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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장. 따뜻한 겨울 (120/126)

119장. 따뜻한 겨울

포근한 이불의 감촉을 느끼며 신라는 기분 좋게 눈을 떴다. 그녀에게 팔베개를 내어준 신후는 아직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가 이렇게 편하게 곯아떨어져 있는 모습을 자세히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반듯한 이마도, 진한 눈썹도, 외국인처럼 예쁘게 떨어져 내린 속눈썹도, 조각으로 빚어놓은 듯한 콧대도, 흐트러져 있는 검은 머리칼도, 모두 하루 종일 감상하고 있어도 전혀 지루하지 않을 것 같았다.

“기분이 너무 좋은데….”

살짝 벌어져 있던 남자다운 입매가 천천히 당겨지며 속삭였다. 신라도 따라서 웃으며 아직 감겨 있는 그의 눈을 매만졌다.

“잘 잤어요?”

“뭘 한 거야? 갑자기 좋은 기운이 가득 차올랐거든.”

“글쎄요. 그냥 바라본 것뿐인데.”

“그것뿐이야?”

신후는 쌍꺼풀진 눈을 조금씩 깜빡이며 떴다. 그리고 좋은 기운의 정체를 곧바로 알아차렸다. 신라의 눈빛에 말로 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애정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는 신라의 손을 쥐어 올려 손등에 입을 맞췄다.

“아침부터 좋은 선물을 받았네. 어떻게 보답하지?”

“보답 같은 게 필요할 리가 없잖아요.”

“어디 가고 싶어? 산이든, 바다든, 해외든, 말만 해.”

“출근은 안 하고요?”

“외근하는 거지, 뭐.”

“그러다가는 신망을 모두 잃을걸요?”

신후는 쿡쿡 웃으며 신라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벌써 마누라 같은 걱정을 해주는 거야?”

“풋, 교수님 입에서 마누라라는 단어가 나오니까 너무 웃겨요.”

“시대가 조금 옛날이었어도 진작에 보쌈해 가서 살림 차렸을걸.”

“못 말려….”

출근 시간이 가까워 씻기 위해 침대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신라를 몇 번이나 침대로 끌어당겨 도로 눕히던 신후는 그녀가 약 오른 표정을 지어서야 못 이긴 척 놔주었다. 얇은 이불로 몸을 감싼 채 방에서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아련하게 바라보다가, 이내 상체를 세워 앉았다.

창가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서 점차 웃음기가 옅어졌다. 차분한 눈빛은 무언가 마무리를 지으려는 사람의 것 같았다.

똑똑.

교수실 문이 두드려지고, 연구실 쪽에서 건우가 들어왔다. 신후는 그를 소파에 앉히고 차를 우려내기 위한 물을 끓였다.

“컨디션은 좀 어떠세요?”

건우가 탁자 근처에 서 있는 신후를 바라보며 물었다.

“좋아.”

“주술 때문에 불편한 점은 없으세요?”

“있기는 할 거야. 하지만 별로 신경 쓰일 정도는 아니야.”

“신라 덕분인가요?”

“그게 클지도.”

신후는 쟈스민 차를 두 잔 타서 한 잔을 건우에게 건넸다. 서랍에서 간단한 다과도 꺼내왔다. 이야기가 길게 이어질 것이라는 걸 짐작한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그렇게 서로의 생각을 눈치챌 정도로, 두 사람은 오래된 사이였다.

“너야말로 내상은 좀 어때.”

“나아지고 있습니다.”

건우는 재킷 안주머니를 뒤져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시력을 회복시켜주는 공작새의 깃털이었다.

“불편한 걸 굳이 참으실 필요는 없는 것 같아서요. 보주에게 부탁해서 얻어왔습니다.”

“괜한 수고를 들였네.”

“어서 치료하세요.”

신후는 그 자리에서 공작새의 깃털을 이용해 오른 눈의 시력을 회복시켰다.

그동안 할 말을 골라내던 건우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아직 신라는… 모르는 거죠.”

“응.”

“그래도 빨리 알려주셔야 하지 않아요? 갑자기 그런 상황이 닥치게 되면 꽤 충격을 받을 텐데요.”

“주술이 풀리지 않았다는 건 어차피 알고 있잖아. 아마 본인이 희생해서 모든 걸 마무리 지으려는 생각을 몰래 하고 있을지도…. 결국 떠나는 것 대신 남게 되는 것뿐이니까, 그렇게 충격은 아닐 거야.”

“……”

“욕심이지. 나와 함께했던 시간을 떠올렸을 때, 슬픈 기억보다는 행복했던 기억이 더 많이 떠오르게 해주고 싶어.”

건우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체념하듯 고개를 푹 숙였다. 깍지를 낀 두 손이 작게 떨리는 것 같기도 했다.

- 저를 망설임 없이 죽여주세요.

신라가 했던 그 부탁을 수백, 수천 번은 곱씹었다. 비형랑과 얽힌 주술을 풀어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다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하지만 신후의 단호한 뜻을 꺾을 수가 없었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를 위한 일이야. 비형랑을 단칼에 베어 없앨 수 있는 사람도 나고. 그러니까 이 역할은 내가 맡을 수밖에 없어.’

건우는 손가락이 하얘질 정도로 깍지를 꽉 끼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비형랑과의 지긋지긋한 연을 끊는 건 제가 해야 했어요.”

신후가 어렴풋이 웃었다.

“어째서?”

“애초에 이 전쟁에 당신을 끌어들인 것도 저였고, 당신이 짊어지게 된 속죄의 삶도, 비형랑과의 전쟁 후 기력이 약해졌을 때 만났던 여인을 더 오래 살게 만들려고 하다가 그런 거였잖아요. 제가 맨 처음 당신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지만 않았더라도….”

“나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널 떠민 건 신들이었어. 차라리 같이 신을 욕하자고. 쓰고 버리는 패…. 우리의 처지는 늘 그랬으니까.”

“……”

“하지만 속죄의 삶을 살게 된 덕에 신라를 만난 거야. 후회는 없어.”

고개 숙인 건우의 얼굴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떨어져 그의 발치를 적시고 있었다. 길달로 처음 세상에 태어나 두 번의 환생을 거치는 동안, 그가 이토록 서러운 눈물을 흘리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만큼 그가 신후를 온 마음으로 믿고 따랐다는 증거였다.

“이렇게 쓸모없어서 죄송합니다….”

신후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바보 같은 소리 마. 너만큼 유능한 인재는 없었어.”

차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김이 사라질 때까지, 건우의 울음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 * *

신후의 생일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그에게 기억에 남는 선물을 해주고 싶어 무작정 백화점을 돌아봤지만, 특별히 눈에 들어오는 게 없었다.

‘물질적인 건 사실 별로 필요 없겠지.’

신라는 홀로 시내를 걸으며 조언을 구할 만한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처음 타자는 혜령이었다.

「교수님 생신? 연구실에서는 매년 조금씩 모아서 머니클립 같은 거 사드렸어. 옷이나 가방 쪽으로 가면 그분 취향에 맞는 건 너무 비싸지잖아?」

“그렇죠….”

「아, 작년에는 만년필 선물했다. 그것도 괜찮은 브랜드는 꽤 비싸더라고. 어디 보자, 한신후에게 생일 선물이라…. 당연히 여자친구로서 주는 거겠지?」

“네.”

「흠…. 겨울에 꼭 필요한 목도리나 장갑 같은 건 어떨까? 애인이 준 거면 왠지 모르게 더 따뜻하게 느껴지더라.」

다음으로는 우선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마침 태인과 데이트 중이었다.

「교수님 선물이라…. 남자라서 그런지 실용적인 것밖에 안 떠오른다. 나는 일단 넥타이핀 추천할게!」

동주는 동주다운 선물을 추천했다.

「교수님 집에 먹을 게 너무 없더라고. 간식거리 같은 거 잔뜩 선물하는 건 어때? 티백 세트라든지.」

건우는 통화하기 곤란한 상태인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하지만 문자로 용건을 전하니 곧바로 답장을 보내줬다.

[독서 좋아하시니까 겨울에 어울리는 책 선물하는 것도 괜찮을 거 같다. 너무 두껍지는 않은 걸로.]

마지막 타자는 서영이었다.

「교수님한테 선물-? 어디 보자…. 학생 수준에서 해드릴 만한 건 넥타이핀 정도려나? 그런데 그건 너무 제자가 스승한테 주는 선물 같아서 재미없잖아?」

“내 생각도 그래.”

「뭐, 교수님이라면 네가 뭘 사 주든 엄청 좋아하실 것 같지만 말이야.」

사실 연구실의 모두가 마지막에는 서영과 똑같은 말을 덧붙였다.

「이왕이면 이 남자가 내 남자다! 영역 표시하는 듯한 선물이 낫지 않아? 한 교수님이 워낙 유명인이어야지!」

“풋, 영역표시라니….”

「나는 그래서 동주 오빠한테 팔찌 선물했어. 다른 여자가 치근거리면, 저는 주인 있어요! 하라고 시켰거든.」

“너다워서 재밌다.”

모두의 의견을 참고해서 신라는 신후의 생일 선물을 미리 샀다. 전날 선물을 주고, 당일에는 하루 종일 그가 원하는 데이트를 할 생각이었다.

마침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외출한 지 1시간도 채 되지 않은 시각이었다. 정말이지, 혼자 조금이라도 떨어져 있는 꼴을 못 보는 사람이었다.

「타임 리미트야. 어디에 있어?」

“뭐 하고 있었어요?”

「네가 날 놔두고 혼자서 외출한 뒤로는 TV 틀어놓고 차나 마시고 있었어.」

“삐진 목소리네요.”

「알면 어서 와. 아니면 내가 나갈까? 점심 먹어야지.」

“아뇨, 제가 갈게요. 적당한 거 아무거나 시켜 먹어요, 우리.”

「알겠어. 조심히 와.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응.”

신라는 웃음 띤 얼굴로 다시 오피스텔로 돌아갔다.

그의 선물을 집 안 적당한 곳에 숨겨놓고, 계단으로 한 층 올라가 문을 두드렸다. 이미 현관 근처로 나와 있던 신후가 문을 열어줬다.

“많이 추웠을 텐데, 그러고 나갔다 온 거야?”

“외투 벗어놓고 올라온 거예요.”

신후는 한 손에 티컵을 들고 편한 실내 복장을 하고 있었다. 잠옷으로 할 만한 걸 선물로 살 걸 그랬나, 속으로 고민하는 신라의 얼굴을 보고 신후가 작게 웃었다.

“내가 너무 편안한 차림으로 있었나? 널 편하게 여기고 있다고 오해하면 안 되는데.”

“아니에요. 보기 좋아요.”

“이리 와.”

먼저 거실 소파에 앉은 그가 컵을 내려놓으며 신라를 불렀다. 신라를 옆에 앉힌 신후는 리모컨으로 영화 목록을 검색했다.

“음식은 시켜놨고, 집에서 이렇게 영화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서.”

“좋아요.”

“무슨 장르 좋아해? 액션? 멜로?”

“너무 시끄럽지 않은 걸로 틀어줘요.”

적당한 헐리우드 로맨스물을 틀어놓은 신후는 신라에게 어깨동무를 해 그의 몸에 편히 기대게 만들고 화면에 시선을 두었다. 그러다가 그녀의 목덜미에 코를 묻고 냄새를 맡았다.

“백화점 다녀온 거야?”

“어떻게 알았어요?”

“향수 냄새 같은 게 나서. 조금만 의처증이 있었으면 누굴 만나고 온 거냐고 꼬치꼬치 캐물었을 텐데.”

“외모는 헐리우드인 사람이 아침드라마 찍고 싶어요?”

“결말이 너랑 맺어지는 거면 뭐든지.”

살풋 웃어버린 신라는 신후의 몸에 더욱 기댔다. 따로 향수를 뿌리지 않아도 신후에게서는 늘 좋은 냄새가 났다. 바깥에서 만나는 이들은 그에게서 향수 냄새밖에 맡지 못할 거라는 사실에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유치한 독점욕이라니, 서영에게 옮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요새 이상한 꿈을 꿔요.”

신라의 말에 신후가 시선을 내려 그녀의 머리칼을 매만졌다.

“무슨 꿈?”

“단편적으로 계속 이어지는 것 같은데, 어린 남자아이와 나이 든 여자분이 나와요. 옷차림은 옛날 사람 같고요.”

“옛날 사람이라면?”

“조선 시대는 아닌 것 같고, 고대 무렵이 아닐까 싶어요. 남자아이는 무척 예쁘장하게 생겼어요. 왠지 모르게 표정이 없어 보이는데, 반면에 엄마는 늘 아이를 보면서 밝게 웃어줘요.”

“…그래?”

“머무를 곳이 없는 모양인지, 산길만 돌아다니면서 끼니는 산나물이나 계곡물로 때우고, 잠은 나무 아래나 동굴에서 자요. 그래도 슬픈 기색 없이 사이좋게 돌아다니는 그 모자의 모습이 보기 좋더라고요.”

신후는 말없이 신라의 머리칼만 계속 매만졌다. 왠지 그 꿈의 주인공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비형랑에게 묶여 있던 영혼의 조각이 튕겨 나오면서 「신의 죄」를 엿보게 된 모양이군.’

신라는 고개를 들어 신후와 눈을 마주쳤다.

“그냥 의미 없는 꿈일까요?”

“네가 꾼 꿈이라면 실존했던 일일 수도 있지만, 옛날 일이니까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그녀의 이마를 부드럽게 매만진 신후는 그 위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마침 배달 음식이 도착하는 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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