”
그 후에도 그들이 앉아 있는 나루터는 줄곧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했다.
회귀향을 차분한 눈빛으로 쫓는 신후에게서 점차 낯익은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가 가졌던 힘과 닮았으면서도 어딘가 달랐다. 신라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시선을 마주한 신후의 얼굴에 그리운 감정이 퍼져나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때 고목에 숨어 있던 잡귀가 가지를 타고 내려와 방심한 신라의 뒤를 노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신라의 곁으로 이동해 그녀를 끌어안은 신후가, 코트 자락을 휘둘러 단번에 잡귀를 먼지로 만들어버렸다.
이제 그에게서는 어둠의 기운이 아닌 빛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불행하게 만들지 않겠다는 약속… 지키러 돌아왔어.”
신후는 목에서 머플러를 풀어 신라의 허전한 목에 가지런히 둘러주었다.
아직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신라는 멍한 눈에서 눈물만 뚝뚝 흘렸다.
“한…신후…?”
“미안해. 너무 오래 걸렸어.”
그는 그림 같은 미소를 지으며 신라의 이마에 길게 입을 맞췄다.
“다녀왔어, 유신라.”
“꿈… 아니에요?”
“죽을 때까지 깨지 않을 꿈이면, 나랑 살아줄 수 있어?”
이제 그의 말이라면 별을 따다 준대도 믿을 수 있었다. 눈물로 얼룩졌던 신라의 얼굴에 비로소 미소가 피어났다. 신후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내고 품에 소중히 끌어안았다.
이번 생은 함께 늙어가기를― 이 단순한 소원을 말하기까지 얼마나 힘겨웠는지.
이제는 나머지도, 반쪽도 아니게 된, 평범한 연인의 모습이었다.
- 귀태, 완(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