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장. 약속
눈을 뜨자 익숙한 방 풍경이 보였다. 침대맡에는 신후가 앉아 있었다. 아직 꿈을 꾸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신라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신후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손을 뻗어 만지면 사라질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그의 얼굴이 감촉을 갖고 만져지는 것이었다.
“진짜…예요?”
“아픈 데는 없어?”
“어떻게 된 거예요?”
서로 묻고 싶은 게 많아 질문이 엇갈렸다. 신후는 작게 웃고는 뺨에 닿아 있는 신라의 손을 꼭 붙잡았다.
“네가 신의 힘을 쓰기 전에 도착해서 막아냈어. 비형랑은 잠시 모습을 감췄고.”
“그슨대는요?”
“화비가 희생해서 완전히 없애는 데 성공했어. 이제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거야.”
“…결국 화비가….”
신라의 얼굴에 슬픔이 내려앉았다. 의식이 사라져 있는 동안 많은 일들이 생긴 모양이었으니까.
“다른… 선배들은요? 다들 괜찮은가요?”
“모두 무사해. 일단 위층에 모여 있어.”
“다행이다….”
신후는 오른쪽 눈의 시력이 사라져 있는 것을 그녀에게 숨겼다. 원한다면 또 공작새의 깃털을 구해 시력을 복원시켜 주겠다고 준성이 제안했지만, 신후는 필요 없다고 거절했다. 어째서 필요가 없는지 잘 알고 있는 준성은 두 번 권하지 않았다.
“당신은 괜찮아요?”
신라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신후의 이마에 붙어 있는 반창고를 바라봤다. 아무렇지 않은 듯 앉아 있지만, 평소보다 그의 기운이 많이 쇠해 있는 것이 느껴지고 있었다. 신후는 고개를 저으며 가까이 다가가 그녀를 품에 넣었다.
“안 괜찮아. 그동안 네 걱정만 달고 살았던 걸 생각하면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가고도 남았을 거야.”
“그건 나도 마찬가지예요.”
“마음고생은 네가 훨씬 심했겠지만. 보내준 단서들 덕분에 그 별장을 제때 찾을 수 있었어. 아주 잘했어.”
“다들 힘들게 찾고 있을 걸 아니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었던 것뿐이에요.”
신라는 그의 품에서 떨어져 다시 시선을 마주쳤다.
“이마 말고 다친 데 없어요? 강 현과 정면으로 싸워서 괜찮았어요? 제대로 공격하지도 못했을 거 아니에요.”
“설상가상이었지. 게다가 ‘신의 죄’를 삼켜버렸더군. 이제 앞으로 그 녀석을 상대할 수 있는 건 일용도뿐이야. 반쪽짜리였던 인간의 혼과 귀혼이 합쳐져 버렸으니 귀혼만 골라서 베어내야 하니까.”
“…그렇군요.”
“나 대신 조 조교가 많이 다치긴 했지만, 생명에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고.”
“건우 선배….”
신후는 옅은 미소를 띤 채 신라의 턱을 쥐었다.
“모쪼록 일이 생각보다 잘 풀렸으니 안전하게 돌아온 것만 생각하자고.”
“네.”
“보고 싶었어. 많이.”
그 말을 듣고 울컥한 신라는 눈시울을 붉히며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
“밥은 제때 챙겨 먹었어요?”
“이제 겨우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바보같이…. 그러니까 그렇게 얼굴이 상했죠.”
“사실 지금으로서는 안 먹어도 쭉 살 수 있을 것 같아. 네가 내 눈앞에 있으니까.”
“절대 안 돼.”
“곧 먹으러 나가자. 같이 새해맞이도 못 했잖아.”
“응….”
신후는 천천히 다가가 신라와 입술을 포갰다. 부르튼 입술이 누구의 것인지는 모르지만 서로의 타액으로 금방 적셔나갔다.
다시는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서로 떨어져 있어도 무사하기를 바랐던 간절한 마음이 다시금 떠오르면서 형언할 수 없는 감격에 휩싸였다.
잠시 입술을 뗐을 때 신라는 서럽게 울고 있었다.
“아이처럼 우네.”
신후가 웃으며 그녀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빨개진 눈시울과 콧망울이 귀여워 짧게 입을 맞췄다.
“흑… 정말, 흑… 보고 싶었어….”
“나도.”
“고마워요. 구하러 와줘서.”
“나도 고마워. 무사히 있어 줘서.”
신후는 들썩거리고 있는 가녀린 어깨를 조심스럽게 품에 넣고 다독였다. 정신을 잃고 있는 그녀를 침대에 눕혀 놓고 밤새도록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보고 싶었어.
무사해서 다행이야.
사랑해, 유신라.
“사랑해.”
너만 무사하다면 내 모든 시간을 바칠 수 있어.
어둑시니로 태어나 살았던 첫 번째 생도, 기억을 모두 잃은 두 번째 생도, 재희로 너를 만났던 세 번째 생도, 가까스로 칠정을 모두 되찾은 이번 생도, 그리고 앞으로의 시간도 모두 너를 위해 쓸 수 있어.
보고 싶을 거야.
“네가 깨어나면 데려가고 싶은 곳이 있었어.”
신후의 말에 신라가 겨우 울음을 멈췄다.
“어디요…?”
“차를 타고 좀 가야 하는 곳. 설경이 일품이라 매년 혼자 다니던 장소거든.”
“가고 싶어요…. 오늘 가요.”
“밥부터 챙겨 먹고. 뭐 먹고 싶어?”
“당신이 해주는 요리 먹고 싶어요. 오늘은 무리예요?”
신후가 기분 좋게 웃었다.
“무리일 게 어디 있어. 올라가서 있는 재료로 만들어 줄게. 다들 네가 깨어나기만 기다리고 있기도 하고.”
“응. 가요.”
두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거실에 모여 있던 조교들이 반색하며 몸을 일으켰다. 화비 생각에 침울해 있던 동주도 겨우 얼굴을 폈다.
“신라, 괜찮아?”
“정말 다행이다, 무사히 깨어나서.”
“아픈 데는 없어?”
아직 소파에서 안정을 취하고 있는 건우, 크고 작은 생채기를 애써 감추는 우선과 혜령, 그리고 슬픔을 웃음으로 가리고 있는 동주까지, 모두의 얼굴을 보자마자 신라는 또 울컥해서 눈물이 고이고 말았다.
입술을 깨물고 울음을 참아내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혜령도 눈시울을 붉히며 다가와 끌어안아 주었다.
“왜 울어~”
“죄송해요…. 가장 중요할 때 아무것도 못 해서….”
“무슨 소리야? 신라 덕분에 적의 본거지도 찾고 거의 다 소탕해버릴 수 있었는걸?”
“죄송해요…. 흑, 다들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우리도 정말 십년감수했어. 늦어서 널 구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고.”
“서, 선배들이, 흑, 너무 좋아요….”
찌잉- 감동을 받은 혜령이 심장 언저리를 움켜쥐며 비틀거렸다. 쑥스럽게 웃고 있는 다른 조교들도 감동을 받은 것은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애인을 코앞에 놔두고 대놓고 여러 명한테 고백하다니 너무한데.”
그 와중에 찬물을 끼얹는 신후 때문에 혜령의 표정이 금방 식어버렸지만 말이다.
“교수님은 맨날 들을 거 아니에요! 저희도 이럴 때 좀 들으면 안 돼요?”
“맨날 듣기는 무슨. 비싼 고백이니까 다들 돈 내.”
“쩨쩨하게 구실래요, 정말?”
투닥거리는 신후와 혜령 덕에 겨우 웃음을 되찾은 신라가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교수님이랑 제가 같이 요리할 테니까 선배들은 계속 쉬고 계세요!”
“아니야, 나도 도울게.”
우선이 소매를 걷어붙이며 따라오는 것을 신라가 도로 돌려보냈다.
“다친 사람은 주방 출입 금지예요.”
곧바로 돌아서 이마의 상처를 들이민 신후는 반대로 주방으로 밀어 넣어졌다. 사이좋게 요리 준비를 시작하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조교들은 마음 놓고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얼굴이 됐다. 특히 건우는 어두워지는 표정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돌려버렸다.
- 신라 대신 내 혼의 조각을 비형랑의 혼과 묶을 거야. 주술사가 사라지면 그게 가능하다고 했으니, 그슨대가 죽는 시점에 곧바로 작전에 돌입한다.
그밖에 별다른 방법이 없다는 걸 알고 있기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그 순간 화살을 정확히 날리는 것뿐이었다.
건우의 심정을 이해한 혜령이 조용히 다가와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건우는 눈시울이 붉어지려는 것을 애써 참아냈다.
식사를 마치고, 신후와 신라는 약속한 대로 설경이 아름다운 곳으로 차를 타고 떠났다. 그곳은 도심에서 다소 떨어진 지대가 높은 언덕이었는데, 언덕 한가운데에 오래된 고목이 우뚝 솟아 있었다.
눈이 쌓인 뒤 아직 녹지 않아 마치 하얀 꽃이 한가득 피어난 것 같은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밖에 자아내지 못하도록 했다.
“정말 아름답네요….”
신라가 입김을 뿜어내며 말했다. 고목은 크기부터 어마어마해서, 한참을 걸어야 한 바퀴를 다 돌 수 있을 정도였다.
신후가 미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사연이 조금 있는 나무야.”
“어떤 사연이요?”
“이 정도 오래된 나무는 보통 혼이 깃들어 있어. 어떤 더럽혀진 것도 말끔히 정화시켜 줄 수 있을 정도로 영험한 혼이. 그런데 이전 생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이 나무를 베어버리려고 하길래, 내가 돈 많은 부친을 설득해서 이 땅 전체를 사버렸어.”
“그랬군요….”
“덕분에 다시 태어나고도 매년 이 설경을 눈에 담을 수 있게 됐지.”
신라는 미소를 띤 채 다시 고목 전체를 시야에 담았다. 신후가 지켜낸 나무라고 하니 이 경치, 그리고 이곳에 서 있는 모든 순간이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앞으로도 계속 든든하게 이곳을 지켜줬으면 좋겠네요.”
“그럴 거야.”
“우리가 매년 이 나무를 볼 수 있을까요?”
그다지 차갑지 않은 바람이 언덕을 가볍게 훑고 지나갔다. 가지 위에서 떨어지는 눈을 막기 위해 신후가 코트 자락 안으로 신라의 머리를 숨겼다. 자연스럽게 거리가 가까워진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매년 내 생일 때마다 왔었는데. 같이 와줄래?”
“물론이죠.”
“해피 뉴 이어.”
새해 인사를 먼저 건넨 신후는 신라에게 담백한 버드 키스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첫 만남 때부터 그렇게 무례했던 남자를 용케 안 밀어내줘서 고마워.”
“이제 와서 그런 말, 새삼스럽네요. 많은 일들이 있었잖아요.”
“그랬지. 넌 정말 용감해. 현명하고.”
신라는 민망한 듯 웃어버렸다.
“생일 선물 엄청 좋은 거 받고 싶은가 봐요? 한신후 씨.”
“진심을 전하는 거야.”
“치….”
신후는 그대로 신라를 꽉 끌어안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그러니까 약속해줄래?”
“뭐를요?”
잠시 뜸을 들이던 신후가, 이내 말을 이었다.
“만약 너에게 다음 생이 있다면, 나라는 남자가 있었다는 사실만 기억해줘.”
멍하니 서 있던 신라가 품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신후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한신후….”
“그래. 어둑시니도, 재희로서 만났던 그 남자도, 다 필요 없어. ‘한신후’만 기억해주면 돼. 널 사랑했던 남자로 말이야.”
“왜 그런 말을 해요?”
신라는 기어코 그의 품에서 벗어나 그와 눈을 마주쳤다.
“우리는 이번 생이 함께 마지막이에요. 아니었어요?”
“나는 속죄의 삶을 사는데 주어진 시간을 모두 썼지만, 너는 잃어버린 굴레를 되찾으면 다음 생이 남아 있을 수도 있어.”
“그럼… 당신 없이 살아가게 된다는 소리예요?”
“물론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전생의 기억은 사라졌겠지만.”
신라의 얼굴이 슬픔으로 물들었다.
“그래도 싫어요…. 당신 없이는 싫어요.”
“나도 누군가 홀로 남게 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분명 그 삶에도 크고 작은 행복은 있을 거야. 그러니까 주어진 삶을 포기하는 건 안 돼.”
“아니야…. 필요 없어, 그런 거.”
신후는 숙여지는 신라의 고개를 감싸 쥐었다.
“슬퍼하라고 한 말 아니야.”
“당신도 약속해.”
신라는 울먹이며 얘기했다.
“허락 없이 사라지지 마.”
“……”
“어서 약속해. 지금 당신, 이상하게 금방이라도 사라져버릴 것 같으니까.”
신후는 쓰게 웃으며 신라의 붉어진 눈시울을 매만졌다.
“예쁘다, 유신라. 달빛 아래에서 보니까 더.”
“말 돌리지 말아요.”
“더 빨리 만났으면 좋았을걸.”
그럼 좀 더 오래 사랑할 수 있었잖아. 속으로 말을 삼키며 신후는 신라와 천천히 이마를 맞댔다.
소중한 사람. 모든 걸 다 바쳐서 지켜내고 싶은 여인. 마지막 생에서라도 맺어지게 돼서 다행이야. 그것만으로 큰 행운이라고 생각했건만, 인간의 욕심은 어찌나 끝이 없는지. 불가능한 너의 소원을 어떻게든 들어주고 싶어지잖아. 서로 사랑하는 미래를 더 그리고 싶어지잖아.
그러니 그 약속, 잊지 않고 있을게.
가능하다면 언제고 반드시 돌아올 수 있도록.
“이거 받아요.”
신라는 품에서 꺼낸 상자에서 회귀향 하나를 집어 들어 신후에게 건넸다.
“나한테 주는 거야?”
“길 잃지 말고 돌아오라고 주는 거예요.”
신후는 고목 아래에 그 향을 꽂고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그러자 연기가 은은히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거 알아? 회귀향은 다 피워서 사라지고 나서도 그 사람이 돌아오고 싶어질 때 그 장소로 인도해준대.”
“그렇구나…. 그럼 이렇게 해도 돼요?”
신라는 회귀향에 불을 붙여 신후의 손에 쥐여 줬다. 그녀의 의도를 눈치챈 신후가 기분 좋은 미소를 내지었다.
“이거 계속 들고 있어야겠네.”
“맞았어요.”
“지루할 것 같은데.”
“다 피울 때까지 지루하지 않게 해줄게요.”
“어떻게?”
신라는 까치발을 들고 그의 입술에 불시에 입을 맞췄다. 그에 목 안으로 웃음을 삼킨 신후는 남은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감싸 쥐고 더욱 진한 입맞춤을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