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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장. 전해지기를 (117/126)

116장. 전해지기를

밤마다 악몽을 꿔야 했다. 신경이 곤두선 탓도 있지만, 간혹 이상하리만큼 생생한 꿈을 꾸는 것은 그슨대의 짓 같았다. 덕분에 며칠 새 눈에 띄게 수척해졌다.

멍하니 욕실 거울 앞에 모습을 비춰보고 있는 신라를 지켜보며 강 현은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뒤늦게 강 현이 뒤에 서 있는 것을 발견한 신라는 민망한 모습으로 시선을 돌렸다. 강 현이 다가와 그녀의 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기운이 없네요.”

“……”

“새해맞이 드라이브나 나갈래요?”

신라의 눈에 조금 생기가 돌아왔다. 피식 웃은 강 현은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두꺼운 파카를 입고 히터를 최대치로 올린 차 조수석에 타 있으니 땀이 날 지경이었다. 파카를 벗으려고 하면 곧바로 질책의 눈빛을 보내는 남자 때문에 그대로 더위를 견뎌야 했다.

어디를 둘러봐도 온통 산맥이었다. 평소 산에 관심이 있었다면 이곳이 어디인지 알아챌 수 있었을 텐데. 신라는 속으로 아쉽게 생각했다.

‘어….’

그때 너른 강가 경치가 나타났다. 겨울의 강가라 사람이 거의 없었지만 추위가 풀리면 충분히 관광 목적으로 찾아올 것 같은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강원도예요.”

남자가 뜻밖의 정보를 흘렸다. 신라가 놀란 얼굴로 돌아보니 강 현은 운전에 집중하면서도 작게 웃었다.

“그렇게 궁금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으면 가르쳐주고 싶어지잖아. 하지만 여기까지예요.”

“……”

신라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다시 차창 너머의 경치를 감상했다. 그가 뭐라고 하든 바람이 쐬고 싶어졌다. 창문을 반쯤 열어 찬바람을 맞으니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혼나요. 이건 의사로서 주의 주는 거예요.”

“……”

대놓고 무시해버리니 어이없다는 듯이 웃는 남자였다.

잠시 후 차들이 줄지어 서 있는 정체 구간에 다다랐다. 새해를 맞아 여행하는 사람들 때문에 도로가 막히나 싶었지만, 곧 멀찍이서 경찰들이 운전자에게 무언가를 확인하고 보내는 것이 보였다. 어떤 이유 때문에 검문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범죄라도 터졌나 보네.”

강 현이 운전대를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신라가 그런 그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검문 차례가 된 그는 운전석 창문을 열었다.

“수고하십니다. 무슨 사건이라도 났나요?”

말갛게 웃는 남자에게서 어떤 악의도 느끼지 못한 경찰은 귀찮다는 얼굴로 말했다.

“네. 젊은 여성 실종사건이요.”

그 말에 신라의 가슴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경찰이 내민 사진 속 여인은 그녀가 아니었다. 경찰이 그들에게 메모지와 펜을 건넸다.

“단서가 범인 필체밖에 없어서. 부탁드리는 글자만 몇 자 적어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메모지에 적으라는 글귀를 동시에 따라 적었다.

“두 분 다 범인의 특이한 필체는 아니시네요.”

“그럼 수고하십시오.”

강 현은 운전석 창문을 올리고 차를 출발시켰다. 그 후 얼마 동안 두 사람 사이에서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한편 두 사람이 탄 차를 보낸 경찰은 뒤늦게 메모지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젊은 여인이 적어준 메모지에 정해진 글귀 외에 다른 글자가 더 적혀 있었던 것이다.

“장혁수… 형사?”

장 형사는 요상하게 얼굴을 구긴 채 눈앞에 서 있는 청년을 바라봤다.

“지금 뭐라고 했냐?”

“도와…주세요.”

민우선이 직접 찾아온 것도 신기한 일인데, 다짜고짜 부탁까지 하니 얼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이곳은 경찰서였다. 우선이 근처에도 오기 싫어하는 장소 말이다.

일단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정신을 차린 장 형사는 우선을 데리고 복도 자판기 앞 의자에 가서 나란히 앉았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저희 학생이 실종됐어요.”

“뭐!? 언제, 어디에서? 며칠이나 됐는데? 원한 관계는?”

“그런 질문들은 의미가 없어요. 눈앞에서 적에게 붙잡혀 가는 걸 우리 편이 봤으니까.”

“하… 또 귀신에 얽힌 사건이냐?”

장 형사는 착잡한 얼굴로 담배를 입에 물었다. 지나가던 여자 순경이 잔소리를 해서 궁시렁거리며 도로 집어넣었지만 말이다.

우선의 망설이는 모습을 보고 장 형사는 마음을 굳힌 듯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말해봐. 도와줄 테니까.”

“…그게, 힘들지도 몰라서….”

“눈앞에서 너희들 마술쇼를 몇 번이나 봤는데, 그 정도 각오 안 하고 하는 말인 줄 알아?”

“다른 경찰 인맥도 쓰고 있긴 한데, 그쪽은 그다지 신뢰가 안 가서요. 정말 온 힘을 기울여서 저희 학생을 찾아줄 수 있을 만한 분이 필요했어요.”

“…그게 나였단 말이지?”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은지 장 형사는 짐짓 거드름을 피우듯이 배를 두드렸다.

“그런데 왜 이번에는 그 능력을 안 쓰는 거야? 멀리서도 서로가 어디 있는지 알아채는 자석 같은 신기한 힘 말이야.”

귀력을 말하는 것임을 깨닫고 우선이 고개를 저었다.

“적이 그 방법을 못 쓰도록 만들었는지 전혀 느껴지지를 않아요.”

“별다른 단서는?”

우선은 현재 알아낸 단서들을 모두 장 형사에게 얘기해주었다. 신라가 보낸 문자 속 세 가지 식당이 모두 모여 있는 지역은 총 두 곳, 강원도 상천, 그리고 충북 괴산이었다. 일단 그 근방의 커다란 별장 정보부터 수집하고 있지만, 집채 수가 너무 많았다.

“범위가 너무 넓어. 적어도 한 지역으로 범위가 좁혀지지 않는 이상 내가 동원할 수 있는 인력이 턱없이 부족해.”

“…그렇겠죠.”

“흠….”

두 남자가 고민에 잠겨있을 때, 사무실에서 달려 나온 젊은 형사가 장 형사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이게 뭐야?”

“그게, 강원도 쪽 도로에서 차량 검문하던 경찰이 전해달라고 팩스가 왔지 말입니다.”

“앙? 강원도 쪽에는 연고가 없는데?”

장 형사는 팩스로 온 종이를 물끄러미 들여다봤다. 그리고 눈을 크게 떴다. 종이에는 사진이 인쇄돼 있었는데, 화질이 안 좋긴 하지만 조수석에 앉아 있는 젊은 여자가 꽤 낯이 익었기 때문이다.

“야! 이 여자애 아니야?”

그가 호들갑을 떨며 우선에게 그 사진을 보여줬다.

“…마, 맞아요. 운전자는 적의 수장이에요! 여기가 어디죠?”

“여기가 정확히 어디야!”

두 남자가 동시에 무서운 기세로 묻자, 젊은 형사가 당황해서 더듬거렸다.

“가, 강원도 상천에서 청평으로 빠지는 도로일 겁니다. 아는 분이거나 담당 사건 관련자면 연락 주시라고….”

“좋았어! 그 차량 번호 당장 보내달라고 해!”

차에서 내린 강 현과 신라는 강가 주변을 천천히 산책했다. 도중에 공중전화 부스를 발견한 신라는 물끄러미 강 현을 바라봤다.

“안 돼요, 전화는.”

금방 풀이 죽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쓰게 웃은 강 현이 못 이긴 척 물었다.

“어디에 전화하고 싶은 건데요?”

신라는 강 현의 손에 천천히 또박또박 적었다.

‘친구가 자기 때문에 내가 붙잡혀 간 거라고 자책하고 있을 거예요. 내가 별 탈 없이 지내고 있다는 걸 전해줘야 돼요.’

그녀의 거짓 없는 눈동자를 한참 바라보던 강 현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평소 두 개의 핸드폰을 지니고 다니니 분명 대포폰 같은 것일 게 분명했다.

“문자로 보내요. 다 보내면 핸드폰은 강물에 버릴 거예요.”

신라는 그에게 핸드폰을 건네받아 그가 보는 앞에서 서영에게 문자를 작성했다. 만일 신후에게 보낸다고 했으면 어림도 없었을 기회였다.

[서영아. 혹시 자책하고 있다면 그러지 마. 난 별 탈 없이 지내고 있어. 밥도 세 끼 잘 챙겨 먹고, 가끔 산책도 나가. 주변에 아무것도 없지만, 방에 있어도 해지는 아름다운 풍경을 오래 볼 수 있어서 마음에 위안도 돼. 다음에 만날 때까지 건강해. 공부 열심히 하고!]

대신 전송 버튼을 누른 강 현은 핸드폰을 강물 저 멀리 던져버렸다.

신라의 아쉬운 눈빛이 핸드폰이 사라진 수면 위에 한동안 머물러 있었다.

서영에게 연락을 받은 동주는 그녀를 데리고 급히 신후의 오피스텔을 찾았다. 어느 정도 체력을 회복한 신후는 막 나갈 채비를 마치고 거실에 서 있었다.

“어디 가세요?”

동주가 물었다.

“민 조교가 장 형사 도움으로 위치 범위를 좁혀놨어. 따라가 보려고.”

“신라가 서영이한테 문자를 보낸 모양이에요. 별다른 내용은 없긴 한데….”

“…신라가 흔치 않은 기회를 허투루 썼을 리가 없지.”

신후는 당장 서영의 핸드폰을 건네받아 문자를 확인했다. 같은 글귀를 여러 번 읽어 내리던 그의 입가가 묘하게 당겨졌다.

“역시 단서를 보냈군.”

“어디에요?”

“두 가지나 보냈잖아. ‘주변에 아무것도 없다’, ‘방에 있어도 해지는 풍경을 오래 볼 수 있다’. 상천 지역에서 멀리 나가야 강가가 보이고 굳이 서향으로 지어놓은 큰 규모의 별장은 드물 테지.”

“아…!”

“당장 보주와 화비에게 연락해. 난 먼저 가 있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신후는 검은 바람을 일으켜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췄다. 힘을 아끼기 위해 차로 움직일 생각이었지만, 단서가 더 명확해진 이상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늦은 밤, 신라는 잠들기 전 창가에 서서 별구경을 하며 오늘 있었던 일들을 떠올려보았다. 검문하는 경찰에게 장 형사의 이름을 몰래 적어준 것, 서영에게 이 별장의 단서가 포함된 문자를 보냈던 것.

부디 알아채 주길 바랐다. 아니, 알아채리라고 믿었다. 그들이라면 말이다.

“전해지기를….”

신라가 정말 말을 잃어버린 것처럼 행동했기 때문에 강 현의 경계를 늦출 수 있었다. 그녀에게는 일말의 양심을 챙기고 싶어 하는 남자였으니까, 어쩔 수 없이 그 심리를 이용했다.

“역시 거짓말이었군.”

갑자기 방 안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그녀는 숨을 집어삼키며 뒤로 돌아섰다. 기척 없이 들어온 그슨대가 막 방의 문을 닫고 있었다.

“영악한 계집 같으니. 주군을 홀리는 짓은 그만하라고 했을 텐데.”

웃는 얼굴이면서 하는 말은 비정하기 그지없는 남자는 역시나 사악한 요괴였다. 무슨 일이든 저지를 것만 같은 그 기세에 신라는 긴장한 표정으로 더 물러날 곳을 찾았다. 그슨대는 코웃음을 치며 그녀와의 간격을 점차 좁혔다.

“나는 이미 한 번의 기회를 줬다. 안 그래도 오래 안 썼던 주술을 쓰고 싶어 근질거리던 찰나에 잘됐어.”

“…뭐 하려는 수작이야!”

신라의 목을 조르듯이 움켜쥔 그슨대는 그녀의 몸을 벽에 밀어붙여 점점 들어 올렸다. 숨이 턱 막혀버린 신라가 발을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윽… 숨… 막혀….”

“주군에게 필요한 건 네년의 혼뿐. 그 껍데기는 사실 주군을 홀리는 불필요한 것이지.”

“읍… 콜록!”

“게다가 접신까지 감당할 수 있는 성가신 껍데기야. 주군께선 냉철한 판단력이 흐려지신 상태이니, 내가 나설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제부터 네년의 혼을 그 껍데기에서 끄집어낼 거다.”

“…!”

신라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두려움에 질린 그녀는 그슨대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귀력을 썼다. 하지만 봉인 팔찌 때문에 그 충격마저 그대로 받게 됐다.

“윽-!”

“어리석구나. 얌전히 운명을 받아들여라. 혼만큼은 상처 하나 없이 깔끔하게 끄집어내 줄 테니. 큭큭큭….”

생리적으로 차오른 눈물이 두려움을 담고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슨대는 신라를 제압한 채로 주술을 읊기 시작했다. 귓가를 쩌렁쩌렁 울리는 기분 나쁜 목소리에 온 정신이 빼앗긴 신라는 점차 사지에서 힘을 잃어갔다. 정말 혼이 육신을 뚫고 나가려는 것처럼 마구 요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그만, 제발 그만…!’

그때 환청과 같은 소리가 들렸다.

- 내 도움이 필요하구나.

‘제발 아무나, 아무나 괜찮으니까 날 좀 도와줘…!’

- 그 말 후회하지 말거라.

그녀의 혼이 육신에서 새어 나오기 시작한 것을 본 그슨대는 미친 듯이 웃어대기 시작했다. 그때 신라의 눈동자가 새하얗게 변했다. 그슨대가 그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하고 웃음을 멈춘 순간이었다.

“으억!”

강한 힘에 멱살이 잡힌 그슨대는 그대로 던져져 신라의 방 벽을 뚫고 바깥으로 추락했다.

“건방진….”

그를 내던진 것은, 다름 아닌 강 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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