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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장. 다가오는 전쟁의 끝 (118/126)

117장. 다가오는 전쟁의 끝

바닥에 주저앉아 위태로운 숨을 헐떡이는 신라를 흘끔 쳐다본 강 현은 일단 그슨대가 떨어진 쪽으로 뛰어내렸다. 그의 손짓에 주변에 있던 바윗돌들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또 허튼짓을 꾸몄다간 용서는 없을 거라고 했을 텐데.”

강 현이 서늘한 살기를 뿜어내며 말했다. 바닥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던 그슨대가 웃는 얼굴로 흙먼지를 털고 일어났다.

“아무리 혼이 멀쩡해도 육신이 이렇게 망가지면 저도 곤란합니다, 주군….”

“유신라는 건드리지 마라, 내가 누누이 얘기하지 않았나?”

쏜살같이 날아드는 바윗돌들에 그슨대의 몸에 크고 작은 생채기가 났다. 그슨대는 다시 쓰러지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주군께서 중심을 잡지 못하시면… 제가 대신 잡아드려야지요.”

“건방진 놈….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그야 존경해 마지않는 단 한 분뿐인 저의 주군, 비형랑이시지요.”

그슨대의 앞으로 걸어간 강 현은 그의 몸을 구둣발로 사정없이 짓눌렀다.

“그럼 주제를 알고 얌전히 내 뜻에 따르도록 해. 여우귀를 찾아내 모조리 죽여버려서라도 네놈을 갈가리 찢어 죽이는 수가 있으니까.”

“큭큭… 아닙니다. 이번만큼은 제가 옳았습니다.”

“뭐?”

강 현의 눈에 참을 수 없는 살기가 들어찼을 때였다. 그슨대의 시선을 쫓아 고개를 돌린 강 현은 어느새 뒤쪽에 다가와 서 있는 신라를 발견하고 표정을 굳혔다. 분명 귀력을 봉인하는 팔찌를 차고 있음에도, 그녀는 일용도를 소환해 쥐고 있었다.

“유신라… 당신…”

“주군, 잘 보십시오. ‘저건’ 그 여자가 아닙니다.”

그슨대가 날카롭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겨 있던 신라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평소의 까맣던 눈동자가 완전히 색을 잃고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서서히 팔을 치켜든 신라가 일용도를 허공에 휘둘렀다. 그 파급력에 중심을 잃을 뻔한 강 현은 능력을 써서 겨우 몸을 지탱해 섰고, 그슨대는 뒤로 몇 바퀴 구르며 날아가고 말았다.

“쯧….”

강 현은 혀를 차며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 입에 넣고 삼켰다.

신라는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듯이 강 현과의 거리를 점차 좁혔다. 그녀를 막기 위해 손을 내뻗은 강 현은 공격을 주저했다. 그녀가 다치지 않는 선에서 막아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망설임을 놓치지 않은 신라가 그대로 달려들어 일용도를 내질렀다.

‘죽는다.’

순간 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생각이었다.

죽는다― 내가.

아니, 유신라가 죽는다.

그는 초인적인 반사신경으로 검을 피해 뒤로 물러났다.

‘모자라.’

어쩔 수 없이 깊은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그때 두 사람 사이로 나타난 검은 그림자가 일용도를 내지른 신라의 손을 간발의 차로 붙잡았다.

“성미가 급하시군.”

신후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내뱉으며 그녀의 손을 천천히 밀어냈다.

“늦었구나.”

다문천왕이 웃었다.

“칼을 거둬주십시오.”

“조금 더 지켜본 뒤에 결정하마.”

신후는 어금니를 꾹 깨물면서도 일단은 신라의 팔에 있는 봉인의 팔찌를 힘으로 끊어내 버렸다. 그리고 돌아서서 강 현을 노려봤다.

“둘 다 허무하게 죽는 게 네놈이 원하던 끝이었나 보지?”

신후가 날카롭게 물었다. 가라앉은 눈빛으로 서 있던 강 현은 본인의 무기인 철퇴를 소환해 쥐었다.

바닥에 엎어져 기회를 엿보던 그슨대는 신후를 향해 몰래 손을 내뻗었다. 능력을 써서 그의 정신에 감응하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직전에 누군가 나타나 그의 시야를 가로막고 섰다.

“이번에야말로 끝이다, 그슨대.”

수십 개의 여우 불이 그슨대를 둘러싸고 둥둥 떠 있었다. 화비와 준성이 살기를 내뿜으며 그의 앞에 서 있었다. 혀를 찬 그슨대가 결코 즐거워 보이지 않는 웃음을 내지었다.

승합차를 타고 뒤늦게 별장에 도착한 고고학 연구실 조교들은 강한 요기의 충돌을 느끼고 심각한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

“교수님과 비형랑이야.”

건우가 중얼거렸다.

주위를 둘러본 동주는 다른 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은 화비와 그슨대예요.”

우선이 랩장으로서 나서서 말했다.

“각자 흩어져서 지원하는 게 좋겠어요. 저와 혜령 누나는 저택에 있는 잔챙이들을 남김없이 처리하겠습니다. 건우 형은 예정대로 교수님 쪽을, 동주는 화비 쪽을 부탁해.”

다들 고개를 끄덕이고 그 자리에서 흩어졌다.

신후는 강 현과 싸우면서 그가 ‘신의 죄’를 몸 안에 흡수해버렸음을 깨달았다. 원래의 작전대로면 그 반지를 빼앗는 것이 수월했지만, 상황이 어렵게 되었다.

더군다나 힘이 비등한 상대를 다치지 않게 하면서 제압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강 현의 상처는 오롯이 신라에게 전해질 것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신라와 엮인 저 주술부터 풀어야 해.’

강 현이 철퇴를 휘두르며 여유롭게 말했다.

“신들이 왜 저렇게 나를 죽이지 못해 안달인지 알아?”

“관심 없어.”

신후가 성의 없이 대꾸했다.

“관심이 없다는 건 정말 관심이 없는 걸까, 이미 알고 있어서일까.”

“헛소리로 시간 끌지 마라.”

“‘신의 죄’에 혼을 담고 있다는 건, 가끔 환영으로나마 그 내용을 엿볼 수 있다는 얘기지. 그래서 저들은 날 더 죽여 버리고 싶은 거야.”

“……”

“표정을 보니 역시 알고 있군. 나도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어. 설마 저들이 그토록 감추고 싶어 하는 진실 속 등장인물에 네가 끼어 있을 줄이야.”

신후의 정신이 흐트러진 틈을 타 강 현의 철퇴가 그의 사각에서 휘둘러졌다. 겨우 몸을 비틀어 피했으나 철퇴의 뾰족한 날이 신후의 이마를 길게 베고 지나갔다.

“큭….”

흘러내린 피로 시야가 반 가려진 신후는 잠시 숨을 몰아쉬며 강 현을 노려봤다. 그 사이 신후의 뒤로 다가온 건우가 전세를 살폈다. 건우를 발견한 강 현이 작게 웃었다.

“그렇게 둘이 서 있는 모습을 보자니 옛 생각이 나네.”

건우가 짓씹는 듯한 발음으로 나지막이 말했다.

“본인이 지옥으로 처넣어질 당시를 회상하면서 웃을 수 있는 건 당신뿐일 거야.”

“유신라의 혼을 인질 삼을 의도는 없었지만, 이번에는 전세가 역전된 것 같지?”

건우가 걸어 나가 신후의 앞을 막아섰다.

“온전치 않은 몸이니까 좀 쉬고 계십시오. 제가 상대하고 있겠습니다.”

“…그래.”

한편, 그슨대는 준성이 대부분 상대하고 있었다. 불사의 혼에 해를 끼치지는 못하더라도 육신을 결박시키는 것 정도는 가능했으니 말이다. 대신 화비는 자잘한 공격보다는 큰 한 방을 노리고 있었다. 괜히 어설픈 공격을 하게 되면 똑같이 충격을 받아 공격하기가 더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동주가 나타나면서부터 전세가 완전히 기울었다. 그의 완력으로 그슨대의 움직임이 완전히 봉쇄됐다. 정신 감응을 힘겹게 이겨낸 그는 준성에게 외쳤다.

“죽이는 건 안 됩니다! 이번에도 봉인해야 해요!”

준성은 그 말을 듣고도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보주! 어서 봉인을-!”

“스승님!”

그때 화비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동주의 불안한 시선이 화비에게로 향했다. 화비는 활짝 웃고 있었다.

“스승님 앞에서 마지막으로 자랑스러운 모습을 남기고 갈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화비가 하려는 일을 눈치챈 동주의 낯빛이 금세 파랗게 질렸다.

“화비, 너….”

“이번에도 약속해주세요. 제가 다음 생에 찾아오면…”

“바보 같은 짓 하지 마!”

“그때에도 제자로 받아주시는 겁니다.”

수십 개의 여우 불들이 점차 다가오는 것을 보고 그슨대가 악을 쓰며 발버둥 쳤다. 그를 놓칠 뻔한 동주는 울 것 같은 얼굴로 그를 다시 제압해 눌렀다.

“여우 불은 적이 누구인지 알아보는 현명한 놈이에요. 부디 놓치지 말아 주세요.”

“젠장….”

입술에 피가 맺힐 정도로 꽉 깨문 동주는 결국 눈물을 흘렸다. 천천히 다가온 여우 불이 그슨대의 혼을 발끝부터 태워 없애기 시작했다.

“끄아악-!”

그슨대가 고통에 몸부림쳤다. 동시에 똑같은 고통이 느껴진 화비는 눈을 질끈 감으며 버티고 섰다. 그에게 다가간 준성이 작은 몸을 꽉 끌어안아 주었다.

“훌륭하다. 내가 모시는 분에게 네 용기를 반드시 전해주마.”

작게 입꼬리를 당긴 화비는 여우 불의 세기를 순식간에 최대치로 올렸다. 그슨대의 혼 전체가 불에 타 바스라져 갔다.

“화, 화비야….”

그슨대를 놓고 일어난 동주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화비를 향해 걸어갔다. 마찬가지로 몸이 거의 바스라져 버린 화비가 동주를 향해 마지막 절로 예의를 갖췄다.

울음을 터뜨린 동주가 그의 앞에 쓰러져 작은 몸을 끌어안으려 했다. 하지만 이미 형체를 잃은 화비의 몸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흐윽….”

동주는 이마로 바닥을 짓이기며 구슬프게 울었다. 준성 또한 붉어진 눈시울로 허공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강 현의 철퇴에 복부를 제대로 맞은 건우는 피를 토하며 비틀거렸다. 그는 방망이로 바닥을 짚어 겨우 섰다.

“길달, 네 끈질긴 목숨은 예전부터 알아 왔던 것이지.”

웃으며 중얼거린 강 현은 건우의 어깨를 발로 차 바닥에 쓰러뜨렸다. 그리고 머리칼을 움켜쥐어 억지로 고개를 들게 했다.

“쿨럭….”

“다음 생이 마지막이었지? 어때. 다음 생에도 찾아와서 날 심심하지 않게 해줄 거니?”

“내 다음 생에 당신이 존재할 것 같아? 꿈이 크네….”

“하하하…. 즐겁네. 역시 넌 죽이기엔 아깝다니까.”

그때 어둠의 힘이 강 현의 몸을 건우에게서 멀찍이 밀어냈다. 상처를 지혈한 신후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2라운드인가? 계속해봤자 의미가 있을까?”

강 현이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그는 멀리 떨어져 서 있는 신라를 한 번 쳐다봤다.

“신도 슬슬 지루해할 것 같은데 말이야.”

“그래. 때마침 그 물귀신 같은 한심한 주술을 행한 주술사가 사라진 것 같아서 말이야.”

강 현은 시선을 움직여 그슨대가 있던 자리를 쳐다봤다. 그슨대가 차지하고 있던 윤 노인의 몸이 다시금 늙은 모습으로 돌아와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래서?”

“물론 그걸로 주술이 풀리지 않는다는 건 잘 알아. 하지만 상황을 바꿀 수는 있지.”

“뭘 바꾸겠다는…” 강 현은 말하던 중 신후에게 가려져 있던 건우가 어느새 일어나 있음을 발견했다. 건우는 방망이가 아닌 활을 들고 날카로운 집중력으로 신후의 머리를 겨누고 있었다. 내상을 입고 피를 토한 것은 사실이지만, 초점을 잃고 비틀거렸던 것은 눈속임이었던 모양이다.

“갑니다, 교수님.”

건우는 망설임 없이 보이지 않는 귀력의 화살을 쏘았다. 빠르게 쏘아진 화살이 신후의 오른쪽 눈을 뚫고 나가 강 현의 가슴팍 정중앙에 꽂혔다.

“윽….”

신후의 오른쪽 눈에서 혼의 일부를 떼어낸 화살이 강 현의 혼에 박혀버린 것이다. 그 충격으로 비형랑의 혼에 묶여 있던 신라의 혼의 일부가 주술에서 풀려나 허공으로 사라졌다.

‘주술에 묶인 혼이 바뀌었다.’

보이지 않게 된 오른 눈을 감싼 신후가 속으로 외쳤다. 이제 강 현을 공격하다 해도 신라가 해를 입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애초부터 이것을 노리고 건우와 번갈아 그를 상대했었던 것이다.

다문천왕은 기다렸다는 듯이 일용도를 들고 강 현에게 달려들었다. 신후가 어림없다는 듯이 그 앞을 가로막았다.

“노망이 나신 게 아니라면 거래의 내용이 어디까지였는지 기억하실 텐데요.”

“지금처럼 절호의 기회는 없을 거다.”

“당신이 신라의 힘을 쓰는 순간 그녀는 귀력을 모두 소진하고 죽습니다.”

“쯧….”

다문천왕은 못마땅한 기색을 비치며 모습을 감췄다. 정신을 잃고 무너져 내리는 신라를 신후가 안전하게 받아냈다.

“그래, 그런 속셈이었군….”

강 현이 화살을 맞았던 가슴을 누른 채 중얼거렸다. 신후는 신라를 건우에게 넘기고 강 현과 마주 섰다.

“이제 이 싸움은 우리 선에서 끝내게 됐다.”

“나를 없앨 수 있는 자는 이제 너뿐이군.”

“영광으로 생각하도록 해.”

지켜보던 건우는 어두운 표정으로 신라를 끌어안은 손에 힘을 줬다. 그녀를 대신해 비형랑과 끝을 함께하는 것이 신후의 생각이었다. 건우는 처음에 그 역할을 본인이 맡겠다고 우겼다. 하지만 신후의 뜻은 단호했다. 비형랑을 완전히 없애버릴 수 있는 자는 자신뿐이라고 하는 그를 설득할 길이 없었다.

별장에 남아 있던 전력을 모두 소탕한 우선과 혜령도 모두가 서 있는 들판으로 나왔다.

강 현은 건우의 품에 안겨 있는 신라를 마지막으로 눈에 담은 후,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췄다.

긴긴 전쟁의 끝이 다가옴을 알리듯, 바람 한 점 없는 메마른 들판 위로 환한 달빛이 비쳐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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