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장. 거짓말 같은 일상
“유 교수는 신정 때 어디 안 가나?”
신후가 전공 도서를 읽다가 입을 열었다. 그의 집무 책상과 수직 방향으로 놓인 또 다른 책상에서 논문 작업을 하던 신라가 대답했다.
“별다른 계획 없는데요.”
원래 혼자 쓰는 공간에 형식적인 칸막이만 놓아 분리한 상태였기 때문에, 고개만 들면 얼마든지 서로를 바라볼 수 있는 위치였다. 하지만 늘 더 많이 바라보는 것은 신후 쪽이었다. 워커홀릭인 듯한 젊은 조교수는 말을 걸지 않는 이상 도통 고개조차 들지 않았으니까.
“크리스마스 때에도 출근하더니, 새해 해돋이 같이 보러 갈 남자도 없는 건가?”
“중국에 꽤 오래 있다 보니까요.”
“곧 만들겠군.”
“일에는 지장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연애에 관심이 없다는 소리는 안 하는 그녀를 보고 신후는 작게 웃었다. 딱히 왕자병이 있는 건 아니지만, 애인을 곧 만든다는 여인이 고립된 공간에 오랜 시간 함께 있는 자신을 돌을 보듯이 대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실은 학부 연구생일 때 내가 많이 괴롭혔을 수도.’
마침 노트북을 접은 신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후가 묻기 전에 그녀는 미리 행선지를 밝혔다.
“곧 한국대 수시 면접이 있어서요. 문제 낼 거리 찾으러 도서관 좀 다녀오겠습니다.”
“웬만한 전공 서적은 다 이 방에 있을 텐데.”
“되도록 난이도는 고등 교육 수준에 맞추고 싶어서요.”
“그렇군.”
코트를 팔에 걸쳐 들고 교수실을 나서는 신라를 물끄러미 지켜보던 신후는, 이내 안경을 벗고 그녀를 뒤따라 나갔다.
방학이라 도서관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덕분에 신라는 여유롭게 책을 고를 수 있었다. 신후는 책장 두 개 정도 너머에서 그녀의 모습을 천천히 눈으로 좇았다.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꺼내 팔에 끌어안는 걸 보니, 학생 때 얼마나 공붓벌레 같았을지 눈에 그려졌다.
이미 책들이 품에 한가득이면서 한 손에 들기 힘들 정도로 두꺼운 책까지 꺼내 드는 신라를 보고 신후는 혀를 차며 빠르게 걸어가 막 무너져 내리는 책들을 대신 품에 받아냈다. 더불어 다른 손이 놓치고만 무거운 책도 무사히 붙잡아 도로 책장에 올려두었다.
자연스럽게 그녀를 책장과 몸 사이에 가둔 자세가 된 신후는 그를 빤히 올려다보는 눈과 태연스럽게 시선을 맞췄다.
‘당황했네, 유 교수.’
정처 없이 흔들리는 눈동자가 귀엽다고 느껴졌다. 그런데 웬일인지, 커다란 눈망울이 촉촉이 젖어가는 듯 보였다. 그게 눈물이 되기 전에 급하게 시선을 피한 신라는 감사합니다, 작은 인사를 남기고 먼저 책장 사이에서 빠져나갔다.
‘피한… 건가.’
신라의 낯선 반응을 보고, 그는 처음으로 이런 추측이 들었다. 여태껏 그녀의 무관심은 정말 관심이 없었던 게 아니고, 일부러 피하는 것이었을지 모른다고.
‘왜?’
사적으로는 언제쯤 자리를 가져볼까, 신후는 종종 생각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유신라에 대한 호기심은 늘어나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 때가 한참 지난 늦은 시각에 학교 근처 공원에서 홀로 거닐고 있는 신라를 우연히 발견했다. 혀를 찬 신후는 도로변에 차를 세워두고 무작정 그녀를 쫓았다.
“이 밤에 여자 혼자서, 겁도 없군.”
무언가를 쫓는 듯이 특이한 동태를 보이던 그녀는 어느 순간 합장한 자세에서 긴 자루를 꺼내 드는 행동을 취했다. 그리고 허공에서 힘차게 휘둘렀다.
‘운동…?’
그런데 잠시 후, 그녀의 쪽에서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날카로운 칼바람은 정확히 신후를 노리고 있었다. 그 증거로 주변 나무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뒤늦게 신후를 발견한 신라가 사색으로 질렸다.
“한신후!”
“유 교수….”
신라는 재빨리 허공에서 활시위를 당기는 동작을 취했다. 만약 정말 화살이 있다면 신후에게 쏘아질 것 같은 정확한 방향이었다. 신라의 손이 활시위를 놓았다. 이번에도 신후는 묘한 풍향의 변화를 느꼈다.
신라는 심각한 표정이 되어 신후를 향해 빠르게 걸어왔다. 그리고 말을 걸려는 신후에게 먼저 버럭 성을 냈다.
“이 야밤에 왜 인적이 드문 곳을 돌아다니는 거예요?”
“…그건 내가 할 말 아닌가?”
“본인이 얼마나 유명인사인지 몰라서 그래요!? 안 그래도 소문이 퍼지고 있어서 얼마나 스트레스인데…!”
“무슨 소문?”
도무지 알 수 없는 소리만 늘어놓는 신라 때문에 신후의 미간은 저절로 구겨졌다.
“당신이…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몸이 되어버렸다는 소문이요.”
“그런 소문이 돌아? 자존심 상하는 일이네.”
“농담하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퇴근하면 곧장 집으로 돌아가요. 그 길만큼은 안전하게 만들어놨으니까.”
“내 집을 알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의 지금 집은 예전에 신라가 살았던 오피스텔이니까. 그를 지키는 데 용이하도록 신라는 신후의 옛집으로 다시 들어간 상태였다. 바로 한 층 위에 그녀가 살고 있다는 걸 신후는 아직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유 교수.”
“…네.”
아직도 화를 가라앉히지 못한 신라는 다른 곳을 바라보며 제법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에 신후의 입가에 점점 재미있다는 미소가 떠올랐다.
“지금 나한테 화내고 있는 거 알아?”
“……”
부정하지 못한 신라는 머리만 가지런히 정리했다.
‘분명히 화를 내는 이유가 날 걱정해서인 것 같기는 한데….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유신라?’
애써 다른 곳에만 시선을 두는 신라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잠깐이라도 진지하게 눈을 마주쳐줬으면 했다.
“왜 당신은, 항상 내 시선을 피하지?”
“…피한 적 없습니다.”
“아니. 사무실에서도 그렇고, 이렇게 밖에서 마주쳤을 때도, 매정하다고 느껴질 만큼 날 쳐다보지 않아. 내가 예전에 당신을 그렇게 괴롭혔어?”
울컥한 신라가 저도 모르게 신후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그게 아니…!”
그의 표정이 상처받은 듯이 사뭇 어두워져 있어서, 도중에 말을 끊고 말았다.
“그게 아니면?”
“…어서 집으로 들어가세요. 날이 차잖아요.”
묘한 표정으로 짐짓 한숨을 크게 내쉰 신후는 팔짱을 낀 채 발을 굴렀다.
“일부 기억을 잃은 게 별로 큰일처럼 느껴진 적은 없었는데, 오늘이 제일 답답하네.”
“……”
“…좋아. 옛일은 천천히 청산하기로 하고, 일단은 내 차로 가지. 태워다줄 테니까.”
“저는 따로-”
“이것도 거절하면 정말로 날 싫어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
싫어할 리가 없잖아. 속으로 우울하게 중얼거린 신라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따라갔다.
조수석에 앉자마자 익숙하게 벨트를 매고 창가를 내다보는 신라를 보고 신후는 왠지 모를 기시감을 느꼈다.
‘그렇게 경계를 하면서, 내 차에 타는 건 자연스러워 보이네.’
그녀가 적어도 여러 번 이 차에 타 보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행선지가 어디야?”
“A 오피스텔이요.”
“…뭐? 또 날 도련님 취급하려는 거야?”
“정말 거기에 살아요. 교수님이 사시는 곳 바로 위층이죠.”
“……”
뜻밖의 사실에 혼란스러운 듯 잠시 앞유리창에서 시선을 헤매던 신후는, 일단 기어를 바꿔 차를 출발시켰다.
같은 엘리베이터에 오른 두 사람은 한동안 대화가 없었다. 민망하기는 신라도 마찬가지였다. 신후가 사는 층에 먼저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안녕히 들어가세요.”
“……”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신후는, 내리지 않고 엘리베이터의 문을 닫았다.
“유 교수가 나를 놀리는 건지 아닌지 확인해 보려고.”
“……”
신라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달고 위층까지 올라갔다. 익숙하게 비밀번호를 눌러 도어락을 여는 그녀를 보고 신후는 턱을 매만지며 신음을 흘렸다.
“조 박사가 꾸민 일인가?”
“꾸몄다기보다, 원래 살던 곳이 이 건물이니까요.”
“내가 살던 곳도 이곳이라고 하던데.”
“그런가보다, 하세요. 스캔들 안 나게 조심히 행동할 테니까 그 부분은 크게 신경 쓰지 마시고요.”
“……”
신라는 짐짓 웃어 보이며 정중하게 계단을 가리켰다.
“살펴 가세요.”
문이 주저 없이 닫힌 뒤로도 신후는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다.
처음 만났을 때의 울 것 같았던 얼굴, 그 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두는 거리감, 가끔 눈을 마주쳤을 때 촉촉하게 젖어 드는 눈, 그리고 같은 건물에 살았었다는 과거….
‘과보호….’
유신라가 자신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 신후에게 점점 선명하게 와닿고 있었다.
사학과 면접이 있는 날이었다. 교수 다섯이서 다대일 면접관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중에는 신후와 초임 교수인 신라도 끼어 있었다.
마지막 순번에 가까워갈 무렵, 신라는 뜻밖의 낯익은 여학생이 들어오는 것을 목격하고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 여학생은 수년 전, 바다의 보물을 가보와 바꿔치기해 갔던 무당의 딸이었다.
“안녕하십니까, 함수진이라고 합니다.”
신라의 표정을 본 신후가 그녀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아는 학생인가?”
“교수님도 아는 학생이었어요. 능력을 타고나서 성적만 잘 가져오면 면접은 통과시켜주기로 하셨었죠.”
“내가 그랬다고?”
“이제는 교수님이 그러지 않으신다고 해도 제가 합격시킬 생각이지만요.”
수진의 영력은 그때보다도 더 강해져 있었다. 신라가 웃으며 말을 걸었다.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겠네.”
영력이 많은 사람에게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잘 알고 있기에 묻는 것이었다. 신라와 신후를 알아본 수진은 민망함에 뺨을 긁적거렸다.
“그때 이후로 공부 열심히 했습니다. 이곳 한국대 사학과에 오고 싶어서요.”
“혹시 1학년부터 학부 연구생으로 공부해볼 생각은 있어?”
“네, 물론이죠.”
수진의 긴장한 시선이 신후에게 닿았다. 어둠의 기운을 써서 마치 마법처럼 이동하던 신후의 모습이 꽤 인상 깊은 기억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저 교수님…. 왜 ‘사라진’ 거죠?”
귀력을 일컫는 말이리라. 하지만 수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한 신후는 미간을 좁힐 뿐이었다. 신라가 나서서 자연스럽게 화제를 바꿨다.
“그럼 얼마나 많이 공부했는지 시험해볼까? 문제지상의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 부탁해요.”
수진이 면접에 성실히 임하는 동안, 신후는 다른 상념에 잠겨있었다.
- 왜 사라진 거죠?
요새 들어 부쩍 느끼게 된 공허함과 조급함의 원인이, 저 낯선 여학생이 언급한 것과 상관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서 사라진 것….’
그는 조용히 신라의 옆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 안에 당신과의 기억이 들어 있었나 보군.’
* * *
빵빵-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던 와중 지척에서 경적이 울렸다. 목도리에 얼굴을 파묻다시피 한 채 걸어가던 신라는 걸음을 멈추고 옆을 돌아봤다. 운전석에서 걸어 나온 남자가 손수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타. 가는 길인데 태워줄게.”
안 그래도 교수들 사이에서 벌써 스캔들이 퍼지고 있는데, 조심할 생각은 않고 멋대로 행동하는 남자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들를 곳이 있어서요. 먼저 가세요.”
오히려 시계를 확인하며 재촉하는 신후였다.
“바쁘니까 얼른 타.”
“……”
신라는 점점 그를 거절할 변명 거리가 떨어져 가는 것을 느꼈다.
어젯밤에는 지방에서 의뢰가 들어와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오니 딱 1시간 정도 잘 수 있는 시간이었다.
잠이 들지 않으려고 손등까지 꼬집으며 버텨봤지만, 신라는 결국 따뜻한 히터 바람에 굴복하고야 말았다. 새근새근 잠이 들어버린 그녀를 보고 신후는 기분 좋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뻑뻑한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린 신라는 자신이 누워있다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라서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조수석 시트가 뒤로 잔뜩 젖혀져 있었던 것이다. 황망하게 옆을 쳐다보니, 신후 또한 운전석 시트에 몸을 편히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교수님….”
“……”
잠이 든 듯한 그의 모습에 신라는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이렇게 오래 마음 놓고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으니까.
‘아직도 꿈같아.’
그가 정말 살아 돌아온 게 맞는지, 하루에도 몇 번이고 의심이 들었다. 심지어 같은 공간 안에 있으면서도 이따금씩 불안함이 생겨났다. 아주 가끔 고개를 들어 신후의 자리를 쳐다보는 것은 그가 정말 그 자리에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래도 고마워요. 돌아와 줘서.’
마음으로는 수백 번 수천 번 키스를 하고 온 힘을 다해 끌어안았다. 퇴근해서도 침대에 누운 채 그의 희미한 기척을 느껴 보다가 웃는 얼굴로 잠이 들곤 했다.
‘이번에는 내가 지켜줄 거야.’
당신이 모든 걸 걸고 날 지켜줬듯이.
주술의 저주를 본인에게 돌려놓고 비형랑과 함께 사라졌을 때는, 왜 말도 없이 그런 일을 저질렀나 원망도 들었다. 하지만 그녀가 하려고 했던 일도 마찬가지였다. 그를 살리기 위해 비형랑과 멀리 떠나는 길을 선택했다면 그도 똑같이 아파했을 것이다.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했다.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뺨 근처에서 맴돌았다. 코에서 흘러나오는 숨이 얼마나 감격적인지, 저절로 웃음이 났다. 정말로 그는 살아있었다.
덥석, 갑자기 손이 붙잡혔다.
신라는 놀란 얼굴로 그 손을 빼내려 했다. 하지만 신후는 놓아주지 않았다. 애초부터 잠이 들어 있지 않았던 사람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신라를 응시했다.
“유 교수.”
“…놔주세요.”
“나랑 무슨 사이였어?”
무슨 사이…. 막연한 물음이었다.
우리에게는 전생의 인연도 있었고, 이번 생에서는 스승과 제자로 만났고, 함께 사랑을 찾아 헤맸고, 수없이 엇갈리기도 했고, 종적에는 사랑을 했다. 짧았지만 행복했다. 그 기억만 갖고도 다음 생까지 살아질 수 있을 만큼.
차분히 숨을 내쉬던 신라는 시선을 그의 어깨 치에 둔 채 나지막이 말했다.
“교수님은….”
드디어 그녀의 입에서 예전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듯해, 신후는 온 정신을 집중했다.
“저 때문에 모든 걸 잃었어요.”
“……”
“하지만 다행히 다시 돌아오셨으니까, 저는 신경 쓰지 말고… 잘 살아가시면 돼요.”
공허한 듯 보이는 그녀의 눈이 말해줬다. 이미 이 눈에서는 수 없는 눈물이 흘렀다는 걸. 그 안에서 얼마나 속이 미어지고 문드러졌을지는 안 봐도 뻔했다.
먼저 조수석에서 나가는 그녀를 미처 붙잡지 못했다. 섣불리 그녀에게 다가갔다가는 오히려 상처를 입힐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신후는 긴 한숨을 내뱉으며 한동안 차 안에 머물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