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장. 그 후
신후가 떠나고 3개월 뒤, 건우는 한 병원을 찾았다. 강 현과 함께 일했던 나이 지긋한 의사가 지방에 작게 세운 병원이었다. 바깥 풍경이 잘 내다보이는 넓은 1인 병실에는 본인의 이름도, 나이도, 직업도, 모두 잊어버린 젊은 남자가 장기 입원해 있었다.
똑, 똑.
건우가 병실 문을 노크하고 들어가자, 침대에 걸터앉아 책을 읽고 있던 남자가 반가운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또 왔네요.”
건우는 떨떠름한 얼굴로 걸어 들어가 침대 근처에 있는 의자에 몸을 앉혔다.
일용도에 베인 비형랑의 혼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몸에 남게 된 것은 백지상태의 영혼뿐이었다. 죄 없는 영혼을 모른 척할 수는 없기에 건우가 그의 남은 삶을 때때로 돌보기로 한 것이다.
아무리 비형랑과 관계없는 혼인 것을 알아도 어찌 됐든 그 모든 것을 수용했던 인간이기에, 바라보는 눈빛에 감정이 뒤섞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건우 씨…라고 했죠?”
이름이 불리자 허공을 바라보던 건우의 몸이 움찔 굳었다. 시선을 옮겨 눈을 마주치니, 강 현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웃었다.
“건우 씨는 참 특이한 사람이에요. 병원 밖에서 유일하게 연고가 있다고 찾아오는 사람인데, 늘 나를 경계하는 듯이 바라보잖아요.”
“……”
“내가 담당했던 환자인가 싶지만, 명문대의 고고학자라고 하니까 그건 왠지 아닌 것 같고. 나에게 원한을 진 사람인가 싶어도, 그러면 진작에 무방비해 있는 나를 해치거나 아예 발길을 끊었어야 해요.”
기억은 사라졌어도 무서운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건 여전한 남자였다. 건우는 복잡한 표정으로 머리칼을 헤집으며 말했다.
“쓸데없이 추리하지 않아도 돼요. 이렇게 가끔씩 종종 들르면서 죽었는지 살았는지만 확인할 생각이니까.”
“내 기억이 돌아오면, 당신은 더이상 날 찾아오지 않을 건가요?”
진지한 눈빛으로 강 현을 바라보던 건우가 입을 열었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만약 기억이 돌아온다면 찾아올 필요가 없어지지.”
“그렇군요….”
강 현은 한숨처럼 내뱉으며 창가를 바라봤다.
용건이 끝난 건우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을 나서려 했다. 그때 뒤에서 들린 강 현의 목소리가 그의 발을 붙잡았다.
“고마워요, 건우 씨.”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건우가 돌아섰다.
“…뭐가 고맙다는 겁니까?”
“당신 덕분에, 그리 외롭지만은 않을 것 같아서요.”
“……”
모든 걸 다 가져도 종적에는 스스로의 외로움에 먹혀버렸던 남자는, 모든 걸 버리고서야 겨우 깨달은 모양이었다. 외로움을 채울 수 있는 건 스스로의 욕심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삶으로 흘러들어온 누군가의 존재라는 걸.
* * *
“틀림없이 보입니다.”
운명의 설계사 예진구가 안경을 벗으며 말했다.
그가 앉아 있는 연구실 소파 맞은편에는 신라가 왠지 긴장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조교들은 예진구의 말을 듣자마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완전히 불안의 끈을 놓지 못한 혜령이 예진구에게 재차 확인했다.
“이제 신라에게도 운명의 굴레가 생겼다는 말이죠?”
“예. 전생도, 후생도, 확실하게 존재합니다.”
“그럼 이게 몇 번째 생인데요?”
“아마도, 세 번째 생일 겁니다.”
혜령은 축하한다는 듯이 신라의 머리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그녀의 가슴에 얼굴이 파묻힌 신라가 숨이 막힌다며 버둥거렸다.
예진구는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 대단하군요. 이미 끊어져 있던 운명의 실이 다시 연결된 것은 처음 봅니다. 이전에도 그런 기록은 없었어요. 한신후라는 남자는 참-”
금기어를 내뱉고 만 예진구에게 질타의 눈빛들이 쏟아졌다. 뒤늦게 본인의 실수를 눈치챈 그는 입을 가리며 신라의 눈치를 봤다.
신라는 짐짓 밝게 웃어 보였다.
갑자기 공석이 되어버린 신후의 자리는 건우가 대신하고 있었다. 학교에는 그가 불현듯 실종되었다고만 전해놓은 상태였다. 아예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사람을 죽었다고 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별다른 후임자가 없었기 때문에 학교 측에서는 인수인계하기에 적임자인 건우를 조교수로서 채용하겠다는 공지를 냈다.
한신후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은 캠퍼스 내에서 돌고 돌아 다양한 가설을 만들어냈다. 어딘가에서는 그가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고 얘기했고, 어딘가에서는 치정극에 휘말려 비명횡사했다고 얘기했다.
신후와 스캔들이 있었던 유일한 인물인 신라에게 그 진상에 대해 묻는 학생들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신라는 조용히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신후의 집과 재산은 랩장인 우선이 맡아 관리하게 되었다.
‘가족이라고 할 만한 사람은 신라뿐인데, 다 줘봤자 안 쓰려고 할 게 뻔하니까 필요해 보일 때에 충분하게 지원해주도록 해.’
그가 남기고 간 말이었다. 그는 이미 그때부터 신라를 동반자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간고사를 앞둔 주말, 신라와 서영은 학교 근처 카페에서 시험공부를 했다. 서영은 공부에 집중하다가도 간간이 맞은편에 앉아 있는 신라의 상태를 살폈다.
혼자 있는 시간에는 마음 놓고 울지 몰라도, 다른 이들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무던하게 행동하고 있는 그녀의 상태가 적잖이 걱정됐다.
“조기 졸업… 할까 하고.”
신라가 책에 시선을 둔 채 입을 열었다.
“조기 졸업?”
“졸업 요건은 이미 다 채워서, 굳이 남은 학기를 다니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서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캠퍼스 어디를 가든 신후에 대한 기억이 가득할 테니, 신라로서는 어서 학교를 떠나는 게 나은 길일 것 같았다.
“졸업하면 어디로 갈 건데?”
“건우 선배가 유학 갔던 중국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까지 밟을 생각이야.”
“그렇구나…. 잘 됐다. 그럼 교수가 될 수도 있겠네?”
- 두고 봐요. 교수님보다 성공할 테니까.
- 그러려면 같이 교수해야겠네.
불과 몇 개월 전의 대화를 떠올린 신라의 웃음이 슬픔으로 금방 바스라졌다.
잠깐 화장실 다녀올게, 황급히 일어나는 신라를 바라보며 서영은 홀로 눈시울을 붉혔다.
시험 기간이 끝나고, 졸업을 위한 행정 처리를 모두 마친 신라는 오피스텔의 짐을 정리했다. 적어도 5년은 자리를 비울 것이기에 대부분의 가구들은 처분하는 쪽으로 했다.
중국으로 떠나기 전주부터는 연구실 사람들과 송별회를 하고, 소꿉친구들인 형철, 아영과도 따로 만나 작별 인사를 건넸다.
떠나기 전 마지막 날의 시간 대부분은 강원도에서 보냈다. 과 엠티에서 준비위원회로 일하던 중 산에서 만난 금돼지 때문에 큰 곤욕을 치렀을 때, 신후에게 구해져 잠시 머무르게 되었던 호텔 근처였다.
또한 이곳은 전생에 ‘재희’로서 그와 처음 인연을 맺게 된 지역이기도 했다. 신후가 인간처럼 사랑할 것을 염려한 신은 그에게서 재희에 대한 기억을 모두 지워버렸었다.
“네 번의 생 모두, 지독하게 괴롭혀졌구나.”
신라의 허무한 목소리가 봄바람을 타고 퍼져나갔다.
“핏줄이라는 이유로 더 모질게 괴롭혀졌어. 사랑한 게 죄야…? 그러는 신도, 당신을 사랑해서 어머니의 목숨을 빼앗아 당신에게 준 거잖아. 이렇게 다 뒤집어쓰고 떠나는 건 불공평해….”
꾹꾹 눌러놓았던 감정이 매듭을 풀자마자 봇물처럼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신라는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낼 생각도 없이 파도가 부서지고 있는 바다를 향해 더 큰 목소리로 외쳤다.
“어둑시니일 때부터 이용만 당하고, 혼자만 다 짊어지고 떠나는 게 어디 있어! 그게 다 내 운명을 원래대로 되돌려놓기 위한 거래였다면 난 필요 없으니까 도로 가져가! 차라리 내 남은 생을 그 사람한테 주란 말이야! 그 사람은 단 한 번도 인간으로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했잖아! 안 그러면… 안 그러면 인간보다 더 따뜻한 마음을 가졌던 그 사람이 너무 안타깝잖아….”
결국 그 자리에 무너져 내린 신라는 무릎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었다. 언제 어디에 있든, 그녀에게 위험한 일이 생기면 마법처럼 나타났던 남자의 따뜻한 품이 아직도 생생했다. 이렇게 울고 있으면 금방이라도 달려와 모든 게 거짓말이었다며, 웃으면서 안아줄 것만 같았다.
“한신후…. 보고 싶어…. 한신후…….”
하지만 쌀쌀한 봄바람과 요란한 파도 소리만이 그녀의 울부짖음에 답해줄 뿐이었다.
* * *
중국은 먼 타지 같으면서도 적응하면 금방 익숙해지는 나라였다. 가장 큰 어려움이 있다면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강한 요괴들이 즐비하다는 것이었지만, 그동안 한국대 고고학 연구실에서 쌓았던 담력과 무엇이든 베어낼 수 있는 일용도 덕분에 헤쳐나가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만은 아니었다.
중국 대학원에서 만난 또래의 남자 조교도 퇴마 비슷한 일을 해서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이름은 리승원으로, 신라의 중국어가 빠르게 는 것은 모두 그 덕분이었다.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쉬워졌을 무렵 승원은 자신이 같은 성을 사랑하는 성 소수자며, 잠깐 유학 왔었던 건우를 마음에 품은 적도 있다는 고백을 수줍게 꺼냈다. 신라는 뜻밖의 얘기에 놀라면서도 앞으로의 그의 연애가 순탄하기를 진심으로 바라주었다.
다행히 연구 과제를 잘 만난 그녀는 예정보다 빠르게 석사 논문을 마무리하고 박사 과정에 돌입했다. 머리를 식힐 겸 기차로 세 시간여 정도 떨어져 있는 홍콩에 홀로 여행을 갔을 때, 해변가에서 뜻밖의 사람과 마주치게 되었다.
“신라…!”
그는 동해 용왕의 장자, 태용이었다. 태용은 중국 대륙 부근의 심해를 시찰하다가 우연히 낯익은 기운이 근처에서 느껴져 뭍으로 올라와 보았다고 했다. 진심으로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다가온 그는 신라를 힘껏 끌어안았다.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야.”
“잘 지내셨어요?”
신라를 잠시 품에서 떼어낸 태용은 금세 걱정스러운 눈빛을 했다.
“태인이를 통해 소식은 들었었다. 장례를 치른다고 하면 직접 찾아가 조문할 계획이었는데, 그러지 않는다고 하길래.”
“네….”
“괜찮은 것이냐.”
괜찮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괜찮지 않다고 하기에는 이미 시간이 꽤 흐른 뒤였다. 인간은 숨만 쉰다면 어떻게든 살아졌다. 다만 결코 채울 수 없는 큰 공허함을 지니고 살아갈 뿐이었다.
어렴풋이 미소만 내 짓는 신라를 보고 태용은 더이상 신후에 대한 이야기를 묻지 않았다.
그들은 해변을 따라 천천히 산책하듯 거닐었다. 안 그래도 혼자 여행 온 듯한 신라를 보고 말을 걸 기회를 보는 남자들이 많았는데, 태용이 인간의 모습으로 그녀의 곁에 붙어 있자 대부분 포기한 듯이 돌아섰다.
“줄곧 혼자일 생각이냐.”
태용이 물었다.
“제가 걱정되세요?”
“걱정이 되기도 하고, 나에게도 기회가 온 것이라면 야비하게 잡아채려는 속셈이지.”
“푸훗… 솔직하시네요.”
“거짓을 말할 필요가 없는 지위에 있으니까.”
“태용 님은 물론 매력적인 남성이지만, 그건 본인의 지위에 맞는 능력과 소양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이고, 저도 이 육지에서 교육자라는 목표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끝까지 매력 있는 여자로 남아 있을 수 있겠죠.”
결국 둘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얘기를 돌려 말한 것이었다. 태용은 쓰게 웃으며 그녀의 말에 수긍했다.
“못 본 사이에 더 매력적인 여인이 되어 있는 걸 본 이상 그 말을 부정할 수 없겠군.”
“감사합니다.”
“대신 하나만 약속하자.”
“뭘요?”
태용은 그녀를 끌어당겨 조심스럽게 품에 안았다. 생각보다 따뜻하게 느껴지는 그의 품 안에서 신라는 눈만 깜빡거렸다.
“태용 님…?”
“혼자라서 힘겨울 때가 반드시 생길 거다. 그때에는 주저 없이 날 부르도록 해. 이렇게 잠깐 품을 내어주는 것 정도는 언제든 해줄 수 있으니까. 친 오라버니라고 생각하고 말이야.”
“……”
“…태인이가 질투하겠군.”
생각지도 못한 감동에 눈물이 반쯤 차올랐지만, 이어지는 그의 혼잣말을 듣고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함께 웃은 태용은 신라의 얼굴을 감싸 쥐고 그녀의 눈에 맺혀 있는 눈물을 자상하게 닦아주었다.
“웃으니까 더 예쁘구나.”
“그런 고마운 약속이라면 꼭 지킬게요.”
신라는 벅찬 마음으로 미소 지었다. 곁에 있는 사람들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깨달았던 지난 몇 년이었다. 그런데 먼 이국땅에서, 소중한 인연을 잃지 않고 이렇게 새로이 맺게 된 것이 무척 기뻤다.
저 멀리서 아름다운 빛깔로 물든 노을이 너른 바다까지 따뜻하게 적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