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장. 안녕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신라는 새벽 동이 트자마자 부엌에서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신후를 위한 생일상을 차렸다. 거의 다 준비하고 조용히 침실을 엿보니 신후는 곤히 자고 있었다. 다 차려지기 전까지 절대로 나오지 말라고 했으니, 기다리다가 자연스럽게 다시 잠들었을 것이다.
‘해줄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어서 미안해.’
행복한 얼굴로 잠이 들어 있는 그의 모습을 보니 울컥한 감정에 목이 멨다.
‘나는 괜찮으니까, 혼자 너무 오래 있지 말아요.’
속으로만 마음을 전한 그녀는 이내 그의 집에서 조용히 나갔다.
얼마 후 침실에서 걸어 나온 신후는 식탁 위에 가지런히 차려진 음식들과 그 옆에 올려진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그의 가라앉은 눈빛이 쪽지 위에 써진 글귀를 찬찬히 읽어 내렸다.
[생일 축하해요. 디저트 거리 사러 나갔다 올 테니까, 깨면 먼저 먹고 있어요. 사랑해요.]
두꺼운 외투를 챙겨 입고 오피스텔을 나선 신라는 택시를 타고 곧장 강원도 상천 지역으로 향했다. 강 현이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별장― 그곳에는 이미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겠지만, 조용히 마무리를 짓기에는 최적의 장소라고 생각했다.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신후가 빨리 찾아내기 힘들 테니까.
택시는 강가를 끼고 빠르게 달렸다. 보석을 뿌려놓은 듯이 정신없이 반짝이는 수면 위로 청량하기 그지없는 겨울 하늘이 비친다.
저 강물 아래에 살고 있는 한낱 미물들도 전생이 있고 후생이 있을 것이었다. 신라는 쓰게 미소 지으며 손을 내려다봤다. 바르르, 손끝이 떨리고 있지만 이미 마음먹은 용기마저 사라진 건 아니었다.
황량한 벌판에 홀로 내리는 젊은 여인을 이상하게 쳐다본 택시 기사는 별다른 말 없이 그 장소에서 떠났다. 신라는 색이 죽어 있는 들판을 천천히 걸어 낯익은 별장 쪽으로 향했다.
생기라고는 전혀 없는 폐건물인 줄만 알았는데, 대문이 열리고 누군가 힘없이 걸어 나왔다. 지난 전투 때 어딘가에 숨어서 목숨을 부지했던 나태귀였다.
“강 현… 아니, 비형랑은 어디 있어?”
나태귀는 대답하기를 망설였다. 그 모습을 보고 신라는 비형랑이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음을 눈치챘다.
“할 말이 있어서 왔다고 전해줄래?”
나태귀가 전할 필요도 없이, 별장 뒤편에서 익숙한 실루엣의 남자가 나타났다. 얇은 코트 차림으로 휘적휘적 걸어 나온 그는 나태귀에게 눈짓해 자리를 피하도록 만들었다.
“혼자 왔네, 유신라.”
이제는 정말 ‘강 현’의 모습을 버리기로 한 모양인지, 그의 말투에서 존칭이 사라져 있었다. 신라는 거치적거리는 외투를 벗어 바닥에 던져놓고 청바지에 셔츠 하나만 입은 차림으로 비형랑과의 거리를 좁혔다.
외투를 짐짝처럼 취급하는 그녀의 행동에 비형랑은 저도 모르게 무언가 말하려다가 도로 입을 다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지?”
나른한 표정을 지으며 물은 그는 철퇴를 소환해 바닥에 내려놓고 그 위에 잠시 걸터앉았다. 신라는 약 다섯 걸음 정도를 남겨놓고 우뚝 멈춰 섰다.
“한신후는 내 옆이 그 사람이 죽을 때 있을 자리라고 했어요.”
“……”
“하지만 내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만들려고요.”
어렴풋이 웃은 비형랑이 철퇴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왔다.
“나와 함께하기로 마음먹은 거야?”
“네. 그래서 혼자 온 거예요.”
“기뻐. 정말 기쁘다.”
비형랑은 아이처럼 웃으며 신라의 몸을 꼭 끌어안았다. 신라는 그의 품에 안긴 채 계속 말을 이었다.
“외롭다고 했었죠. 멈추는 방법을 모른다고….”
“그래.”
“내가 당신을 멈춰주러 왔어. 나도, 당신도, 다음 생은 없으니까 이곳에서 함께 끝내는 거야.”
기쁨도, 욕망도, 환희도, 슬픔도, 외로움도…. 모두 이곳에서 끝내자.
신라의 오른손에서 일용도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주인의 뜻대로 소리 없이, 빛없이 나타난 일용도는 남자의 왼쪽 가슴팍 심장을 망설임 없이 꿰뚫고 지나갔다. 비형랑의 몸이 움찔 굳는 것을 본 신라는 두 눈을 꾹 감았다. 이제 그와 똑같은 고통이 온몸에 덮쳐 오리라는 생각에 두려움이 닥쳤다.
“결국, 한신후를 지키기 위해서 나와 함께 죽는 길을 선택했다는 거네.”
비형랑의 온화한 목소리가 들려 신라는 귀를 의심했다. 고개를 쳐들고 그의 상태를 살피니 일용도에 전혀 타격을 입지 않은 모습이었다. 일용도는 단지 그의 심장을 ‘통과’해 지나가 있을 뿐이었다. 분명히 인간만이 볼 수 있는 ‘신의 죄’를 향해 정확히 찔러져 있었다.
“어째서….”
“한신후가 말하지 않았던 모양이야. 이제 우리 둘 사이에 혼을 연결하는 주술 따위 없거든.”
“뭐…?”
“한신후가 그 매듭을 대신 가져 가버렸지.”
신라의 혼란스러움을 담은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그러면… 한신후는….”
“날 죽이고 함께 사라질 생각이야. 그래서 나는 한신후와 싸울 수밖에 없는 거야.”
한신후가 이긴다면 둘 다 죽을 수밖에 없다는 말은 이를 의미했던 것이다. 신라는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현실에 힘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일용도가 천천히 아래쪽으로 기울었다.
비형랑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신라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불쌍한 여인…. 어쩔 수 없어. 이게 한신후가 전생에 당신에게 짊어지게 만든 업보야. 당신을 지켜낼 순 있어도, 영원히 곁을 지켜주지는 못하지.”
“……”
“지금이라도 나에게 와. 난 당신을 혼자 만들지 않을 자신 있어.”
눈물을 훔쳐낸 신라는 애써 비형랑을 노려봤다.
“한신후를 죽이면, 당신도 불사의 몸이 아니게 되는 거 아니야?”
“주술은 다시 쓰면 돼. 나의 세력도, 지금부터 차차 다시 만들어나갈 거야.”
“제발… 그만둬….”
“당신이 순순히 날 따라온다고 한다면 누구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떠날 수도 있어. 무슨 수를 써서든 신도 찾아내지 못하도록 해줄 거야. 다만 그렇게 되면 당신도 신들에게 나와 같은 이단으로 취급되겠지. 그걸 감당해낼 수 있겠어?”
“……”
지금 가장 피하고 싶은 건 한신후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리는 일이었다. 그 심리를 파악한 비형랑은 신라에게 가장 솔깃할 만한 제안을 한 것이다. 신도, 한신후도 찾지 못하는 곳으로 떠난다면 누구도 죽지 않아도 되니까.
신라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고 비형랑은 쓴웃음을 삼켰다. 이렇게 해서라도 신라를 손에 넣고자 하는 스스로의 모습이 낯설었다. 그동안 수도 없는 것을 손에 넣어왔지만, 모든 걸 지배하고자 하는 군림욕을 버릴 정도로 절박하게 바랐던 것은 없었다.
“나… 난….”
신라는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비형랑의 시선은 오로지 그녀의 입술에만 고정돼 있었다.
‘그래. 따라오겠다고, 그 한마디만 하면 돼.’
비형랑을 찾아온 신라의 처음 의지가 꺾인 것을 드러내듯 일용도는 점차 땅을 향해 기울었다. 비형랑을 죽일 수도, 신후를 살릴 수도 없어진 지금 그녀에게 선택권은 오로지 비형랑이 제안한 단 한 가지 길이었다.
“당신을… 따라…”
신라가 어렵게 결정한 바를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일용도의 자루를 놓칠 뻔한 그녀의 손 위로 다른 손이 나타나 다시금 힘주어 쥐게 만들었다.
“그럴 필요 없어.”
어둠을 타고 신라의 뒤쪽에 나타나 그녀를 한 팔로 꽉 끌어안은 신후는, 바닥으로 향해 있던 일용도를 치켜들어 주저 없이 비형랑의 심장을 단번에 꿰뚫었다.
커헉, 단말마의 신음을 뱉어낸 비형랑이 비틀거리며 각혈을 토했다. 새파랗게 질린 신라의 얼굴이 신후에게로 향했다.
“아, 안 돼….”
“기껏 차려준 아침에 손도 못 대고 나와서 미안해.”
나지막이 말한 신후가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일용도의 칼끝은 정확히 ‘신의 죄’를 가르고 지나갔다. 검이 꽂힌 채 한 걸음 뒤로 물러난 비형랑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아아…. 이걸 볼 수 있다는 건, 넌 이미 인간이 되었기 때문인가?”
그와 똑같은 충격을 받은 신후의 입에서도 참아내지 못한 각혈이 터졌다.
“글쎄…. 그 죄로 인해 피해를 입은 당사자이기 때문일 수도 있지.”
신후는 신라에게 지탱하고 있던 몸을 떼어내고 직접 일용도를 가져가 다시 비형랑의 몸을 사선으로 베어냈다. 완전히 박살 난 비형랑의 귀혼이 베어진 자리부터 바스라져 허공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안 돼-!”
신라의 날카로운 비명이 울렸다. 그녀는 일용도를 떨어뜨리고 바닥으로 무너지는 신후에게 황급히 달려갔다. 애타는 손길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를 끌어안기만 했다.
“아, 안 돼…. 교수님…! 한신후!”
“네가 희생하려고 하는 걸 알고 있었어…. 그래서 일부러 보내준 거야. 내가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알면 넌 절대 일용도를 소환하지 않을 테니까.”
“어째서… 말 안 했어….”
“미안해.”
비형랑은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지 신라를 눈에 담고 있었다. 이전에 신에게 몸을 빼앗긴 신라의 칼에 찔리기 직전, 가장 먼저 든 걱정은 그의 목숨이 아닌 신라의 안위였다.
사실은 이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한신후에게 이기더라도 남겨진 신라에게는 언제고 신이 찾아와 그녀의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으니, 그럴 바엔 자신이 먼저 사라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역시 당신을 사랑…’
원하는 것은 무조건 가져야만 했다. 그렇게 살아왔는데도 저 여인을 두고 떠나는데 마음이 편안한 것을 보면….
‘…하지 않았나 보다….’
그는 차분히 두 눈을 감으며 허공에서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그것이 귀신들 사이에서 오랜 시간 군주로 재림했던, 또한 전설처럼 전해지던 귀태―비형랑의 말로였다. 비형랑의 혼이 사라진 강 현의 몸은 힘없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한편 신후의 몸에서도 비형랑과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심장부터 천천히 혼이 바스라져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 아니야… 안 돼….”
신라는 애원하듯이 그를 붙잡고 늘어지며 정신없이 고개를 저었다. 신후는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은 채 그녀의 뺨에 온기를 전했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안 돼…. 가지 마….”
“네 끊어진 운명의 굴레는…, 그분이 책임지고 이어주기로 했어.”
“그런 거… 그런 거 필요 없어. 이제 당신은 없잖아! 불행하지 않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잖아….”
“마지막 생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봐 줘서 고마워.”
“흑…. 가지 말아요, 제발….”
황량한 벌판은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했다. 신후는 점점 힘을 잃어가는 손으로 겨우 머플러를 풀어 신라에게 둘러주었다. 그에게서 나고 있는 은은한 향도, 신라가 생일 선물로 사 준 향수의 향이었다.
연구실의 승합차가 벌판에 도착하고 조교들이 서둘러 달려 나왔다. 이미 비형랑의 혼이 사라진 것을 보고 그들은 이 또한 신후의 마지막 순간임을 깨달았다. 모두가 조용히 눈물을 떨어뜨리는 가운데 혜령은 참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아 오열했다.
며칠 전부터 신후는 조교들을 한 명씩 따로 만나 그가 사라지고 난 다음의 일을 부탁했었다. 대부분은 홀로 남겨질 신라를 위한 부탁이었다.
마지막 힘을 끌어모아 신라의 얼굴을 감싸 쥔 신후는 작게 떨리는 입술로 그녀에게 마지막 키스를 남겼다. 이제는 눈의 초점조차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는 그를 보고 신라는 애써 울음을 삼키며 그를 품 안에 따뜻이 안았다.
“꿈속의 그 아이는, 당신이었던 거죠?”
“응….”
“당신 어머니가 따뜻한 사람이어서, 그 감정을 물려받은 당신 사랑도 무척 따뜻했나 봐요.”
“…그래….”
천천히 눈을 감은 신후가 희미하게 웃었다. 신라는 그에게 더 잘 들리도록 귓가에 다가가 속삭였다.
“사랑해요.”
“…나…도.”
“이번 생의 남은 시간, 당신이 지켜준 다음 생, 그다음 생에도, 줄곧 사랑할게요.”
평온함만이 신후의 얼굴에 남았다. 그의 혼은 완전히 빠져나와 허공에서 연기처럼 사라졌다. 이윽고 검은 어둠의 바람이 그의 주위에서 피어올라 그의 육신마저 데리고 사라져버렸다.
“안녕….”
그가 사라진 곳을 올려다보는 신라의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잠시 후 조교들이 그녀에게 다가와 조용히 위로의 포옹을 했다. 그들은 신후가 사라진 그 자리에서 오래도록 떠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