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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장. 다시, 한국 (124/126)

123장. 다시, 한국

신라가 완전히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 건 그로부터 2년 후, 스물아홉의 막바지인 겨울 무렵이었다.

고고학으로 정통한 중국 학계에서 중요한 발견으로 이름을 날린 신라는 박사 조건을 수료하자마자 한 통의 메일을 받았다. 모교인 한국대에서 조교수로 초빙하고자 하는 뜻을 전한 스카우트 메일이었다.

처음에는 잘못 온 메일인 줄만 알았다. 물론 학계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발견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발견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건 유적지에서 우연히 마주친 대요괴 급 존재 덕분이었다. 인간과의 소통이 고팠던 대요괴는 며칠 밤을 새우며 이야기 상대가 되어준 신라에게 고맙다며 그녀가 연구 목적으로 찾아 헤매던 단서가 어디에 있는지 일러주었다.

조금 더 실감할 수 있게 된 계기는 건우로부터 걸려온 전화 한 통이었다. 그는 한국대에서 조교수로 일하다가 얼마 전 타 대학 부교수로 스카우트 돼 자리를 옮겼다고 했다. 마침 한국대 사학과 교수진에 공석이 생겼고, 신라와 관련된 기사가 타이밍 좋게 캠퍼스 안에서 이슈화되었었다는 것이다.

기쁜 소식을 전하느라 평소보다 들뜬 목소리로 얘기하던 건우는, 점차 가라앉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서 학교에서 널 조교수로 초빙하고 싶어 하는데…. 연구실 규모를 키우려고 하다 보니 초임에게 모두 맡길 수는 없고, 두 개 연구실로 분리시키기 전까지는 부교수, 조교수 두 명 체제로 가기로 했어.」

“오히려 잘됐네요. 혼자 연구실을 이끌어가는 건 아직 무리일 테니까요.”

「아직 이런저런 위험한 의뢰들도 많이 들어오는데, 새로 온 부교수는 영력이 전혀 없어. 그러니까 그쪽 방면은 신라 네가 온전히 책임져야 할 거야.」

“이해했어요.”

「귀국이 언제야? 픽업하러 나갈게.」

“사양해야 맞는 건데, 선배가 빨리 보고 싶으니까 못 이긴 척 알려드릴게요.”

「4년 동안 말재간도 늘린 거냐?」

신라는 애교 있게 웃을 뿐이었다.

그녀가 귀국하는 날, 건우는 정말 자가용을 끌고 공항까지 마중을 나왔다. 집을 구할 동안 신라는 학교 측에서 마련해준 근처의 호텔에서 묵기로 했다.

“교수님 집은… 아직 그대로예요?”

호텔로 향하는 도중 신라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건우는 잠시 뜸을 들인 후에 대답했다.

“응. 우선이가 가끔 가서 청소하고 있어.”

“……”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네가 그 집에 들어가는 건 어때?”

신라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건우를 쳐다봤다. 그가 하는 말이니 여러 번 머릿속에서 곱씹어보다가 신중하게 꺼낸 말일 터였다.

“생각… 해볼게요.”

“그래.”

호텔에 짐을 내려놓고 두 사람은 걸어서 한국대로 향했다. 이미 한국대 사람이 아니니까 주차비가 든다며 꽤나 현실적인 이유를 늘어놓는 건우를 보고 신라는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혜령이랑 다른 애들도 학교에 와 있어.”

“정말요?”

신라가 크게 반색하며 물었다.

혜령은 졸업 후에 어머니의 사업을 물려받아 중소기업 수준의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우선은 원하던 대로 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쳤고, 여전히 태인과 알콩달콩한 연애를 했다. 동주는 대학에서 강사로 일했다. 교수는 성미에 맞지 않는다며 다소 프리한 직업을 선택한 것이었다. 곧 서영과 결혼 날짜를 잡는다는 기쁜 소식도 들려왔었다.

“네가 교수로서 처음 학교에 방문하는 날이기도 하고… 부교수라는 사람도… 소개를 시켜줘야 할 것 같아서.”

“알던 분이세요?”

“원래 한국대에서 교수를 하던 사람이니까. 안다고 하기에는 애매한 감이 있지만 말이야….”

다소 긴장한 것처럼 보이는 건우의 표정을 보고 신라는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했다.

이윽고 사학과 건물에 다다랐다. 정겨운 건물의 외관을 보자마자 신라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겉보기에는 변한 것이 전혀 없어 보였다.

4년이 지났으니 같은 사학과라 하더라도 얼굴을 아는 이가 적었다.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는 간간이 아는 얼굴이 보였지만 말이다.

막 기말고사가 끝난 모양인지 학생들이 생기 넘치는 모습으로 복도를 걸어 다녔다.

건우와 함께 천천히 복도를 걷던 신라는 어딘가에서 들려온 말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새로 온 고고학 교수, 큰 사고를 당해서 몇 년 자리를 비웠던 거래.”

“예전부터 유명했다고는 들었는데, 아까 얼굴 보니까 왜 유명했는지 딱 알겠더라.”

누구를 일컫는지 정확히 몰라 마음에 걸렸지만, 그대로 지나치게 됐다.

그런데 다음 복도에서도 사학과 학생들이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까 봤어? 그 교수 진짜 잘생겼더라.”

“그 얼굴로 서른일곱이 말이 돼?”

“식물인간으로 있었다잖아. 그래서 나이를 천천히 먹었나 보지, 뭐.”

여덟 살 차이, 몇 년 자리를 비웠던 한국대 고고학 교수. 설명할 수 없는 기시감이 어렴풋이 잡혀가고 있었다. 건우에게 물어보려 그를 쳐다봤지만, 한발 앞서가는 그의 표정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 사이 옛 고고학방 교수실 앞에 도착했다. 교수실 문에 걸린 명패에는 믿을 수 없는 이름 석 자가 적혀 있었다.

한 신 후

동명이인일 수도 있고, 아직 명패를 바꾸지 않은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심장은 터져나갈 것처럼 빠르게 뛰고 있다. 신라는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겨우 교수실의 문고리를 붙잡았다. 조용히 다가온 건우가 그녀의 손을 덮어 대신 문고리를 돌려주었다.

천천히 교수실의 문이 열렸다. 그 안에 서 있던 반가운 얼굴들이 차례로 신라를 돌아봤다. 더 멋있어진 혜령과 여전히 차분해 보이는 우선, 그리고 어른스러워진 동주까지.

“신라….”

“오랜만이다.”

“여전하네.”

신라에게 반가움을 표현한 그들은, 고개를 돌려 창가 쪽에 서 있는 남자를 조심스럽게 바라봤다.

‘그럴 리가 없는데.’

살아있을지도 모른다, 수천수만 번을 곱씹었을 것이다. 하지만 항상 뒤늦게 나타난 이성은 날카롭게 바보 같은 희망을 꾸짖었었다. 그렇게 결코 이루어질 수 없었던 염원이다.

‘꿈이겠지.’

너무 오래 기다리다 못해 그의 존재는 그저 슬픔으로 사무쳐 있었다.

뚜벅뚜벅, 정갈한 걸음으로 다가온 남자는 옅은 미소를 띤 채 앞에서 악수를 건네 왔다.

“반갑습니다. 아니, 오랜만이라고 인사해야겠죠.”

당신은… 누구야?

“함께 일하게 돼서 기쁩니다. 유신라 씨.”

신라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에 온 감각이 마비되어있는 상태였다. 보다 못한 혜령이 다가가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살아 계신지… 모르는 상태였어요. 놀란 것 같으니까 이해 좀 해주세요.”

“그래.”

혜령은 일단 신라를 부축해 연구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신라는 연구실 문이 닫히자마자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신라…!”

“…서… 설명 좀 해주세요. 저 사람, 정말 한신후가 맞아요?”

표정은 넋을 잃었는데 사슴 같은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혜령은 안타까운 얼굴로 손수건을 꺼내 신라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응…. 맞아.”

“꿈이 아니고요? 왜… 왜 날 기억 못 해요?”

“너뿐만 아니라 전부 기억 못 해.”

한신후가 다시 나타난 것은 작년 말경이었다. 그의 혼이 사라졌던 당시 육신마저 사라졌던 건 신의 사자인 준성이 거둬갔기 때문이었다. 그의 ‘육신’의 목숨은 신의 힘을 빌려 기적적으로 다시 살아났다.

혼도 넝마가 되긴 했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남아 있었던 이유는, 그가 비형랑의 ‘귀혼’, 반쪽짜리 영혼만을 베어 없앴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불사의 주술은 그 주인이 피해를 입은 만큼 공격을 한 자도 똑같이 받게 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충격으로 신후에게서 모든 귀력은 사라졌고, 귀태로 살았던 기억도 통째로 날아가 버렸다. 그저 학자로서 살았던 기억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한신후가 맞지만… 내가 알던 한신후는 아니군요….”

신라가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혜령은 지끈대는 이마를 짚었다.

“나도 이 소식을 듣자마자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 가장 먼저 네 생각이 났지만, 섣불리 알릴 수가 없었어. 교수님을 보고 가장 기뻐할 너지만, 저 모습을 보면 한편으로는 가장 실망할 사람도 너니까.”

“……”

“천천히 결정해도 좋아. 만약 교수님과 함께 일하는 게 괴로울 것 같으면 당장 다른 자리를 알아보자. 네 커리어 정도면 여기저기에서 오라는 곳 많을 거야.”

멍하니 앉아 있던 신라는 이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게 되든 상관없었다. 꿈에서조차 다시 만나는 게 어려웠던 신후를, 결코 두 번 다시 놓치고 싶지 않았다.

신라가 정신을 추스르고 신후와 독대를 하게 된 건 다음 날 오후 무렵이었다. 책장을 정리하고 있던 신후는 노크하고 들어온 신라를 바라보고 예의 차원의 미소를 지었다. 신라는 작게 심호흡을 했다. 다시 얼굴을 보면 눈물부터 울컥 날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이성이 제 역할을 잘해주었다.

‘보고 싶었어.’

“어제는 경황이 없어서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네요. 죄송했어요.”

겨우 떨리지 않는 목소리가 나왔다.

신후는 신라에게 소파에 앉을 것을 권하고 습관처럼 차 물을 끓였다.

‘정말 아무것도 기억 못 하는 거예요?’

교수실 안에서 돌아다니는 모습은 저렇게 익숙해 보이는데도, 그녀를 비롯한 연구실 사람들 모두에 대한 기억을 잃었다는 것이 다시금 믿기지 않았다.

신라의 앞에 찻잔을 내려놓은 신후는 그녀의 맞은편에 차분히 몸을 앉혔다.

“그렇게 됐어요. 사실 내가 4년 가까이 누워있었다는 사실도 아직 실감이 안 나요. 그냥 긴 잠을 자고 개운하게 일어난 느낌이었거든.”

그가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걸어 다니고 사고할 수 있는 건 신의 힘으로 넝마가 되었던 혼을 다시금 이어 붙여 놓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치료 과정이 꽤 까다로워서 4년이라는 시간이 걸린 것이다.

‘정말 아무 기운도 느껴지지 않아.’

고귀한 분위기, 상대를 압도하는 위압감, 모두 여전했으나 단 한 가지- 어둑시니의 귀력은 정말로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신후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중국에 유학 가기 전 학부 연구생으로 있었다고 들었어요. 만약에 내 기억이 온전했으면 난 깜짝 놀랐겠네. 자고 일어났더니 내 학생이 교수가 돼서 돌아온 거잖아.”

“…그러네요.”

“우리 사이는 어땠어요? 나는 신라 씨한테 어떤 교수였죠?”

당신과 함께했던 순간들은, 모두 따뜻했다.

“언젠가는 꼭… 다시 만나고 싶었던 사람이요.”

“다시 만나고 싶었다…라. 칭찬인 것 같은데.”

신라는 그저 입가를 당겨 웃었다.

신후는 아닌 척하며 신라가 어떤 사람인지를 주의 깊게 관찰하는 중이었다. 앞으로 그를 도와 함께 일하게 될 조교수였다. 능력이야 의심할 바 없어 보이지만, 서로 성별이 다른 이상 적당히 선을 지켜야만 오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녀는 기대 이상으로 현명해 보였다.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다시 나타난 것에 다소 혼란스러워 보이지만, 말하는 분위기나 인상을 보면 기본적으로 차분하고 이성적인 타입이었다.

‘연애는… 해봤을까.’

그리고 호기심이 들었다.

첫 만남 때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길래 감정이 풍부한 타입인 줄 알았는데, 그녀가 감정을 드러낸 건 그때뿐이었다. 차분하게 내면을 가리고 있으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감정인지, 파헤치고 싶은 욕구가 들었다.

처음 만난 여성에게 이토록 관심을 갖다니, 별난 일이었다.

“유 교수라고 불러도 됩니까?”

“네.”

“앞으로 잘 부탁해요.”

신후는 손을 뻗어 악수를 건넸다. 어제 미처 맞잡지 못했던 손이었다. 신라는 약간의 망설임 끝에 그 손을 붙잡았다. 낯설 리가 없었다. 그건 너무도 익숙한 체온이었으니까. 너무 놓고 싶지 않아서, 그 감정을 들킬까 봐 거꾸로 빠르게 손을 놓았다. 오히려 신후의 손이 그 자리에서 아쉽게 더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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