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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장. Like a Doll (116/126)

115장. Like a Doll

도로롱, 도로롱, 완전히 곯아떨어진 지금의 모습을 보면 영락없는 인간 소녀에 불과했다. 신라는 침대에 대자 모양으로 누운 나태귀를 조심스럽게 시선으로 훑었다. 바깥에서 기척이 느껴져 잠시 숨을 참고 스스로의 기척을 숨겼다. 이 상황에서는 팔찌가 귀력을 봉인하고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녀는 나태귀의 침대 가까이로 다가가 눈앞에서 손을 휘휘 저어보았다.

“우웅-!”

“…!”

“…귀… 찮아…. 흠냐….”

그저 잠꼬대였던 듯 몸을 뒤척이고 마는 소녀였다. 핸드폰은 나태귀의 베개맡에 놓여있었다. 신라는 천천히 허리를 숙이고 핸드폰을 향해 손을 뻗었다. 바닥재가 나무라 무게가 불균형하게 실리면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잡았다!’

핸드폰은 최신 유행하는 기종으로 신라에게도 익숙한 것이었다.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일단은 기억나는 번호를 찍고 문자부터 작성했다.

그때 나태귀의 방이 두드려졌다. 차마 원래 자리에 되돌려놓을 시간은 없어 신라는 그것을 등 뒤로 교묘히 숨겼다.

끼익-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곳에 서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그슨대였다. 그는 표정 없는 얼굴로 조용히 들어와 문을 닫았다.

“잘 마련해준 보금자리를 놔두고, 이곳에서 뭘 하고 있는 것일까?”

신라는 침을 삼키며 한 걸음 물러나 그와의 간격을 벌렸다.

“잠이 안 와서, 이곳저곳 둘러보고 있었어요.”

“하필이면 나태귀의 방에? 어느새 사이가 많이 좋아졌나 보군. 능력은 쓸모 있지만, 간혹 저렇게 경계심이 무뎌서 마음에 들지 않는 아이지.”

그슨대가 발걸음을 떼어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뒤에 서랍장이 있어 더 물러날 곳을 잃은 신라가 그를 향해 한 손을 들어 보였다.

“더 가까이 다가오면 비명을 지르겠어.”

“착하지 못한 아이구나. 내가 널 선택한 것을 후회하게 만들지 말아 주련.”

“선택…?”

그슨대는 외팔을 뻗어 신라의 멱살을 쥐었다. 강한 힘에 속절없이 끌려간 신라가 까치발을 든 채 그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윽….”

“널 주군의 ‘부속품’으로 정한 선택 말이다. 자꾸 특이한 짓을 하며 꿈틀거리면 주군이 너를 더 신경 쓰게 되시겠지. 난 그런 게 마음에 들지 않아. 가뜩이나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사사로운 감정에 휘말려 혼란스러우신 분이다. 그러니 너는 조용히, 인형처럼….”

팟- 어느새 일어나 있던 나태귀가 살기를 뿜어내며 신라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아갔다.

“너, 못된 버릇이 있구나? 정말 인형으로 만들어버릴까?”

나태귀가 했던 대규모 인형극을 떠올린 신라는 핏기가 가신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슨대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야 좋겠지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자꾸나. 그 성가신 물건은 없애버리도록 해. 어떤 신호를 남겼을지 모르니까 말이야.”

“아직 아무 짓도 안 한 것 같긴 한데.”

“어서.”

“쳇….”

나태귀는 못마땅한 얼굴로 핸드폰을 바닥에 떨어뜨린 다음 발로 밟아 산산조각 냈다. 침착하게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신라를 보고 그슨대는 입가만 당겨 웃었다. 반면 웃음기가 전혀 없는 찢어진 눈은 소름마저 돋게 만들었다.

“영민한 여인이야. 이대로 방으로 돌려보내기엔 불안해서 안 되겠어.”

“무슨… 짓을….”

“귀력은 쓰지 못하는 처지이지만, 그래도 얌전히 있을 수 있도록 조금은 힘을 빼주마.”

“뭐?”

치잉- 갑자기 뇌가 진동하는 것처럼 시야가 마구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그슨대에게서 풀려난 신라는 입가를 틀어막으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욱… 윽….”

어디가 땅인지, 하늘인지도 모를 정도로 방향 감각이 고장 나고 속이 울렁거렸다. 그 와중에 잊고 살았던 옛날 기억이 하나둘씩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처음 요괴에게 쫓겨 달아나다가 강가에 빠져 죽을 뻔했던 기억, 요괴를 보고 튀는 행동을 했다가 학교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받았던 기억, 조모가 이웃들에게 사과를 하러 몸소 찾아다니던 기억…. 한데 뭉뚱그려져 온 정신을 덮쳐왔다.

“그만… 그만….”

- 왜 쓸데없는 짓을 해서 할머니를 창피하게 만드는 거니?

- 저 문제아. 엮인 사람들만 불쌍하죠.

- 위험한 아이야! 근처에 가지 마.

- 튀지 말고, 조용히 다니렴. 그래야 착한 아이지.

“흑…. 으흑….”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신라를 보고 그슨대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내지었다.

한참을 고통에 몸부림치던 신라는 이내 바닥에 쓰러져 눕고 말았다. 정신을 잃고도 흘러내린 눈물이 바닥을 적셨다.

* * *

[설이네 국밥. 황금 보리밥. 다담 순두부.]

간밤에 도착한 발신자 불명의 문자 한 통. 언뜻 보면 광고 목적 같은 그 문자를 신후는 그냥 흘려 보지 않았다. 조교들을 집으로 호출한 그는 그들에게 그 문자를 보여주었다.

“이게 뭐죠?”

동주가 게슴츠레 뜬 눈으로 문자를 재차 읽으며 물었다. 먼저 무언가 눈치챈 건우가 웃음을 감추지 못하며 턱을 매만졌다.

“용케 저 문자를 보냈네.”

그 말을 듣고 우선과 혜령도 상황을 눈치챘다. 혜령이 흥분된 목소리로 외쳤다.

“신라가 보낸 문자야! 장하다, 우리 학부 연구생!”

“덕분에 지역 범위가 줄어들겠네요. 당장 세 음식점이 동시에 위치하는 장소 알아보겠습니다.”

신후는 우선의 말에 덧붙여 말했다.

“이 발신 번호도, 마지막 신호가 잡힌 게 어느 지역인지 경찰 쪽 통해서 알아볼 테니까, 각자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도록 해.”

“네!”

신후는 다시 신라가 보낸 문자를 읽으며 핸드폰을 꽉 움켜쥐었다. 감금된 상황 속에서 어떻게든 자신이 있는 장소를 알리려고 노력하는 신라가 대견하고 한편으로는 안타까웠다. 빨리 그곳에서 꺼내주고 싶은 마음이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간절했다.

똑똑.

늦은 아침이 되어서야 신라의 방문이 두드려졌다.

“아가씨, 나 들어가요-”

가정부가 청소 도구를 들고 신라의 방으로 들어왔다. 별생각 없이 먼지떨이부터 손에 들고 침대 쪽을 쳐다본 여인은 에그머니나, 큰 목소리로 외치며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침대에 누워있을 줄만 알았던 젊은 아가씨가 침대와 벽 사이의 좁은 바닥에 웅크려 앉아 손톱을 뜯고 있는 것이다.

“왜, 왜, 왜 거기에 앉아서 그러고 있는 거예요!”

여인의 큰 목소리에 비로소 정신이 든 신라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언가 말하려던 그녀는 자신이 벙어리로 알려져 있음을 떠올리고 다시금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창가로 걸어가 바깥 경치를 내다봤다.

가정부는 어딘가 위태로워 보이는 신라의 뒷모습을 힐끔거리며 떨떠름하게 청소를 시작했다.

청소가 다 끝날 무렵 강 현이 음식이 든 봉투를 들고 방으로 들어섰다. 가정부에게 이만 되었으니 나가보라고 말한 그는 직접 식탁에 음식을 꺼내 올려놨다.

“와서 아침 먹어요, 신라 씨.”

“……”

창문을 닫은 신라는 강 현의 맞은편에 조용히 몸을 앉혔다. 왠지 평소보다 더 차분해 보이는 신라를 잠깐 관찰한 강 현은 그녀의 이마를 짚어 체온을 확인했다.

“약간 미열이 있네. 밥 먹고 해열제 먹어야겠어요.”

“……”

“입맛은 좀 어때요? 오늘은 브런치를 테이크아웃해 왔는데. 꽤 멀리 있어서 직접 차 타고 나가서 가져온 거예요.”

“……”

“신라 씨?”

강 현의 표정이 굳었다. 어느 순간 신라의 얼굴에 핏기가 가셔 있는 것이다. 그녀는 당황한 모습으로 목을 짚으며 기침을 했다. 아, 아, 입 모양을 열심히 바꾸어보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왜 그래요. 목이 이상해요? 신라 씨.”

두려움에 사로잡힌 신라의 상태를 눈치채고 강 현은 일어나서 그녀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잠깐 진정해요. 호흡이 불안정해요. 왜 그런지 원인을 알아볼 테니까….”

결정적인 원인이라 할 만한 것을 꼽자면 간밤에 그슨대에게 당한 정신 감응이었다. 하지만 깊이 생각해보면 모든 시작은 이 남자였다. 그슨대가 충성하고 있는 것도 이 남자였고, 그녀가 외부에 벙어리로 알려지기를 바란 것도 이 남자였다.

신라는 결국 눈물을 떨어뜨리며 남자를 세게 밀어냈다. 강 현이 답답한 표정으로 그녀의 양손을 붙잡아 막아냈다.

“많이 힘들어? 옛날에 불행했던 꿈을 꿨어?”

‘지금도 불행해.’

신라는 더욱 서럽게 울었다. 그녀가 우는 것을 보고 안색을 굳힌 강 현이 큰 목소리로 나태귀를 불렀다. 그러자 사색이 된 나태귀가 헐레벌떡 달려 들어왔다.

“네 짓이야?”

“엣, 예?”

“신라 씨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거.”

“어… 그게….”

나태귀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망설였다. 그 모습에 더욱 화가 난 강 현이 능력을 써서 나태귀를 바닥에 짓눌렀다. 나태귀가 고통에 몸부림치며 비명을 내질렀다.

“어, 어젯밤에, 그 여자가 제 방에 들어와서, 핸드폰을 쓰려고 해서…!”

“그래서 벙어리로 만들었다는 소리야?”

“그, 그게 제가 한 게…!”

“네 물건은 네가 알아서 단속해. 그따위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이 여자를 또 한 번 울렸다간 산 채로 요괴들 밥으로 던져줄 테니까.”

“히익!”

나태귀는 비명을 내지르며 겨우 바깥으로 기어나갔다.

한숨을 길게 내쉰 강 현은 힘을 뺀 눈빛으로 다시 신라를 바라봤다. 눈물을 멈출 기색이 없는 여인은 아무리 봐도 식사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는 신라를 조심스럽게 품에 안고 침대로 갔다. 눕히려 하니 싫다고 고개를 저어 벽에 등을 기댄 자세로 앉혔다. 그리고 이불로 다리를 덮어주었다.

“걱정 말아요. 말은 금방 다시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줄 테니까.”

“……”

이 순간에도 눈물에 젖어 있는 여인의 얼굴이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스스로가 우스워 그는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손을 뻗어 젖은 뺨을 매만졌다. 증발한 눈물 덕에 차갑게 식어 있던 뺨이 자신이 주는 온기에 녹아가는 느낌이 기분 좋았다.

앵두 빛 입술 또한 눈물에 젖어 예쁘게 빛나고 있었다. 넋을 놓고 울면 이렇듯 눈꼬리며 입술이며 위험한 붉은 빛으로 물드는 타입인 모양이었다.

‘무슨 맛일까.’

속으로 궁금해했을 뿐인데, 솔직한 몸이 어느새 그녀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힘없이 끌려오는 그녀의 턱을 쥐고 위로하듯이 부어 있는 눈꼬리에 입을 맞춘다. 맺혀 있는 눈물을 살짝 핥아냈다. 혀가 주는 온기에 움찔 떨리는 눈꺼풀이 느껴졌다.

그대로 뺨과 콧등에도 입을 맞추며 내려온 그는 이윽고 젖어 있는 입술도 조심스럽게 머금었다.

‘달다.’

입 안은 어떤 맛일까. 자연스럽게 혀로 입술을 가르고 들어가 그 안에 있는 혀와 어우러진다. 울음의 여운 탓인지 그녀답지 않게 저항 없이 따라오는 것에 감격스러움마저 들었다.

조금 흥분하고 만 강 현은 그녀의 어깨를 더욱 꽉 끌어당겨 안으며 키스를 계속했다. 밀어붙이는 느낌을 주지 않기 위해 최대한 완급을 조절하려 노력했다. 입천장과 약한 점막을 훑어내 미약 같은 타액을 남김없이 빨아들였다. 또한 타액도 전해 입 안이 마르지 않도록 만들었다. 두 입술 사이에서 질척이는 소리가 났다.

숨이 찬 모양인지 헐떡이며 밀어내는 여인의 손길에 그는 잠시 입술을 떼어냈다. 열꽃이 피어나 있는 눈가가 자신을 애절하게 바라보는 것 같아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런 눈빛은 위험해, 유신라….’

순간 정신이 나간 강 현은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체취를 가득 맡았다. 여린 어깨를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대로 눕혀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한계까지 밀어 붙여진 자제력을 끝내 놓지 않고 그저 목덜미의 여린 살결을 강하게 깨무는 것으로 모든 욕구를 참아냈다.

“…으….”

신라는 따끔한 목덜미를 쥐며 당황한 손길로 강 현을 밀어냈다. 순순히 물러나 준 강 현은 시선을 억지로 그녀에게서 떼어내며 서둘러 방에서 나갔다.

“하아….”

신라는 그대로 벽에 머리를 기댄 채 쉽게 진정되지 않는 호흡을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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