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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장. A caged bird (114/126)

113장. A caged bird

신후가 다다랐을 때 이미 그 장소에 신라는 없었다. 남아 있는 건 그녀의 귀걸이뿐이었다. 귀걸이가 GPS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적은 그녀를 데려가기 전 그것을 바닥에 버려두고 갔다.

“미안….”

화비가 시무룩한 얼굴로 다가왔다.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 그의 오른팔에는 정신을 잃은 서영이 안겨 있었다.

“너희 둘을 구하려고 하다가 대신 붙잡혀 간 거겠지. 안 봐도 훤하군.”

신후가 잔뜩 힘이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슨대였어. 그자라면 분명 자기를 죽이지 않을 거라면서 서영이를 먼저 구하라고 했어.”

“아니. 그놈이라면 무슨 짓까지 저지를지 알 수가 없어. 비형랑과는 달라.”

“……”

그슨대에게 산 채로 꺼내진 여우귀의 혼을 떠올린 화비는 더욱 침울해졌다. 신라가 그렇게 붙잡혀 간 것이 모두 자신의 탓인 것 같았다.

신후는 벽을 짚고 서서 신라가 서 있었을 자리를 허무하게 바라봤다. 아직도 은은하게 풍기고 있는 그녀의 체취가 느껴졌다.

‘늦지 않을 거야… 절대로.’

눈앞에 어른거리는 그녀의 모습을 향해 손을 뻗어본다. 간절하게 그러쥔 곳에는 아무것도 없다.

“쿨럭….”

참았던 각혈을 토해내며 무릎을 꿇는 신후를 보고 화비가 놀라서 다가갔다.

“이, 이봐! 왜 그래! 이봐!”

소식을 들은 건우와 동주가 때마침 달려 들어왔다. 아무 일도 없기를 간절히 바라며 달려온 그들은 두 사람이 쓰러져 있는 광경에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건우가 신후에게 달려가 그의 상태를 살폈고, 동주는 바닥에 눕혀져 있는 서영을 품에 안았다.

“서영아, 정신 차려봐. 서영아!”

“교수님! 이게 무슨…! 다치신 거예요?”

끝내 대답하지 못한 신후는 가슴팍을 움켜쥔 채 정신을 잃고 말았다. 반대로 서영은 동주의 품에서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깨어나자마자 신라의 이름을 부르며 구슬프게 울었다.

화비는 건우와 동주에게 그 자리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 나머지 조교들이 다다를 때까지 그들이 서 있는 자리에 무거운 정적만이 맴돌았다.

* * *

‘너는 주군에게 반드시 필요한 존재지.’

‘죽이는 건 안 되고….’

‘도망치게 해서도 안 되고….’

‘어떻게 해야 인형처럼, 움직이지도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착한 아이로 만들 수 있을까?’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에 신음하며 깨어났다. 다른 공간, 다른 풍경이지만 왠지 모르게 익숙한 이 기운은 필시 ‘경험’해 보았던 곳.

‘강 현이 머무르는 곳이야.’

신라는 최대한 기척을 내지 않으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넓은 침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의 취향대로 앤티크한 인테리어였고, 가구는 잡다한 것을 모두 치워 깔끔한 느낌이 났다.

창가로 걸어가 작은 창문을 바깥으로 열어봤다. 차가운 겨울바람에 예전처럼 바다 내음은 없었다. 이번에는 바다 근처가 아닌 곳에 별장을 얻은 모양이었다. 추위에 색을 잃고 축 늘어진 잡초들만이 끝이 보이지 않는 벌판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곳은 어디일까.’

“감기 걸려요.”

문가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신라는 놀란 기색 없이 그를 향해 몸을 틀었다. 강 현이 상의를 탈의한 채 문턱에 기대서 있었다. 그나마 가디건으로 보이는 것을 어깨에 걸쳐 놓았는데, 가슴팍에 가득한 할퀸 상처를 보면 왜 상의를 입고 있지 않은지 그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신라의 가까이로 걸어와 그녀를 벽에 가둔 채 직접 창문을 닫았다. 신라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한층 수척해진 남자의 얼굴에선 예전과 같은 생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피 냄새가 섞인 체향에 정신이 아찔할 정도였다.

“많이… 안 좋아 보이네요.”

강 현의 눈길이 신라의 얼굴에 닿았다. 웃음기라고는 전혀 없는 그의 차가운 눈에 손끝이 떨릴까 봐 주먹을 꼭 쥐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좀 더 명확해졌다. 살기- 아니, 애증의 감정이 잔뜩 담긴 눈빛이다.

“덕분에 많이 나아졌어요. ‘제 발로’ 찾아왔다고 하던데. 내 집에.”

“…그슨대가 그러던가요?”

“물론 제 발로 오도록 상황을 그렇게 만들었겠지만. 납치 같은 게 아니라서 다행이네요. 당신에게만큼은 일말의 양심이라도 챙기고 싶어져서.”

신라는 그때의 상황이 다시금 떠올라 한숨을 내쉬었다. 결론적으로 그슨대에게 휘둘렀던 일용도는 그를 베어내지 못했다. 그자의 혼에 타격을 입힐 수 있는 건 결국 화비뿐이라는 소리였다. 신후와 건우가 전생에 그를 봉인하는 데에 그친 것을 보면 이상할 일도 아니었다.

“당신이 오니까 주술의 부작용이 많이 잠잠해졌어. 이제 좀 숨통이 트여.”

“……”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가끔씩 느껴지던 혼이 잘게 찢어지는 듯한 소름 끼치는 감각이 거짓말처럼 사라졌으니까.

“우리는 같아.”

강 현이 천천히 이마를 맞대었다. 체온을 나누고 있으니 더 안락함이 느껴지는 것 같아 그는 옅게 웃었다.

“좋다, 유신라. 이럴 줄 알았으면 더 빨리 데리고 오는 거였는데.”

그는 그대로 고개를 틀어 자연스럽게 키스를 유도했다. 하지만 입술이 닿자마자 떨어져 나간 신라가 그들 사이에 간격을 만들었다.

“같은 처지라도, 함께할 수 없어요.”

그녀의 눈빛은 단호했다.

“우리는 함께해야 비로소 완전해질 수 있어. 나는 불사의 몸이 되고, 당신은 내 힘으로 육신을 바꾸면서 영원히 살 수 있지. 나와 함께하는 한 그 어떤 요괴도 당신을 건드릴 수 없을 거야.”

“아뇨. 전 그런 거 바라지 않아요.”

“어째서?”

“인간답지 않아요. 그렇다고 요괴도 아니죠. 그럼 그건 대체 뭐죠?”

“그런 게 중요해? 강해지면 인간이든 요괴든 모두가 우리를 우러러볼 텐데.”

“외롭잖아요.”

강 현의 입이 잠시 멈추었다. 신라는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지금도, 외로워하고 있잖아요.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잖아요. 아니에요?”

“……”

“난 당신의 외로움을 해결해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유일하게 도울 수 있다면, 그 방법은…”

신라는 천천히 일용도를 소환해냈다. 강 현은 긴장하지도, 화나지도 않은 모습으로 그녀의 행동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그 방법은, 당신을 고통 없이 보내주는 것뿐이야.”

강 현의 입가가 작게 당겨졌다.

“당신을 희생해서?”

“당신이 죽을 정도의 타격이면, 나도 분명 죽겠죠.”

“나와 함께 죽어주겠다고 하는 거야?”

‘아니. 내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지 않게 만들기 위해서.’

신라는 속으로 말을 삼켰다.

“강해졌네요. 신라 씨.”

갑자기 예전의 말투로 돌아온 강 현이 말갛게 미소 지었다. 그는 일용도를 손에 든 신라의 손목을 부드럽게 감싸 쥐며 말했다.

“무엇이 당신을 예전과 달리 망설임 없게 만들어줬을까.”

그의 시선이 신라의 몸을 찬찬히 훑어 내렸다.

“곤란해요…. 그렇게 내가 증오하는 놈의 기운과 체취를 몸에 한가득 담아 와서는…. 내 도움이 필요 없을 정도로 강해져 있으면 내가…”

챙그랑- 가볍게 꺾어 쥔 손에서 일용도가 떨어져 저절로 모습을 감추었다. 강 현은 그대로 신라의 손에 깍지를 껴 더는 무엇도 손에 쥘 수 없도록 만들었다.

“당신을 다시 나약하게 만들고 싶어지잖아.”

“윽….”

신라는 그에게서 손깍지를 풀려 애써봤지만, 힘의 차이 때문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반면 강 현의 표정은 온화하기 그지없었다.

“괜찮아. 천천히 할게요. 어차피 그놈의 기운을 지우려면 오랜 시간을 들여야 돼. 마음만 같아선 당신을 바로 이 자리에서 함락시켜 내 여자로 만들어버리고 싶지만, 그럼 정말 부서져 버릴지 모르니까. 대신 규칙 하나만 정해요, 우리.”

강 현은 바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신라의 팔에 채워주었다. 겉보기에는 실을 이용해 만든 듯한 장신구였지만 쉽게 풀지 못할 것이라는 게 느껴졌다.

“귀력을 쓰지 말 것. 조금이라도 쓰게 되면 이 팔찌가 그대로 당신에게 충격을 돌려줄 거야.”

“……”

“대신 나는 당신에게 신이 접신하든, 그 무엇이 찾아오든 도망치지 않을게.”

신라의 눈이 조금 커졌다. 강 현은 말을 이었다.

“당신은 몰라도, 당신을 이용한 신에게는 죽지 않아. 멋대로 이곳으로 데려온 대신 책임은 져야 하잖아, 내가.”

“……”

“역시, 많이 불안했던 거죠?”

굳어 있는 사이에 그의 입술이 이마에 닿아갔다.

파르르, 애처롭게 떨리고 있는 신라의 손끝을 보고 강 현은 소리 죽여 웃었다.

‘거봐. 어디에든 기대고 싶으면서. 애처롭고 여리기 그지없는 나의 작은 새.’

지금은 혼자 있을 시간을 줘야 이쪽을 더 신뢰하게 될 것이다. 강 현은 그렇게 생각하고 신라의 방에서 조용히 나갔다.

두 손을 모아 가슴팍 옷깃을 꽉 움켜쥔 신라는 벽에 기대 서서히 미끄러져 앉았다. 두렵지 않은 척하기에 적의 수장인 남자는 상대방의 심리를 너무도 잘 파악해내는 정신과 의사 출신이었다. 방금처럼 스스로를 속인 용기마저 간파하고 손쉽게 무장해제를 시켜버리니 말이다.

더는 도망칠 곳도, 나아질 상황도 없는 이곳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하기가 힘들어졌다.

신후는 쓰러진 지 반나절 만에 눈을 떴다. 그슨대와 함께 사라진 신라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해 건우와 동주, 우선이 그 일대를 아직 조사 중이었고, 신후의 병간호는 혜령과 화비가 맡았다.

준성은 일이 그렇게 되고 나서 연락을 받고 곧장 신후의 집으로 찾아왔다. 물론 그가 찾아온 이유는 병간호 때문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말해.”

그는 평소와 달리 무섭게 굳힌 얼굴로 물었다. 신후는 침대에 누운 채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칠정을 모두 되찾은 걸 들켰어.”

“…그래서.”

“그때 신라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걸 느끼고 빨리 구하러 가기 위해서 네 몸을 밀쳤던 거야. 그게 다야.”

“……”

“이제 와 생각해보면 일부러 그 타이밍을 노린 건지도 모르겠어. 신라가 비형랑 가까이에 머무르는 게 만일을 대비해 그들에게 좋으니까. 시간을 달라는 내 제안은 수락했지만 지금 당장은 구하지 못하도록 내 발을 묶어놓은 거야.”

준성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 섣부른 판단은 증오를 만들고, 그 감정은 이성을 흐리게 해.”

“알아. 우연이었을 수도 있다는 거.”

신후는 심장 언저리를 짚은 채 겨우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고통을 참아내느라 그의 이마에 금방 식은땀이 흥건히 맺혔다.

혜령이 다가와 걱정스럽게 말했다.

“누워 계세요. 지금으로서는 빨리 회복하는 게 중요하잖아요.”

“불행하지 않게 해주겠다고 했는데…. 함께 새해도 맞지 못하게 됐군.”

“신라가 우리 쪽에 위치를 전해줄 방법은 아직 없는 거죠?”

“귀력을 쓰게 내버려 뒀을 리가 없어. 현재로선 우리 쪽에서 샅샅이 뒤지는 방법뿐이야.”

침울하게 서 있던 화비는 곧 거실로 조용히 나갔다. 그의 심정을 눈치챈 준성이 그가 나간 자리를 씁쓸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야.”

깜빡 잠들었던 모양이다. 귓가에서 조용히 부르는 목소리에 신라는 숨을 집어삼키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와, 무슨 용수철인 줄 알았어.”

침대맡에 서 있는 건 어린 소녀였다.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어딘가 익숙한 기분이 드는 이유는 ‘다른 몸’을 사용할 때 대면한 적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넌… 나태귀?”

“맞아.”

신라는 잠시 주위를 둘러봤다. 방 안에는 그녀와 나태귀뿐인 듯했다.

“나 때문에 절벽에서 떨어졌었다고 해코지할 건 아니지?”

나태귀가 물었다. 예전에 강 현의 다른 별장에 감금되었을 때 추병귀를 추격하다가 그녀의 방해로 절벽 아래로 떨어졌던 일을 말하는 것일 터였다. 이제 와 책임을 물을 생각이 없는 신라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나랑 놀자. 요새는 인형을 모으는 일도 금지당해서 할 게 없거든.”

“너도 이 집에 살아?”

“살지. 이 소녀의 부모는 일찍이 이 아이를 버렸거든.”

“……”

“뭐 하고 놀까? 카드 게임 할래?”

신이 난 나태귀는 폴짝폴짝 뛰어가 서랍을 뒤졌다. 그녀가 까치발을 들자 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이 살짝 보였다. 신라는 놀란 기색을 숨기며 다시 그 실루엣을 자세히 봤다. 분명히 핸드폰이 맞는 것 같았다.

‘일이… 쉬워질 수도 있겠네.’

그녀는 돌아서서 창밖을 바라봤다. 지는 해가 정면으로 보이는 것을 보면 특이하게도 서향으로 지어진 집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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