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장. 조우
「올해의 코리아 어워즈 남자 신인상은, 최준성 씨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연말 시상식에서 준성은 그야말로 단골손님이었다. 신인상을 모조리 싹쓸이하고 인기상도 손에 거머쥐었다.
무대 아래로 내려와서도 축하 인사는 끊이지 않았다. 그들에게 일일이 웃음으로 보답하며 자리에 돌아와 앉은 그는 밀려드는 피곤함에 몰래 하품을 했다.
비형랑의 행방을 수색하고 화비를 훈련시키는 것도 모자라 주술에 대한 해법을 수소문하는 것까지,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애초에 배우의 길을 걷게 된 것은 부모님의 적극적인 권유 때문이었다. 지국천왕을 따라 비슷한 시기에 인간으로 태어나 본분을 늘 잊지 않고 살았지만, 외동아들 하나만 바라보고 사는 부모님의 원도 무시할 수가 없었다.
‘내년에는 좀 쉴 수 있으려나….’
시상식이 다 끝나기도 전에 준성은 다음 스케줄 장소로 떠나야 했다. 벤을 운전하는 매니저에게 잠시 눈을 붙이겠다고 얘기한 뒤 팔짱을 낀 자세로 쪽잠을 잤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차가 세워지는 느낌에 눈을 뜬 그는 매니저가 열어 주는 문으로 걸어 나갔다. 그런데 차가 서 있는 곳은 방송국 주차장이 아닌 웬 어두운 골목길이었다.
“어라? 김 매니저, 왜 이런 곳에…”
매니저는 서 있긴 하지만 잠시 의식이 사라진 듯했다. 무언가를 직감한 준성은 다소 심각해진 모습으로 천천히 골목길로 걸어 들어갔다. 그의 눈앞에 새하얗게 빛나는 것이 발현했다.
준성은, 아니 보주는 성스러운 그 빛 앞에 조용히 한쪽 무릎을 꿇고 경외의 뜻을 표했다.
“부르셨습니까.”
* * *
왠지 여유롭지만은 않은 연말이 다가왔다. 3학년 두 학기를 무사히 마무리하고 이제는 졸업을 준비해야 하는 4학년이다. 서영과 만나면 어느샌가 이야기 대부분이 진로에 관한 주제였다.
그녀들은 학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시내로 나가 쇼핑을 하고 영화를 보는 등 연말 분위기를 즐겼다. 신후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용무가 있다고 했고, 동주도 마찬가지로 급한 의뢰 건이 들어와서 느지막하게야 서울로 돌아온다고 했다.
저녁 메뉴는 파스타와 피자였다. 거리의 풍경이 잘 내다보이는 1층 양식점은 넓지는 않아도 아늑하게 잘 꾸며놓은 곳이었다.
“그래도 이게 얼마 만이야~ 유신라랑 데이트하는 게?”
서영이 개구지게 웃으며 하는 말에 신라가 작게 웃었다.
“미안. 사정이 이래서.”
“자세한 사정을 들은 적은 없지만, 네 안전을 위한 일인 건 아니까. 괜찮아!”
“고마워.”
“넌 그래서 진로 어떻게 할지 정한 거야?”
아무렇지 않게 훗날에 대해 이야기하는 서영이 내심 부러웠다. 신라는 망설이던 끝에 질문에 답했다.
“교수…. 아니면 학자로 남고 싶어.”
‘앞으로는 나한테도 먼 미래가 있을 거라고 믿기로 했으니까.’
서영이 반색하며 박수를 쳤다.
“정말? 우와…. 하긴, 신라 너는 지식을 쌓는 걸 즐기는 타입이니까. 어울리기도 한다.”
“많이 부족하겠지만.”
“그럼 한 교수님이랑 교수 커플 되는 거네?”
“그건 너무 먼 훗날의 이야기인데?”
그때 그녀들이 앉아 있던 창가에 누군가 잔뜩 얼굴을 밀어붙였다. 먼저 발견한 서영이 의자에서 튀어 오를 정도로 놀라며 외쳤다.
“깜짝이야!”
입에서 침을 뚝뚝 흘리며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화비였다. 웬일인지 인간으로 둔갑해 있는 그는 그냥 지나가다가 우연히 발견하고 멈춘 것 같았다. 신라가 그에게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러자 반색한 그가 재빨리 달려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밥 안 먹고 어디를 그렇게 돌아다니는 거야?”
신라의 옆에 앉은 화비는 그녀가 쥐여주는 포크로 허겁지겁 파스타를 흡입했다. 그 사이 서영은 웨이터에게 메뉴판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몰라, 쩝쩝, 큰 스승님이 갑자기 저녁은 혼자 해결하라고 하면서 연락 두절이잖아. 언뜻 한신후를 만나러 간다고 한 것 같기도 하고.”
현재 준성의 집에 기거하는 화비는 준성을 ‘큰 스승님’으로, 동주를 그냥 ‘스승님’으로 부르고 있었다.
“교수님이 최준성 씨를…?”
신라가 무언가 아는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안 그래도 며칠 전 준성이 잠시 신후를 만나고 갔던 것을 목격한 그녀였다.
‘그슨대에 관한 일인가? 그러면 굳이 숨길 이유는 없을 텐데….’
화비는 그녀들이 내민 피자 몇 조각과 새로 시켜준 리조또 한 그릇까지 모조리 비워서야 부른 배를 두드리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후아! 맛있게 잘 먹었다. 역시 인간들의 음식은 끝내준다니까.”
서영이 턱을 괴고 말했다.
“그 맛있는 음식들을 죽지 않는 한 영원히 먹을 수 있다는 게 부럽다.”
“어째서?”
“그야…. 오래 사니까?”
화비와 서영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를 긁적인 화비가 조금 가라앉은 표정으로 말했다.
“죽지 않고 오래 산다고 해서 행복한 건 아니야. 그 어떤 희로애락도 시간이 흐르면 무뎌지기 마련이니까. 다시 새로운 것을 만날 때까지 늘 심심할 뿐이지. 하지만 인간은 생이 짧은 대신 그 감정들을 모두 불꽃처럼 태우고 가잖아.”
“그런가?”
“응. 그래서 난 꼭 인간으로 환생하고 싶어.”
“그게 마음대로 돼?”
“글쎄. 눈에 띄는 공을 세우면 되지 않을까?”
그때 귀를 쫑긋한 화비가 재빨리 창밖을 내다봤다.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도시에는 사람들이 줄어들긴커녕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안에서 용케 신경이 쓰이는 기척을 찾아낸 모양이었다.
“화비야, 왜 그래?”
신라가 묻자 화비는 입술에 검지를 붙이며 ‘쉿’ 소리를 냈다.
“정확하진 않지만, 그 녀석이 근처에 있는 것 같아. 나와 큰 스승님이 쫓아다닐 때는 쥐새끼처럼 잘 숨어다니다가 이제야 나타났다는 건, 아마도 신라 너를 노리고 따라다녔던 거겠지.”
“…그슨대를 말하는 거야?”
“이쪽에서 역으로 공격하리라는 건 눈치 못 챌 거야. 난 이 기회를 노려야겠어.”
“뭐? 혼자선…”
신라가 만류하기 전에 화비는 자리에서 박차고 레스토랑에서 달려 나갔다.
“화비야!”
화비가 그슨대를 공격했다간 어떤 일까지 벌어질 수 있는지 알고 있는 신라는 황급히 화비를 따라 달려 나갔다. 인간과 애초에 사고관이 달라서 그런 것일까? 단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시한폭탄과도 같은 존재에게 달려드는 화비의 뒷모습에서 신라는 형언하기 힘든 감정을 느꼈다.
‘아무리 그래도, 혼자서 뛰어드는 건 막아야 해!’
그슨대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는 것은 사기업의 사무실들이 몰려 있는 고층 빌딩이었다. 화비와 신라가 간발의 차로 함께 달려들어갔고, 서영도 동주에게 전화를 걸며 그들을 열심히 쫓아갔다.
「응, 서영아. 일이 생각보다 일찍 끝나서 지금 돌아가는 중…」
“그러면 빨리 와요, 오빠!”
동주의 목소리가 단번에 심각해졌다.
「무슨 일이야?」
“그, 그슨대인지 뭔지, 신라랑 화비가 뒤쫓고 있다고요!”
「거기가 어디야! 젠장, 넌 따라가지 마, 알았지!」
“친구가 위험한데 보고만 있으라는 소리예요?”
한편, 여우귀의 본체로 돌아와 건물 옥상까지 단숨에 뛰어 올라간 화비는 자물쇠가 걸린 철문을 통과해 바깥으로 나아갔다. 그곳에 중절모를 쓴 사내가 하늘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날이 참 좋군. 겨울에는 이렇게 겨울만의 정취를 느낄 수가 있지.”
화비는 온몸의 털을 곤두세우며 여우귀 특유의 요기를 잔뜩 뿜어냈다. 눈앞에 서 있는 사악한 요괴는 다름 아닌 동족의 혼을 이용해 불사의 몸을 얻었다. 그 과정에서 이름 모를 그 여우귀가 얼마나 큰 고통을 받았을지는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특히 내가 겨울을 좋아하는 이유가 뭔지 아니?”
그슨대가 돌아서서 화비를 바라보며 물었다. 양복의 왼쪽 소매가 팔이 없는 탓에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어차피 움직이지 않아 걸리적거리는 팔을 아예 떼어낸 모양이었다.
“내가 그딴 이유를 궁금해 할 것 같아?”
화비가 날이 서린 목소리로 묻자, 그슨대가 한차례 크게 웃었다.
“궁금해야 할 거란다. 너희 동족과 관련된 이야기거든.”
“우리 동족…?”
“그래. 겨울이면 숲속에서 얻지 못하는 먹이를 얻기 위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던 그 작고 귀여운 종족들 말이다.”
“……”
“그날도 이렇게 추운 겨울이었다. 흉작으로 몇 날 며칠 굶어서 눈이 뒤집힌 인간들이 여우귀를 잡겠다고 산으로 뛰쳐 들어갔던 때가. 쯧쯧쯧…. 참혹했지.”
“이 자식이, 그만 놀리지 못…!”
“그렇게까지 잔인하게 굴지 모르고 일러줬던 거였단다.”
“…뭘 말이야!”
그슨대는 입가에만 비릿한 미소를 내건 채 작게 말했다.
“‘너희들의 흉작은 모두 얄미운 여우귀들의 소행이다. 그들이 사라지면 다시는 이런 흉작이 없을 것이다.”
화비는 충격을 받고 그 자리에서 굳어버리고 말았다.
“어, 어, 어째서 그런 거짓말을….”
“‘여우귀’ 자체가 나에게는 약점이자 흠이기 때문이었다. 나에게는 여우귀 단 한 마리만 있으면 되었거든.”
그슨대는 그렇게 말하며 남은 오른쪽 팔뚝을 들어 보였다. 그의 팔에 채워진 염주에, 어렴풋이 여우귀의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염주 알이 있었다.
결국 그슨대는 여우귀의 혼 하나를 불사의 주술에 사용하고, 필요 없는 나머지들은 말살시켜버리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그, 그럼 네놈 때문에, 우리 동족들이…!”
그 시절의 참사로 현재 남아 있는 여우귀들은 극히 소수였다. 얼마나 많은 여우귀들이 인간들의 손에 잔인하게 죽어갔던가.
그때의 울분이 다시금 떠오른 화비는 허공에 수십 개의 여우 불을 동시에 발현시켰다. 고작 불사의 존재가 되고자 한 종족을 무참히 짓밟아버린 저자를 도저히 편하게 보내주고 싶지가 않았다.
“각오해….”
여우 불이 한가득한 옥상 풍경을 돌아보며 그슨대는 여유롭게 웃었다. 화비의 눈에는 이미 무엇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여우귀로 살면서 이토록 분노해본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 * *
신후는 준성의 집으로 초대됐다. 조용히 혼자 오라는 준성의 말에 신후는 그가 부탁했던 또 다른 일을 해낸 것이라 짐작했다.
신도 내게 죄를 지었거든.
되도록 이 생이 다할 때까지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은 존재였다. 사천왕 중에서도 그를 직접 단죄하고 칠정(七情)을 모두 빼앗아간 장본인.
―다문천왕(多聞天王)
준성은 넓은 거실 소파에 앉아 있다가 신후에게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무거운 듯하면서도 덤덤한 분위기가 다음에 벌어질 일에 대해 예고하고 있었다.
“내 몸을 빌려 대화하고자 하셔. 당신이 원했던 대로 해주기로 하신 거야.”
준성이 입을 열었다.
“대화의 내용은, 당신도 알게 되나?”
“아니. 접신 되는 동안 내 의식은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그럼 부탁하지.”
소파에 반듯이 허리를 세우고 앉은 준성은 두 눈을 감고 한차례 크게 심호흡을 했다. 곧 그가 앉아 있는 자리에서 빛이 생겨나 주변을 은은히 밝히기 시작했다. 신후도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묵묵히 준성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을 하라.”
신후의 입가가 작게 당겨졌다. 그것은 회심의 미소 같기도, 혹은 체념의 미소 같기도 했다.