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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장. ESCAPE GAME (115/126)

114장. ESCAPE GAME

“헉…!”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누군가 침대맡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신라는 숨을 집어삼키며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저리 가…!”

이불을 끌어모으며 경계의 태세로 벽까지 잔뜩 물러나자, 상대는 고개를 갸웃하며 관찰하듯이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아마도 인간의 몸에 빙의한 귀신인 듯했다. 가정부처럼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것을 보면 이 집에서 일반 가사 일을 담당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두렵게 느껴지는 것은 귀력을 조금도 쓰지 못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바… 바…”

“싫어, 물러나!”

“밥….”

손이 뻗어져 신라의 이불을 끌어당겼다. 신라는 이불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발로 그 몸을 쳐냈다. 그러다가 무의식중에 발에 귀력이 실린 찰나, 쩡- 하고 힘을 준 다리에 충격이 일었다. 팔찌의 효과를 여실히 깨닫는 순간이었다.

“윽…!”

딱- 문가에서 손가락 튕기는 소리가 났다. 강 현이 한숨을 쉬며 방안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는 가정부에게 나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리고 대신 걸어 들어왔다.

오늘의 그는 깔끔해 보이는 흰 셔츠에 회색 바지를 갖추어 입고 있었다. 반면 막 일어난 채라 부스스한 모양을 하고 있던 신라는 민망함에 더욱 이불을 끌어모았다.

“많이 놀랐어요? 신경 못 써서 미안해요.”

“……”

“앞으로는 진짜 사람을 부르도록 할게요. 아마 끼니를 어떻게 할지 물어보러 들어왔던 걸 거예요.”

자연스럽게 신라의 옆에 걸터앉은 강 현은 그녀의 머리칼을 정리해주고 방금 충격을 받은 발목 부분을 조심스럽게 마사지해주었다.

“생각보다 아프죠?”

“……”

“잘 잤어요?”

“…피곤했어요.”

“놀리려고 물은 거 아니에요. 잠을 설치는 것 같지는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아침은 뭐로 준비하라고 할까요?”

“입맛이 별로 없어요.”

사람이 아닌 귀신이 만드는 음식이라면 뭐든 싫었다. 신라의 어두운 표정을 보고 그녀의 생각을 눈치챈 강 현은 잠시 고민하던 끝에 얘기했다.

“그럼 바깥에서 사 오는 음식은 괜찮아요?”

“이 근처에 그런 게 있어요?”

“사람 사는 곳인데 당연히 있죠. 따뜻한 국 종류가 좋겠어요? 아니면 죽?”

“…아무거나 괜찮아요.”

작게 미소 지은 강 현은 잠시 문가로 나가 누군가에게 음식을 배달시키라고 했다. 투덜거리는 목소리를 들으니 나태귀 같았다.

‘배달 음식을 시키면, 지역명이나 가게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을까?’

신라는 강 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홀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그가 돌아서자 다른 곳을 쳐다보는 척을 했다.

“배달 오는 사람한테 도움을 청할 생각이라도 했나 본데.”

그가 생각을 간파했다는 듯이 웃으며 다가왔다. 신라는 시치미를 떼는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좋은 생각이네요.”

강 현은 재미있다는 듯, 귀엽다는 듯 웃음을 삼키며 그녀의 턱을 쥔 채 시선을 맞췄다.

“유감이지만 이곳 주소를 정확히 알려주지는 않을 거예요. 저 녀석이 어느 정도 나가서 받아올 거거든.”

“아쉽네요.”

그때 누군가 문을 노크했다. 삐걱거리는 걸음새를 보니 역시나 귀신이 빙의한 몸 같았다. 눈에 띄게 굳어버리는 신라를 눈치챈 강 현이 가까이 다가와 그녀를 품에 가두고 시야를 차단했다. 그리고 바깥을 향해 들어오라고 지시했다.

“TV를 설치하라고 시켰거든요. 아무것도 없는 방 안에만 있으면 지루할 테니까.”

“……”

“걱정 말아요. 가끔은 데리고 나가줄 테니까.”

세 명이 들어와 무거운 TV를 벽에 걸고 열심히 설치하기 시작했다.

‘기분 나빠.’

신라는 고개를 돌리고 더욱 몸을 움츠렸다. 강 현이 자세를 바꿔 더 완벽하게 시야를 차단해주었다. 이 순간만큼은 그들과 단절시켜주는 그의 몸 덕분에 조금 안심이 됐다.

‘우습네.’

자신의 꼴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지금 가장 위험한 존재는 눈앞에 있는 이 남자일 텐데 말이다. 귀력을 쓰지 못하게 된 상황은 생각보다 스스로를 겁쟁이로 만들고 있었다.

갑자기 노랫소리가 들렸다. 놀란 그녀는 고개를 들고 남자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가 한창 유행하는 발라드를 자연스럽게 흥얼거리고 있었다.

“이 노래 알아요? 시험 기간이어서 들을 새도 없었나? 흠- 흠-”

긴장을 풀게 만들려는 뻔한 속셈인 걸 아는데도, 심장을 조이고 있던 불안함이 점차 걷혀 갔다. 더불어 어깨를 감싸 쥔 손도 안락하게 느껴지고 말았다.

‘바보 같아, 유신라….’

입술을 꾹 깨문 신라는 스스로도 어떤지 모르는 표정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잔뜩 숙였다. 노랫말을 흥얼거리는 강 현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피어났다.

한 시간 정도 후 나태귀가 추위에 벌벌 떨며 배달 음식을 들고 돌아왔다. 다시 전자레인지에 데워 온 것은 콩나물국과 밑반찬 등이었다.

‘설이네 국밥….’

봉투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먹어요.”

식탁에 마주 앉은 강 현이 웃으며 말했다. 그는 먹을 생각이 없는지 가져온 책을 펴 읽기 시작했다. 그의 존재감이 다소 불편했지만, 정오가 가까운 시간이었던 터라 신라는 허기를 채우기 위해 식사를 시작했다.

‘먹을 만하네….’

따뜻한 것으로 속을 채우니 마음이 더 평온해졌다. 갑자기 신후와 데이트를 하던 때가 떠올랐다. 스스로 입맛이 까다롭다고 말한 그는 사귀고 나서부터 절대로 맛없는 것을 먹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물론 어중간한 맛의 음식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잘 먹지도 않고 있겠지…. 바보처럼 그러면 안 될 텐데.’

미안함, 애틋함, 여러 감정이 어우러져 눈꼬리에 우울함이 담기고 말았다.

“혼자 먹기 심심한가요?”

그녀의 기분을 눈치챈 강 현이 물었다.

“아뇨….”

“난 아침을 늦게 먹었거든요. 다음부터는 같이 먹어요.”

신라는 고개를 끄덕이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녀는 반도 채 먹지 못하고 수저를 놓았다. 허기를 채우자마자 입맛이 뚝 떨어져 버린 것이다.

“더 못 먹겠어요?”

남자의 물음에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그는 자신을 칼로 찌를 것인지, 죽을 다 비울 것인지 선택하라고 종용했었다. 갑자기 떨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고 강 현의 얼굴에서도 표정이 사라졌다.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스스로 식탁을 치우기 시작했다.

“학습 효과가 너무 좋네, 명문대생답게.”

“……”

“하지만 앞으로는 그렇게 대하지 않을게. 내 말만 잘 듣는다면.”

큰 손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고 갔다.

‘인간인 척… 자상한 사람인 척하지 마….’

그가 쟁반을 들고 나가고, 신라는 참았던 숨을 길게 내뱉었다. 조금 얹힌 듯한 가슴팍을 툭툭 두드리며 커튼이 걷힌 창가를 바라봤다. 탁 트인 들판의 풍경이 조그만 창문을 통해 보이고 있었다. 마치 갇혀 있는 그녀의 신세를 상징하는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오늘 처음 온 가정부예요.”

다음 날, 정말로 나이 지긋한 여인이 신라의 방문을 두드렸다. 신라는 놀라서 방문을 연 채 굳어 서 있었다.

‘정말이었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강 현이 정말로 실행할 줄은 몰랐다. 가정부에게 도움을 청해 탈출할 거라는 생각도 어느 정도 했을 텐데 말이다.

‘하다 못 해 위치라도 물어봐야겠다.’

청소를 시작하려는 가정부에게 물어보려던 찰나, 그녀의 입이 먼저 열렸다.

“말을 못 하는 아가씨라고 하던데, 편하게 앉아 있으면 돼요.”

순간 그 말대로 이루어진 것처럼 말문이 턱 막혀버렸다.

“이 댁 총각은 착하기도 하지. 갈 곳 없는 자기 환자를 직접 집에서 보살필 생각을 다 하고…. 게다가 잘생겼잖아? 아가씨는 복 받은 줄 알아요.”

‘벙어리’, ‘환자’. 이 두 가지 키워드만으로 무슨 말을 하든 이 여인에게는 통하지 않을 터였다. 신라는 금방 희망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벙어리라고 일러준 이유는 아마도 메시지일 것이다. 쓸데없는 것을 물어 알아냈다가는 이 여인 또한 무사히 돌려보내지 않을 거라는 메시지 말이다.

“아침은 한식이 좋아요, 양식이 좋아요? 뭐든 되니까 말만 해요. 아, 말은 안 되니까 종이에 적어주면 되겠다.”

“……”

어제 아침부터 저녁까지 배달시켜 먹었던 덕에 근처 식당의 이름을 세 개나 수집할 수 있었건만. 앞으로는 그런 기회가 사라졌다는 생각에 신라의 표정이 다소 시무룩해졌다.

‘아무거나 괜찮아요.’

신라는 입 모양으로 말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고개를 끄덕인 가정부는 청소를 마무리한 후 요리를 하러 방에서 나갔다. 그리고 곧바로 나태귀가 어슬렁거리며 들어왔다.

“저 여자한테 허튼소리를 하려고 하면 진짜 말을 못 하도록 만들어도 좋다고 그랬는데. 그럴 필요 없었네.”

“…그런 일도 할 수 있어?”

“무엇이든, ‘의지를 없애는 것’이 가능하니까. 혹시 밖으로 탈출하거나 허튼짓하고 싶어?”

나태귀가 떠보듯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여차하면 능력을 쓸 속셈인 모양이었다. 신라는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저어 보였다.

“내가 뭘 어쩌겠어. 일단은 이곳 생활에 적응하는 수밖에.”

“흐음~ 생각보다 얌전하구나?”

“현실을 깨닫는 게 빠른 거지.”

“그럼 우리 어제 못다 한 카드 게임이나 계속할까?”

“좋아.”

나태귀와 방바닥에 마주 앉으며 신라는 핸드폰의 위치를 빠르게 시선으로 확인했다. 오늘도 주머니에 핸드폰을 지니고 온 것이 보였다.

“어디를 보는 거야?”

나태귀가 멈칫하며 날카롭게 물었다. 신라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응? 옷이 특이해서. 어디에서 사는 거야?”

“시내에 나갈 때 몸에 맞으면 닥치는 대로 사. 재물귀가 사라지기 전에 자금을 잔뜩 조달하는 역할을 맡았었거든.”

재물귀라면 일용도로 베어 없앴던 그 여자를 일컫는 것이리라. 그 순간의 기억만 사라진 것을 보면 아마도 신이 다녀갔던 것일 수도 있다고 신라는 이제 와 짐작했다.

카드 게임을 하면서, 신라는 지나가는 듯이 물었다.

“너는 나태귀잖아. 귀신이면서 잠도 자니?”

“일단은 인간의 몸을 빌렸으니까 이 몸의 수면 패턴에 따라갈 수밖에 없어. 나태귀니까 게으름피우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

“따로 방도 있겠구나? 내 방과 가까워?”

“응. 그러니까 맨날 놀러 오지. 주군이 시간이 남으면 너랑 자주 놀아주라고 시키기도 하셨고 말이야.”

“…그랬구나.”

짝맞추기 게임을 하면서, 신라는 일부러 나태귀에게 매번 지는 쪽을 선택했다. 항복의 표시로 손을 들어 보이면 나태귀는 기분이 들떠서 히히덕거렸다.

‘그래, 그렇게 마음을 놓으면 돼.’

속으로 중얼거린 신라는 태연하게 카드를 섞었다.

그날 밤, 신라는 잠들 때 입는 편한 복장으로 방의 문을 열고 조용히 나가봤다. 긴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루 종일 바깥에서 기척이 느껴지는 시간을 체크하면서 깨달은 것은, 하수인들이 10분에 한 번씩 복도를 순찰하듯이 돌아다닌다는 것이었다. 강 현의 방은 1층이라고 했으니, 조심스럽게 움직인다면 그가 쉽게 눈치챌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어디일까….’

나태귀의 방을 찾는 것이 첫 번째 목표였다. 남은 시간은 약 8분. 그녀는 최대한 발걸음 소리를 죽이고 왼쪽의 두 개 방부터 열어봤다. 그녀가 겁을 먹을까 봐 일부러 하수인들의 방은 1층으로 모두 옮겼다고 했다. 그 증거로 열어본 두 개 방들은 모두 비어 있었다. 남은 방은 오른쪽에 있는 두 개 방이었다.

‘바로 옆방은 아닐 테니까, 저 끝 쪽 방이겠다.’

그녀는 예측한 마지막 방문 앞으로 가 살짝 귀를 대 보았다. 도로롱 도로롱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렸다.

“…!”

그때 1층 계단에서 절뚝이며 걸어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8분이 다 사라진 것이다. 그녀는 선택의 여지 없이 그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하수인들이 복도로 올라와 수상한 기척이 없는지 두리번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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