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장. Happy Birthday To You
“안녕.”
캠퍼스 안에서 마주칠 줄 몰랐던 남자가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건네 왔다. 신라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이렇게 마주 보고 있자니 불과 며칠 전 그의 별장에 감금되었던 일이 환상처럼 느껴졌다.
“학교에 행정적으로 처리할 게 있어서 잠시 들렀어요. 잘 지내고 있나 봐요.”
어쩌면 환한 대낮에 사람이 많이 지나다니는 장소라서 더 부담 없이 나타났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정말로 혼자가 된 남자는 마치 처음 만났을 때처럼 말갛게 미소 짓고 있었다. 하지만 풍겨 나오는 기운은 전과 같지 않았다. 비형랑의 혼을 환생한 인간의 혼과 합쳐버렸다는 말이 사실인 듯했다.
“이제 여기서 그만… 할 수는 없어요?”
신라의 말에 강 현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미안. 그만두는 방법을 몰라.”
“한신후는 죄를 인정하고 속죄의 삶을 살았어요. 당신은 그렇게는 안 되나요?”
“그와 나는 달라. 출생부터가 다르지. 만에 하나 죄를 뉘우치고 제 발로 찾아간다 해도 기다리고 있는 건 끝없는 지옥 불 뿐이야.”
“……”
“그렇게 슬픈 얼굴 하지 마. 어차피 나에게는 ‘죄’라는 개념조차 없으니까. 그러니 누구에게도 용서를 구할 일도 없지.”
살을 에는 듯한 겨울바람이 날카롭게 두 사람을 스치고 지나갔다.
강 현은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기며 초연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번 패인을 꼽는다면 당신에게만큼은 관대했던 거야. 아플까 봐, 외로울까 봐, 원하는 걸 다 들어줬지. 친구에게 보내는 문자도 수상했지만, 그냥 보내도록 했어.”
“……”
“비형랑으로 살았을 때 패했던 원인도 마찬가지야. 길달을 내 손으로 죽여 놓고 그 후로 그 아이를 머릿속으로 많이 그렸어. 인간 세상을 손짓 하나로 좌지우지하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내 앞에 머리를 조아렸지만 외로움은 도무지 채워지질 않았지. 그러던 중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 날 기습한 녀석에게 충격을 받았고, 어둑시니는 그 틈을 파고들어 날 무력화시켰어.”
강 현은 안락사를 부탁했던 윤 노인의 말이 갑자기 떠올라 옅게 미소 지었다.
- 그 외로움에 잡아먹혀 버리면, 저처럼 아무것도 남는 것 없이 일생을 마무리하는 것이겠지요.
“신라 씨, 당신 말대로 나는 내 외로움을 인정하고 직면했어. 그리고 찾아낸 유일한 방법은, 당신을 영원히 내 곁에 두는 것뿐이었지.”
“……”
“하지만 아무리 붙잡아도 당신은 떠나가 버리더군.”
“아니요.”
신라는 강 현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당신은 날 붙잡은 적이 없어요.”
“뭐…?”
“스스로가 약해질까 봐, 혹시나 내가 적에게 약점이 될까 봐, 단 한 번도 인정하지 않았어요.”
- 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 사랑할 수 있을 리가 없지.
강 현의 얼굴에서 점차 표정이 사라져 갔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아도 사랑의 감정이 없는 어둑시니 정도는 잊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붙잡은 적이 없었다….”
바로 눈앞에 있는 여인임에도, 갑자기 너무나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그렇구나. 감정은 질량이 아니라 다른 감정으로 가감할 수도 없고, 감추려고 한다고 해서 감춰지는 것도 아니었어. 충분히 기회가 있었는데도, 당신 안에 그자가 점점 크게 들어찰 동안 난 당신의 껍데기만 가지려고 했었던 거야.”
“그게 당신의 삶이었어요. 그래서 늘 외로웠죠.”
강 현은 쓰게 웃었다. 천 년을 넘게 사는 동안 몰랐던 것을 인간으로 태어나서야 비로소 깨닫게 된 현실이 허무하기 짝이 없었다.
잠시 상념에 잠겨있던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 남자를 죽일 거야.”
신라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 말아요….”
“그게 이 전쟁을 끝맺는 유일한 결말이야. 말했잖아. 둘 중 하나는 죽어야만 한다고. 그쪽이 승리하면 둘 다 죽겠지만.”
“강 현-!”
“비형랑.”
신라의 말을 끊은 강 현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앞으로 당신에게 나는 ‘비형랑’이야. 곧 당신에게 일어날 일들은 강 현이 원한 바가 아니니까.”
그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돌아서서 점차 멀어져 갔다.
- 그 남자를 죽일 거야.
행복에 젖어 꿈속의 일처럼 느껴졌던 정해진 비극은 결국 문턱에서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신라는 모든 감정을 소진한 사람처럼 넋을 놓고 허무하게 서 있었다.
“그렇게… 두지 않을 거야….”
더듬더듬 힘겹게 내뱉어진 말 이후, 그녀의 눈에는 점차 날카로운 의지의 빛이 떠올랐다.
‘알고 있었잖아. 나만 용기 내면, 모두가 다치지 않고 끝날 수 있다는 걸.’
신후가 모든 걸 걸고 지켜줬듯이, 이번에는 그녀가 그의 마지막 생을 책임지고 지켜줄 차례였다. 그를 위한 끝이라면 마지막 순간까지 두려움 한 점 없을 것 같았다.
* * *
이상한 꿈을 꿨다. 요새 가끔 꾸던 꿈의 연장인 것 같았다.
어둑시니의 기운을 가진 작은 꼬마가, 현명해 보이는 인간 여인의 손을 붙잡고 산길을 걷고 있었다. 더운 날씨에 힘겨워 보이는 여인을 위해 어린 어둑시니는 산길에 온통 그늘을 드리웠다.
‘시원하십니까, 어머니?’
그녀는 어둑시니의 친모인 듯 보였다.
‘그래, 고맙구나.’
그들은 계곡가에 있는 동굴로 들어가 간도 제대로 배지 않은 주먹밥으로 끼니를 때웠다. 바깥에 수상한 기척이 느껴질 때마다 여인은 아들을 끌어안고 더욱 깊은 어둠 속으로 숨으려 했다.
‘저희가 죄를 지은 겁니까?’
‘아니다.’
‘그럼 왜 도망 다녀야 합니까?’
‘네 아버지에게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함이다. 너와 나의 존재는 그분께 누를 끼치기 때문이란다.’
‘그럼 아버지는 저희를 미워하시는 겁니까?’
여인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사랑해서 낳은 자식이다. 미워할 리가 없지 않니.’
‘사랑…. 그것은 눈에 보이는 겁니까?’
‘보통은 볼 수 없단다. 하지만 너의 아버지께서는 그 감정을 따로 빼내 보관하곤 하셨지.’
여인의 눈이 슬프게 휘었다.
‘너를 잉태했을 때, 배 속에 있던 너에게서도 그렇게 가져가 버리셨단다. 반요로 살기에 그 감정은 필요 없는 것이라 하시면서.’
‘그럼 저에게는 사랑이 없군요.’
‘괜찮다. 그 감정은 애초에 혼자서는 가질 수 없는 것이니, 노력하면 다시 얻어질 것이란다.’
여인은 사랑이 어떤 감정인지 아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그 덕분인지 어둑시니는 요괴의 천성보다는 인간의 천성을 더욱 갖게 되었다. 하지만 선하기만 해서는 요괴로서의 명줄을 길게 이어갈 수가 없었다. 그는 점차 기운이 쇠해져 허구한 날 앓아눕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두 모자가 사는 동굴로 찾아왔다.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온몸에서 성스러운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남자였다. 그는 다름 아닌 어둑시니의 친부였다.
‘그 아이가 필요해졌다.’
‘많이 약해졌습니다.’
‘쓸데없는 짓을 했나 보구나. 그대로 두면 그 아이는 죽는다.’
정신을 잃은 어둑시니를 눕혀 놓고, 그들은 바깥에서 조용히 얘기를 나눴다.
어둑시니가 다시 깨어났을 때 그의 모친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도 쇠약해졌던 몸에 힘이 들어차고 생기가 흘러넘쳤다. 더불어 무의미하게 뛰고 있는 줄만 알았던 심장에서는 따뜻한 감정이 느껴지고 있었다.
‘이게 사랑이구나.’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흘렀다. 어머니가 했던 말이 그의 머릿속에 어렴풋이 떠올랐다.
- 누군가를 생각하면서 울고 웃을 수 있다면, 그 감정이 바로 사랑이란다.
낯선 사내가 다가와 어둑시니에게 말했다.
‘혹여 인간의 감정이 섞여 들어갔다면 쓸모없는 것이니 버려라. 너는 앞으로 요괴의 힘으로 신들을 도와 인간계의 복잡한 일들을 해결해야 한다.’
‘어머니는 저에게 쓸데없는 것을 일깨워주려 하신 겁니까?’
‘……’
사내의 입에서는 곧바로 대답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어둑시니는 제 어미의 명줄을 이어받아 좀 더 살아가게 되었다. 그녀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그는 스스로를 단련시키고 강하게 만들었다.
이름도 성도 모르는 부친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은 고려 말, 어느 가엾은 여인의 명줄을 늘리고 난 후였다.
그는 본인의 이름을 다문천왕(多聞天王)이라 했다.
해가 어스름하게 저물어갈 무렵, 신후는 거실의 불도 켜지 않은 채 조용히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잠깐 영상으로 올라온 기후 때문에 한겨울에 보기 힘든 비가 추적추적 창문에 떨어졌다.
아무것도 닿지 않은 창문에, 희뿌연 연기가 피어나며 마치 사람이 쓴 듯한 글씨가 떠올랐다.
[ 네가 스스로 정한 결말이 얼마 남지 않았다 ]
“생일 전야에 굳이 매정하게 굴지 않아도 될 텐데.”
신후는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손에 든 티컵의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처음 글귀가 사라지더니, 곧 그 자리에 다른 글귀가 생겨났다.
[ 끝에 어긋남이 없어야 허락되지 않은 네 심장도 눈감아 줄 수 있다 ]
기억마저 희미한 옛날, 그에게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던 것도 같았다.
- 어머니는 저에게 쓸데없는 것을 일깨워주려 하신 겁니까?
사내는 완전히 모습을 감추기 전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해주고 떠났다.
- 인간에게 사랑은 약이 된다. 하지만 잔재주가 많아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요괴에게는 독이 될 뿐이다.
- 저도 반은 인간이라 들었습니다.
- 반만 인간인 존재는 없다. 그것은 결국 인간이 아니라는 뜻이다.
결국, 마지막 생까지 인간으로서 인정받지 못했다는 얘기였다.
묵묵히 상념에 잠겨있을 때, 거실 불이 켜지고 인기척이 났다.
“불 안 켜고 뭐 해요?”
신라였다. 신후의 얼굴에 금세 미소가 피어났다. 굿나잇 인사를 남기고 아까 전 본인 집으로 내려갔던 그녀는 웬일인지 저번에 사줬던 원피스로 갈아입고 다시 올라왔다. 신후는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고 홀린 듯한 표정으로 그녀의 앞에 걸어가 섰다.
“…예쁘다.”
더 표현할 말이 없었다. 머리도 손질을 했는지 살짝 웨이브를 준 머리를 반묶음 해 한층 여성스러운 미가 풍겼다.
“생일 이벤트인가?”
신후의 말을 부정하지 않은 신라는 고개를 살짝 숙여 민망함으로 붉어진 얼굴을 감췄다.
“어설퍼서 미안해요.”
신후는 대답 대신 신라의 손을 감싸 쥐어 그의 가슴 위에 얹었다. 쿵, 쿵, 평소보다 빠르게 뛰는 듯한 심장 소리가 그녀의 손끝에 오롯이 전해졌다. 이미 유신라의 존재 자체가 심장에 가득 차 있어 어설프든 않든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했다.
사랑해, 입 밖으로 내뱉으면 왠지 울컥해서 눈물이라도 쏟게 될 것 같아서, 신후는 그저 소중히 그녀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눈가가 조금 젖어 있던 신라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짐짓 밝게 웃었다.
“생일 축하해요.”
“생일은 내일이잖아.”
“그냥, 미리요.”
그녀는 선물이 담긴 쇼핑백도 그에게 전했다. 저번 주말에 백화점에서 산 남성 향수와 머플러였다. 신후는 포장을 뜯자마자 진심으로 기쁜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마음에 들어.”
“연인 간에 향수를 선물하는 건 언제 어디에 있든지 나를 기억하고 사랑해달라, 라는 의미래요.”
“알고 있어. 그래서 더 기뻐.”
신후는 신라의 손을 붙잡고 식탁으로 이끌었다.
“마침 괜찮은 와인 선물이 들어왔는데, 같이 마실래?”
“좋아요.”
두 사람은 밤새도록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하고, 사랑을 속삭이고,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러다가 입을 맞추고, 자연스럽게 침실로 들어가 사랑을 나눴다.
신라는 새벽에 잠깐 눈을 뜬 뒤로 다시 잠들지 못했다. 눈앞에 곤히 잠들어 있는 남자를 조금이라도 더 오래 눈에 담고 싶은 마음에 잠은 저절로 달아나버렸다. 손을 뻗어 예쁜 이목구비를 찬찬히 매만졌다. 아이처럼 곯아떨어진 모습이 귀여워 웃음이 나기도 했다.
‘안녕.’
신라는 문득 그녀의 생일날 식사 자리에서 신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 그 말, 겨울이 되면 또 해주겠어?
모든 감정을 되찾는 일이 후회로 끝날지는 몰라도 그건 당신에게 어울리는 모습일 것이다, 라고 한 말에 그가 진심으로 기뻐하며 했던 말이었다.
“어울려. 지금 당신의 모습.”
조그맣게 속삭인 신라는 신후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