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장. 신과의 거래
신후는 꽤나 뜸을 들였다. 준성이 지켜보고 있었다면 빨리 말을 꺼내라고 끈질기게 재촉했을 것이다.
“왜 유신라지?”
마침내 내뱉어진 날카로운 물음에 다문천왕은 조용히 웃었다.
“첫마디가 아주 인상 깊군. 기껏 불러내어 하고자 했던 말이 그것이냐?”
“그 여인은 내가 저지른 과오로 운명의 굴레를 잃어버린 박복한 여인입니다. 더는 불행하게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만.”
“귀력의 화수분, 게다가 비형랑의 도를 넘는 집착을 받고 있지. 이보다 더 알맞은 인간이 있는가?”
신후는 작게 눈썹을 비틀었다.
“그게 비형랑을 사라지게 하기 위함인지, 본인의 죄를 덮기 위함인지는 솔직히 관심 없습니다. 당신들의 모순은 익히 보아왔던 것이니까. 다만 그전에 알려드릴 것이 있어서.”
“건방진 놈….”
다문천왕의 눈빛이 예리하게 바뀌었다.
“이성보다 감정에 더 사로잡혀 있는 것이 보인다. 널 그토록 흥분하게 만든 것이 그 아이냐?”
“피차 시간이 없으니 본론부터 얘기하죠. 유신라의 영혼은 비형랑과 엮여버렸고, 비형랑이 죽으면 유신라도 죽습니다.”
“……”
“그건 당신들도 원하지 않는 방향이겠지. 운명을 관장하는 신들이 애써 균형을 맞춰놓은 실타래를 다시 끊어버리는 짓이니까. 그중 하나만이라면 모를까, 둘 다 사라져버리게 된다면 분명 그들도 의심하고 진상을 파헤치려 할 겁니다.”
“그 원인이 애초에 누구에게 있다고 생각하는가?”
“결정적인 원인은 이쪽에 있으니, 끝맺음도 내가 짓는 게 맞다 생각해서. 제안을 하나 할까 합니다.”
다문천왕은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들어서 손해 볼 것은 없는 일이라 신후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
신후는 그의 생각을 조리 있게 전했다. 그것은 운명을 관장하는 신들 모르게, 그 어떤 추가적인 희생 없이 이 지긋지긋한 악연을 끊어버릴 수 있는 묘수 중의 묘수였다.
다만―.
“네가 모두 짊어지고 가겠다는 소리냐?”
다문천왕이 표정 없이 물었다. 다소 차가워 보이는 말투에는 자비로움보다 냉혹함이 가득했다.
“대신에 일이 잘 마무리되었을 때는 내가 원하는 바 한 가지만 들어주십시오.”
“가능한 일이라면 그렇게 하마. 네 생각대로 일이 흘러가겠는가?”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때까지 유신라를 건드리지 말아줬으면 합니다만.”
“네가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이해했다. 다만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말한 대로, 내가 뿌린 씨앗이니 스스로 거두어야지.”
다문천왕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둑시니가 저지른 죄로 인해 운명의 굴레를 잃어버린 두 인간, 그중에는 「신의 죄」를 훔쳐 달아난 요괴의 환생과, 어둑시니가 지키려고 하는 귀력의 화수분인 여인이 있다.
세상만사 중 대부분이 신들이 의도하지 않은 대로 흘러간다고는 하나, 이토록 기구하게 꼬여 버린 운명은 그야말로 흔치 않은 것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운명의 실타래에 본인마저 끼어있다는 현실이었다.
“그래. 이 끈질긴 연결 고리를 끊어내는 데에 누군가는 반드시 희생해야 하겠지. 그 역할을 자청하니 들어주지 않을 이유는 없겠구나.”
“……”
“다만.”
다문천왕은 자리에서 일어나 신후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 전에 확인해 보아야겠군. 네가 칠정 중 ‘어디까지’ 되찾았는지를.”
예상했다는 듯이 신후는 무방비한 상태로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먼 옛날 빼앗긴 감정은 사실상 칠정이 아닌 여섯 가지 감정. 나머지 하나는 ‘애초에 없었다’라는 것으로 결론이 났었다.
하지만 신라를 위해 희생하려는 신후의 모습을 보고 다문천왕은 무언가 어렴풋이 느껴진 모양이었다. 게다가 귀력의 화수분인 여인은 분명 그를 사랑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눈을 감아라.”
다문천왕이 천천히 신후의 심장 쪽으로 손을 뻗었다.
곧 찾아올 끔찍한 고통을 알고 있는 신후는 숨을 고르게 내쉬며 차분히 눈을 감았다.
쾅- 쾅-!
옥상의 닫힌 문에 누군가 몸을 부딪쳤다. 긴장감 속에 그슨대와 대치 중이던 화비가 문가를 돌아봤다.
“신라! 이곳에 녀석이 있으니까 어서 멀리 달아나!”
문 너머에서 신라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자도 지금은 사람 몸을 차지하고 있잖아! 아무리 능력을 썼더라도 유령처럼 문을 통과했을 리가 없어!”
“어?”
“잘 봐! 그슨대 본인이 맞아?”
화비는 심각해진 표정으로 그슨대를 돌아봤다. 여전히 여유롭게 웃으며 서 있는 남자에게서 별다른 수상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 더 집중해보니, 옥상이 아니라 아래층 어딘가에서 그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준성에게 특훈을 받은 덕에 그는 전보다 귀기를 탐지해내는 것에 민감해졌다.
- 꺄악-!
그때 어딘가에서 서영의 비명이 울렸다. 그슨대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는 쪽 같았다.
“안돼, 서영아…!”
불길함을 느낀 신라가 먼저 계단을 통해 뛰어 내려갔다.
화비는 혀를 차며 눈앞에 보이는 그슨대에게 여우 불을 날렸다. 하지만 여우 불은 허무하게 그슨대를 통과해 지나가 버렸다.
“환영이잖아! 제길, 함정이야!”
화비는 허둥지둥 신라를 뒤쫓아 갔다. 느릿하게 행동하는 그슨대의 동태를 보고 필시 본인을 노린 함정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함정인 줄 알고도 그의 꼬리를 잡기 위해 일부러 쫓아온 것이었다.
‘나를 위한 함정이 아니었어! 이건 분명 신라를 꾀어내려는 함정이었다!’
건물의 10층은 아직 임대 중인지 유리 벽과 기둥만 있을 뿐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이었다.
“서영아!”
문을 박차고 들어간 신라는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춰서야 했다. 그슨대가 서영의 멱살을 쥐고 허공에 들어 올린 채였다.
문제는 그녀의 몸이 유리 벽 밖으로 나가 있다는 것이었다. 무슨 수를 썼는지 유리 벽 하나가 통째로 사라져 있었다. 그슨대가 손을 놓는 순간 서영은 10층 높이에서 추락하고 말 것이었다.
“시, 신라….”
서영이 그슨대의 손을 쥔 채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다.
“어떻게 할 테냐. 친구를 살리고 따라올 테냐, 아니면 친구가 죽는 모습을 눈앞에서 지켜볼 테냐.”
그슨대가 눈을 접어 웃으며 물었다. 신라는 주먹 쥔 두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정말 친구를 살려줄 거야?”
“네가 네 발로 날 따라온다면 말이지.”
“이것도 강 현 그 사람이 시킨 짓이야?”
“우습구나, 인간 여인아. 너는 그분을 그렇게 나약한 이름으로 부르느냐?”
곧 화비가 나타나 신라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그슨대를 노려보는 그는 온몸의 털을 잔뜩 세우고 있었다.
“저놈이 하는 말을 믿지 마. 거짓으로 얼룩진 사악한 요괴라고.”
그슨대가 껄껄 웃었다.
“아까 내 환영이 한 얘기가 거짓이기를 바라는 것이로군.”
“아니. 네놈은 충분히 그런 짓을 저질렀을 만하다고 생각해. 어찌 됐건 내가 네놈을 죽여야 하는 동기는 이미 충분히 차고 넘친다는 얘기지.”
서영의 눈에서 두려움의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신라는 자기도 모르게 움직일 뻔한 다리를 겨우 멈췄다. 그슨대가 이쪽을 바라보며 기분 나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저자는 서영이를 살려줄 생각이 없어.’
신라는 그슨대가 들리지 않을 정도의 목소리로 화비에게 얘기했다.
“화비. 우리는 무조건 서영이를 살려야 해.”
“어떻게?”
“내가 대신 인질이 되는 척할 테니까, 천천히 나를 따라오다가 혹시나 서영이가 추락하면 다치지 않도록 막아줘.”
“그러다 정말로 인질로 붙잡히면!”
“내 걱정은 마. 저자는 날 절대 죽이지 못하잖아.”
신라는 아무런 짓도 하지 않겠다는 표시로 양손을 든 채 천천히 그슨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슨대가 그녀를 흥미로운 눈빛으로 지켜봤다.
“시, 신라야, 미안해….”
서영이 바들바들 떨면서 말했다. 신라는 걸음을 잠시 멈추고 그슨대를 향해 말했다.
“먼저 내 친구를 안전하게 바닥에 내려놔. 그래야 그쪽으로 가겠어.”
“안 그래도 그러려던 참이다.”
그슨대는 선심 쓰듯이 서영을 옆에 내려놨다. 다리가 풀려버린 서영이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자, 이리로.”
사악한 손길은 애초부터 노리고 있던 신라에게로 뻗어졌다. 그슨대는 동시에 화비에게 살기 어린 눈빛을 보내 다가오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어서.”
소름이 끼치는 재촉이었다. 마치 지옥 불에 빨리 들어가라는 말처럼 들렸다. 신라는 굳은 표정으로 한 걸음씩 그슨대에게 다가갔다.
“아주 소중한 친구인가 보구나. 안 그러면 스스로를 희생하려고 할 리가 없지.”
신라가 다섯 걸음 정도를 남겼을 때, 그슨대는 시선을 내려 발치에서 움직이고 있는 서영을 내려다봤다. 서영은 울먹이며 앉은 채로 신라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너는 움직여도 된다는 소리를 한 적이 없는데.”
그슨대의 발은 마치 걸음이라도 내딛듯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래서 서영의 몸이 창밖까지 밀려날 때까지 신라도 화비도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못했다.
“화비-!”
신라가 다급히 외쳤다. 이미 달릴 준비를 하고 있던 화비가 쏜살같이 달려가 아슬아슬하게 서영의 발끝을 물어 잡아챘다. 하지만 신발이 벗겨져 서영의 몸은 그대로 추락하고 말았다.
“꺄악-!”
“쳇!”
화비는 고민할 새 없이 서영을 따라 뛰어내렸다.
그 사이 신라는 합장 자세로 일용도를 소환해냈다. 그슨대를 제령시키지는 못하더라도, 누군가 올 때까지 시간을 벌어볼 셈이었다.
다문천왕의 손이 가슴팍에 닿았을 때, 신라의 귀력의 파동을 느낀 신후가 자리에서 솟구쳐 일어났다.
“지금은 안 되겠습니다.”
“왜지?”
다문천왕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대로 내뻗어진 그의 손이 신후의 심장까지 순식간에 파고들었다. 이리저리 파헤치며 감정을 헤아려보는 무자비한 손길에 신후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가셨다.
“으윽…!”
그는 감당하기 힘든 고통에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고 말았다. 무의식중에 그러쥔 소파 가죽이 그대로 뜯어져 버릴 정도였다.
표정 없이 행위를 계속하던 다문천왕이 신후의 심장에서 찾아낸 감정을 나지막이 읊기 시작했다.
“희(喜)… 노(怒)….”
“큭…. 악…!”
“우(憂)… 구(懼)… 증(憎)… 욕(欲)….”
신후는 검붉은 선혈을 토하면서도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핏기 서린 눈을 들어 다문천왕을 노려봤다.
“왜 방해하는 거지? 신라가 위험한 걸 느꼈을 텐데.”
“지금 비형랑의 손에 넘어간다고 해서 그 아이가 죽는 것은 아니니까.”
“크윽…”
“난 네 거래를 받아들였다. 다만 시간은 그리 오래 주지 않을 거야. 저쪽 손에 넘어간 유신라가 네가 찾아내기 전에 위험에 처한다면 난 내 뜻대로 할 것이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직접 비형랑을 처치할 수 있는 보험도 들어두겠다는 소리였다. 신후는 고통을 참아내느라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손으로 다문천왕의 손목을 꽉 움켜쥐었다.
“어서… 이거 빼….”
“여기 있구나. 허락하지 않은 마지막 감정이.”
“어서―!!”
절규와 같은 목소리를 내며 신후는 준성의 몸을 강하게 밀쳐냈다. 귀력이 담긴 공격에 거실 반대편 벽까지 날아간 준성이 바닥에 쓰러져 신음을 흘렸다. 그 충격으로 다문천왕은 모습을 감춘 듯했다.
“쿨럭, 이게 무슨….”
준성은 정신이 들자마자 충격에 빠졌다.
“당신 설마 다문천왕을 공격한 거야? 기껏 뵙게 해줬더니…!”
“시간이 없어….”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낼 새도 없이 신후는 어둠의 소용돌이를 만들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남겨진 준성은 허탈한 한숨을 토해내며 바닥에 널브러지고 말았다. 분명히 이 일로 지국천왕에게 큰 꾸지람을 들을 것이라고 확신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